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겔8장
◉1장에서 6장까지◉
1장은 제사장 부시의 아들 에스겔을 선지자로 부르신 소명장이라 했고요
2장은 부른 에스겔에게 말씀을 먹이시고 교육하여
그가 감당해야할 사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사명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먹은 에스겔이 입에 달기가 꿀 같더라..고 합니다.
성도는 이 은혜를 체험해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읽다가 듣다가 말씀이 꿀보다 더 달도다...이런 영적 체험이 있어야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데 힘들지 않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겁니다.
말씀을 먹을 때 꿀같이 단 말씀임을 체험할 때에 진짜 내가 해야할 일 사명을 발견하게 된다는 겁0
3장은 말씀을 먹고 사명을 깨달은 에스겔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보냄을 받은 파송장이라고 했습니다.
3장에서 파송을 받았다면
4장에서는 받은 말씀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파함이 당연한데..의외의 장면을 보여줍니다..
즉 말씀을 전하게 한 것이 아니라 행위로 이스라엘 백성이 어떤 상태인가를 전하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두가 행위계시입니다.
1) 그림으로 이스라엘 나라가 심판 받게 됨을 계시하고
2) 누워서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담당하라는 것입니다.
왼쪽으로 390일을 누워 있게 하고, 오른쪽으로 40일을 누워 있으라는 겁니다.
하루가 1년이라고 했습니다. 390+40=430입니다. 하루를 1년으로 환산하면 430년입니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 한 사람을 불러서 한 민족을 만든 기간이 430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그와 같이 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이 430년입니다.
5장도 4장에 이어 행위계시입니다.
에스겔에게 삭도를 가져다가 머리털과 수염을 밀게 합니다.
그리고 삼등분하게 합니다.
1/3은 성읍 안에서 불사르고 - 기근으로 죽고
1/3은 성읍 사방에서 칼로 치고 - 전쟁으로 죽고
1/3은 바람에 날려라...내가 따라가며 칼로 치리라..고 합니다.- 전염병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6장부터 본격적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사역을 감당하게 되는데
6장의 핵심은 “나를 여호와인줄 알게 하려 함이라”에 있습니다.
이 말씀이 6장속에 4번에나 나오고요...
에스겔서 전체가 48장인데 그중에 70회 정도 나옵니다.
무엇을 통해서 여호와인줄 알게 하신다는 겁니까?
남북 이스라엘을 심판하심으로 말미암아 심판자가 여호와인줄 알게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남북 이스라엘 망하고 난 뒤에 진짜가 나타난 겁니다.
무슨 진짜가 나타났습니까?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 나타나서
나라가 망하게 하신 이가 여호와 하나님이신줄 알고..하나님을 기억하고 살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은 7장으로 넘어왔습니다.
7장의 핵심은 “가증한 죄가 종말에 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가증한 죄가 무엇입니까? 언약의 길을 버리고 딴 길로 감을 말씀합니다.
믿음의 길을 버리고 기복신앙의 길로 갔다는 겁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에 가증한 죄가 들어오게 된 중심에 누가 있다고 했습니까?
선지자의 죄가 있고 제사장의 죄가 있고 장로의 죄가 있다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타락이 백성의 타락을 부추기게 되었고...결국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오늘 8장으로 넘어왔습니다.
8장 전체는 이스라엘이 가증한 우상숭배가 만연해 있음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가증한 일”이란 단어가 6,6,9,10, 13,15,17 총 7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6절에“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핵심 말씀이 ‘하나님을 떠나시게 하는 가증한 일’이 핵심적 말씀이라 기억하고
8장을 한절 한절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체 흐름을 보시면 11절에 70명의 장로의 가증한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4절에 여인들의 가증한 일이 기록되어 있고요
함께 14절에 25명의 제사장들의 가증한 일까지 폭로하고 있는 겁니다.
장로와 여인들과 제사장들이 성전 담안에서 은밀한 중에 이런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이끌고 성전뜰을 둘러싼 담앞에 서게 하고...
그 담에 구멍이 있는데 구멍으로 보게 하여서 보니...
그들의 가증한 일들이 결국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게 하고...
하나님이 떠나시게 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겁니다.
이렇게 에스겔에게 구멍을 통하여 성전 담을 흘게하고
담안에 들어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여주는 이유가 뭘까요?
그냥 구경하고 즐기라고 보여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 당시의 교회가 얼마나 타락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니 하나님이 참으시고 오래참으시는 분이시지만 결국은 심판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주고
더 나아가 오고 오는 시대의 교회 교회마다...구멍을 통해서 교회를 보라는 겁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일들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행하는 일인지...아닌지..
아버지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
여호와를 알고 그 여호와 하나님의 원하심을 따라 행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보라는 겁니다.
구멍을 통해서 이 시대의 교회를 보아야 하고...오늘 우리 교회를 보아야 하고
나아가 오늘을 사는 나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8장도 3단락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1-6)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
둘째(7-13) 구멍을 통해본 담 안의 우상숭배
셋째(14-18) 여호와의 전을 등지고 있는 자
첫째(1-6)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
3절을 봅시다.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1-6절의 핵심은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하기를 하나님이 무슨 질투하시냐?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질투는 누가 합니까? 사랑하니까 질투합니다. 사랑하지 않는다면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은 율법속에 10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을 주실 때 출20:4,5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땅에 있는 것이나...물속에 있는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섬기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하신 겁니다.
왜 왜 하나님이 다른 신들, 즉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느냐...
출20:2,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시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단지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자리에서 구원해낸 자이라는 말씀입니까?
때로는 우리가 말을 할 때에 요약해서 말할 때가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은 요약된 말씀입니다.
무엇이 요약된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에서부터 출애굽까지가 요약된 말씀입니다.
즉 아브라함 한 사람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어 한 민족을 만들기 위하여
야곱의 시대에 애굽에 들어가게 하시고, 애굽에서 민족 대 폭팔운동이 일어나..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하여 지금 200만 이상의 민족이 되었고...
완전한 한 민족 한 나라가 되었을 때...그 종 되었던 집,
애굽 나라에서 출애굽케 한 그분이 네 하나님이시오 여호와 하나님시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민족이 만들어지는데 이스라엘 백성의 노력과 수고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없었다는 것입니까?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라는 겁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그런 신분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의 길에 들어오신 것도, 지금의 믿음을 가지신 것도 다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여러분의 뜻대로 여러분이 좋아하시는대로 두셨다면 지금의 믿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디자인하시고 하나님이 실행하시고 결국 하나님이 만드신 겁니다.
끊임없이 미꾸라지처럼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또 잡으시고 또 잡으셔서 오늘 지금의 믿음의 자리에 이르게 하신겁니다.
