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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전선생문집별집(苟全先生文集別集)
조천록(朝天錄)
갑인년(甲寅年1614년 광해군6년)
10월
1일(경진)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제독(提督)이 관(館)에 좌정하여 하정(下程)을 보내고 신력(新曆)60건(件)을 세 사행(使行)에 각각 나누어 보냈으므로,
역관(譯官)을 시켜서 전례대로 고맙다는 사의를 표하게 하였다.
양자승(楊子昇)이 그의 상사(上使)와 함께 주청관(奏請館)으로 갔는데 그의 말이 천추사(千秋使)가 장계(狀啓)한 일에
대하여 몹시 침해하였다고 하였다.
2일(신사) 맑았다가 밤에 바람이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도상서(涂尙書)가 달노의 일 때문에 그대로 머물면서 구처(區處)하느라 조정으로 쉽게 부임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양오(李養吾)가 이상근(李尙謹)을 상사(上使)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어제 박이상(朴貳相)이 망령되게 정문(呈文)한 일에 정익지(鄭翼之)는 관여하지 않았다고 하고,
또한 그대들이 익사공신(翼社功臣)되기가 부끄럽다고 하였으며 또 정말로 공신(功臣)이 되려고 넘겨다 보는가? 하므로,
상사(上使)가 곧장 박지장(朴知章)에게 편지를 보네어 분변하려고 다투었으니 가소(可笑)로운 일이였다.
3일(임오) 흐리다가 개였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박이망(朴而望)이 와서 상사(上使)가 하였던 전일(前日)의 말을 분변하려고 한다기에,
내가 가지 않았더니 그 사람도 오지 않았다.
저녁에 상사와 같이 정익지(鄭翼之)를 만나보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다.
4일(계미)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주청사(奏請使)가 정문(呈文)을 방각로(方閣老)에게 밀어 올리도록 청원하였다고 하였다.
5일(갑신)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6일(을유) 맑음
천단(天壇)을 가서 보았다.
천단이 정양문(正陽門) 밖 5~6리(里) 쯤 되는 지역에 있는데,
지단(地壇)과 마주보고 있으며 담장으로 빙 둘러 쳐서 매우 넓었다.
북쪽에는 대향전(大享殿)과 황건정(皇乾殿)이 있는데 모두 황폐화(荒廢化)되였으니,
아마도 원(元)나라 조정에서 세운 오래된 건축물인 듯하고 남쪽에는 새로 지은 황궁우(皇穹宇)가 있는데,
천제(天帝)의 위판(位版)을 봉안(奉安)하고 태조(太祖: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章)를 배향(配享) 하였다.
그리고 또 청단(靑壇)이 있는데 아주 크고 기이하며 정교하고 화려하였다.
가정(嘉靖:명나라 세종(世宗)의 연호1522~1566) 연간에 수축(修築)한 것인데,
지금의 황제(皇帝)가 직접 제사지내지 않은 지가 거의 20여 년이 되였으므로 그곳 역시 퇴락되었다.
7일(병술) 맑음
정익지(鄭翼之), 양자승(楊子昇)과 함께 국자감(國子監)에 갔다.
제일패루(第一牌樓)에는 성현가(成賢街)란 세 글자가 게시(揭示)되어 있었고,
제이패루(第二牌樓)에는 국자감(國子監)이란 세 글자가 게시되어 있는데 대문(大門)에도 역시 그와 같았다.
지경문(持敬門)을 경유하여 묘정(廟庭)으로 들어가 네 번 절을 하는 의식을 행하였다.
묘정의 동쪽에 비각(碑閣)이 있는데 정통(庭統:명나라 영종(英宗)의 연호 1436~1449) 황제(皇帝)가 직접지은 새로 건축한
태학(太學)의 비문(碑文) 이였다.
문(門)안에 석고(石鼓)를 좌우(左右)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각각 다섯 글자를 새겼는데 모두 옛날의 전자(篆字)로
글자의 획이 모두 떨어져나간 상태였다.
그리고 내용은 모두 당(唐)나라 한유(韓愈)와 송(宋)나라 소식(蘇軾)이 지은 석고가(石鼓歌)라고들 하였다.
묘우(廟宇) 뒤에 계성묘(啓聖廟)와 장경각(藏經閣)이 있고,
서쪽에는 이륜당(彛倫堂)이 있는데 대문(大門)에 태학(太學)이란 두 글자를 게시(揭示) 하였다.
그리고 이륜당의 좌우에는 긴 행랑(行廊)이 있는데 각기 30여 가(架)이며,
동쪽 행랑의 제일청(第一廳)을 승건(繩愆)이라 하였고,
서쪽행랑의 제일청을 박사(博士)라고 하였는데,
승건청(繩愆廳)아래 솔성당(率性堂), 성심당(誠心堂), 숭지당(崇志堂)의 3당(堂)이 있고,
박사청(博士廳) 아래 수도당(修道堂), 정의당(正義堂), 광업당(廣業堂) 3당이 있는데 각각 9가(架) 였다.
그리고 이륜당의 북쪽 벽(壁)아래 황제가 친히 임어(臨御)하는 자리가 있고 좨주(祭酒)는 황제의 자리에서 조금 동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당(堂) 뒤에는 경일문(敬一門)이 있고 문안에는 경일정(敬一亭)이 있으며 정(亭)안에는 여섯 개의 비(碑)가 있는데,
그것은 가정(嘉靖) 황제(皇帝)가 친히 지은 경일잠(敬一箴)과 또 친히 사물잠(四勿箴),심잠(心箴)을 쓰고 그래서
주해(註解:본문의 뜻을 해석함) 한 것이였다.
세종황제(世宗皇帝)가 15세의 춘추로 즉위(卽位)하여 5년 후인 춘추 겨우 20세에 이 경일잠을 지었으니
성학(聖學:제왕(帝王)학문을 높여서 이르는 말)의 성취(成就)가 이와 같았고 숭상하고 장려하는 전례(典例)가 또한
이와같으니 아아!! 융성하기도 하도다.
가만히 경일잠 및 사물잠, 심잠의 주해를 보니 제왕의 경계를 이루는 절실히 요구 되는 내용으로 여러 생도(生徒)들에게
열어 보이기 위한 것만이 아니였다.
돌아와서 상사(上使)에게 말하기를,
이 몇 가지 잠(箴)은 진상(進上)하지 않을 수 없습니가.
만약 주상(主上)과 동궁(東宮)이 병풍(屛風)이나 족자(簇子)에 붙여서 앉아 있는 오른쪽에 두고서 아침 저녁으로
경계하고 신칙하는 자료로 삼게 하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베껴서 성균관(成均館)에 내려 주었는데,
그래서 임금의 필체[어필(御筆)]로 발문(跋文)을 써서 명륜당(明倫堂) 위에 게시(揭示)한다면 어찌 성명(聖明)한 시대의
일대 융성한 거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하면 뒷날 명나라 사신이 와서 보더라도 빛이 날 것입니다. 하였더니,
드디어 방의남(方義男)을 시켜서 인쇄한 것을 구매(購買)하여 오도록 하였다.
상사가 병(病)이 나서 가지 못하였다.
성현(聖賢)의 거리를 지나는데 두 사람이 함께 서서 이야기하기를 맨 뒤에 가는 어사(御史)가 바로 각로(閣老)이다.
하였는데 맨 뒤에 있던 나를 가르키는 것이였다.
현응민(玄應旻)을 시켜서 탐지하여 보도록 하였더니 그들은 바로 상(相)을 보는 사람이였기에 가소(可笑)로웠다.
[계성묘(啓聖廟:공자(功子)의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을 제사 지내는 곳]
[사물잠(四勿箴:시청언동(視聽言動) 네 가지를 경계한 내용으로 송(宋) 나라의 정이(程頤)가 지었음.]
[심잠(心箴:마음을 다스리는 내용으로 송(宋)나라 범준(范浚)이 지었음.]
8일(정해)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요동 순안(遼東巡安) 적황충(翟凰翀)이 또 본국의 사신[천사(天使)]을 조선으로 보내는 일이 합당하지 않다고 참견하자
황상(皇上)이 즉시 그 원본(原本)을 내렸는데 성지(聖旨)에 이르기를,
분명히 순종하고 부합되게(순부(順付)]하여 본국의 배신(陪臣)에게 고명(誥命)을 반포(攽布)하라. 고 하였다.
저녁에 주청사(奏請使)를 가서 보았다.
9일(무자)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도야(涂爺:도상서(涂尙書)를 높여서 부름)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오필보(吳弼甫)가 와서 이야기를 하였다.
10일(기축) 개였다가 바람이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저녁에 상사(上使)와 함께 정익지(鄭翼之)와 양자승(楊子昇)에게 가서 이야기하였다.
11일(경인)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제독(提督)이 관(館)에 좌정하였다.
들으니 이부상서(吏部尙書) 정계지(鄭繼之)가 탄핵(彈劾)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주청상사(奏請上使)와 부사(副使), 그리고 서장관(書狀官)이 모두 와서 이야기하였다.
12일(신묘)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도야(涂爺)가 빨리 도착하기 어려운 형세라고 하였다.
