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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문즉답 8
2022. 7. 23
볼 때마다 보고 또 보고 싶다. 재미있는 얘기도 많지만 얼굴과 얼굴로 마주 대해 볼 수 있다는 것이 축복이다.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우리가 함께 살았다는 것이 인간사회에서 기적 같은 일이다. 누구도 한 사회 안에서 40-50년을 함께 하기가 어려운데 우리는 오래살수록 더욱 좋아지는 것 같다. 세상으로 보면 기이한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다.
근본으로 돌아갈수록 우리 인생은 단순화되고 명료해지고 혼란이 없어진다. 그러나 저 바깥으로 나가면 복잡해지고 혼란스럽고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생긴다. 원래 그런 법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늘 근원으로 돌아가는 삶에 있다는 것이 큰 축복이다.
구속은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김경수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사랑, 화평, 오래참음 등 성령의 9가지 열매를 제시했는데 이것은 구속받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이런 좋은 것들이 나온다는 말로 보인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속은 결국 하나님의 좋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초점은 구속이 아닌 열매에 있게 된다. 그래서 열매가 안보이면 ‘십자가에서 못 내려온 예수’는 구속의 주가 아니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구속과 열매의 이러한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 바란다.
이현래 목사
요즘 우리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있고 다른 데서도 이런 문제가 있다. 기독교는 이런 아홉가지 열매를 최고의 미덕으로 꼽고, 실천해 보려고 많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그렇게 다 지켜졌는가. 관심을 가지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있다. 그리고 정의를 무엇을 사랑해야 할 것인지, 화평은 무엇으로 표현할 것인지, 참음은 무엇으로 할 것인지 늘 숙제가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기준이 일정하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가 볼 때는 별로 큰 사랑이 아닌데 굉장히 큰 사랑으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큰 사랑도 전혀 사랑으로 느끼지 못한다.
집이 굉장히 부자집이고 넉넉하고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는데 본인는 전혀 감사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 어떤 경우에는 반대로 옹색하고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늘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규정을 정해놓고 말하기가 곤란하다.
율법이라는 것은 바깥에 무슨 기준을 정해놓고 그 기준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율법이라 해서 꼭 바깥에 있는 십계명만 율법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것을 하고 싶다. 나쁜 것을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안되니까 그러는 것이다. 된다면 기왕이면 남들이 다 실천하고 좋아하는 생활을 하고 싶지 남들이 싫어하는 생활을 일부러 하는 사람은 없다. 혹시 생활 습관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그렇게 표현되는 것뿐이지 일부러 그런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너무 거기 매일 필요는 없다. 같이 사는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좋게 살 수 있는가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의식해야 할 문제다.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고 저렇게 해야 될 문제라면 얼마나 옹색한 일인가.
지금까지 역사적으로 어떤 종교든지 이런 것을 나쁘다고 한 데는 없다. 세상에서도 이런 것을 싫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 좋은 일이다. 할 수 있다면 많이 할수록 좋다. 일부러 나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 해서 안되는 것을 억지로 할 필요도 없다. 안되는 것을 억지로 사랑을 하겠는가. 억지로 화평하고 억지로 오래 찹겠는가. 나는 억지로 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교회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말을 거의 안했다. 다 하고 싶지 누가 안하고 싶겠는가. 다 건강하고 싶지 누가 병들고 싶겠는가.
병든 사람에게 “너는 왜 병들었어? 밥은 무엇을 먹어?”라고 질문할 사람은 없다. 추궁할 수도 없다. 병들고 싶어서 병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어려서 자라면서 상처가 있는 사람도 있고 크면서 상처를 받은 사람도 있다. 요즘 트라우마라고 하는데 어떤 사람을 보고 ‘저렇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면
무조건 저것은 열매다 아니다 하고 따질 것이 아니라 ‘왜 저렇게 할까, 오죽하면 저렇게 할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도와줄 수만 있다면 도와줘야 한다. 친구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지 아닌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그렇게 해야 되지 않겠는가.