이런 하나님이신데...질투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징계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딴 길로 가지 마세요...더 이상 다른 길로 가지 마세요
믿음의 길로 갑시다...언약의 길로 갑시다....복음의 길로 갑시다.
진리의 길로 갑시다...생명의 길로 갑시다....
하나님의 나라의 길로 가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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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돌아온 장로◉
1절을 봅시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라고 시작합니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가 언제를 말할까요?
유다 나라가 망한지, 다르게 표현을 해보면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혀 유다백성과 함께
끌려 온지가..6년 6개월 5일이 지났다는 겁니다.
이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까?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라고 합니다.
에스겔이 집에 앉아 있는데..왜 유다 장로들이 이 에스겔앞에 와 앉아 있을까요?
장로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장로들이 선지자 앞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성경속에서도 극히 이례적인 일입니다.....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나라가 망하고야 비로서 선지자들이 외친...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그 말씀을 기억하고
비로서 하나님께로 돌아온 장로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호세아 6: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는 북 이스라엘이 망하기 전의 선지자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직감한 호세아는 눈물로 호소한 중요한 두 가지가 있습니다.
1절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이 말씀과...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이 두가지 말씀을 우리가 기억하고 지켜야 할 중요한 말씀입니다.
누가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알아야 한다는 것은 오늘날 성도된 우리들이 알아야 합니다.
누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간다는 것은 오늘날 교회의 성도들이 여호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현대교회의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 중에 문제입니다.
나라가 망하기 전 기록된 이사야서를 새벽시간에 나눌 때에 제가 계속 강조하고 강조한게 뭡니까?
사1:2,3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늘이여 들으라...땅이여 귀를 기울이라...이게 무슨 말씀이며 무슨 뜻입니까?
호세야를 통하여 그렇게 말씀하고 나머지 당시에 선지자들도
문자적으로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라고 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전한 메시지의 중심 사상은 결국 뭐였습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돌아가자 돌아가자 돌아가자고 외쳤지만 돌아오지 아니하니
하나님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탔든지.. 이사야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이 뜻은 하늘이라도 내 말을 좀 들어보고 땅이라도 내 말에 귀를 기우려 좀 들어보라는 겁니다.
무엇을 들어보라는 겁니까?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다...양육했다는 것은
내가 이스라엘백성을 만들고 내가 이스라엘 나라를 만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내가 만든 이스라엘 백성이 나를 거역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3.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 뜻이 뭡니까?
짐승도 그 임자를 안다는 것은 자기 주인을 안다는 겁니다.
거기다...그 주인의 구유를 안다는 것은..
먹여주고...일용할 양식주고 보살펴 주는 주인을 안다는 겁니다. 이렇게 짐승도 아는데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이스라엘은 주인도, 자기를 양육하여 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그분이 누구신지...어떤 분이신지...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뭡니까? 내 인생의 주인이 누구시냐? 이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내 인생의 생사화복의 주권을 가지신 분이 누구시냐...이것을 알자는 겁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누가 주인이십니까?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주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내가 주인인 것 같으면 여러분이 늙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아야지요?
저는 요즘 깜빡 깜빡합니다. 모든게 이전 같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때가 점점 가까워 오고 있음을 압니다.
이전에는 몇일씩 잠을 안자다 시피 뛰어다녀도 입술이 부르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밥을 한끼만 제때 안먹어도 몸에 이상이 생기고 정신이 몽롱합니다.
때가 가까워 옴을 봅니다. 이런 것을 보면서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님을 압니다.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을 살았고 먹고 배출하고 숨쉬고 자고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먹지 못하는 자가 없어야지요? 그런데 병원에 가보세요..
먹지 못하는 분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숨쉬는 것이 힘들어서 산소호흡기 달고 있는 분도 셀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불면증 환자가 얼마인지 아십니까?
2016년 기준으로 국가건강정보포털에 따르면
불면증으로 진료를 받고 약을 처방 받은 환자 수가 50만5천685명으로,
2013년 42만5천77명보다 19.0% 늘었다...그렇다면 지금은 더 줄었을까요?
국가 건강정보원에 따르면 매년 증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모든 것은 내 손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한쪽만 건드리면 우리는 돌아갈 내고향 하늘나라임을 알게 됩니다.
잘 살아야 합니다. 정말 잘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애가 3:4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자고 합니다.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떠난 것인지...왜 하나님을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인지
우리의 행위들을 스스로 조사해봐야 합니다.
그리고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것을 계시록에서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서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합니다.
처음 사랑이 어디에서 어떻게 떨어졌는지...스스로 조사해봅시다.
그리고 돌아옵시다...여호와께로 오직 예수, 오직 하나님, 오직 성령 중심으로
돌아오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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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우리가 에스겔 앞에 앉은 장로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성경기록한 선지자들만 아니라
모든 성경의 가중 중요한 핵심이 뭐냐고 한다면
여호와, 즉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함이 첫 번째 목적입니다.
실제로 창세기부터 기록된 모든 말씀이 왜 기록되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말씀입니다.
왜 애굽에 하나님께서 10대재앙을 내렸습니까?
그것도 이스라엘 백성이나 이방민족이나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10대 재앙이 있을 때마다...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스겔서에도 계속반복되는 내용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내가 여호와인줄 너희가 알리라...
내가 여호와인줄을 너희가 알게 하려 함이라...이 말씀이 반복되는데..
에스겔서 전체가 48장인데--무려 70회 정도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성경 전체에서도 최고로 많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기록 목적이 무엇이다? 여호와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여호와께로 돌아오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지자를 보내고 또 보내도 여호와를 알고자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알고자 하지 않으니 당연히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길...
하나님이 닦아 놓으신 언약의 길을 버리고 하나님이 닦지 않은 다른 길로 가는 겁니다.
끝까지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아니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 사1:2,3절에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고 하나님이 한탄하듯이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이 저는 단지 이사야 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면 더 답답한 마음으로 더 고통스러운 마음으로 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을 보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최종 결정이 뭡니까?
가증한 악으로 인하여 종말이 임하게 하심입니다.
즉 남북 이스라엘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이스라엘이 722년 앗수르에 의하여 망하고
남유다가 587 바벨론에 의하여 망한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난후 6년 6개월 5일 째에...장로들이 에스겔 앞에 앉은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반전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들이 선지자 않에 앉았다는 것은 돌아왔다는 겁니다.
언제 나라가 망하고 나니...자기들이 포로로 잡혀와서야...
하나님을 알기를 원했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벌어진 것입니다.
난세에는 영웅이 나지만...환난에 때에는 진짜가 나타납니다.
무슨 진짜...진짜 믿음의 사람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흐름에서 우리도 비슷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잘나가고 잘살고 잘 될 때에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그때 믿음이 좋아지는 사람보다 믿음이 타락하는 사람이 부지기 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나라가 안정되니 딴길로 가듯이 동일합니다.