달빛을 받으며 정익지(鄭翼之)를 찾아갔더니 양자승(楊子昇)과 한창 술을 마시고 있는 참이였다.
나를 보고 즉시 한데에 있는 자리[로좌(露坐)]로 나와 안온하게 이야기하였는데 닭이 울고서야 그 자리를 파(罷)하였다.
13일(임진)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주객사(主客司) 및 제독(提督)이 즉시 수본(手本)을 병부(兵部)의 거가사(車駕司)에다 타진(打診)하여,
비록 대당(大堂)이 미쳐 출사[상임(上任)]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해사(該司)에서 먼저 태복시(太僕寺)로 하여금
황제(皇帝)가 하사하는 은량(銀兩)을 대조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거가사 낭중(郎中) 초형권(焦馨權)이
특별 규정을 적용하여 즉시 태복시에 이문(移文)하도록 하였는데 그것도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대체로 주객사 및 제독이 우리나라의 사신이 중복되게 도착하여 오래도록 체류(滯留)하므로 빨리 되돌아 가게 하려고
하지는 않으나 외랑(外郞)이 번번이 정실 관계[정면(情面)]를 위한 예물을 징수하기에 너무나 우리가 버틸 수 없었다.
장계(狀啓)한 통(通)을 봉(封)하여 주청사(奏請使)의 선래(先來) 정언방(鄭彦邦) 등에게 부쳤다.
[대당(大堂:명청 시대 중앙 각 아문(衙門)의 장관 및 주현(州縣)의 정인관(正印官)정방형(正方形)의 관원.]
14일(계사) 낮에 비가 내리다가 곧 그쳤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주청사(奏請使)가 머무는 관(館)에 가서 이야기하였다.
15일(갑오)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박이망(朴而望)이 찾아왔다.
16일(을미) 개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저녁 무렵에 정익지(鄭翼之)에게 가서 이야기하였다.
17일(병신) 개면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제독(提督)이 관(館)에 좌정하여 하정(下程)을 보냈다.
태복시(太僕寺)에서 거가사(車駕司)의 수본(手本)을 보고 22일에 발급(發給)하기로 기약하고,
인정물(人情物)을 독촉하며 받아 내는데 값이 50 금(金)에 이르므로 상통사(上通使)가 어쩔 수 없이 일행(一行)에게
거두어 모아 그들의 요구에 응하였다.
18일(정유)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제독(提督)이 병부낭중(兵部郎中)과 함께 짐꾸러미[포(包)]를 대조하였다.
너녁 무렵에 정익지(鄭翼之)와 양자승(楊子昇)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19일(무술)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주청정사(奏請正使)와 부사(副使) 및 서장관(書狀官)을 가서 보았다.
20일(기해)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21일(경자)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양자승(楊子昇)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22일(신축) 개이다가 밤에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23일(임인) 개이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역관(譯官) 강충립(康忠立)등이 예부禮部)에 가서 표리(表裡) 12, 금(錦) 4단(段) 및 정사(正使),부사(副使),서장관(書狀官),
통사(通事), 종인(從人) 등이 표리 모두 39 건(件)을 받아왔다.
그리고 상통사(上通事) 방의남(方義男)과 당상역관(堂上譯官) 이운상(李雲祥)이 상은(賞銀) 1백냥(兩)을,
그리고 정사 부사, 서장관, 통사의 종인(從人)과 순해원역(巡海遠役)등이 아울러 3백 냥을 받아 왔다.
그리고 희봉달자(喜峰㺚子) 1백 60여 명이 공물(貢物)을 바치러 들어와서 본관(本舘)에 임시로 거처하고 있었다.
[표리(表裡:은사(恩賜)나 헌상(獻上)하는 옷의 겉감과 안감)]
[순해원역(巡海遠役:국경인 해안을 순행하며 먼 지방에 가서 변방 수비에 복역(服役)하는일. 또는 그런 사람.]
24일(계묘)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황제(皇帝)가 하사한 은(銀) 1백 20냥과 표리(表裡)와 금단(錦段) 아울러 28필(匹)을 봉(封)하여 넘겨 주므로,
역관(譯官) 진사영(秦士榮)과 방의남(方義男)등이 가지고 왔다.
저녁에 송효남(宋孝男)이 와서 말하기를,
보삼(補蔘) 6근(斤)을 도둑맞았습니다.
이는 분명히 현적(玄賊:현응민(玄應旻)이 한 짓입니다. 하므로,
내가 깜짝 놀라며 말하기를,
상사(上使)는 모르는 일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어찌 모르실 리가 있겠습니까?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도둑맞은 것이 아니고 써 버린 것이다. 하였다.
[보삼(補蔘:사행(使行)의 갑작스런 수요(需要)나 부족을 채우기 위하여 정수(定數) 이외에 지참하는 인삼(人蔘)]
25일(갑진)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예부(禮部)의 회계(回啓)를 받아왔다.
정익지(鄭翼之)와 양자승(楊子昇)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회계(回啓:제왕(帝王)의 하문(下問)을 재심(再審)하여 상주(上奏)하는일.]
26일(을사)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바다에 표류하였던 방초양(方初陽)과 하삼재(河三才)가 와서 보았는데,
역대명신주의(歷代名臣奏議) 1백여 책(冊)을 상사(上使)에게 주고,
대학연의(大學衍義) 및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 등의 질(帙)을 나에게 주겠다고 하면서,
성(城)에서 나오는 날 중로(中路)에 가져다 주겠다고 하였다.
27일(병오)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상사(上使)가 강충립(康忠立)을 시켜 나에게 와서 말하게 하기를,
보포(補布)를 꺼내어 활용하는 일을 이미 장계(狀啓)하였으니 지금 곧 홍저(紅苧, 백저(白苧) 각 2필(匹)과
황세포(黃細布) 4필, 흑세포(黑細布) 2필, 백면주(白綿紬) 2필 모두12필을 역관(譯官) 박운상(朴雲祥)과 기섬(奇暹)등에게
주어 각 곳의 정면(情面)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봉(封)해 둔 궤(櫃)를 어찌하여 함께 앉아서 입회하는 상태에서 개봉(開封)하여 꺼내지 않았는가? 하자, 강충립이 말하기를,
상사(上使)께서 소적(小的:소인(小人)으로 하여금 가서 고(告)하기를 이와 같이 하라고만 하셨으며,
그 밖의 다른 것은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날 새로 임명된 제독(提督) 왕개(王玠)가 관(館)에 내려 왔으므로 함께 관에 있던 제인(諸人)들이 현관례(見官禮)를 행했는데,
절하는 의식은 없애고 두 번 읍(揖)을 하고 물러났다.
며칠 전에 장제독(莊提督)이 극력 사임하고 출사(出仕)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개가 대신 임명되기는 하였으나,
늙고 병이 들어 임무를 보살필 수 없다고들 하였다. 제독이 말하기를,
사신 등이 어찌하여 예물 단자[예단(禮單)]는 없는가? 하자, 패자(牌子) 등이 말하기를,
일이 모두 이미 완결되어 거량(車輛)이 곧 출발하려 할 때에는 으례 예물 단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송효남(宋孝男)이 와서 의주(義州)의 일관(一關)에 보낼 공문[이문(移文)]을 보여 주며 서명(署名)하기를 청원하므로
꾸짖어 돌려 보냈다.
우리나라로 되돌아 가는말에 실을 짐바리를 나열하여 적어 올렸는데 서책(書冊)이 여섯 짐바리 하사(下賜)받은 물품이 네 바리
보삼(補蔘),보포(補布) 두 짐바리로 모두 열두 짐바리이기에 내가 두 번 세 번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말하자,
정사(正使)가 불평스럽게 말하기를,
올 때에 의주부윤(義州府尹)과 약속한 것이 있으니 의심하지 않았으면 다행이 겠소. 하기에, 내가 다시 말하기를,
그렇다면 사사로운 교제(交際) 및 편지에 대해서는 적절하게 언급(言及)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짐바리 수효를 고치지 않는다면
서명(署名)할 수 없습니다. 하였더니, 정사(正使)가 말하기를,
그렇다면 고처서 내가 아무 조[모조(某條)]는 나의 복태(卜駄:짐바리)로 옮기도록 하겠소. 하였다.
송효남(宋孝男)이 고쳐 써서 왔으므로 내가 그제야 서명(署名)을 하였다.
밤에 정몽태(鄭夢台)가 와서 말하기를,
상사가 관문(關文)을 받아서는 앞서처럼 짐바리를 실은 말의 수를 나열하여 적어 소인에게 주면서 누설시켜 서장관이 알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는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28일(정미) 흐리다가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역관(譯官) 기섬(奇暹)과 이명담(李命聃)등에게는 거량(車輛)을 거느리고 먼저 출발하게 하고 송응선(宋應瑄)은
수레를 재촉하는 임무를 맡도록 하였다.
들으니 주청사(奏請使)일행이 우선 먼저 칙서(勅書)를 받들고 떠날 일을 예부(禮部)에서 이미 제청(題請)하였다고 하였다.
29일(무신)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들으니 이부시랑(吏部侍郞) 이지(李鋕)가 병부(兵部)의 일을 대신 서명(署名)하도록 하라는 성지(聖旨)가 내렸다고 하였다.