성령의 열매가 아니라도 잘하는 사람이 많다. 꼭 ‘이것이 성령의 열매인가 아닌가?’ 하고 구분하기가 쉬운 것이 아니다. 구속이 곧 열매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연합이 곧 열매라고 생각할 수도 없다. 일단, 이런 염려를 하지 말고 주님이 부르시는대로,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자리로 오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것 저것 따지고 언제 가겠는가.
꼭 성령의 열매를 위해 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교회 다니는 사람 중에 자기 생활을 고쳐 보려고, 좋은 사람이 되려고 온 사람도 있다. 그러나 결국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을 함께 가질 수 없다.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려면 구속이 필요하다. 그냥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싶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다. 로마서 3장 24절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라고 하였다.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그냥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받은 것이다.
모든 것의 기초는 구속이다.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서, 부르심에 응하기 위해서 무엇이라도 구속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렇게 아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전우석
성경에 기록된 부활의 실재는 무엇이며, 오늘날 부활의 실재는 무엇인가?
이현래 목사
부활의 실재를 물었는데 부활은 눈에 안보이기 때문에 어렵다. “저 사람은 부활했네. 저 사람은 부활안했네.”라고 편의상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부활은 아니다. 우리가 늘 “부활, 부활” 하다보면 관심이 다른 데로 쏠리기 쉽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 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어떤 모양으로 부활할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우리가 씨를 뿌릴 때 열매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것이다.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 씨에 따라서 각기 합당한 열매를 주신다.”고 대답했다.
그러니 씨를 먼저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호박을 생전 안본 사람은 호박씨를 아무리 보아도 호박을 상상할 수 없다. 안본 것은 알 수 없다. 농부는 열매를 알기 때문에 씨를 뿌린다. 열매를 모르면 씨를 못뿌린다.
옛날에는 국광이 제일 좋은 사과였다. 사과나무 한 그루면 아들을 대학에 보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익이 높은 과일이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후지 사과가 들어왔다. 이것을 먼저 안 사람은 그 묘목을 심었고 거기서 열린 열매가 국광에 비해 달았다. 그래서 국광 사과나무가 인기가 없어졌다. 그때 빨리 교체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고 늦게까지 교체하지 않은 사람은 재미를 못보았다.
경산 어느 집에 들렀는데 그 집은 사과나무를 베고 대추나무를 심었다. 아들과 아버지가 심히 논쟁을 하다가 대추가 비싸게 팔릴 것이라는 정보를 알고 아들이 대추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과는 농사짓기가 너무 어렵기 때문에 대추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사과는 일 년에 열번 이상 약을 쳐야 하는데 대추나무는 일 년에 한두 번 치면 되니까 일이 쉽다. 그리고 그때는 대추값이 아주 비쌌다. 사과 상자에 비해 반밖에 안되는 상자에 풋대추가 7만원이었다. 그 뒤로 중국에서 대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대추값이 떨어졌지만 농사짓기는 굉장히 편하다. 빠른 정보를 잘 알아서 받아들이면 농사짓는 사람도 큰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성주 지방에 가면 금싸라기 참외를 많이 하는데 돈이 된다고 한다. 그것도 먼저 한 사람일수록 더 수입을 많이 올렸다. 그러려면 정보를 알아야 한다. 농사짓는 것도 정보가 있어야 하고 돈벌이 하는 것도 정보가 있어야 한다.
인생도 정보를 잘 알면 좋지 않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부활을 자꾸 생각하면 뭐하겠는가. 새 생명 안에서 행하는 것을 두고 이것이 부활의 실재라고 할 수도 있다.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함이라 했다. 좌우간 좋은 것을 택하시기 바란다. 모르는 것을 가지고 애쓸 필요가 없다.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라는 말이 있다. 성경을 모르는데 억지로 풀려고 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우리가 살 길은 얼마든지 열려 있는데 굳이 모르는 것을 알아보려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 직접 ‘이것이 아니면 안되겠다.’ 할 때, ‘이것이 아니면 나는 안되겠다.’고 생각될 때 찾아야 한다.
복음을 전해 보면 누구에게 전파되는가. 예수님께서도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하셨다. 그렇다고 가난한 자에게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데 누가 먼저 받아들이느냐 하면 가난한 자들이다. 물질적인 가난이 아니라 마음, 영이 가난한 사람들이 먼저 받아들인다. 그리고 형편으로 보면 가난하고 병든 사람이 많으니까 그런 사람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물질이 많아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있고 물질이 없어도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복음은 가난한 자들에게 전파된다.