그런데 언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습니까?
언제 우리가 더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일이 잘될 때? 거의 없습니다.
고난의 시간에 하나님 앞으로 나옵니다. 하나님앞에 엎드립니다.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 이렇게 찬양합니다.
천부여 의지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주나를 박대하시면 나어디가리까
내죄를 씻기위하여 피흘려주시니 곧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앞에 옵니다.
고난을 당하고 나니...환란속에 빠지고 나니...그때서야 손들고 옵니다.
그때서야 주님 나를 버리지 마소서...나를 외면하지 마소서...기도하면서
우리 스스로가 행위들을 돌아보고...우리의 죄를 주님 앞에 내어놓고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1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즉 에스겔이 하나님의 이끄심에 민감하고..유다 장로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 가운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셨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권능이 내리셨다는 것은....거기에 하나님이 임재하셨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끼십니까?
우리 마음이 여호와께로 돌아오고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면...
하나님의 임재하심, 즉 임마누엘 하신 하나님이 삶속에서 날마다 느껴지고 누려지는 겁니다.
어제 우리가 오권사님 댁에 입택겸 이사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저는 사실 이사하는 날 이미 권사님 집들을 이곳 저곳을 다 둘러보았습니다.
둘러보고 있는데 내 마음에 연신 이뻐다...아름답다...멋지다...그림같다...동화같다...
이런 생각이 연신 일어나는 겁니다....그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양수야...이렇게 이뻐야할 것이 있다...아름다워야 할 것이 있다...
멋지고 그림같아야 할 것이 있다...그게 뭔지 아니? 그렇게 제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뭐지요? 믿음입니다...양수야 난 내가 너를 볼 때에
믿음이 이쁘기를 바라고, 믿음이 아름답기를 바라고, 믿음이 멋지기를 바라고
네 믿음이 내가 볼 때에 그림 같기를 바란다...
그것만 아니다...네 마음도 이렇게 좀 이뿐 마음을 가져라...아름다운 마음을 가져라..
거기에서 나아가...네 삶이 이렇게 이뿌게 살아라...아름답게 살아라...
네 삶이 멋지고 그림 같도록 동화같은 삶을 살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끄심에 민감해보세요...눈으로 보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귀로 듣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좋은 이야기를 들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나쁜 이야기를 들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가 잘 아는 민족 시인 윤동주씨는 서시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나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
이게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무엇을 뜻하고 있습니까?
그는 하나님앞에 정말 민감하고 예민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한 점도 부끄러움이 없이 살고 싶다는 겁니다.
그런데 돌아보니 자기에게 잎새에 이는 바람이 있어서 괴로워했다는겁니다.
아주 세미한 바람에 잎이 살짝 흔들리는 것..자기가 살짝 흔들린 것 까지도 괴로워했다는 겁니다.
이게 영적 민감함이요...예민함입니다.
저는 요즘 들어서 이것을 느끼고 있습니다....이것을 느낌이 좋습니다.
그래서 더 다듬어지지 못한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더 성숙하지 못함이 숙제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고 나를 만지시고 나로 하여금
그러한 예민함과 민감함을 갖게 하심이 감사합니다.
누구에게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있느냐?....
마음이 삶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하나님의 이끄심에 민감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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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작정하신 두 가지◉
1,2절을 다시 보시겠습니다.
여섯째 해 여섯째 달 초닷새에 나는 집에 앉았고
유다의 장로들은 내 앞에 앉아 있는데 주 여호와의 권능이 거기에서 내게 내리기로
내가 보니 불 같은 형상이 있더라 그 허리 아래의 모양은 불 같고
허리 위에는 광채가 나서 단 쇠 같은데
이것은 성자 하나님의 현현하신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1:26-28절에서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에서도...1절에 여호와의 권능이란 단어가 하반절에 있고요
2절에 불같은 형상이 있고요...3절에 주의 영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동시 사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성자 하나님은 불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심을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불은 심판을 상징합니다. 성자 예수님은
구원자이시자...심판자이심을 불로 나타심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성자하나님이 불같은 형상으로 나타나셨느냐..
당시는 성전 밖에서도 문제지만...성전안에서 가증한 일을 행해지던 시대였다는 겁니다.
성전에서 70인의 장로들이 25명의 제사장들이 여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하니 심판하실 수 밖에 없는 겁니다.
3절을 봅시다.
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2절에...그가 손 같은 것을 펴서 내 머리털 한 모숨을 잡으며 라고 합니다.
여기에 머리털 한 모숨을 잡았다고 하는데...모숨이 무슨 뜻일까요?
한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머리카락을 말합니다.
즉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머리털 한 움큼을 잡으셨을까요?
그렇게 머리털을 잡으신 하나님께서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천지 사이로 올리시고 라고 합니다.
주의 영이 나를 들어 올리신다는 표현이 에스겔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그중에 이미 우리가 지나온 말씀중에 살펴보시면...3:12,14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에스겔을 들어오리셨다는 것은 진짜 에스겔의 몸이 장로들 앞에서 떠났음을 말씀하느냐
아니면 바울이 말했듯이 몸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바울이 몰랐던 것처럼
에스겔도 동일한 체험을 한 것이냐...어느것이냐에 대해서
주석가들도 정확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에스겔의 몸이 진짜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아서
바벨론에서 예루살렘 성전으로 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진짜 몸이 간게 아니라...
3절에서 말한 하나님의 환상가운데 나를 이끌어...올렸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상관이 없지만 저는 이게 실제로 장로들 앞에 있던 에스겔이
엘리야처럼 들림 받아서 예루살렘에 갔다기 보다는 환상중에 끌려간 것이라고 봅니다.
실제로 3절에 하나님의 환상 가운데에 나를 이끌어
예루살렘으로 가서 안뜰로 들어가는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 라고 하였듯이
에스겔이 본 것은 환상중에 되어진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북향한 문에 이르러서 본 것이 무엇이라는 겁니까?
3절 하반절에 거기에는 질투의 우상 곧 질투를 일어나게 하는 우상의 자리가 있는 곳이라
성전에 무엇이 있었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질투하시는 우상이 있더라는 겁니다.
우상이란게 뭡니까?
이사야서나 에스겔서를 통하여 보는 우상이란...
바알신 아세라신 금송아지등의 형상을 만들어 섬김을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그런 것이 우상입니까? 물론 성도가 그런 것을 섬긴다면 우상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영적으로 낮은 수준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런 것을 섬기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의 우상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게 우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우상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질투를 하시는데...
이 질투로 인하여 하나님이 내리신 결단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심판입니다.
우리가 지끔까지 살펴본 내용이 그것입니다.