동조(東照)에 가서 이야기하고 밤에 양자승(楊子昇)에게 가서 이야기했다.
11월
1일(기유) 맑음
옥하(玉河)에서 유숙하였다.
사령군관(使令軍官) 문홍경(文弘慶)이 와서 한림(翰林) 풍유경(馮有經)이 손학사(孫學士)의 운(韻)에 차운(次韻)한
율시(律詩) 한 편(篇)을 보여 주었는데 다음과 같다.
尺疎高飛中外傾 척소고비중외경 한자 길이의 소장이 높이 날아 중앙과 지방의 귀를 기운게 하였으니,
靑霄片日此時明 청소편일차시명 푸른 하늘에 조각같은 태양 이 때에 환히 비취도다.
箕封臣子原忠孝 기봉신자원충효 기자가 봉해진 나라 조선의 신하들 원래 충성스럽고 효도스러운데,
相國文章自悃誠 상국문장자곤성 상국의 문장은 저절로 정성이 우러나도다.
賸有雄才回廟議 승유웅재회묘의 뛰어난 재능은 묘당의 논의를 돌리고도 남음이 있는데,
羞將柔翰學經生 수장유한학경생 유약한 필치로 경생을 배우는 것이 부끄럽도다.
何當一借如椽筆 하당일차여연필 어떻게 당장 서까래 같은 붓을 한 번 빌려,
爲取縹箱記姓名 위취표상기성명 표상을 가져다 성명을 기록하여 보려므나.
그리고 또 한 폭(幅)을 부쳐 보낸 것이 있으므로 내가 배첩(拜帖)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표하였다.
이 상공 응악(李相公應嶽)이 율시(律詩) 5~6편(篇)을 부쳐 보였으므로 즉시 화답(和答) 하여 보냈다.
밤에 양자승(楊子昇)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경생(經生:경학(經學)의 전수(傳授)를 관장하는 박사(博士). 전의되어 경학을 연구하는 서생(書生)을 이르기도 함.]
[서까래 같은 붓:서까래와 같이 큰 붓이란 뜻으로, 대문장(大文章),대논문(大論文)을 이르는 말.]
[표상(縹箱:옥색상자.옛날에 옥색의 사백(絲帛)으로 책상자나 책갈피를 만들었기 때문에 전의되어 책을 말하기도 함.]
2일(경술) 개이다가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상사(上使)와 함께 사조(辭朝) 하였다.
한림(翰林) 주여지(周如砥)가 대궐에 나아가기를 기다렸다.
진시(辰時:오전 7시~9시)에 칙서(勅書)를 받았다.
서반(序班)이 신(臣)등을 인도하여 오문(午門)으로 들어가 수십 보(步)를 걸어가서 동쪽으로 회극문(會極門)으로 들어가
환관(宦官)의 조방(朝房)에서 잠시 머물렀다.
식경(食頃:한 끼의 음식을 먹을 시간)이 지난 뒤에 또 인도하여 한 곳의 문으로[공통으로 회극(會極)이라 불렀다]들어가
문화문(文華門) 밖의 넓은 뜰[대정(大庭)]에 북쪽을 향하여 섰다. [안에 문화전(文華殿)이 있었다.]
조금 있으려니까 중서 사인(中書舍人)이 봉(封)한 칙서(勅書)를 받들고 사례감(司禮監)이 앞에서 인도하여 서쪽 계단을
경유하여 올라가서 문 밖의 뜰 위에 섰는데 사례감은 동쪽에 중서사인은 서쪽에 섰다.
그러자 한림(翰林)이 따라 나와서 중서 사인의 다음에 섰다.
우리들이 꿇어 앉아 세 번 머리를 조아리니 한림이 받들고 온 칙서를 전하려고 동영(東楹)안으로 조금의 종종 걸음으로 나아가
어체(御砌)의 동편(東偏)에서 내려와 사신(使臣)의 오른쪽에 북쪽을 향하여 서서 읍(揖)을 하고 바로 칙서를 사신에게 준 뒤
또 읍을 하고 동쪽의 작은 뜰[소계(小階)]로 올라와 사례감 아래에 섰다.
사신들이 세 번 머리를 조아리고 칙서를 받들어 오문(午門)으로 나왔다.
그리고 또 광록시(光祿寺)에서 술과 밥을 수령한 뒤에 한 번 절을하고 세 번 머리를 조아리기를 처음과 같이 하고
곧장 객관(客館)으로 돌아 왔다.
[문화문(文華門) 밖에 어떤 사람이 오래도록 꿇어 앉은 체 일어나지 않더니만, 의식을 행할 무렵에 이르러 조금 왼편으로
비껴 있다가 의식이 끝이나자 도로 꿇어 앉아 있으므로 물오 보았더니 영국공(英國公) 장성(張姓)의 사람으로 풍성후(豊城侯)
이성(李姓)의 사람과 산에다 묘를 쓰는 문제로 다투며 분변해 달라는 글을 올리고 바야흐로 성지(聖地)가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였다.]
병부대서(兵部代署) 이시랑 지(李侍郞鋕)가 이날 현조(見朝) 하였다.
이응악(李應嶽)이 상사(上使)에게 게첩(揭帖)하기를 어사[수의(繡衣)]의 시(詩)는 논리가 갖추어지고 의미가 깊숙하여
더욱 따를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사가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마침 보고서 물었더니 바로 말하기를,
잊어버리고서 보내어 보도록 하지 못하였소. 하였다.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따를 수 없다. 는 한 마디에 개하여 몹시 꺼려하는 태도가 보였으니 가소(可笑)로운 일이였다.
이날 이공(李公)이 또 시(詩)를 부쳤는데 바로 작별하는 글이였다.
나는 화답하지 않았고 상사 또한 억지로 권하지 아니하였다.
[사조(辭朝:외국 사신이 길을 떠나기에 앞서 조정에 들어가 임금을 뵙고 하직 인사를 드리는 의식.]
[조방(朝房:조신(朝臣)들이 조회(朝會)의 시각(時刻)을 기다리는 곳.궁문(宮門)의 옆에 있음.]
3일(신해) 맑음
상사(上使)와 함께 당상관(堂上官)에게 하직하러 해부(該部)에 갔다.
그리고 송업남(宋業男)으로 하여금 바다에 표류하였던 사람들을 병부(兵部)에 교부(交付)하고,
회자(回咨)는 반 낭중(潘郎中)의 분부(分付)대로 박이순(朴而恂)으로 하여금 머물면서 부제(覆題)와 회지(回旨)가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받들고 오도록 하였다.
오후에 숭문문(崇文門)으로 나왔다. [일명(一名) 합달문(嗑達門)이라고도 한다.]
숭문문 밖 5리 쯤 되는 곳에 삼충사(三忠祠)가 있는데 바다에 표류했던 사람인 하삼재(河三才),방초양(方初陽),고기원(顧起元)
주수(周秀),임정무(林正茂) 등 다섯 명이 성대하게 술과 안주를 준비하여 와서 삼충사 앞에서 기다리다가 맞이하며 청원하므로
즉시 말에서 내려 삼충사를 알현(謁見)하였는데 바로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諸葛亮)를 봉향(奉享) 하면서
악무목(岳武穆:岳飛)과 문문산(文文山:문천상(文天祥)을 배향(配享)한 곳이였다.
방초양 등과 후당(後堂)에 앉아 술을 마시며 전별(餞別)을 받았다.
그리고 또 용안(龍眼)과 예지(荔枝) 각 2반(盤) 및 사륙비급(四六秘笈),오경수진(五經袖珍)등의 제서(諸書)를 나누어 주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칭송하며 사례하기를,
조선 국왕(朝鮮國王)의 다시 살려 주신 은혜를 입었는데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잊기 어렵습니다. 하였다.
우리가 그들이 주는 선물을 굳이 사양하였으나 끝까지 거절할 수 없었다.
통주(通州)에 도착하니 밤이 벌써 깊었다.
노하(潞下)의 이성 인가(李姓人家)에서 유숙 하였다.
관압사(管押使) 심언명(沈彦明)의 일행을 보았다.
[당상관(堂上官)에게 하직하던 때에 정사(正使)가 이운상(李雲祥)을 불러 말하기를,
김 첨지 정간(金僉知廷侃)이 와서 하는 말이 주청사(奏請使)가 떠날 때에 조칙(詔勅)을 수령하는 날짜를 물리도록 한 일은
그대가 정괴(鄭魁)에게 뇌물을 주어 그렇게 한 것이다. 고 하면서,
힘을 다하여 명백하게 분변하여야 한다. 고 하였다. 하자,
이운상이 화를 발끈내며 말하기를, 이는 틀림없이 송효남(宋孝男)의 날일 것입니다. 하니, 상사가 말하기를,
송효남이 앞서 이미 말을 전한 일이 발각되어 죽으려다가 뜻대로 되지 않았는데 지금 까지도 징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인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분명히 나에게는 이런 일이 없었을 따름인데 어찌하여 갑자기 말을 누설시킨 장본인을 먼저
공격하려 합니까? 하였다.