최정임
요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오해한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 맏아들이라고 표현하셨고 그 다음에 우리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그래서인지 목사님 말씀 하신 것 중에서 ‘과정을 거친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실 때
분명히 어린양인데 왜 ‘과정을 거친’에 초점을 두어서 우리도 맏아들처럼 똑같이 과정을 거쳐서 죽기까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순섬김이를 하면서 순원들이 나의 인격에 만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옹색한 변명을 하면서 힘들었는데 요즘 목사님 말씀을 들으면서 ‘아, 저것이 과정을 거친 어린양이구나.’라고 알면서 예수님에게 대한 말씀인데 그것을 나에게 적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해마다 여름집회를 끝낼 때마다 “일년 동안 여러분이 이 말씀을 잘 살아내서 내년에 다시 만나자.”고 하실 때 그 말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왔다. 어떤 의미로 하신 말씀인지?
이현래 목사
나는 어떤 결과가 꼭 어떻게 어떤 모양으로 있어야 된다고 말해 본 적은 없는데 “내년에 올 때는 더 좋은 모습으로 옵시다.”라는 말은 더러 한 적이 있다. 그것도 어찌 보면 정례적이고 규격적인 것으로 들릴 수 있다. 그래서 앞으로 그런 말은 안할 것이다.
생명의 과정은 사람마다 각각이다. 공업이나 과학은 아주 정밀한 규격이 있어서 그 규격을 넘어서면 안된다. 이번에 어떤 형제가 왔는데 미국에서 고분자 공학을 전공한 아들이 인도 사람이 세워놓은 논문이 정설로 되어 있었는데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들을 계속 괴롭게 한다는 것이었다. 과학은 어떤 것도 틀릴 수 없는 것이다. 틀리면 아무것도 안된다. 자동차에는 3만 개의 부품이 있다는데 그중에 하나만 없어도 자동차는 고장을 일으킨다.
사람은 그와 다르다. 그런 과정을 공업적으로 거쳐가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성장과정이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다. 어떤 것이라고 규정해서 말할 수 없다. 그 사람 나름대로, 그리고 환경도 있고, 말씀을 듣는 것에 따라서 다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공업처럼 딱 정해 놓을 수 없다. 예수를 이렇게 믿으면 이런 결과가 오고 저렇게 믿으면 저런 결과가 온다고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것을 기대하면 ‘그 기대가 과연 맞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사람마다 개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랑은 아주 광범위하다. 그러니 상대방이 바라는 사랑이 어떤 것인지 공업적으로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작은 사랑도 크게 보일 수 있고 큰 사랑도 작게 보일 수 있다. 사랑의 성질이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단순한 언어로 사랑과 화평과 오래 참음……, 이라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바울은 그때의 어떤 형편에서 그 교회 사람들에게 필요했기 때문에 그 말을 했을 것이다. 그것을 바이블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따라 그 사회를 유지하고 평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랑이 필요한 사람도 있고 참음이 필요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 교회생활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갖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백 사람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기만은 예라고 하거나, 백 사람이 좋다고 할지라도 자기만은 아니라고 할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게 되면 곤란하지 않겠는가. 모두 아니라고 하는데 나 혼자 그렇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의 사회 생활은 상대적이다. 그렇게 이해하면 좋겠다.
여행선
지난 주 빌립보서 메시지의 제목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준비하라는 것이었다.
구속 안에서 하나님과 연합된 사람으로, 하나님의 신부로 사는 삶이 좋은데 왜 바울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준비하라고 했는지 목사님의 말씀으로 들어보고 싶다.