4장에서 그림을 그리라...무슨 그림? 예루살렘 성전이 포위된 그림을 그리라고 했고
5장에서는 네 머리털과 수염을 삭도로 밀어라...그것을 1/3 1/3 1/3 으로 나누어라
1/3은 성안에서 전염병으로 죽고...1/3은 성밖에서 전쟁으로 죽고
1/3은 바람에 날려 보내면 내가 따라가며 칼을 치겠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심판을 계속하여 선포하셨습니다. 대부분의 선지서들이 그렇다고 했습니다.
2) 하나님의 떠나심입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을 보느냐
그들이 여기에서 크게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
너는 다시 다른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그가 또 내게...이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이르시되...
에스겔아...이스라엘 족속이 행하는 일...가증한 일..우상을 숭배하는 일을 보느냐...라고 하시고
이어지는 말씀...그들이 여기에서...여기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가증한 일을 행하여 나로 내 성소를 멀리 떠나게 하느니라...라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지니...어떤 역사가 일어났다는 겁니까?
하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계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떠나시겠다는 겁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좀 생각해야 할 것이 오늘날의 성전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오늘날 성전이 무엇이다? 우리의 몸이 성전이다는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3: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오늘날의 성전은 우리의 몸입니다...우리 안에 하나님이 계시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죄에 빠지고, 우상에 빠지면 하나님께서 두가지 결단을 내리십니다.
1) 심판 또는 징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상에 빠져 있을 때, 즉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에 빠져 있을 때
참으시고 또 참으시고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
이게 우리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참으시고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두고, 하나님보다 세상의 것을 의지할 때에
하나님은 사울처럼 심판을 하시든지...아니면 다윗처럼 징계를 하시든지...두가지 중에 하나입니다.
2) 하나님이 떠나심입니다.
범죄한 사울이나 다윗에게 하나님의 영, 성령이 떠나심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두려워 한 것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는 것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사울이 두려워한 것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삼상15:3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
무엇을 두려워 한 겁니까?
사울은 백성들과 장로들과 이스라엘 나라에서 버림받는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은 사람에게 버림을 받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함은 하나님이 떠나시고 주의 성령이 떠나는 것을 두려워 했습니다.
시51: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돌아봅시다...내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것이 없는지 돌아봅시다.
그리고 돌아옵시다. 여호와께로, 하나님께로 돌아옵시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징계하시기 전에 돌아와야하고...주의 성령이 떠나시기 전에 돌아와야 합니다.
주의 영이 함께하셔야...신앙생활의 즐거움 기쁨 행복을 날마다 누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구멍난 담◉
둘째 단락(7-13) 구멍을 통해 본 담 안의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이끌고 뜰 문에 이르시기로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
즉 바벨론에 있던 에스겔이 환상중에 하나님께 이끌려 예루살렘으로 왔고...
예루살렘중에서도 성전 뜰 문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뜰 문이 무엇이냐...성전 안에 뜰이 있습니다.
성막을 보면 하나의 뜰이지만 솔로몬이 지은 성전에는 뜰이 두가지입니다.
안뜰과 바같뜰이 있습니다....
바깥뜰은 백성들의 뜰이라고 하고...안 뜰을 제사장의 뜰이라고 합니다.
뜰 문에 이르시기로...라는 이 뜰 문은 성막의 문을 말합니다.
그런데 또 한가지는 어려운게...성막의 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의 문은 세 군데나 문이 있습니다. 동문 남문 북문이 있습니다.
3절 중반절에 북향한 문에 이르시니...라고 하니까...
아마도 7절에 이 뜰 문은 북문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7절 하반절에 내가 본즉 담에 구멍이 있더라...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문이 있는데 왜 구멍이 있을까요?
이것을 옛날에 왕이 사는 궁궐이라고 합시다...
요즘이야 담장을 철고하고 담장 없는 집이 고컬리티가 된다고 하니까...
그렇게 담장 없이 집을 짓기도 하고...담장을 철거하기도 하지만...
옛날에 궁궐이 아니더라도 고관대작의 집은 다 높은 담장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런 궁궐이나..고관대작의 집 담에 구멍이 났다고 합시다.
그것을 안다면 그냥 두겠습니까? 두지 않습니다...당장에 하인들이 그 담장을 보수할 것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것이 당연하쟎아요...정말 못 사는 집이야...담장이 무너져도 그냥 두지만
꼭 궁궐이 아니더라도 규모 있는 가문의 집이라면 당장에 보수함이 마땅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그 당시로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전입니다.
이것은 왕이 사는 다윗 궁과 솔로몬 궁궐과도 비교고 안되는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그런 성전의 담에 구멍이 났다...이게 정말 구멍이 맞느냐는 의문이 들어서 찾아보았습니다.
여기에 대한 답이 두가지입니다....진짜 구멍이 맞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그 구멍을 통해서 성전 안의 일들을 보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고요
또 한편에서는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구멍이 아니라는 겁니다.
일종의 통로라는 겁니다. 무슨 통로냐...사람이 드나드는 통로라고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을 보는 우리의 고민이 있습니다.
구멍이라고 할지라도 왜 하필 구멍을 통해서 성전안에 일어나는 일들을 보느냐는 의문이 있고요
또는 솔로몬 성전은 문이 하나가 아닙니다..
세개나 있는데 굳이 또 다른 통로가 있을 이유가 뭐냐는 겁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답을 얻기 위하여 들어가보면
본문의 구멍이 우리가 아는 구멍이,,,,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구멍이 아니라면 무엇이라는 겁니까?...통로라는 겁니다.
어떤 통로...사람이 드나드는 비밀 통로입니다.
문이 있는데 왜 비밀 통로가 필요할까요?
이곳은 성전입니다. 하나님의 전입니다.
하나님의 전인데..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숭배하고 있습니까? 우상을 송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장로들이야 정상적인 문으로 드나들겠지만
정상적인 문으로 더나들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누구냐...제사장도 장로도 아닌 우상숭배자들이 더나드는 통로라는 겁니다.
왜 에스겔에게 이 비밀 통로를 보여주시고 에스겔로 하여금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을 속이면 하나님도 모를 줄 압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이요, 아론이요, 다윗인 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비밀이 많은 것은 절대 좋은 믿음이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신전의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앞에서 산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8절을 봅시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 담을 헐라 하시기로 내가 그 담을 허니 한 문이 있더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비밀통로가 난 담을 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담이 성막으로 보면 바깥 담...울타리와 같은데 그것을 헐라고 하신 것은
이미 더렵혀진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무늬만 성전일 뿐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담을 헐라고 하시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교회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는 규모가 크고, 화려고 아름다운 건물의 교회가 중요한 게 아니라
하나님 사랑,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그 안의 성도들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오늘날 교회를 평가하는 평가 법도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성도들 조차 성도의 숫자가 많은 교회는 좋은교회로....
