김삼의당을 아시나요?
김정숙 / 수필가
1개월 전쯤의 일이다.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혹시 시를 좀 써서 공모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이다. 평소 ‘시(詩)’에 대한 관심은 다소 있었지만, ‘공모‘라는 단어가 어쩐지 부담감을 가지게 했다.
그리고 내게는 공모에 도전할 만큼의 실력도 자신감도 없었다. 더군다나 일반적인 시를 쓰는 것도 아니었고, 250여 년 전에 태어나서 한 여성 시인으로서 굵직한 삶을 살다 가신 분에 대해 기리는 시를 써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 분의 삶이 반영되고 투영된 ‘목적시’를 써야 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너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핑계 구실을 대자면, 나는 요즘 너무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아이들 밥을 서둘러 차려주고는 아침 8시 30분까지 부랴부랴 실습장소로 출근을 한다. 자격증 취득을 위해 현장실습 2개월 동안 관련기관으로 출퇴근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 일과를 시작하면, 오후와 저녁때에는 교습소에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밤에는 추가로 배우고 있는 학부과정의 과목들을 수강해야 하고, 20여개의 리포트도써야 한다. 그래서 거의 익일 새벽 2~3시까지 풀타임으로 내 체력을 소진해야만 한다. 어떤 날엔 할 일이 너무 많아 교습소에서 2~3시간 쪽잠을 자면서 당일 해야 할 일들을 소화해 낸 적도 있다. 그렇게 ‘깊은 밤의 색깔’과 ‘새벽 여명의 색깔’이 교차하는 것을 시간대별로구경하며 나의 할 일들을 마무리한 게 벌써 몇 번째가 되는 지도 모른다.
하여튼, 나는 어떤 핑계를 대고서라도 그렇게 어려운 시는 쓸 수 있는 능력이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 분께서 진정으로 격려해 주시고 응원해 주셔서, 못쓰겠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바로 ‘김삼의당(金三宜堂)’ 그분의 이름이었다.당신은 혹시 ‘김삼의당’이라는 사람을 잘 아는가? 신사임당, 허난설헌, 황진이, 매창 등의여성 문인들은 익숙할 정도로 들어봤어도 ‘김삼의당‘이라는 이름이 내게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녀는 많은 여성 시인 중에서도 가장 많은 한시(漢詩)를 남긴 분이라고 한다.
그리고 김삼의당의 시는, 조선시대의 다른 여성 문인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과 주고받은 화답시(和答詩)가 유난히 많다는 것이다.
삼의당 김씨(金氏)는 영조45(1769)년 전라북도 남원의 서봉방(교룡산 서남쪽 기슭)에서, 연산군때의 학자로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화를 당한 김해김씨 탁영(濯纓) 김일손(金日孫, 1464-1498)의 후손인 김인혁(金仁赫)의 딸로 태어났다. 다시 말해 그녀는 쇠락한 양반가의 후손인 것이다.
그녀는 18세에, 동년 동월 동일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담락당(湛樂堂) 하립(河𣸭)과 결혼했다. 하립은 본관이 진양으로 세종 때에 영의정을 지낸 하연(河演)의 13세 후손이며, 교리(校理) 하응림(河應臨)의 7세손이다. 하립은 5형제 중 3남인데 태어났을 때 그의 집안은 3대째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다. 김삼의당은 260여 수(首)의 한시와 20여 편의 산문(散文)을 남겼는데, 생애를 몇 단계로 나누어 보면 미혼 시기, 신혼 시기, 별거 시기(남편의 과거공부 때문), 부부해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이들 부부는 때때로 화답시를 주고받았다. 하립은 자신의 젊은 시절 대부분을 과거공부를 하느라 한양과 산사 등으로 떠나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서로 시를 주고받는 일을 중단하지 않았다 한다.
그래서 나는 김삼의당이라는 그 분 자체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 계기를 통해, 그 분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알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빈 마음으로 생각하니 내 마음이 한층 가벼워짐을 느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사실 나는 그 지인에게서 김삼의당을 기념하는 글을 공모해 보라는 권유를 받기 전까지 이 분의 이름도 잘 몰랐다. 그런데, 인터넷 검색을 여기저기 해가면서 그 분이 참 매력적인 여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분은 조선시대 여인이었다. 즉, 그 시대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터놓고 글자를 배울 수도 없었고, 한자는 더더욱 공부할 수 없었던 시기였다. 그런데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어깨 너머로 언문을 깨우치고 한자를 익힌 여인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그녀는 몰락한 양반가문의 아녀자로서, 그리고, 남편의 과거공부를 뒷바라지하는 아내로서, 동분서주하며 생업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틈틈이 자신의 삶이 반영된 한시를 짓고, 화답시를 지을 만큼 한시에 대한 감각이 출중했다는 것이다.