그러다가 객관(客館)으로 골아옴에 이르러 후마(侯馬)와 주청정사(奏請正使),부사(副使) 및 서장관(書狀官)이 함께앉아 서로
나무라며 매우 미안(未安)한 언사까지 있었으니 한스럽다.
대체로 상사가 이운상과 현응민(玄應旻)을 심복(心腹)으로 삼아 모든일을 극도로 이상 야릇하게 비밀리 처리하였다.
그러면서 상사가 늘 말하기를 주청사 일행이 왔을 적에 인삼(人蔘)과 바꾸면서 값을 헐하게 한 것이 많았는데 그일행이먼저 북경을
떠나면서 은(銀)으로 갚는 경우에도 반드시 비싼 이식(利息)을 따랐으므로 우리 천추사(千秋使)일행의 하인(下人)들이 비싼 값으로
사들여야 하며 비싼 이식으로 갚아야 하기 때문에 이익이 아주 없다. 하였지만,
내가 대답하지 않은 적이 여러번 이였다.
그리고 또 이상운의 무리가 이익을 좆는 마음에서 주청사 일행의 출발을 물리게 하고 우리일행이 먼저 출발하도록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는가? 어제 아침에 명목이 없는 은(銀) 21냥(兩)을 정괴(鄭魁)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이 의심 스럽다.]
[부제(覆題:재심(再審)하여 내리는 제사(題辭).]
[회지(回旨:회답하는 유지(諭旨)]
[회자(回咨:회답하는 자문(咨文)]
[후마(侯馬:정찰(偵察)과 순찰(巡察) 임무를 맡은 기병(騎兵)]
4일(임자) 개이면서 바람이 불었다
통주(通州)에서 머물렀다.
정사(正使)가 임거만록(林居謾錄)을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바로 오현(吳縣)의 오원췌(伍袁萃)가 지은 것으로 원래 인본(印本)이 아니고 필사본(筆寫本) 이였다.
역관(譯官) 정몽태(鄭夢台)와 군관(軍官) 유의남(劉義男)이 선래(先來)로 떠나는데 출발한다는 장계(狀啓)한 통[도(道)]과
칙서초(勅書草) 및 진신편람(縉紳便覽) 등 책(冊)을 아울러 부치고 집에 보내는 편지도 부쳤다.
[오원췌(伍袁萃:명나라의 오현(吳縣)사람. 자(字)는 성기(聖起), 만력(萬曆) 연간의 진사(進士),
벼슬은 광동해 북도 부사(廣東海北道副使)를 지냈다.
법의 집행이 엄정하여 지체가 존귀 하거나 왕의 총애를 받거나 가리지 아니하였다.
저서(著書)에 임거만록(林居謾錄),탄원잡지(彈圓雜志) 등이 있음.]
5일(계축)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삼하(三河)의 이성 인가(李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길에서 동지사(冬至使) 윤의(尹顗), 이정겸(李廷馦), 서장관(書狀官) 민응회 이정(閔應恢而靖)을 만났다.
6일(갑인)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계주(蓟州) 성(城) 밖의 송성 인가(宋姓人家)에 유숙하였다.
역관(譯官) 송업남(宋業男)이 바다에 표류했던 중국 사람을 넘겨주고 조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하여 뒤따라 왔다.
들으니 병부(兵部)의 외랑(外郞)이 표류했던 사람들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표류했던 사람들이 그 요구에 응하지 못하자
마침내 모두 구금(拘禁)당하였는데 대체로 사사로이 바다에 들어가 왜인(倭人)들과 물화(物貨)를 유통시킨 것으로 죄를
산았다고 하였다.
7일(을묘) 맑음
일찍이 출발하여 유가점(劉家店)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옥전(玉田) 동문(東門)밖의 당성인가(唐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상사(上使)와 같은 주막이였으나 안팎이 매우 멀었다.
동지사(冬至使)의 역관(譯官) 전응시(全應時)가 집에서 부친 편지를 전해주었다.
8일(병진)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사류하포(沙流河鋪)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풍윤현(豊潤縣)의 곽성인가(郭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이날 상사(上使)가 현응민(玄應旻)이 탄 말이 좋지 않다고 하여 강충립(康忠立)에게 곤장을 쳤다.
강충립이 그때 임시 상통사(上通使)가 되어 참(站) 마다 말을 재촉[최마(催馬)]하였기 때문이였다.
방의남(方義男)이 형벌(刑罰)을 받고 즉시 뇌물을 주어 먼저 산해관(山海關)으로 떠났으므로 강충립이 그 일을 대신하였는데
실제로 나를 배행(陪行)하여야 하기 때문에 그를 위협(威脅)하여 그의 입을 막으려는 것이였다.
이미 곤장을 친 뒤에 상사가 와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강충립의 죄가 중대하였으므로 어쩔수 없이 다스린 것이니,
절대로 개의(介意)하지 마시오. 하였다.
이에 상사가 강충립을 자기 집의 전도(前導)로 삼고 이운상(李雲祥)을 머물게 하여 나를 배행(陪行)하게 하였다.
매가 이운상을 책망하기를 상사[상도(上道)]가 비록 생각이 깊지 않다고 하더라도 네가 어떻게 감히 종용을 한단 말인가?
모름지기 빨리 가서 일행들로 하여금 거량소(車輛所)에 도착한 곳에서 머물며 기다리게 하여 정사(正使),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따질 것 없이 짐바리가 규정에 위반되는 자가 있으면 즉시 태워버리거나 깨트려버리고 치계(馳啓)하겠다.
하였더니 풍윤현에 도착하자 상사가 두 번 세 번 사람을 보내어 굴복하며 사죄하므로 내가 정지시켰다.
[전도(前導:앞을 인도(引導)함. 또는 인도하는 사람.]
9일(정사)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진자진(榛子鎭)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칠가령(漆家嶺)의 조성인가(曹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거량(車輛)이 이곳에 도착하여 출발하지 못한 지 벌써 이틀이 되였다.
[길에서 어떤 사람이 검은 색의 양[흑양(黑羊)]을 끌고 가는 것을 만났는데 꿇어 앉으라고 시키니 사람처럼 꿇어 앉는 것이였다.]
10일(무오)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영평부(永平部)에 이르러 곽성인가(郭姓人家)에 유숙(留宿)하였다.
일부(馹夫) 등이 강충립(康忠立)에게 말하기를 이쪽의 한 줄기 도로 주변에는 너희 나라 사신[사개(使价)]들의 왕래 때문에
형세가 장차 뿔뿔이 흩어질 지경인데 무슨일로 이와 같이 행차가 끊임없이 계속되는가?
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려고 하였다.
상사가 보포(補布) 2단(端)과 벼루, 종이, 부채,등의 물품을 백 한림(白翰林)에게 보내면서 만나 볼 날짜를 청원하니,
내일 서로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하였다.
그의 누나 유고서문(遺稿序文)을 북경으로 떠날 때에 후한 뇌물을 주고 청원하였더니만 지금 이미 지어 놓았다고 하였다.
인신(人臣)이 사명(使命)을 받들 경우 개인적인 교유(交遊)는 없어야 하며 여자(女子)가 문장(文章)에 능한 것이 또한 어떻게
드러내어 자랑할 일이 겠는가?
보포 등의 물품을 이와 같이 사용하면서 그의 하인(下人)들에게 서장관(書狀官)이 알도록 누설하지 말라고 단속하였다고
하니 가소(可笑)로운 일이다.
[일부(馹夫:역참(驛站)에서 잡무(雜務)에 종사하는 사람.]
11일(기미) 맑음
앞 길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상사(上使)가 두 번 세 번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거량(車輛)이 오지를 아니하고
나 또한 몸이 편치 않으니 나를 위하여 이곳에 머물도록 하면 다행이겠소. 하였다.
이미 식사를 하고 난 뒤에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백야(白爺:한림(翰林) 백유(白瑜)가 형(兄)을 맞이하여 보려고 할터인데,
함께 갈 수 있겠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몸이 피곤 할 뿐만 아니라 애당초부터 그 분을 보기를 바란 의사가 전혀 없습니다.
하였더니 상사가 그 곳으로 가는 길에 들러 보고 말하기를 그 분이 만약 하인을 보내어 초청한다면 무어라고 대답하겠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비록 백 명의 하인을 보내더라도 갈 수는 없습니다.
혹시 물을 경우 모름지기 병이 났다고 말씀해 주십시요. 하였다. 저녁에 상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백야(白爺)가 어사[수의(繡衣)]는 어찌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하인을 보내어 초청하려고 하가에 내가 형(兄)의 말대로 병이 났다고 말하였소. 하였다.
대개 나의 뜻은 어쩔 수가 없어서가 아니고 개인적인 일로 다른 사람을 만나 본다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였다.
더구나 한림(翰林) 백유(白瑜)는 죄를 지은 처지로 강서(江西)에 유배(流配)되어 있었는데 앞질러 그의 집으로 돌아와
정사(亭榭)를 수리하였다고 하는데 설령 그가 범(犯)한 죄가 사심(私心)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조정에서 이미 그를 처벌하였다면
그가 스스로 처신하기를 이와 같이 하는 것은 불가하니 그의 사람 됨됨이를 알 만하였다.