성도들의 숫자가 많지 아니하면 좋지 않은 교회로 평가 받습니다.
건물이 큽니다. 아름다운 재료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거기다 땅이 넓고 주차장도 수십대 수백대의 차를 주차할 수 있다면 좋은교회로...
그렇지 아니하면 별 볼일 없는 교회로 평가하는 시대입니다.
세상 사람이 그렇게 보고, 심지어 성도들 조차 그 기준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시록에 나타난 소아시아 7교회에 대한 주님의 평가입니다.
에베소교회 사데교회 라오디게아 교회 다 메가쳐치입니다.
그러나 서머나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들과는 비교가 안되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놀랍게도 큰 교회를 칭찬한게 아니라...작은 교회를 칭찬했습니다.
계3:8 볼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내가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켰다.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작은 능력이란 무엇을 말할까요? 성도가 많지 않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결국 세상적으로는 한 일도 별로 없고, 또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그 작은 숫자가 무엇을 했다는 겁니까? 내 말을 지켰다는 겁니다.
말씀을 따라 살았다는 겁니다.
생각해봅시다. 교회가 이것보다 더 귀중한게 뭐가 있을까요?
저는 솔직히 큰 교회가 부럽습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는 교회가 부럽습니다.
그런데 정말 마음에 안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부러운 교회에 세상적인 문화가 너무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겁니다.
온갖 취미 프로그램이 난무합니다.
문제는 그런 프로그램은 난무하면서 성경을 모른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쟎아요
교회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행하고 무엇을 지키는 장소가 되어야 합니까? 말씀이지요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따라 행하고 말씀을 지키는 재미로 사는 성도들의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딴 것으로 재미를 삼고 있으니 이게 문제가 아닐 수 없다는 겁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고전10:31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되지 않는다면 하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가 솔로몬 성전을 객관적으로 보면 엄청나게 잘못되어 있음을 압니다.
문제는 오늘날의 교회가 바로가고 있느냐는 겁니다.
그 교회가 누구입니까? 우리 한 사람이 한 사람이 교회입니다.
나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킵니까? 내가 하나님이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습니까?
정말 내 삶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삶의 중심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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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신을 섬기는 장로◉
지난 시간에 우리가 두 번째 단락으로 넘어와서 담에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구멍이 무슨 구멍이냐...그냥 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구멍이 아니라
그 구멍은 비밀통로라고 했습니다.
누가 다니는 비밀 통로냐...제사장이나 장로가 아닌 우상숭배자들이 다니는 비밀통로라고 했습니다.
왜 에스겔에게 이 비밀 통로를 보여주시고 에스겔로 하여금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는 비밀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하기를 사람을 속이면 하나님도 모를 줄 압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가인이요, 아론이요, 다윗인 겁니다.
그리고 신앙생활에 비밀이 많은 것은 절대 좋은 믿음이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신전의식이 없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불꽃 같은 눈앞에서 산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시험에 들고 죄에 빠질 수 밖에 없는 인생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8절에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비밀통로가 난 담을 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이 담이 성막으로 보면 바깥 담...울타리와 같은데 그것을 헐라고 하신 것은
이미 더렵혀진 성전은 성전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는 무늬만 성전일 뿐이라는 겁니다.
무엇으로 더렵혀져 있다는 겁니까? 아래로 내려가보면 세상 온갖 잡신으로 더렵혀져 있다는 것0
성전을 헐어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을 헐라는 말씀속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당시의 성전도 그렇지만 오늘날 성도된 우리도 무늬만 성도가 되어서 안됩니다.
이런 성도는 하나님이 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고전3:16-17절 말씀을 먼저 찾아보고 말씀을 계속 나누겠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이 성전이 뭡니까? 우리 몸이요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다? 멸하시겠다는 겁니다.
이 멸하신다는 것이 헐어버리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무너뜨리고 우리 몸을 무너뜨리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눈이 범죄하면 네 눈을 빼버리라...손이 범죄하면 그 손을 찍어내 버리라.
그렇게 하고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이지요
삼손으로 말하면 스스로 눈을 빼지 아니하니...강제적으로 눈을 빼는 겁니다.
눈이 빠지고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그게 복중에 복이요 은혜중에 은혜입니다.
9-10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들어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행하는 가증하고 악한 일을 보라 하시기로
내가 들어가 보니 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 벽에 그렸고
8절에서 담을 헐라고 하신 하나님께서...
9절에 에스겔에게 헐린 담안으로 들어가서 담안에 어떤 악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보라고 합니다.
들어가서 보니...각양 곤충과 가증한 짐승과
이스라엘 족속의 모든 우상을 그 사방벽에 그렸더라고 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세상의 모든 잡다한 우상을 다 성전 벽에다 그렸다는 겁니다.
정말 우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우리나라는 옛날에 동네 정자 나무도 우상이었습니다.
큰 바위도 우상이요...해도 달도 다 우상이었습니다.
거기다 집에 화장실에도...헛간에도...곡간에도....다 거기에 우상이 있었습니다.
심지 몽땅 빗자루에도 귀신이 있다고 하여 마음대로 못 버렸습니다.
실제로 저는 태어나자 말자 밀양 표충사 절에 제 이름을 올렸답니다.
그 절에서 중이 일년에 몇 번씩 저희 집을 방문해서
점인지 사주관상인지...정확히 모르지만...이런 복이 있을 것이고...누구는 무엇을 조심해야 한다
저를 보고는 한해는 물조심해야 한다...또 다음해에는 불조심해야 한다.
그 다음에는 또 물조심 불조심...어려서 그런지 항상 그렇게 말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거기다 조상귀신까지...무슨 섬겨야할 우상이 그렇게 많은지...끝도 없습니다.
저희 가정에 형님들이 예수를 믿지 않아서 제사를 지냅니다.
설에도 제사를 지내는데 보통 제사에는 안갑니다.
설에는 안갈 수가 없어서 갔는데...어느해...양수야...이리 와봐라...
그리고 하시는 말씀이 식구들 다 데리고 방안에 들어가서 제사 끝날 때까지 나오지 마라는 겁니다.
무슨 뜻인지 물으니...지금 문 밖에 조상귀신들이 너희들 때문에 들어오지 못하고
조롱조롱 매달려 있다는 겁니다....그러니까...나오지 말고...내년부터는 제사 끝나거든 오라는 겁니다.
저는 아파트 현관 문에 메달려 있는 귀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네가 투시의 은사가 있어서 볼 수 있다면 싸그리 잡아서...던져 버릴 것인데
안타깝게도 투시의 은사가 없어서 잡아서 목을 비틀지 못한게 아쉽습니다.
