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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4년 5월 26일 주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청소년 주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교회는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주일을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어져 왔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보편 전례력에 들어온 것은 14세기, 요한 22세 교황 때이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는 미사를 시작할 때 사제가 삼위의 이름으로 교우들과 나누는 인사입니다. 은총과 사랑과 친교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미사에 참여합시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주님의 규정과 계명들을 잘 지키면 그분께서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자녀는 성령의 힘으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 하고 부른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다. 다른 하느님은 없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4,32-34.39-40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32 “이제, 하느님께서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너희가 태어나기 전의 날들에게 물어보아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물어보아라.
과연 이처럼 큰일이 일어난 적이 있느냐?
이와 같은 일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33 불 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도
너희처럼 살아남은 백성이 있느냐?
34 아니면 주 너희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너희가 보는 가운데 너희를 위하여 하신 것처럼,
온갖 시험과 표징과 기적, 전쟁과 강한 손과 뻗은 팔과 큰 공포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 가운데에서 데려오려고 애쓴 신이 있느냐?
39 그러므로 너희는 오늘, 주님께서 위로는 하늘에서,
아래로는 땅에서 하느님이시며,
다른 하느님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너희 마음에 새겨 두어라.
40 너희는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그분의 규정과 계명들을 지켜라.
그래야 너희와 너희 자손들이 잘되고,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영원토록 주시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8,14-17
형제 여러분, 14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15 여러분은 사람을 다시 두려움에 빠뜨리는 종살이의 영을 받은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자녀로 삼도록 해 주시는 영을 받았습니다.
이 성령의 힘으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 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16 그리고 이 성령께서 몸소,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우리의 영에게 증언해 주십니다.
17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려면 그분과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8,16-20
그때에 16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
17 그들은 예수님을 뵙고 엎드려 경배하였다.
그러나 더러는 의심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다가가 이르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마태오 복음서의 마무리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장엄히 선포되는데,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대목을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라는 수동형 문장으로 시작하십니다. 당신의 모든 일이 아버지에게서 위탁되고 주어진 것임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에게 모든 권한을 주신 아버지께서 어떤 분이신지는 제1독서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땅 위에 사람을 창조하신 날부터” 늘 인간과 함께 계셨던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함께하시고자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가운데 보내십니다.
더욱이 제2독서에서 바오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공동 상속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느님의 ‘함께하심’이 ‘예수님과 우리가 공동 상속자’라는 내용으로 선언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오늘 독서와 복음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인간과 함께하시려고 어떠한 일들을 하셨는지 그 구원의 역사를 요약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 역사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씀인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는 준엄한 약속으로 마무리됩니다. 육화하신 ‘성자’께서는 구약 내내 인류와 함께하신 ‘성부’의 완전하고 결정적인 계시이시고, 이렇게 성자 안에 성부께서 온전히 드러나셨음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신비’라고 하는데, 이해할 수 없는 애매함 때문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사랑을 통한 체험으로 인식되고 확인되는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삼위일체의 결정적 신비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 선언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상 끝 날까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지금 내 삶과 주변에서 구체적으로 체험하지 못한다면 삼위일체의 관계적 신비는 당연히 이해되지 않을 것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묵상합시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강론하기 참으로 힘든 주일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이 돌아올 때마다 지난 시절, 생뚱맞고 엉뚱한 이단 교리를 선포한 것이 떠올라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입니다. 하느님께도 크게 송구스럽고, 적절치 않은 예로 인해 고개를 갸웃거리셨을 교우들에게도 죄송한 마음이 큽니다.
삼위일체의 신비에 둘러싸인 하느님, 오묘하신 하느님을 인간의 제한된 지식과 언어로 설명한다는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그래서 삼위일체 대축일이 다가올 때 마다, 제 자신이 지니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과 신앙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를 재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 안에서 틈만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고백하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성호경을 통해서입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며 성호경을 긋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성삼위로 존재하고 계심을 믿겠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미사 시작 때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이렇게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은연중에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 안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지식에 있어서 둘째 가면 서러워할 바오로 사도 역시 ‘하느님 찬가’를 부를 때 아주 겸손한 신앙 고백으로 시작했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 누가 주님의 생각을 안 적이 있습니까?”(로마서 11장 33~34절)
결국 하느님은 파악이나 결론을 내릴 대상이 아니라 신비와 신앙의 대상입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 방식, 접근 방식 역시 더없이 신비스럽고 심오하며 불가사의합니다.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통상적이고 보편적인 양식과는 완전 다른 초월적·신비적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을 사랑하는 방식은 인간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방식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훨씬 초월적이고, 훨씬 풍요롭고, 훨씬 조화롭고, 더없이 뜨겁고 극진한 사랑인데, 곧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성삼위께서 각자 다른 방식으로 그러나 상호 일치 안에서 통합된 사랑을 우리 인간에게 보내시는데, 곧 성삼위의 사랑입니다.