이현래 목사
여행선을 타고 다니다 보니 여러가지 문제를 발견한 것 같다. 배를 타고 다니면 볼 것이 많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준비하라고 한 것은 아마 무슨 이유가 있어서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생각해야 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항상 구원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만 누구나 해야 한다면 쉬운 일이겠는가. 구원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개념도 사람마다 다르니까
하나님은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하나님의 말씀, 계획, 뜻을 사람들이 받아들이기를 원하신다. 모세 시대에 하나님을 만날 사람은 모세 한 사람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때처럼 모세 한 사람뿐이면 되겠는가. 모세는 산 속에 들어가서 뇌성이 치고 폭풍이 불고 나팔소리가 나는 무서운 광경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아무도 산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당시의 하나님은 무서운 분인데 지금은 안그런가? 하나님은 같다. 그런데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무서운 하나님일 수도 있고 자비로운 하나님일 수도 있다. 호랑이 같은 경찰관이나 판사가 집에 가면 아이들은 그 아버지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다. 집에 와서도 법정에서처럼 하면 그 집안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사람에 따라서, 관계에 따라서 두렵거나 떨리기도 하고 평화롭기도 한 것이다.
계시의 역사는 점점 쉽고 편해지고 그래서 마지막에는 보편화되는 과정으로 가고 있다. 예레미야 31장에 나오는 새 언약을 볼 때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새 언약을 세우겠다.” 하셨다. 왜 그런가? 지금까지의 언약이 잘 안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언약하신 하나님이 다른가? 그렇지 않다. 한 하나님인데 모세 시대에 주신 언약은 정교한 의식과 빈틈없는 율법, 계명이었다.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시간동안 준엄하게 시행해 왔다. 그런데 겉 모양은 되는데 속이 안되었다. 마음 속으로는 그 법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소원은 제사라는 형식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제사를 통해서 드려지는 사람의 마음을 바라셨는데 도저히 안되니까 새 언약을 세우겠다고 하신 것이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이가 무엇인가. 돌비에 새겨서 밖에 있는 옛 언약에 비해 새 언약은 획기적이다.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이것이 새 언약의 내용이다. 돌비에 새겨진 법이 아니라 내 속에 새겨진 법인 것이다. 어떻게 내 속에 법을 새기겠는가. 이것은 생명의 변화를 말한 것이다.
새 언약은 생명이 변화하는 생명의 언약이다. 알고 보면 엄청난 것이다. 보통 일이 아니다.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나라는 인간의 속을 완전히 바꿔서 다른 마음이 있는 인간이 되게 할 수 있겠는가. 상상할 수조차 없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쉬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 언약을 새로 준비하신 것이다. “나의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기록하리라.” 과연 이것이 이루어질 것인지 누구도 믿기 어려운 말이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사람들이 ‘이 사람이 바로 예레미야로 예언하신 그 사람이 아닌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사람같이 된다면 되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이천 년이 지났다. 결과는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이다. 잘 되지 않았다. 왜 그런가? 하나님은 분명히 약속하셨는데 무엇인가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준비해야 했다.
그런데 종교개혁 당시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쉽게 해 보려고 했다. 가톨릭은 전통적으로 이러저러한 행위가 있어야 된다며 공덕설을 주장했다. 그래서 수도원도 생기고 고행도 생겼다. 그에 비해 개혁가들은 사람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고 오로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고 나온 것이 종교개혁이다. 그렇게 해서 가톨릭의 제도로부터는 해방되었다. 그렇다고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가능해졌는가? 그렇지 못하다. 구속이 빠졌기 때문이다.
의로워져서 의롭다고 하신 것이 아니다. 의롭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렇게 여겨주셨다 해도 나는 의로운 사람이 아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오백년 이상 지나왔다. 그래서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 그런 자세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놓아두실 것인가, 예수님이 오신 것은 아무 효과가 없는 것인가? 이런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결과다. 말씀을 듣고 많이 쉬워졌다. 그러나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구원의 표적이 드러나기도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70년 대에 구원파 사건이 있었다.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무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미국에서 들어온 선교사가 가르치고 간 교리인데 거기서 나온 것이 구원의 복음이다. 죄 사함,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말이 그때 나왔다. 그들은 성경을 펴놓고 “어떻게 죄사함을 받는가? 이러 저러하게 하면 된다.”는 식으로 방법을 가르쳤다. 그것을 듣고 죄책감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발이 땅에 닿는지 모르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얼마나 좋으면 그랬을까? 나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모르겠다. 나는 교회 다니면서 죄 문제로 고민해 본 적도 없고 그런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만나본 적도 없다.