귀신은 숫자도 끝이 없고 셀 수도 없는 겁니다.
그 많은 우상들을 지금 성전의 어느 방에 그려놓고 섬기고 있는 겁니다.
◉장로의 역할◉
11절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우리가 앞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더랬습니다만
장로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바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잘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에 탁월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장로가 되면 문제교회가 생기지 않습니다.
문제 교회가 있는게 아니라 문제 장로가 있기에 문제 교회가 있는 겁니다.
장로님을 폄하 하는 것 아닙니다. 정말 직분에 충실하게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말씀을 잘 알고 말씀을 따라 산다면 교회에 왜 문제가 생깁니까? 생길 수가 없는 겁니다.
혹 목사가 타락했다고 할지라도 장로님이 바로 서 있으면 교회는 딴길로 가지 않습니다.
장로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권사님이 말씀에 깨어 있고 권사님들이라도 말씀대로 산다면
교회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교회가 살아납니다.
장립집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선택되어 뽑힌 자입니다.
뽑힌 자는 다 말씀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장립집사님들이 말씀에 깨어 있고 말씀을 귀중히 여기고 말씀을 따라 산다면 교회가 됩니다.
그런데 집사님들이 말씀을 우습게 알고 농담으로 안다면 희망이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70명의 장로중에 딱 한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입니다.
왜 이 이름을 여기에 기록했을까요? 그것을 알기 위하여서는 사반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사반은 왕하22,23장에 보시면 요시야 왕의 개혁운동 때에 요시야 왕을 도운 서기관이 사반입니다.
그런 사반의 아들이 야아사냐도 렘29:3절에 보시면 예레미야를 도운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야아사냐를 지도자인 장로로 선택되게 되었나 봅니다.
이와같은 믿음의 가문에서 믿음을 대물림하여 이스엘백성들의 지도자인 장로까지 되었다면
더 잘 감당하고 더 자신을 돌아보아 믿음의 길에서 딴길로 가지 말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 조차도 타락하여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게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 편에서 너는 여기에 있을 사람이 아닌데 왜 여기에 있니?
너만은 이러지 말아야 하는데 너는 안그럴 줄 알았는데 너 왜 이러니...
저는 성경을 보면서 꼭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 음성을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 말아야 하는 장소에 갔을 때...
하나님께서...너 왜 여기에 있어? 넌 여기 올 신분이 아니쟎아?
어떤 불편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하나님께서 너 왜 마음이 그렇게 불편해?
사실 나도 너가 이러니 너 안에 있기에 많이 불편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할 때도...어울리지 말아야 할 사람과 어울릴 때도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면 진짜 신앙생활 하는 재미가 넘치는 겁니다.
저는 반석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삶속에서 너 왜 거기에 있어? 너 왜그래?
그렇게 하는 것 아니냐? 넌 그렇게 해서 안돼 정신차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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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새벽에 70명의 장로가 우상을 섬기는데 앞장 선 모습을 보았습니다.
장로가 해야할 가장 중요한 일, 역할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전달자라고 했습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전달자가 장로입니다.
그러기 위하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하고, 말씀을 잘 알아야 하고
그들이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백성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재판장이 될 수 있습니다.
장로가 말씀대로 살지 아니하고 백성들이 문제가 생겼을 때 말씀에 따른 재판장이 된다면
백성들이 믿고 그 재판을 맡길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그렇지 아니하다보니...악한 재판장, 불의한 재판장이 생겼던 겁니다.
시편 94:20 율례를 빙자하고 재난을 꾸미는 악한 재판장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으며
이것이 구약시대만 아니라...신약시대에도...눅18장에 보면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이 어떤 사람이라고 하느냐 하면
눅18:2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라고 합니다.
왜 불의한 재판장, 악한 재판장이 생깁니까?
먼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습니다. 듣지 아니하니 하나님의 말씀을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르니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겁니다.
그렇다면 정말 구약의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몰랐을까요? 압니다.
그렇다면 모른다는 말이 뭡니까? 말씀을 따라 살지 아니하면 아는게 아는게 아닙니다.
왜 야고보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겁니다.
그냥 지식적으로 하는 것은 아는 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아는 것은 말씀따라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짜 아는 것이고 믿는 것입니다.
성경말씀 달달 외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말씀따라 사는 믿음이 참 믿음이입니다.
말씀을 많이 알고 달달 외우는 것으로 내 믿음의 수준을 평가하지 맙시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히 여기며..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삶이 내 믿음을 결정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70명이 장로중에 한 사람을 콕 찝어서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만천하에 공개합니다.
그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거기에 들어가서 안될 사람이 들어갔다고 했습니다.
거기에 함께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이 함께하고 있다는 겁니다.
즉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너 왜 거기에 있니?
나는 네가 거기에 있음에 심히 마음이 아프다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때, 길을 갈 때, 어떤 장소에 가고
어떤 사람들과 어울릴 때에...너 왜 그러고 있어?
왜 마음이 그렇게 불편해? 네 마음이 불편한 거보니까 나도 불편해..
너 왜 그 길을 가는거야? 네가 가야할 길이 아니쟎아...너 왜 거기에 있니?
너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니...그 사람들과 같이 어울릴 사람이 아니쟎아...
이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둠에 빠진 자◉
다시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 중 칠십 명이 그 앞에 섰으며 사반의 아들 야아사냐도
그 가운데에 섰고 각기 손에 향로를 들었는데 향연이 구름 같이 오르더라
11절에 70인의 장로가 손에 잡은 것이 무엇입니까? 향로입니다.
우리가 성막을 배울 때에 향단이 지성소 앞에 있었습니다.
이 향단의 불은 어디서 담아 옵니까? 번제단의 불을 담아서 가져오고 거기에 향을 피웁니다.
향은 무엇을 상징하느냐 하면...하나님앞에 올려드리는 기도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이 향단의 불을 담고 그것에 향을 드리며 분향하는 일을 누가 합니까?
제사장이 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절대 장로들이 향로를 손에 들고 다닐 수도 불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하물며 그 불도 번제단이 불 외에 다른 불을 담아다가 분향하다가 죽은 제사장이 있습니다.
그들이 민26:61절에 보시면 나답고 아비후입니다.
그런데 장로가 향로를 들수 있느냐....
또 향로에 불을 담을 수 있느냐...장로가 향을 드릴 수 가 있느냐.. 한마디로 다 안됩니다.
그런데 장로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도 율법을 어기는 심각한 문제인데
더 심각한 것이 이곳이 지금 어디냐는 겁니다. 일반적인 세상 어느 산골 운막이 아니라
지금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에서 이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형식과 법을 가지고 지금 우상을 섬김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다.
12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장로들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하는 것을 네가 보았느냐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지금 이 말을 누가 하고 있다는 겁니까? 하반절에...그들이 이르기를..이라고 합니다.