그리고 또 사신 일행이 되돌아오는 길에 진강(鎭江)을 지날 적이면 으례 유격아문(遊擊衙門)에 의한 짐바리의 물품을
침탈(侵奪)당하는데 이것은 대체로 중국에서 해외로의 유출을 금지시키는 물품을 조사한다는 것으로 그런 전례를 둔 것이였다.
그러나 요동 포정(遼東布政)의 행문(行文)으로 지나치게 조사하지 말도록 할 경우에는 아무런 일이 없이 강진을 통과하는 것
또한 근래특별한 규례(規例)였다.
그러므로 북경(北京)에 있을 적에 제독(提督)에게 뇌물을 주고 게첩(揭帖)을 받아오기는 하였으나 그래도 포정사(布政使)가
고분고분 시행하지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또 백 한림(白翰林)에게 토서(討書)를 간청하려고 하였으며 역관(譯官)의 무리들도 만나 보도록 종용하고 바란 걸이
이 때문이였다.
그러나 백 한림이 기꺼이 토서해 주지 않았다고 하였다.
송응선(宋應瑄)이 거량(車輛)을 거느리고 뒤따라 왔다.
[토서(討書:토의(討議)하는 내용의 편지. 청원하는 내용의 서신(書信).]
12일(경신)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쌍망포(雙望鋪)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무령(撫寧)의 조성인가(曹姓人家)에 유숙하였다.
13일(신유)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심하역(深河驛)에 이르러ㅛ으나 즉시 말을 교체하지 못하여 왕성인가(王姓人家)에 유숙하였다.
반송(伴送) 왕정언(王廷彦)이 역관(譯官)에게 말하기를 이재상(貳宰相:여기서는 서장관을 말함)은 어찌하여 풍류(風流)에
관한 일을 즐기지 않으시고 언제나 관저(館邸)에 들어 앉아 문을 닫고 혼자 계시는데 무료(無聊)하지 않으신가? 하였다.
14일(임술)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산해관(山海關)의 김성인가(金姓人家)에 이르러 머물며 숙박 하였다.
들으니 주청사(奏請使) 일행의 선래(先來) 이정상(李廷祥)이 그 곳을 지나 갔는데 12일에 북경(北京)을 출발하였다고 하였다.
15일(계해) 맑음
산해관(山海關)에서 유숙하였다.
송응선(宋應瑄)이 말히기를 수레 세 량(輛)이 무령(撫寧)에 있으므로 수레가 없어서 출발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므로,
내가 곤장(棍杖)을 치려고 그곳에 머물렀더니 송응선이 곧 바로 노새를 세내어 떠났다고 하였다.
16일(갑자) 맑음
산해관(山海關)에서 유숙하였다.
17일(을축) 맑음
아침에 학관(學官) 이 장배 영길(李長培榮吉)이 와서 보았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 일행이 북경(北京)을 떠나 온 뒤에 기대재(杞大才) 긍이 떠들어대며 하는 말이 허 사신(許使臣:허균(許筠)의 마음은
매우 좋지 아니하여 모든 일을 도리에 어긋나게 비밀리 처리하였으니 실로 도깨비의 정기(精氣)를 지닌 듯한데
조선(朝鮮)에서 어찌하여 사람을 가려서 보내지 않았는가? 하였다.
저녁에 주청사(奏請使)일행이 이르렀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가서 보았다.
밤에 상통사(上通使)에게 말하기를, 내일 조패(早牌)로 관(關)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일행의 은량(銀兩)이 거두어지지 않았고 주방(廚房)에서도 당장 25냥을 먼저 내주어야 하는데 이응수(李應樹)의 무리가
기꺼이 내놓지를 않으니 목이 탈 정도로 민망한데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주방의 박운상(朴雲祥)을 불러다 말하기를 네가 압물 역관(押物譯官)으로 보삼(補蔘)과 보포(補布)를 어느 곳에다 두고서,
지금 또 사싱 일행에게 이러쿵 저러쿵하면서 은량(銀兩)을 내놓도록 요구하는가?
그리고 내가 북경(北京)에 있을 적에 받은 것이 거의 70여냥(兩)이 되는데 또 다시 은량을 내놓도록 독촉하는가?
성절사(聖節使)일행이 원래 70냥을 가지고 갔다 와야 하는데 북경에서 산해관(山海關)까지 오면서 70냥을 이미 다 써버다는
말인가? 하였다.
박운상(朴雲祥)이 돌아가 상사(上使)에게 알리자 상사가 몹시 노여워 하며 강충립(康忠立)을 불러다 말하기를,
네가 곤장을 맞고부터 말썽을 매우 많이 일으켰으니 이 뒤로는 네가 모름지기 이곳에 와서 숙직[상직(上直)을 하여라. 하였다.
18일(병인) 맑음
산해관(山海關)에서 유숙하였다.
이운상(李雲祥)이 와서 말하기를,
보삼(補蔘)과 보포(補布) 그리고 인정(人情)으로 사용한 물품에 대한 일정한 양식(樣式)에다 서명(署名)을 하셔서
상통사(上通事)에게 넘겨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그런 물품을 쓴 곳을 모르는데 서명 할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이운상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기는 하지만 사또[상도(上道)를 위하여 그렇게 시행하여 주시면 다행이옵기에 간절이 빌고 또 비옵니다.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너희 사또께서 자기 집안에서 한 짓을 살피지 아니하고 나를 배행(陪行)한 강충립이 지어냈다는 말을 하면서 위협하기를
그만 두지 않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와 같이 할 수 있겠는가?
하자, 이운상이 말하기를,
엊그제 밤에 반송(伴送)이 와서 말하기를 현풍자(玄風子:현응민(玄應旻)가 대재상(大宰相:상사(上使)를 말함)을 위하여
창녀(娼女)를 샀다. 고 하기에 소인[소적(小的)]이 그의 입을 후려쳤습니다.
이느 바로 미치광이 같은 현응민이 사또를 그릇되게 한 것인데 강충립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네가 돌아가서 사또[상도(上道)]에게 보고하라.
정당하지 않은 일을 가지고 노여움을 강충립에게 옮긴 뜻에 대해서는 그가 정말 스스로 나에게 굴복을 한다면
나도 부응(副應) 하기를 힘쓰겠다. 하였다.
이운상이 돌아가 상사(上使)에게 아뢰자 상사가 바로 사죄하기를,
나의 성품이 본래 사나워 잘 살피지를 못하였으니 공(公)의 말씀이 참으로 옳소. 대면(對面)하여 사죄하는 것이 합당하겠소.
하고 그래서 서명(署名)하기를 원하므로 내가 바로 서명하여 주었는데 가련(可憐)하다고 하겠다.
주청사(奏請使) 일행이 만패(晩牌)로 관(關)을 통과 하였다.
19일(정묘) 맑음
산해관(山海關)에서 유숙하였다.
상사(上使)가 또 짐바리[복태(卜駄)]가 너무 무겁고 고르게 하기가 쉽지 않음으로 하여서 노새[라(騾)]를 삯을주고 부리게했다.
그리고 함께 유림천총(楡林千摠)에게서 임시 묵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밤에 이야기하기로 약속하고서 출발하지 않으므로
내가 여러 번 재촉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기에 마침내각산(角山)으로 갔다.
7 산 밑에이르러 보니 천길[천인(千仞)]이나 높이 솟았는데 길이 바위와 돌에 둘려 있으므로 걸어서 올라가 거의 2리(里) 쯤
가니 절이 바라다 보이고 거기에는 평평한 사잇길이 있기에 1 마장(馬場) 쯤 말을 타고서 절에 도착하였다.
절은 산꼭대기에서 바로 내려다 보이는 곳인 장성(長城)의 북쪽 꼭대기를 의지하고 있었으며 뜰 위에는 불당(佛堂)이 우뚝하게
서 있고 뜰 아래는 동서(東西)로 방이 있었는데 중들이 거처하는 방이였다.
뜰에는 천여 척(尺)이나 되는 오래된 큰 소나무가 있었고 그곳에 살고있는 중은 2,3명 이였다.
문(門)에서는 창해[창명(滄溟)]가 내려다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시계(視界)가 천리(千里)는 될 듯하였다.
곧장 법당(法堂)으로 올라가서 보니 동쪽 벽(壁)에 의자(椅子)가 있기에 한 참 동안 앉아서 쉬고 있는데 늙은 중이 차(茶)를
올리므로 그에게 들으니 수재(秀才)가 와서 동쪽 방[동실(東室)]에 기거(起居)하고 있다고 하기에 두루 구경하기를 마치고
곧장 동쪽 방으로 향하였더니 수재가 나와서 맞아주며 말하기를,
들으니 대인(大人)께서 멀리서 오시느라 시장하실 것 같아 삼가 죽(粥)을 마련 하였아오니 변변치 못한 마음을 받아 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기에, 내가 사양을 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하인이 붉은 상[주안(朱案)]에다 흰 죽 한 사발,
그리고 볶은 장[자장(炙醬)]과 복숭아[도인(桃仁)] 한 접시를 곁들였다.