어떤 이유가 있으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라고 하지 않았겠는가. 할 수만 있다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아닌 다른 판으로 옮기면 된다. 미국에서 영어를 못하니 병신이 되었다. 나는 말을 잘하는 사람인데 미국에 가니까 벙어리가 되어 미국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칼기를 타면 금방 해방된다. 판을 바뀌니까 두려움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직도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뤄야 한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효과가 어디서 나타나겠는가. 그분이 죽기까지 하셨으면 무슨 대책이 나와야 하지 않겠는가. 죽으나마다 같으면 되겠는가.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들은 대단히 좋은 말씀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성경의 금자탑이라며 굉장히 높게 평가한다. 5리를 가자 하면 10리를 가고 10리를 가자 하면 100리를 가고,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을 돌려대라는 말씀은 너무나 좋은 말씀이다. 그러나 막상 해 보면 잘 안된다. 안되니까 거기서 좌절하게 된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그분에게는 당연하니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그분은 다른 판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도 그분이 있는 세계에 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판이 아니라 다른 판에 살고 있다. 뺨을 한대 맞으면 분노가 일어나는 판에 살고 있다. 옛날에 두 아이를 마주 세워놓고 뺨 때리기 벌을 주었다. 처음에는 상대방을 세게 때리지 못하는데 상대방에게 맞고 나면 좀 더 세게 때리고, 그러다 보면 싸우게 된다. 사람이 해 보면 안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런 법을 선포하셨는가? 그것은 율법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 있는 말씀이라고 무조건 들으면 안되고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자기만큼 들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자기 이상은 들을 수 없으니까 자기만큼 듣고 할 수 있으면 하고, 못하면 보류하는 것이 좋다.
김영국 목사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있어서 목사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를 통해서 예수를 만났고 예수와 하나로 발견되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인생의 원 위치로 회복되셨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내려오지 못한 예수는 사람을 말한 것으로 인식되는데 여기에서 사람이 중요한 것인지 죽음이 중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는 간과한 것이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인가?
이현래 목사
이런 질문이 늘 있다. 목회하시는 분이니까 책임도 있고 해서 구체적으로 이런 질문을 하신 것 같다. 왜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말하는가, 그리고 왜 그 예수를 만났다고 하는가?
그 전에 예수는 만날 수 없는 분이었다. 하나님 같은 분을 어떻게 만나겠는가.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인 분인데 내가 어떻게 그런 분을 만나겠는가. 만난다는 말이 그냥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분과 하나되고 소통이 되겠는 말인데 무슨 말을 한들 그분과 소통이 되겠는가.
소는 등에 쌀을 두가마를 얹든 세 가마를 얹든 그냥 갈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하기 쉽겠는가. 불가능하다. 예수님을 볼 때 우리는 전혀 그분과 만나질 수 없는 분이었다.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많지만 그분을 만나기는 불가능했다.
나는 그분을 만나고 싶어서 여기저지 찾아다녔다. 부활하셨다는 데도 가 보았고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데도 가 보았다. 여러군데를 가 보았다. 날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다는 데도 가 보았고 자기 안에 성령이 있다는 데도 가 보았다. 그 사람은 되는지 몰라도 나는 안되었다. 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되지만 나는 믿음이 적어서 안되기 때문에 좌절하고 또 좌절했다.
이 분을 만날 수 없는가. 떡만 얻어먹고 포도주만 얻어 마시고 살아야 되는가? 그래도 그것을 가지고 형제들과 나눠 먹었다. 우리끼리 잔치가 잘 되었다. 부잣집 밥상처럼 늘 풍성하고 좋았다. 그러면 내가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내가 떡 받아온 사람인데 떡을 받아오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이분을 어디 가서 만날까?’ 하다가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자리에서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고 할 때도 나는 그분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그분은 뛰어내리지 못했다. 더구나 마지막에는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운명하셨다. 거기서 모든 사람이 실망하고 떠났다. 우리 역시 그러지 않았겠는가. 그 안에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되어 있다. 시기 질투하는 사람, 증오하는 사람, 구경하는 사람, 기대를 하고 있는 사람……,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만족하지 못해서 다 가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겠는가. 사람은 사람이고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아들이지.’ 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너무나 어려운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아들을 알겠는가. 지금은 모두 쉽게 말하지만 어떻게 사람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겠는가. 그런 관계였다.