여기 그들이 누구입니까? 장로일까요? 아니면 우상들일까요?
우상들이 말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쟎아요
시115:4-7
4.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이런게 우상인데 그 우상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니...결국은 장로들이 한 말인겁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있는 장소가 어디입니까?
중반절에 보시면 각각 그 우상의 방안, 어두운 가운데에....라고 합니다.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어두운 곳이라는 겁니다.
지성소와 성소가 있는 곳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원래 성막에는 방이 없지만...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는 방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성전 안에 있는 어느 방이라는 말이 됩니다.
방이라면 당연히 불을 켤 수 있는 장치가 있을 것인데 어두운 가운데에서 행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환경적인 요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들의 마음의 상태를 말합니다.
즉 그들의 마음이 이미 어두운 가운데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마음이 어두움에 빠져 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뭐라고 합니까? 하반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시며 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 하느니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상이지요
그런데 마음이 이미 하나님을 떠나니...우상에게 해당하는 말을 하나님께 합니다.
그리고 또 말합니다...여호와께서 이 땅을 버리셨다..고 합니다.
사실적으로 따져 봅시다...누가 누구를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이들을 보지 않는 겁니까? 아니면 이들이 하나님을 보지 않는 겁니까?
하나님은 우상숭배자들이 다니는 비밀 통로도 다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안보시는 겁니까?
안보는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요 장로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안보는 겁니다.
누가 누구를 버렸습니까? 하나님이 이땅을 버리신 겁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땅을 버린 겁니까?
그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약속의 땅...가나안 땅을 우상의 도굴로 만들어 버린 겁니다.
우리도 가끔 이런 성도들을 만나쟎아요
하나님 믿어도 별 수 없더라...하나님 믿어도 하나님 도와주지 않더라...
언제 그들이 진심으로 하나님 믿어 보기나 했을까요?
하나님 앞에 구하고 찾고 두드려 보았을까요?
70-90년대 까지는 목숨을 걸고 하나님 만나고자 금식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이 언제 하나님을 알려고 하고 하나님을 찾고자 한 적이 있습니까?
그 많은 선지자들이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하지만 하나님을 알고자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오죽했으면 이사야를 동원하여...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렇게 말씀하게 하셨을까요?
거기다 호세아 6:1절, 예레미야나3:40절에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겁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났다는 겁니다.
이사야 55:6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아모스 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이런 그들이 도리어 하나님이 자기들을 버려...돌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느냐 하면 하나님을 자기들이 부리는
종처럼 알라딘의 램프의 거인처럼 생각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종이 아닙니다. 우리 문제의 해결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인이십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실 때 진짜 믿음생활이 시작되는 겁니다.
그래서 날마다 아니 매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원하심이 무엇인지 뜻이 무엇인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살기를 원하시고,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시고,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지를 하나님께 물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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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통해야 할 것◉
우리가 지난 새벽에 우상숭배하는 이스라엘 70인의 장로들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에 있었다고 했습니까? 어두운데 있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이 있는 곳이 환경적인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문제라고 했습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우리는 영적으로 어두움의 영에 사로잡힌 자가 됩니다.
이들이 영적으로 어둠에 사로 잡혀 있으니 그들이 하는 말도 부정적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들의 말이 뭡니까? 두 지로 말했습니다.
1)여호와께서 우리를 보지 아니하신다. 2) 여호와께서 이땅을 버리셨느니라...
누가 누구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끊임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지금은 우상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러면서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도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성도가 날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게 믿음생활입니다.
2) 여호와께서 약속의 땅을 버리심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과 장로들이 행위가 약속의 땅을 타락의 땅으로 만들었다는 겁니다
땅의 문제도 하나님의 문제도 아니라...사람의 문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 오늘은 마지막 단락인...14-18절 말씀으로 넘어왔습니다.
핵심은 16절에 있습니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세 번째 단락의 핵심은 16절이고 16절의 핵심은 하반절에 “성전을 등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있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일단 이 문제는 좀 뒤로 미루고..먼저 성경 14절을 봅시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전으로 들어가는 북문에 이르시기로 보니
거기에 여인들이 앉아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더라”
여이들이 무엇을 위하여 애곡했다는 겁니까?
담무스를 위하여...담무스가 무엇인가 찾아보니..
뜻이 생명의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식물을 생육케 하는 신이라고 불리는 신이라는 겁니다.
그리하여 식물이 시드는 가을이 되면 그 식물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살려달라고, 식물이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고 애곡했다는 겁니다.
진짜 여인들이, 성도들이 애곡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까?
이것을 우리가 성경속에서 몇가지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요엘 2:12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고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왜 금식하고 울고 애통하라는 겁니까?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기 위하여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2)미1:7,8 이러므로 내가 애통하며 애곡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행하며
들개 같이 애곡하고 타조 같이 애통하리니
내가 애통하고 애곡하겠다...여기 내가가 누구입니까? 선지자 미가입니다.
그런데 특이하게 벌거벗은 몸으로 그렇게 애통하고 애곡하겠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이 죄악으로 인하여 벌거벗은 몸같이 되어 부끄러운 모습이 되어버림을
안타까워하며 자신이 그렇게 회개하며 울겠다는 겁니다.
3)누가복음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것을 말씀하니까...그때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울었던가 봅니다.
예기에 예루살렘의 딸들이라는 사람은 꼭 여자들을 말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된 이스라엘 모든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신부니까...예루살렘의 딸들아...라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프하기보다...
누구를 위하여 울라는 겁니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그리고 자기 자녀들을 위하여 울라는 겁니다.
왜 울어야 합니까? 믿음 없음을 회개하며 울어야 한다는 겁니다.
역시 믿음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4) 약4:8,9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9.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무엇 때문에 울라는 겁니까? 죄 때문에 울고 애통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들 때문에 애통합니다. 슬퍼합니다. 눈물을 흘리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죄 때문에, 세상의 흐름따라 유행따라 산 것
하나님을 더 잘 섬기지 못한 것, 더 믿음으로 살지 못한 것
이런 것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눈물흘리고 애통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길로 가야 합니다....더 믿음으로 잘 사는 길로 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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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떠났던 것을 울고 애통하라는 것이고
2)하나님앞에 죄로 인하여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하여 회개하라는 것이고
3)자기 자신과 자녀들의 믿음 없음을 애통하고 회개하라는 것이고
십자가 믿음, 부활의 믿음, 죄사함의 믿음, 구원의 믿음, 천국에 대한 믿음
이 믿음이 확실하지 아니할 때에 우리는 정말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 애통을 하나님이 받으십니다.
4)일심으로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에 서지 못함을 회개하고 애통하라는 겁니다.