우리네 인간이 지닌 두드러진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강한 정복 욕구입니다. 적정선에서 물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그 어떤 대상이든 끝끝내 파헤쳐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 어떤 오지이든 탐험하고 깃발을 꽂아야 직성이 풀립니다. 더 나아가서 하느님마저도 인간의 머리로 딱 떨어지는 공식이나 이론으로 설명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연구의 대상도 아닙니다. 신비 그 자체입니다. 알량한 인간의 머리로 파헤쳐지고 결론이 딱 떨어지는 대상이 절대 아닙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느님의 실체가 명확하게 설명되고 낱낱이 밝혀진다면 더 이상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신비하며 불가해한 하느님의 영역은 있는 그대로 놔두는 게 현명합니다.
삼위일체의 신비 앞에 우리는 더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지닐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 자체이신 성삼위 존재 앞에 더 뜨겁게 그분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바탕으로 더 깊이 동료 인간들을 사랑할 때, 삼위일체의 신비는 좀 더 친근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본질적인 교리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제234항)
결국 삼위일체 신비는 인간에게 당신 자신을 건네주시는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미천한 인간에게 당신에 관한 가장 내밀(內密)하며 지고(地高)한 신비인 삼위일체를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입니다.
삼위일체가 이해되지 않는다면 진짜 세례를 받은 것이 아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보통 삼위일체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삼위일체에 대해 고민하다 바닷가에서 아이를 만난 예화를 사용합니다. 아이는 조개껍데기로 작은 웅덩이에 바닷물을 담고 있었습니다. 바닷물을 어떻게 작은 웅덩이에 다 담으려고 하느냐고 어리석은 행위라고 말하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아이는 “당신도 인간의 작은 머리로 하느님의 무한한 진리를 채워 넣으려 하지 않느냐?”며 반문합니다. 아이는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단순히 우리가 삼위일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만을 도출하고 끝내야 할까요? 어쩌면 무한한 삼위일체 진리를 어느 정도는 인간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가 아닐까요? 바다를 다 담을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작은 바다를 만들 수는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는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삼위일체가 가장 명확하게 계시되는 때는 예수님의 세례와 죽음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셨다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아버지-아드님-모든 권한).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주시는 모든 능력이 성령이십니다. 성령 안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들어있기에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아드님께 전해 주시고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써 마치 하와가 아담의 옆구리에서 빼낸 갈비뼈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로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시며 세례를 베풀라고 하는 말씀에도 ‘그리스도-제자들-성령’의 삼위일체가 나타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동물에게 이름을 지어주라는 첫 명령과도 같습니다. 이름은 새로 태어날 때 받는데 이를 위해서는 아담의 ‘피’ 흘림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 순종하여 아담이 흘리는 피가 성령입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이뤄지는 성사입니다. 새로 태어남은 ‘믿음’으로 이뤄지는데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가 믿음입니다. 만약 아버지로부터 받아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흘리신 피가 아니었다면 나는 부모와 같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하느님이 세 분이셔야 할까요?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하고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사랑을 하려면 최소 단위는 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둘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습니다. 자기 모든 것을 선물하는 ‘관계’가 일어나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51 참조). 관계의 기본은 남자와 여자의 사랑인데, 하느님은 그것이 삼위일체를 닮았다는 힌트를 성경에서 주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27) 오헨리 단편소설 『크리스마스 선물』에서 가난한 남편은 아내를 위해 가보처럼 내려오는 시계를 팔아 아내의 빗을 사고 아내는 머리카락을 팔아 남편을 위한 시곗줄을 사서 선물했습니다. 선물 안에는 주는 이의 존재가 담깁니다. 선물은 성령인데 선물을 무시할 때 관계가 끝납니다. 아내는 분명 남편으로부터 받은 선물에 감사해서 자녀를 낳게 될 것입니다. 자녀는 자신의 탄생이 ‘아빠-엄마-선물’로 이뤄짐을 알지 못할 수 없습니다. 태어나면 삼위일체를 저절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자녀는 부모의 삼위일체 사랑으로 탄생합니다. ‘아버지-어머니-피’가 우리가 인간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만들어 길거리 짐승들처럼 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교회가 ‘아버지-아드님-성령’ 삼위일체로 탄생하였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교회-성령’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세례는 성령으로 받는데, 성령은 그리스도의 피입니다. 따라서 세례로 하느님 자녀가 되었는데 삼위일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리고 나도 ‘교회-나-성령’으로 자녀를 낳으라고 파견받습니다. 