그런데 만날 자리는 딱 한 군데밖에 없었다. “내려와 보라.”고 했어도 못내려오고 결국 죽고 만 그분에게서 만날 구멍이 생겼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거기서 비로소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어렵지 않게 간단하다. ‘아, 나와 공통점이 있구나. 말할 자리가 있구나. 소통할 곳이 있구나.’ 이래서 만나게 된 것이다.
내가 큰 믿음이 있어서도 아니다. 오히려 믿음이 없어져 버렸다. 그렇게 만나고 보니까 ‘이렇게 만날 수 있는 자리가 있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있던 의문이 사라져 버렸다. 나도 정말로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한다고 해도 100% 그렇게 안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나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구나. 그냥 인생일뿐이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이것은 내 출발부터 그러했다. 나는 하나님을 찾다가 못찾았고 마지막에 이른 곳은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라는 곳이었다. 그렇게 밀리고 밀려서 ‘나는 내일 일도 모르는구나.’ 하는 데까지 밀려왔던 것이다. 친구는 “믿어. 믿으면 알아.”라고 말했는데 아무리 믿으려고 해도 안되기 때문에 그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나만 알게 되었다. 하나님은 못보았는데 나는 확실히 보이니까 내일 일을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실제로 현실 생활에서도 나는 내일 일을 모르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알아졌는지 모른다.
그러고 나니 거품이 빠졌다. 그러고 나니 나는 땅바닥에 엎드린 피조물에 불과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피조물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거기서 절망이 아니라 평안이 왔다. 묘한 일이었다. 거품이 빠지니까 평안이 왔다. 그때 내가 부름받았다. 그래서 나는 평생 똑같다. 항상 같은 자리다.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판명되어 처참하게 죽으셨는데 그것이 절망으로 보인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평안해진다. 그때 나와 차이가 별로 없지 않은가. 나는 그 절망에서 평안을 느꼈다.
그 외에도 또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끝났는데, 희망이 없어졌는데 평안해졌다. 빛이 온 것처럼 아주 평안해졌다. 이상한 일이다. ‘주의 손에 이끌려’를 보시면 그런 장면이 써 있다. 절망적 상황에서 나는 평안해졌다. 예수님의 절망적 상황에서 나는 그분을 만났고 그 안에서 나는 인생으로서의 평안 평안을 찾은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구나. 더 이상도 이하도 아니구나. 하나님 같았던 사람까지도 저렇구나.’라고 아니까 더 이상 딴 생각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 같은 분도 저런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겠는가. 거기서 내 밑바닥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 전에도 드러났지만 이렇게 확실하게 드러났다. 예수의 드러나심 안에서 내 자신이 드러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나는 평안하다. 더 이상 딴 생각을 할 수 없다.
나는 생각이 굉장히 많은 사람이다. 생각이 많아서 끝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생각이 끝나니 평안해졌다. 바람이 잔 것처럼 고요해졌다. 여기서 나는 내 정체성을 발견하고 나를 알게 되었다. 예수 안에서 내 자신이 새로운 삶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전파하고 싶은 것이다. 사람들은 얼른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무엇을 얻어서 된 것이면 따라오는 사람이 많을 텐데 내가 다 끝났는데 평안하다는 것이니 누가 따라오겠는가. 어찌 보면 아이러니다.
사람들은 다 무엇을 얻으려고 한다. 나도 무엇을 얻으려고 했지만 아무것도 없고 나 자신만 보였다. 나 자신의 정체성만 보였다. ‘이것이 나구나.’ 알게 되었다. 그 안에서 다른 사람도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차별이 없게 되었다. 너와 나만 남았다. 모든 조건이 없어지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너와 나만 남았다. 그래서 이 세계가 점점 확대되어서 ‘예수 안에서 우리가 하나구나.’라고 알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것을 알면 세계가 아주 넓어진다. 한계가 없이 넓어진다. 차별이 없게 넓어진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자. 내가 해 본 결과 너무나 넓어진다. 그래서 자유로워진다. 너와 나의 차별이 없으니까 너무나 자유로워서 누구를 만나도 서슴없이 이 말을 하게 된다.