내가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산사(山寺)에서 글을 읽으며 죽을 쑤어 十 자(字)로 그어 그것으로 요기(療飢)를 하며 어렵게 공부를 하였다고
하던데 공(公)이 또한 그렇게 하는 것이오?
하였더니, 대답하기를,
죽(粥)을 쑤어 먹기는 합니다만 十 자(字)로 긋는 것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하고, 그래서 말하기를,
소생이 어떻게 감히 옛날 현인(賢人)에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죽을 다 먹고 나니 차(茶)를 올렸으며 차를 다 마시고 나자 나에게 술을 따르어 주며 고맙다고 하였다.
내가 좌우(左右)의 서사(書史)에 주묵(朱墨)으로 표시하여 백배(百倍)로 공부한 모습을 보고서 붓으로 써서 보이기를,
옛 사람이 삼동에 읽은 사기가 이미 충분하다고 하더니만[고인기족삼동사(古人己足三冬史)],
오늘날 그대가 만 권의 책을 읽었구료[금자능개만권서(今子能開萬卷書)] 라고 한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오. 하였더니,
수재가 또 고시(古詩) 1절(絶)을 써서 답(答)하기에 내가 오언단율(五言短律)을 써서 주고 그리고 먹(墨)과 홀(笏)을 선물했더니,
그도 또 절귀(絶句)를 써서 나에게 사례하는 것이다.
수재의 이름은 정소(廷召)인데 갑신년(甲申年 선조17, 1584)에 태어났으며 계축년(癸丑年 광해5, 1613)에 진사(進士)가 되였다.
바로 유정선(柳廷宣)의 동생이였다.
20일(무진) 맑음
조패(早牌)로 관(關)을 통과하여 전둔위(前屯衛)에 이르러 오성인가(吳姓人家)에 유숙하였다.
21일(기사) 개이다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사하(沙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동관역(東關驛)의 고성인가(高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22일(경오) 맑음 매서운 추위는 어제와 같았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조장역(曹莊驛)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영원위(寧遠衛)의 조성인가(曹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길에서 광녕안병(廣寧按兵) 장승윤(張承胤)을 만나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더니 요동 순안(遼東巡按) 적봉충(翟鳳翀)의 임기가
만료되어 사임(辭任)하고 지금 관외(關外)에서 명(命)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동지절(冬至節)을 하례하려고 달려가는 길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역관(譯官) 송업남(宋業男)과 송응선(宋應瑄)으로 하여금 길 좌편에서 관원을 보도록 하였다.
저녁에 들으니 주청사(奏請使) 정립(鄭岦)의 일행이 동점9東店)에 도착하였다고 하므로 우리들이 달려가서 보았는데,
전지(傳旨) 5통(通)을 받들고 있었다.
23일(신미) 개이다가 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연산역(連山驛)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행산역(杏山驛)의 원성인가(袁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24일(임신) 아침에 눈이 내리다가 늦게 개였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소릉하(小陵河)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대릉하(大陵河)의 양성인가(梁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성절사(聖節使)의 선래(先來) 방예남(方禮男)이 지나가기에 집에 편지를 부쳤다.
25일(계유)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십삼산(十三山)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여양역(閭陽驛)의 유성인가(劉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26일(갑술) 맑음
전지(傳旨)에 빨리 오도록 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에 단지 역관(譯官) 송응선(宋應瑄)만 광녕(廣寧)의
도어사 아문(都御史衙門)에 보내고 곧은 길을 경유하여 농우촌(農牛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동가둔(董家屯)의 장성인가(莊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여양(閭陽)과의 거리는 70리 이다.]
27일(을해)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사령(沙嶺)에 이르러 우성인사(于姓人家)에서 유숙하였다. [동가(董家)와의 거리는 70리 이다.]
28일(병자) 맑았다가 저녁에 잠깐 눈이 내렸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동창보(東昌堡)에 이르러 유성인가(劉姓人家)에서 유숙하였다.
29일(정축)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강가둔(姜家屯)에 이르러 왕성인가(王姓人家)에서 유숙하였다.
30일(무인)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요동(遼東)에 도착하였다.
주청사(奏請使)일행이 관내(館內)에 임시로 우거(寓居)하고 있으므로 문(門) 밖의 유성인가(劉姓人家)에 임시로 우거하였다.
약재(藥材)를 먼저 보내라고 하교(下敎)가 있었기 때문에 강충립(康忠立)으로 하여금 약재를 가지고 밤에도 불을 밝히고
달려가서 바치도록 하였는데 장계(狀啓) 한 통[도(道)]을 봉(封)하여 올렸다.
역관(譯官) 송업남(宋業男)과 송응선(宋應瑄)이 도사(都司)에서 관원을 뵈었다.
수산(首山)에서 단련(團練) 이순명(李順命)을 만나 집에서 보낸 편지를 받아 보았다.
12월
1일(기묘) 맑음
송응선(宋應瑄)으로 하여금 양무상(楊武祥)에게 말을 전하게 하고,
북경(北京)으로 갈 적에 부탁한 주자(朱子)가 쓴 명륜당(明倫堂) 세 글자의 탑본(榻本)을 찾아오게 하였는데,
마침 양무상의 형제(兄弟)가 제관(祭官)으로 차출되어 성중(城中)에서 재계(齋戒)하므로 찾아오지 못한 채 돌아왔다.
늦게 출발하여 냉정촌(冷井村)의 후성인가(侯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2일(경진)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낭자산(狼子山)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신교촌(新橋村)의 장성인가(張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3일(신사) 맑음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벽동(甓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연산(連山)의 서성인가(徐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눈이 쌓이고 얼어붙어 고갯길이 다니기에 어렵고 위태로웠는데 사람과 말이 넘어지며 발을 붙일 수가 없어
하루종일 간 길이 겨우 40리였다.
4일(임오) 맑음
답동(沓洞)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동원보(東遠堡)의 비성인가(卑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5일(계미) 맑음
옹북하(甕北河)에 이르러 상사(上使)가 병(病)이 글어 갈 수 없으므로 고성인가(高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6일(갑신) 맑음
백안촌(伯顔村)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서고산(西孤山)의 피성인가(皮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7일(을유) 맑음
주국(柱國) 등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영남(嶺南)과 서울이 모두 무사(無事)하다고 하였다.
아침 일찍이 출발하여 금석산(金石山)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마아곡(磨兒谷)의 최성인가(崔姓人家)에 투숙(投宿)하였다.
땅거미가 질 무렵에 상사(上使)가 사람을 보내어 말하기를 내일은 농막(農幕)에서 자고 이른 아침을 이용하여 압록강(鴨綠江)을
건너 는 것이 어떻겠소?
하기에, 답(答)하기를,
팔참(八站)으로 오면서 너무 꾸물대는 것을 괴롭게 여겼는데 이틀만에 지나칠 정도로 재촉하여 독려하시니 영공(令公)이 나를
온당하게 여기지 않아서 이기는 하지만 이 뒤로는 하라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8일(병술) 맑음
식사를 한 뒤에 출발하였다.
이보다 먼저 옥하(玉河)에서 포장물(包裝物)을 조사할 때에 역관(譯官) 등이 가까운 사례(事例)에 의거하여 제독(提督)에게
정품(呈稟)하여 진강(鎭江)에서 뇌물을 요구하고 거둬들이는 패단을 면제하도록 요청하자 제독이 백 포정(白布政)에게
공문(公文)을 보내게 되였다.
그런데 당시 백 포정이 남은 은량(銀兩)을 받은 일로 인해서 진강의 손중군(孫中軍)에게 잡혀가 뜰에서 추궁당하며 곤장으로
다스려지는 무렵이였다.
손중군이 제독의 공문을 보고 그로인해 신문(訊問)하기를,
황상(皇上)께서 조선(朝鮮)에 대해서는 보기를 내복(內服:왕기(王畿) 안의 지방)과 같이 하며 병부(兵部)와 예부(禮部)에서
입회[안동(眼同)]하여 포장물을 조사하면서 별도로 국경을 넘어 갈 때에 다시 조사하라는 명령이 없었다.
그런데 너희 무리가 전례(前例)를 따라 뇌물을 요구하며 거두어 들이기를 이와 같이 하니 이것이 유격(遊擊)이 하는 짓인지
아니면 서리(胥吏)들이 하느 짓인가를 모르기는 하겠지만 그 죄는 사형(死刑)에 처할 만하다.
하자, 대답하기를,
왕래(往來)하는 행상(行商) 및 부랑한 무리들이 이와 같이 어지러운[창난(搶亂)]데 유격아문(遊擊衙門)에서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하며,
포정(布政)이 빈 종이의 두 곳에다 인장(印章)을 찍은 뒤 손중군(孫中軍)에게 보이고 송응선(宋應瑄)에게 건내주며 말하기를,
네가 만약 아무런 일 없이 통과하여 가거던 무사과거(無事過去) 네 글자를 인장을 찍은 두 곳의 사이에다 써넣어 며칠 안으로
와서 중군(中軍)에게 올리도록 하라,
그렇지 않거던 네가 이 종이를 가지고 돌아가 버려라.