이는 마치 성모님께서 그리스도께 파견받아 엘리사벳에게 성령을 주셔서 새로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나의 피에 성령을 섞어 내어주며 하느님 자녀라는 믿음을 전해 주는 삶이 삼위일체 신비에 참여하는 삶이고 삼위일체만이 사랑이며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제는 매일 미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인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셨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주신 십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우리가 머무는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이 될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성부이신 하느님께 대한 체험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장 강력한 하느님 체험은 모세와 함께한 ‘출애굽’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약속의 땅으로 가도록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은 드디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성부이신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입니다. 비록 우리가 잘못을 했어도 뉘우치면 언제나 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릇된 길을 갈 때면 예언자를 보내 주시어 바른길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성자이신 하느님은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와 기쁜소식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한 사람들이 머무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나 갈 수 있지만 아무나 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기쁜소식을 온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갈 수 있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셨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으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병자들은 치유되었고,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던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신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체험한 하느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하고, 온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 또한 주님께서 가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하느님을 체험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진리의 협조자 성령의 하느님입니다. 성령의 강림으로 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이제 성령과 함께하는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은 은사를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그것에 맛 들일 수 있는 슬기로움을 주는 은사, 교리의 어려운 점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은사, 어떤 일이 옳고 그른 일인지 더욱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열렬히 섬기게 하며, 죄악과 악마를 거슬러 용감히 싸울 수 있는 능력이며 순교까지 하면서 신앙을 증거 할 수 있는 은사,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믿어야 할 것과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분별케 하는 은사,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자녀다운 사랑과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사람을 예수님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랑하게 해 주는 은사. 하느님을 하느님으로 섬기게 하며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취하게 하며, 죄를 피하게 하며 영생에 대한 희망을 주는 은사입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신다면 본당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와 신자들도 사랑과 은총 그리고 친교로 일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성직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모범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어 준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준 것이다. 모범의 방법은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입니다. 수도자가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치에서 말씀을 듣는 것을 귀하게 보셨습니다. 그리고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수도자에게서는 ‘청빈, 정결, 순명’의 향기가 넘쳐납니다. 신자들이 일체를 이루는 방법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나누면서 회개한 것을 행동으로 보여 줄 수 있습니다. 자캐오는 기꺼이 가진 것을 나누었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과 가정은 구원받았다.’라고 하셨습니다. 성직자의 겸손, 수도자의 기도, 신자의 회개가 삼위일체를 이루면 본당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필립보 네리(Philip Neri)
신분 : 신부, 설립자
활동연도 : 1515-1595년
같은이름 : 네리오, 네리우스, 비리버, 필리뽀, 필리뿌스, 필리포, 필리포스, 필리푸스, 필립, 필립부스, 필립뽀, 필립뿌스, 필립포, 필립푸스
이탈리아 중부 피렌체(Firenze) 태생인 성 필리푸스 네리우스(Philippus Nerius, 또는 필립보 네리)는 산마르코(San Marco)의 도미니코 회원들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세 때에 그는 산제르마노(San Germano)로 가서 사업 경력을 쌓으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의 뜻과는 달리 신비체험을 하게 되면서 수도생활로 마음을 굳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1533년에 로마(Roma)로 갔으며, 그곳에서 어느 부유한 고향 사람의 두 아들을 가르치면서 은거생활을 하다가 사피엔차(Sapienza)와 산타고스티노(Sant'Agostino)에서 철학과 신학을 3년 동안 공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길거리나 시장바닥에서 로마인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신앙생활이 극히 미온적이었던 로마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1548년 성 필리푸스는 자기의 고해신부인 페르시아노 로사(Persiano Rossa) 신부와 함께 '삼위일체 형제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는 어려운 처지의 순례자들을 사목하기 위하여 평신도들로 구성되었으며 '40시간' 신심을 전파하였다.