1장 두 마음을 품지 말라...두 마음을 품은 자는 주께 얻기를 생각지 말라
2장 두 신앙 말합니다. 말씀과 행함이 일치되는 신앙, 말씀을 알지만 행하지 않는 신앙
3장 두 말을 말합니다. 한 샘에서 단물과 쓴물을 동시에 낼 수 없는데
한 입으로 두말을 잘도 한다는 거지요
4장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15절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11절에 70인의 장로들이 우상앞에서 향로를 들고 향을 올리고...
14절에 여인들이 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하고 이것이 성전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것만 해도 참담한 지경인데...하나님께서 15절에...에스겔에게 에스겔아...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이게 무슨 뜻입니까? 에스겔아..너도 생각이 있거든 생각좀 해봐라...
이게 보통 일이고, 이게 그냥 눈 감고 넘어갈 일이냐는 겁니다.
심판 받을 일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겁니다.
저는 내 인생을 돌아보면 죽어도 몇 번 죽었어도 하나님앞에 말못할 그런 인생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이 나를 데려가실만한 사건도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혹 데려가시지는 않으실지라도 최소한 장애를 않고 사는 자가 되거나.
아니면 반신불구되거나...식물인간이 되어 있을 법도 한 사건들이 줄지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고 있고요...건강도 남에게 뒤진다고 생각지않습니다.
그래서 종종 생각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데려가시지도 않으시고
장애도 없이 지금가지 멀쩡하게 살아있게 하셨는지...생각해보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놀랍도록 오래 참으심이 작동하셨다고 믿습니다.
저야 일평생 하나님이 참아주신다고 할지라도 80-90일겁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서 하나님의 참으심 어느 정도일까요?
광야시간이 40년, 여호수아시대가 정확히 모르니 10년이라고 합시다...합 50년
사사시대가 학자들에 따라서 다르나...340년이라고 보고 왕정시대가 400년이라고 봅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790년 전후가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참으신 겁니다.
정말 놀랍도록 오래 참으신 하나님이심입니다.
2) 그렇게 오래참으심의 핵심이 뭡니까? 돌아오라는 겁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하나님께서 제게 오래 참으심은 단 하나입니다.
저에게 어떤 큰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라는 겁니다.
우리가 일이란 내 기분으로 할 수 있지만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게 진짜 하나님의 일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제가 애통했던 장소를 돌아보면...
그때마다 하나를 깨닫게 하시고 한가지를 고치게 하셨습니다.
제가 좀 머리가 좋고 영감이 뛰어나면 한가지를 통해서 두가지 세가지...수십가지를 배웠다면
그 눈물의 시간 애통의 시간이 줄었을지 모르는데...
머리가 좀 어리버리해서 깨닫지 못하니...그렇게 많은 어려움의 시간을 주셨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기쁨, 그 즐거움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15절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그것을 보았느냐
에스겔아...너 장로들이 하는 것, 여인들이 행하는 것을 보았지? 너 생각은 어떠니?
이럼에도 내가 참고 또 참아야 겠니? 너도 입이 있으면 말좀 해봐라...는 겁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15절 하반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는 또 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보리라 하시더라
지금까지 본 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이보다 더 큰 가증한 일을 볼것이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6절을 봅시다.
그가 또 나를 데리고 여호와의 성전 안뜰에 들어가시니라
보라 여호와의 성전 문 곧 현관과 제단 사이에서 약 스물다섯 명이
여호와의 성전을 등지고 낯을 동쪽으로 향하여 동쪽 태양에게 예배하더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여인들은 성전의 바깥뜰에서...담무스를 위하여 애곡했다면
지금 이 제사장들은 성경의 내용상으로 볼 때 성전 앞뜰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즉 번제단이 있고 물두멍이 있는 그 사이로 보입니다.
거기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이니까...여기 25인은 제사장들이라는 겁니다.
왜 25명이 제사장들이냐...어제 제가 나누어 드린 프린트 물에
24반열의 제사장에 대해서 함께 나누어 드렸습니다
24반열은 대상24:5-19에 기록되어 있는데
다윗이 성전 건축 준비와 함께 성직에 임할 레위 사람들을 분류하면서,
제사장들을 24반열로 조직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최초의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레위자손의 아론입니다.
아론에게 아들이 몇 명이었습니까? 4명입니다.
나답과 아비후와 엘르아살과 이다말입니다. 사실은 나답이 장손입니다.
민26:61절에 보시면 나답과 아비후가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는 다른 불을 여호와 앞에 드렸다가
하나님이 치심으로 죽게 됩니다...그리고 남은 아들이 엘르아살과 이다말입니다.
다윗이 24반열을 세울 때 엘르아살 자손이 이다말의 자손보다 많아서
엘르아살 가문에서 16족장, 이다말 가문에서 8족장이 뽑혀
도합 24족장으로 24반열의 우두머리가 되게 하였습니다(대상 24:4).
거기다 대제사장까지 합하면 25명이 됩니다.
그러니까 여기 본문에 25명이라는 것은 당시에 대제사장과 모든 제사장들이라고 보면됩니다.
이들이 성전 앞에서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당시에 태양신이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태양이 아니면 농작물이 안됩니다. 태양이 없이는 사람도 짐승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하나님의 성전을 등지고 태양신께 경배하는 겁니다.
그 결과로 18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분노로 갚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이 큰 소리로 내 귀에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이들의 행위가 결국 하나님으로 하여금 극도의 분노를 일으키게 하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는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긍휼을 베풀지도 아니하고..
그때서야 큰 소리로 애통하며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겠다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때가 늣기 전에 하는 것이 좋습니다.
때가 지나고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돌아갑시다.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힘써 하나님을 알아갑시다.
그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아가서...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는 이런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7절을 봅시다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보았느냐 유다 족속이 여기에서 행한 가증한 일을 적다 하겠느냐
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 또 다시 내 노여움을 일으키며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17절의 말씀은 두가지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노가 끝까지 차게 하였다는 것이고
다음은 25명의 제사장들이 얼마나 우상숭배에 심취해 있는가를 다시 말씀합니다.
심지어 나뭇가지를 그 코에 두었느니라...
태양신을 숭배하는 숭배자들이 기도할 때에 갖는 습관이 무엇이냐 하면
코앞에 나뭇가지를 둔다는 겁니다. 왜 자기들의 숨쉬는 숨조차 더럽고 불결한 것이라 생각하여
태양신이 뿜어주는 그 광선이 더렵혀진다고 생각하여 정결을 위하여 그렇게 행한다는 겁니다.
반대로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하나님이 자기들을 보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땅을 버리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오늘 중반절에 보세요...그들이 그 땅을 폭행으로 채우고...라고 합니다.
이게 무슨 뜻이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땅,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우상으로 더렵혔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