그렇게 되면 중군이 이 종이를 얻지 못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사형에 처할 죄로 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오늘 일행의 짐바리[복태(卜駄)]가 관(關)에 들어오자 성중(城中)의 군사가 달려와서 하나하나 조사하고 점검하여
아무런 폐단이 없이 보내어 주었다.
그런데 어승마(御乘馬:임금이 타는 말)를 붙잡고는 선물을 요구하므로 후한 뇌물을 주고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인장이 찍힌 종이는 포정(布政)이 분부(分付)한 대로 네 글자를 써넣어 중군에게 주였다.
그러자 유격(遊擊)이 몹시 유감(有憾)스럽게 여기는 바가 있어 본도(本道)의 도사(都事)에게 위표(委票:증서를 위임함)하기를,
각 사신(使臣) 일행의 짐바리가 매우 많은데 이는 틀림없이 개인적인 일을 가지고 두목(頭目)을 매수(買收)하여 외국 방출을
금지하는 물품을 많이 바꾸었을 터이니 하나하나 기준대로 조사하여 보고하시오. 하였으므로,
기섬(奇暹)을 보내어 유격에게 배첩(拜帖)을 올렸더니 회첩(回帖)에 이르기를,
길을 빙돌려서까지 찾아와주니 미안(未安)하게 여기며 비록 서로 만나보고 싶지만 아마도 어려울 듯하오. 하였다.
강(江)가에서 주문사(奏聞使) 윤선(尹銑)의 일행을 만났는데 부험(符驗)을 전해주는 일 때문이였다.
주국(柱國)과 주우(柱宇)가 강 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하기에 놀랍고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았다.
도사(都事) 오행민(吳行敏)이 도착하는 데로검사하여 아무런 일 없이 압록강을 건넜다.
도사(都事)가 유격(遊擊)에게 답(答)하는 표문(票文)에 이르기를,
비직(卑職)은 순찰사(巡察使)의 명령으로 짐바리[복태(卜駄)]의 경중(輕重)만 검찰(檢察)하였을 뿐이며 그 밖의 다른 것은
감히 알지를 못합니다. 하였다.
강충립(康忠立)이 약재(藥材)를 가지고 먼저 떠났다가 위관(委官:담당 관원)에게 저지당하는 바가 되어 진강(鎭江)에서 머물다
이제야 비로서함께 압록강을 건넜는데 짐바리를 관성(關城:국경에 있는 성보(城堡)에서 점검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저녁에야 이르렀다.
압록강을 건넜다는 장계(狀啓)와 비밀장계(秘密狀啓) 두 통을 봉(封)하였는데,
받아본 전지(傳旨)에 칙서(勅書)를 25일에 맞이 하겠다고 하였기 때문에서였다.
[회첩(回帖:회답(回答)하여 보내는 공문(公文).]
[부험(符驗:중국에 가는 사신이 갖고 다니는 신임증표(信任證票).비단으로 짠 횡축(橫軸)에 말의 모양을 수 놓았음.부패(符牌)]
9일(정해) 개이다가 오후에 눈이 잠깐 내렸다
상사(上使)가 병(病)이 나서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10일(무자) 맑음
의주(義州)에서 유숙(留宿)하였다.
들으니 주청사(奏請使) 일행이 와서 농막(農幕)에 머문 다고 하기에 정찬(鄭璨)을 보내어 안부(安部)를 여쭈었다.
의주부윤(義州府尹) 및 대동찰방(大同察訪) 성이민(成以敏)과 설마(雪馬)를 타고 구룡연(九龍淵)을 가서 보았는데,
집아이 주국(柱國), 주우(柱宇) 및 역관(譯官) 표정로(表廷老)와 송업남(宋業男)도 따랐다.
부윤이 설마를 펴서 열었는데 크기가 8,9명은 앉을 만하였다.
거기에다 여덟 마리의 말을 보태어 돌진하여 달리게 하니 빠르기가 나는 배[비선(飛船)]와 같았다.
구룡연은 얼어붙어 그 깊고 얕음을 엿볼 수는 없었지만 돌 벽(壁)이 깍아지른 듯이 솟아 기이하고 빼어남은 형용하기 어려웠다.
숙야(叔夜:부윤의 자(字)임)가 석벽 가운데 한 곳의 바위에 택용(澤龍)이란 두 글자 새긴 것을 가리켜 보였는데,
그것은 바로 한천장(寒泉丈:정협(鄭協)의 호(號)이 장난삼아 한 것이였다.
밤에 선전관(宣傳官)이 도착하였는데 주청사(奏請使)사행(使行)의 학관(學官)이장배(李長培)를 북경(北京)으로 떠나게 하고,
사신(使臣)일행은 그대로 올라오게 하라는 것이였다.
11일(기축) 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여 소곳[소관(所串)]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양재관(良才館)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용천군수(龍川郡守) 이정배(李廷培)가 나와서 접대하였다.
12일(경인) 맑음
거련(車輦)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임반(林畔)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선천군수(宣川郡守) 윤수(尹綬)가 나와서 접대하였다.
13일(신묘) 맑음
운흥(雲興)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곽산군수(郭山郡守) 이응뇌(李應賚)가 나와서 접대하였다.
정주(定州)에 투숙(投宿)하자 정주부사(定州府使) 김수현(金壽賢)이 나와서 접대하였다.
14일(임진) 맑음
가산(嘉山)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군수(郡守) 유대형(兪大逈)은 파직(罷職)을 당하였고 희천군수(회熙川郡守) 양응락(梁應洛)은 주청사(奏請使)일행에게
음식을 제공하여 접대하는 일로 왔기에 잠깐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사잇길을 경유하여 안주(安州)에 투숙(投宿)하였는데,
부윤(府尹) 송안정(宋安廷)이 나와서 댑접하였다.
15일(계사) 맑음 밤에 눈이 조금 내렸다
숙천(肅川)에 투숙(投宿)하였다.
부윤(府尹) 장세철(張世哲)이 나와서 대접하였으며,
관찰사[방백(方伯)] 김신국(金藎國)과 서로 만났다.
16일(갑오) 맑음
순안(順安)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현감(縣監) 정호(鄭皓)가 나와서 대접하였다.
평양(平壤)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서윤(庶尹) 조성립(趙誠立)이 나와서 대접하였다.
전지(傳旨)를 받들었는데 그대는 대죄(待罪)하지 말라는 내용이였다.
17일(을미) 맑음 밤에 많은 눈이 내렸다
중화(中和)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황주(黃州)에 투숙(投宿)하였는데,
관찰사[방백(方伯)] 유대정(兪大楨)과 병사(兵使) 유형(柳泂) 그리고 문화군수(文化郡守) 박진장(朴進章)'
안악군수(安嶽郡守) 이정익(李廷益), 청단찰방(靑丹察訪) 성굉열(成宏烈)이 나와서 영접하였다.
18일(병신) 아침에 눈이 내리다가 늦게는 개였다
봉산(鳳山)에 투숙(投宿)하였다.
현감(縣監) 윤공(尹珙)이 나와서 대접하였는데, 땅거미가 질 무렵에 와서 보고 말하기를,
상도(上道:상사(上使)의 개인 짐[사복(私卜)] 열두 바리[태(駄)]가 되기에 물었더니 상사(上使)가 말하기를,
서책(書冊)이 여덟 바리이고, 초황(硝黃:화약(化藥)의 원료)이 두 바리이며 상사와 서장관(書狀官)의 종[노(奴)]이 두바리이다.
고 하였는데, 그렇습니까?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초황은 우리 일행이 소유(所有)한 것이 아니며 서장관(書狀官)의 종[노(奴)]은 북경(北京)에서의 종 외에는
말[마(馬)]이 없었소. 하자,
수(守:여기서는 봉산현감을 말함)가 즉시 장무역관(掌務譯官)을 불러다 말하기를,
아홉 짐바리[태(駄)]외에는 나갈 수 없다. 하였다.
조금 있다가 상사(上使)가 주수(主守)에게 청원을 하고서야 떠났다.
[장무역관(掌務譯官:통역(通譯)을 맡아 보는 역관 가운데서 우두머리]
[주수(主守:해당 고을의 수령을 이르는 말임.]
19일(정유) 맑음 몹시 추웠다
인수(釼水)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용천(龍泉)에 투숙(投宿)하였는데,
서흥군수(瑞興郡守)로 신계군수(新溪郡守)를 겸임하고 있는 황재중(黃在中)이 나와서 대접하였다.
20일(무술) 맑음
총수(蔥秀)에서 점심 식사를 하고 평산(平山)에 투숙(投宿)하였는데,
현감(縣監) 최정운(崔挺雲(이 나와서 대접하였다.
밤에 술을 마련하여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곡산군수(谷山郡守) 정문용(鄭文龍)이 와서 보았는데 길에서 전지(傳旨)를 받든 사람을 만났으며,
칙서(勅書)를 영접하는 날자[일기(日期)]를 내년 정월(正月)로 물려 정하였다고 하였다.
21일(기해) 맑음
금교(金郊)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다.
우봉군수(牛峯郡守) 엄혜(嚴憓)가 나와서 대접하였다.
