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늦겨울 아침,
봄 햇살은 누구를 들뜨게 했나
남진원
1973년 10월 13일, 내가 처음 발령받은 학교는 삼척군 황지읍 화전리 화전 국민 학교였다. 이후 황지읍은 태백시가 되었다.
당시는 광산업이 잘 되는 시기여서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학급수는 늘어나서 2층 짜리 커다란 건물에 16학급의 학교였다.
날마다 검은 하천과 길바닥에 쌓인 탄가루를 대하다가 하얀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도 이처럼 하얀 눈이 내리는구나.’ 마을이 온통 검은색에서 하얀 마을로 변해가는 모습을 볼 때는 낯선 나라에 온 듯한 생각이 들었다.
1976년 3월 초, 쌓인 눈이 햇볕에 의해 녹기 시작했다. 특히 지붕에서 녹아내리는 낙숫물 소리에 내 마음은 어언, 고향집의 겨울에 가 있었다. 지붕 아래 뽀송한 흙에는 봄이 움트고 있었다. 새까만 탄광지에서의 생활은 자주 밝고 따뜻한 것들을 꿈꾸게 하였다. 특히 늦겨울에 쏟아지는 햇살은 눈만ㄴ을 녹이지 않았다. 봄이 오는 그 모습은 더욱 나를 들뜨게 만들았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쓴 시조 한 수가 ‘늦겨울 아침’이었다. 『샘터』에서는 시조 투고를 받고 있었다. 그곳에 작품을 투고 하였다. 그 시조가 연말에 시조상 입상이라는 행운을 안았던 것이다. 박재삼, 정완영, 이근배 시인들께서 심사를 하셨다.
1976년 5월호 『샘터』에 발표된 작품이 연말에 샘터시조상으로 뽑힌 것이었다.
늦겨울 아침
남진원
햇살이 눈을 밟고 달려오는 이 아침
지붕엔 토옥 토독 겨울이 헐리는데
볕 묻은 흙담 밑에서 봄은 자리 트는가
이후 류제하 선생께서 서신을 보내주셨다. 시조를 본격적으로 쓰면 도와 주겠다고 하셨다. 1978년 『시조문학』에 초회 추천이 되고 1980년 여름호에는 『시조문학』에서 시조 ‘매미소리’ 작품이 천료되었다. 류제하 선생의 덕분이었다. 1980년에는 『월간문학』에도 시조와 동시를 응모하였다. 『월간문학』에서 당선 통지가 왔다. 나는 동시가 당선된 줄 알았더니 1980년 월간문학 8월호, 제31회 신인작품상에 시조가 당선되었던 것이다. 그때 심사는 이상범 선생께서 하셨다. 류제하 선생이나 이상범 선생께 큰 도움을 받았지만 늘 큰 은혜를 입기만 했다. 그리고 여태까지 고마움만 마음에 담고 살았다.
시조, [늦겨울 아침]은 언뜻 보면 늦겨울 아침 눈이 녹고 봄이 움트는 생명의 기쁨을 노래한 것 같이 느껴진다. 그 말도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겨울을 보내고 맞이하는 내 인생의 봄을 그려 보려고 하였다. 그래서인가, 늦겨울 아침은 더욱 내 마음에 닿는 정신의 무게추를 세우는 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지붕에서 겨울이 헐리는 그 기쁨은 느긋한 행복감에 취하는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맞이하는 봄날의 아름다움은 [교육자료] 교사문원 추천에 ‘봄날’ 이라는 작품으로 빛을 보게 되었다.
[ 추천 2회]
봄 날
남진원
냉이 캐는 아이들
호미 끝에서
초록빛 숨소리가
파랗게 터져나오고
아지랑이
자욱히
산과 들을 맴돌면
나비 등을 타고
쏟아져내리는
분홍빛 자락
민들레 웃음소리
들판 가득히 지저귀고
종달새 노래소리
노오랗게 익어가는데
병아리 한 떼가
양지쪽에서
봄을 데리고 놉니다.
호미 들고 냉이 캐는 아이들의 모습, 아지랑이가 맴도는 봄날. 나비가 날아다니고 민들레가 활짝 핀 길은 너무나 아름다운 봄의 길이었다. 거기에 더해 노랑 병아리들이 양지쪽에 모여 모이를 쪼고 있는 모습은 또 얼마나 귀여운가. 나는 이런 봄의 모습에 취헤 글을 썼던 것이다. 고향집의 이런 아름다운 모습을 그릴 수 있는 것은 내 상상력의 힘이라기 보다는 고향이 마련해준 아름다운 자연의 풍경들이었다.
문학에 대한 싱싱함과 싱그러움, 삶의 역동적인 힘을 이 동시 ‘봄날’에 그려 넣고 싶었다. 늦겨울 아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따뜻하고 행복한 봄날의 정경은 나로하여금 늘 싱싱한 행복을 꿈꾸는 날로 있게 해준 감사한 사물들이었다.
20대, 돌도 씹어 소화할 수 잇는 그 나이에 아름다움의 보석을 캐는 언어의 광부가 된 것에 대해 나는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지금도 그 생각은 녹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