삼의당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1990년대 이후 관심의 폭이 점차 커진 덕분에 좀 더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특히 삼의당이 출생하고 만년을 보낸 남원과 진안에서 기념행사 및 김삼의당기념사업회를 준비하는 등 그녀의 삶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면서, 그녀의 이름도 점점 더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들을 거친 뒤에야, 그녀의 문학적 성취와 문학사적 의의가 비로소 일반인들에게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처럼 멋진 여성 시인이 있었다는 말만 들어도 내게는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녀의 삶을 조명할 수 있는 시(詩)를 써 보기 위해 마음과 생각을 모으다 보니,그녀의 인생이 ‘달맞이꽃’과 참 많이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이다. 머리를 올릴 때까지는 단정하고 고운 마음으로 남편을 맞이하기를 기다렸고, 결혼 후에는 오직 부군의 과거시험 합격을 기원하며 가문의 영광과 회복이 있기를 기다리면서 가족과 생계를 꿋꿋하게 꾸려 나갔다. 그러나 그녀의 부군은 향시는 합격했어도, 한양에서의 과거시험은 합격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가족들 모두는 더 큰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집안의 가세가 더욱 기울게 되자, 그녀와 남편은 나중에는 남원에서 진안으로 이사하여 살게 되었다고 한다. 여인으로서, 그리고 한 남자의 아내로서, 비록 그렇게 굴곡진 삶을 살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는 그 힘든 시간들을 꿋꿋하게 견디며 자기만의 세계를 시로 승화시키는 삶을 살았다. 때로는 한시로 자신의 마음을 달래었고, 또 때로는 편지를 통한 화답시로 남편과의 애정을 신실하게 쌓아갔다.
그렇게 청초하고 초연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내며, 시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꽃피운 그녀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도 내게 있는 모든 용기를 내어, 그녀를 기념하고 그녀의 삶을 위로하는 글을 조금씩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 나의 진심이 통해서 일까? 나는 초등학교 때 동시로 가끔 상을 받곤 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한 번도 제대로 된 시를 써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그 시/서/화 공모전에서 ‘장려상’을 받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나의 이런 상황을 두고 뭇사람들은 뒷얘기를 할지도 모른다. “무식하니까 지나치게 용감하다!”고…….
하지만, 그런들 어떠하랴. 누군가에게 무식하다고 욕 좀 먹으면 어떠하랴.
나는 이 기회를 통해 또 한 명의 멋진 여성 시인과 그녀의 진솔했던 삶을 알게 되었고, 덤으로 상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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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시는, 김삼의당과 그녀의 삶을 기념하며 냈던 작품임)
김삼의당, 그대는 달을 품은 달맞이꽃 같네
김정숙
1769년 11월 30일
전라북도 남쪽 근원(南原),
교룡산 서남쪽 기슭에
참 미쁜 삼의당 꽃씨 하나 움돋았네.
그 새싹 너무 고와
같은 해, 같은 달, 같은 날에
담락당 달도 기어이 따라 올랐네.
어여쁜 포도열매가 송아리되어 피어나는 7월 어느 날,
따뜻한 남원 땅 유천 마을에
서쪽의 붉은 햇빛은
다채로운 꽃구름을 만들며 유혹해 보지만,
참한 꽃망울을 고이 간직하며
또바기 달빛만을 바라는 그대,
그대는 청초한 달맞이꽃 같네.
달은 달빛을 뿌려 꽃봉오리를 감싸고
달맞이꽃은 달의 마음을 받아 충만하니
그 윤슬 조각들이
섬섬옥수에서 한시(漢詩)되어 화답시로 만개하네.
극한의 극빈(極貧)이 그대를 시험하고
부군의 낙방(落榜)이 그대를 좌절시키려 해도
‘시(詩)’를 벗 삼고
‘생(生’)을 재산삼아
굴곡진 삶의 시간들을 의연히 살아내어,
마침내
시(詩)의 모습으로 자신을 승화시킨 그대……,
그대는 초연한 달맞이꽃 같네.
님을 달님처럼 여기고
문자를 달빛처럼 여기며
지식도 감추고
서러움도 삭히며
켜켜이 살아 내었던 그 삶들을
달빛색 종이 위에
한 글자 한 글자 아로 새긴 그대......,
어둠에도 굴하지 않고
현세(現世)의 막막함에도 용기로 대처하며
오롯이 그대의 삶을 살아간 그대……,
그대는
‘기다림’의 꽃말을 가진
달을 품은 달맞이꽃 같네.
첫댓글 덕분에 김삼의당이라는 분을 알게 되었네요. 늦었지만 수상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