하인(下人)들이 모두 굶주렸기에 송경(松京)에 투숙(投宿)하게 되였으며,
홍덕준(洪德俊)의 집에 임시로 붙여 있었는데 제공하는 장막(帳幕)과 음식이 사행(私行)과 다를 바 없으므로
공리(公吏)에게 곤장(棍杖)을 쳤다.
장계(狀啓)한 통[도(道)]을 봉(封)하여 올렸는데 일의 형세가 전진(前進)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서 였다.
22일(경자) 맑음
송경(松京)애서 유숙하였다.
오후(午後)에 유수(留守) 한산군(漢山君) 조진(趙振)을 맞아 매우 즐겁게 대화하였는데,
경력(經歷) 이시정(李時楨), 교관(敎官) 차운로(車雲路), 이사성(李士星)이 모두 함께 하였으며,
집아이 주국(柱國)과 주우(柱宇)도 참여하여 밤이 깊어서야 끝이 났다.
23일(신축) 맑음
들으니 주청사(奏請使) 일행이 도착한다고 하였다.
늦게 출발하여 장단(長湍)에 투숙(投宿)하였는데, 부사[부백(府伯)] 이흘(李忔)이 나와서 대접하였다.
상사(上使)가 중로(中路)에서 선영(先塋)에 참배(參拜)하고 오겠다기에,
내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먼저 떠났는데 한 사람도 영접하거나 만나는 사람이 없으므로,
장막(帳幕)에 도착하여 아전[색리(色吏)]을 문책하였다.
이날 집아이 둘을 데리고 숭양묘(崧陽廟)를 배알(拜謁)하였다.
[공리(公吏:공전(工典)에 관한 일을 담당한 아전. 곧 지방 관청 육방(六房)의 하나임.]
24일(임인) 맑음
아침 일찍 출발하여 파주(坡州)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는데 부사[부백(府伯)] 조욱(趙稶)이 나와서 대접하였다.
벽제(碧蹄)에 투숙(投宿)하였으나 고양군수(高陽郡守) 구심(具瀋)이 칙서(勅書)를 맞이하지 아니하였다.
25일(계묘) 맑음
영서(迎署)에 이르러 상사(上使)는 역관(譯官) 김응인(金應仁)의 집에 임시로 거처를 정하고,
나는 촌막(村幕)에 임시 거처를 정하였다.
그런대 고양군(高陽郡)에서 음식을 준비해 왔다가 철거하여 되돌아가 버리고 김응인이 초구(草具:거친 음식)을 올렸으므로,
정찬(鄭璨)이하가 모두 굶은 채로 잤다.
주국(柱國)과 주우(柱宇)가 도성(都城)으로 들어갔다.
[영서(迎署: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모화관(옛 독립문 자리에 있었음)를 말함.]
26일(갑진) 맑음
주국(柱國)이 이모(李慕)와 함께 왔다.
박경정(朴景靜)이 와서 유숙하였으므로 가성군(佳城君)의종[노(奴)]의 집으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이모(李慕:구전선생(苟全先生)의 사위(壻)]
27일(을사) 맑음
28일(병오) 개이다가 밤에 잠시 눈이 내렸다
이모(李慕)가 돌아갔다.
역관(譯官) 진사영(秦士榮), 이명담(李命聃)이 찾아보러 왔으며 고양(高陽)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비로서 도착하였다.
29일(정미) 맑음
주우(柱宇)가 나갔다가 왔다.
박의후(朴義厚), 송응선(宋應瑄) 등이 찾아보러 왔다.
심 판사 집(沈判事檝)과 이 서흥 극신(李瑞興克信)이 하인 용정(龍丁)을 보내와 안부를 물었는데,
어버이가 계신 집이 평안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을묘년(乙卯年1615년 광해군7년)
1월
1일(무신) 맑음
김윤신(金允信)의 정자(亭子)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상사(上使)를 찾아 갔더니 전 군수(前郡守) 조유한(趙惟韓), 기준격(奇俊格), 기수발(奇秀發)등도 그곳에 왔었다.
주국(柱國)이 도성(都城)안에 갔다가 왔다.
양주(楊州)에서 제공하는 음식이 도착하였다.
2일(기유) 맑음
주우(柱宇)는 도성(都城)에 들어가고 주국(柱國)은 두통(頭痛)과 복통(腹痛)을 알았다.
들으니 기윤헌(奇允獻)과 변응선(邊應瑄)이 상사(上使)를 보려고 왔다가 상사를 보지도 묻지도 않았다고 하였으니
이상하게 여길 만하다.
3일(경술) 맑음
기섬(奇暹), 이효남(李孝男), 조경(曹瓊)이 찾아보러 왔다.
그리고 임 박사 숙영(任博士叔英)과 신숙근씨(申叔謹氏)가 찾아왔는데 신숙근씨는 술을 가지고 왔다.
4일(신해) 맑음
도목정(都目政)을 맡았던 서몽현(徐夢賢), 한원상(韓元祥), 이언빈(李彦賓) 등이 찾아왔다.
안성(安城)에서 제공하는 음식물이 도착하였다.
5일(임자) 맑음
이조(吏曹)에서 나를 영천(榮川) 고을의 수령(守令)으로 맨 앞에 의망(擬望)하였으나 낙점(落點)을 받지 못하였다.
들으니 전이성(全以性)과 변삼근(卞三近)이 주청사(奏請使)를 보러 왔다고 하였다.
주우(柱宇)가 나갔다가 왔다.
6일(계축) 개이다가 잠시 눈이 내리기도 하다가 그쳤다
견후증(堅後曾)이 술과 음식을 성대하게 마련하여 와서 접대하였으며,
주청 상사(奏請上使)와 부사(副使)가 하인을 보내어 안부를 물였다.
7일(갑인) 맑음
주국(柱國)이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는데 인일 과시(人日課試)를 구경하기 위해서였다.
허상사 회(許上舍淮)가 찾아왔다.
역관(譯官) 박의후(朴義厚), 이응수(李應樹), 전의남(全義男)이 찾아보러 왔다.
주우(柱宇)가 위장(胃腸)이 상하여 앓으며 누웠으므로 삼소음(蔘蘇飮)을 먹이고 땀을 내게 하였다.
[인일과시(人日課試:음력 정월 초 7일에 정례(定例)로 보이는 시험. 인일(人日:정월 초칠인은 사람의 날이다.]
[삼소음(蔘蘇飮:한약 처방의 하나.
인삼(人蔘),소엽(蘇葉),전호(前胡),반하(半夏),건갈(乾葛),적복령(赤茯苓),진피(陳皮),
길경(桔梗),지각(枳殼),감초(甘草),등의 약재(藥材)로 구성되어 있으며,
풍한(風寒)으로 인한 두통(頭痛),발열(發熱),기침,구토(嘔吐)등을 치료한다.]
8일(을묘) 눈이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정토사(淨土寺)의 동실(東室)로 임시 거처를 옮겼다.
형조좌랑(刑曹佐郞) 조익(趙釴)이 찾아왔고 조경(曺瓊)도 왔다.
들으니 영의정(領議政)이 참찬(參贊) 윤승길(尹承吉)과 먼저 성균관(成均館)으로 갔는데,
진시(辰時:오전 7시~9시)가 되어도 관각당상(舘閣堂上)이 오지 않으므로 영의정{영상(領相)]이 자리를 파(罷)하고 떠나가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을 시켜 입계(入啓)하여 관각당상을 추국(推鞫)하도록 청원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9일(병진) 맑음
사성(司成) 배대유(裵大維)가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고,
오봉(五峯:이호민(李好閔)의 호(號)이 술과 음식을 가지고 와서 위로하였다.
그리고 송덕기(宋德基)가 찾아보러 왔으며,
주국(柱國)이 나갔다가 왔다.
10일(정사) 맑음
상사(上使)를 찾아가 보았더니 상사가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허 백천(許白川)이 왔었다고 하면서,
임거만록(林居謾錄)을 만약 위에 진달하지 않을 것 같으면 조정의 의논이 크게 발의 될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계달(啓達)하여야 하겠소.
하였다.
11일(무오) 맑음
날이 아직 밝기 전에 모화관(慕華館)의 시냇가로 달려갔다.
사시(巳時:오전 9시~11시)에 들으니 대가(大駕:임금이 탄 수레)가 대궐을 출발하였다고 하기에
연조문(延詔門) 밖으로 나아가 동쪽을 향하여 꿇어 앉았는데 남쪽을 위로 하였다.
조금 있으려니까 대가가 이르므로 칙서(勅書)를 용정(龍亭) 에다 봉안(奉安)하여 대가가 대궐로 돌아가고,
사신(使臣)은 용정을 따라 대궐로 나아갔다.
사신은 서청(西廳)으로 들어가 칙서를 전달하고 서장관(書狀官)은 장막(帳幕)에 있었다.
의식이 끝나자 사신 이하가 복명(復命)하였으며,
조정에 가득한 대소 신료(大小臣僚)글이 모두 하인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용정(龍亭:나라의 옥책(玉冊), 금보(金寶) 등 보배와 중국의 황제가 내리는 칙서(勅書) 등의
귀중품을 실어 나를 때에 사용하는 교여(轎輿). 용정자(龍亭子)라고도 함.] 끝.
<<13세손 김태동 옮겨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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