그는 1551년에 사제로 서품되자마자 고해신부로 명성을 날렸으며, 수많은 군중들이 집단을 이루어 산 지롤라모 델라 카리타(San Girolamo della Carita)로 몰려왔다. 이곳은 그가 생활하고 있던 사제들의 공동체였다. 그는 수많은 개종자를 얻는 일에서뿐만 아니라, 자신을 도와줄 사제들을 확보하는 일에도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들은 신자들을 그들의 오라토리오(Oratorio, 방)에 모아놓고 영적 권고와 고해성사를 주곤 하였기 때문에 '오라토리언'(Oratorians)이란 이름으로도 알려졌지만, 실제로 '오라토리오회'가 설립된 연대는 1564년이다. 이때 필리푸스는 산조반니(San Giovanni) 성당의 주임신부였고, 다섯 명의 제자들이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 새로운 수도회는 1575년에 공식 승인을 받았는데 이때는 그가 이미 로마(Rome)의 명사로 알려진 때였다. 성 그레고리우스 13세(Gregorius XIII) 교황은 그에게 발리첼라(Vallicella)의 산타 마리아(Santa Maria) 성당을 하사했는데, 그는 옛 성당을 철거한 후 그 자리에 '키에사 누오바'(Chiesa Nuova)를 짓고 오라토리오회의 본원으로 사용하였다.
이즈음에 그는 '로마의 사도'로 알려졌고, 교황과 추기경 심지어는 권력자들과 일반 시민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았다. 그는 뛰어난 영적 지혜와 환시를 통하여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자와 힘없는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특히 그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탈혼과 환시를 수차 경험하였고, 기적까지 행하였으며, 예언의 은혜도 받았다. 1593년에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장상직을 사임하였다. 1595년 5월 25일 불편한 몸으로 고해성사를 주고 방문자들을 맞은 그는 그날 밤 상태가 악화되어 주위에 모인 영적 아들들에게 십자가를 그어 축복한 후 선종하였다.
그는 1615년 교황 바오로 5세(Paulus V)에 의해 시복되었고,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15세(Gregorius XV)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성녀 마리아 안나(Mary Anne)
활동년도 : 1618-1645년
신분 : 동정녀, 은수자
지역 : 키토(Quito)
같은 이름 : 낸시, 니나, 마리아나, 마리안나, 메리, 미리암, 애나, 애니,앤
성녀 마리아 안나 아 예수 데 파레데스(Maria Anna a Jesu de Paredes)는 당시 에콰도르의 수도였던 페루비안 마을에서 태어났고, 마리아 안나 데 파레데스 이 플로레스(Maria Anna de Paredes y Flores) 즉 ‘키토의 꽃’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녀는 에스파냐 귀족의 딸로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신심이 뛰어나서 언니들과 더불어 로사리오와 십자가의 길의 기도 바치기를 매우 좋아하였다. 12세 때에는 몇 명의 친구들과 어울려 일본인들을 개종시키려다가 키토 교외 산에서 은수자로 살려는 생각이 떠올라 포기하였다. 그러나 이 일 역시 정치적인 문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고해신부인 예수회원의 지도를 받으면서 성당에 가는 일을 제외하고는 독수자처럼 생활하였다.
그리고 성녀 마리아 안나는 관을 하나 마련한 뒤 매 금요일마다 그 속에서 지내며 죽음을 묵상하기도 하였다. 팔과 다리를 쇠사슬로 묶고 고행자가 입는 말총 속옷을 입었으며, 가시관과 쇠못관을 만들어 고행하였다. 음식은 극히 소량만 먹었고, 물은 그리스도의 갈증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겨우 입을 축이는 정도였다. 이와 동시에 예언과 기적도 일어났다. 1645년 키토 지방에 지진과 더불어 전염병이 번졌다. 사순 제4주일의 강론을 들은 그녀는 자신이 백성의 희생물이 되겠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나섰다. 결국 지진은 멈추었지만 그녀는 26세의 젊은 나이로 운명하고 말았다. 그녀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고, 1950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그녀는 마리아나 데 파레데스(Mariana de Paredes)로도 불린다.
복녀 에바 (Eva)
활동년도 : +1265년경
신분 : 동정녀
지역 : 리에주(Liege)
같은 이름 :
복녀 율리아나(Juliana, 4월 5일)가 코르닐롱 산(Mount Cornillon)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을 때 그녀의 벗 한 사람의 성덕이 매우 뛰어났다고 했는데, 그가 바로 벨기에 리에주의 에바이다. 에바는 특히 성체 축일이 제정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교황 우르바누스 4세(Urbanus IV)는 에바의 신심을 높이 평가하여 그녀의 소원대로 그리스도의 성체 축일을 제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Thomas de Aquino)가 편찬한 성체 축일의 성무일도 등을 인정하는 칙서까지 하사하였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902년 교황 레오 13세(Leo XIII)에 의해 승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