전에는 이런 저런 조건이 있었고 높고 낮은 것이 있었다. 그래서 그런 것을 가렸는데 지금은 가릴 필요가 없다. 그래서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기회만 얻으면 이 말을 한다.
이번에도 어떤 분과 얘기를 하는데 전에는 그분의 얘기만 들어야 했다. 왜냐하면 그분에게는 세상 사는 지혜도 많고 배울 것이 많기 때문에 듣기만 해도 나쁘지 않고 좋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처음으로 ‘아니다. 내 말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분이 말을 하는데 기회가 와서 이 복음을 한 시간동안 얘기했다. 이것은 아주 놀라운 일이다. 아무도 그분에게 말을 못하는데 서슴없이 이 말이 나갔다. 그런데 또 오시겠다고 전화가 왔다. 가면서 “내가 오늘 목사님에게 한 시간동안 벌을 서고 왔다.”고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어제는 거두절미하고 내말부터 시작했다. “어제 벌 서게 해서 미안합니다.” 하고 시작해서 “오늘은 벌좀 더 받으세요.” 하고 한 시간을 더 얘기했다. 만난지 벌써 20년 이상인데 모든 면에서 배울 것이 많은 분이다. 사업을 한다면 사업가로서 배울 것이 많고 인생경험도 많고 너무 경험이 풍부하고 지식도 풍부하니까 듣고 있으면 흥미롭다. 그런데 내가 지금은 그렇게만 있을 수 없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이것을 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얘기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있다 가셨다. “죄송합니다. 한 시간동안 붙잡아 놓아서 죄송합니다.” 하고 보냈다.
김영국 목사님, 이 복음에 한번 맛을 확실히 들이면 여러 문제가 다 없어질 것이다. 목회하는 목사는 신도들과의 관계가 어렵다. 쉽고도 어려운 문제다. 그런데 아무것도 어려운 것이 없어진다. 아주 쉬워지고 단순해진다. 답이 되었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양생회 김성훈
길거리에서 평생 처음 본 어떤 사람이 저를 붙잡고 “너, 나를 좋아하는거 아니지? 그럼 나를 싫어하는거네.” 하는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요? 십자가에 달려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좋아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것이라고 이분법적으로 가를 수 있는 것인가?
보기가 1번 “좋다”, 2번 “싫다” 밖에 없는 것이 옹졸해 보인다.
이현래 목사
김성훈 형제는 젊은데 질문이 특이하고 예시를 든 것도 특이하다. “싫으냐 좋으냐,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아니냐는 질문인 것 같다.
그보다 내가 먼저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좋지 않겠는가. 나에게 누가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행복합니까?”라고 물을 대상이 되면 좋지 않겠는가. 나는 누가 나에게 그렇게 물어보면 좋겠다. “나이도 들고 병들어서 바깥 출입도 하지 못하는 데도 무슨 힘이 나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나는 어떻게든 이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이것은 물어볼 필요가 없는 문제다. 내가 누구보고 “나를 좋아해, 싫어해?”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겠는가. 그렇게 인생을 사는 것보다 내가 더 좋으면, 남이 나에게 “당신은 무엇이 그리 좋습니까?”라고 물어보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나는 요즘 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요즘 새로 사는 것 같다. 몇년간 나는 새로 살고 있다.”왜냐하면 전에 살지 못한 삶을 지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나이에 새로 산다니 무슨 소린가? 나는 새로 살고 있다. 전에 살지 못했던 삶을 살고 있다. 다른 삶이 아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삶인데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더 깊어졌고 내 정체성이 더 분명해졌고 나 자신이 더 분명해졌다. 더 분명해질수록 더욱 확실하고 더 확실하니까 자신이 생긴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나는 언제까지 살지 모른다. 두번 세번 살아나고 보니까 나는 언제 죽을지 모른다. 지난번에 병원에 갈 때만해도 나는 가는지 안가는지도 몰랐다. 119에 실려서 영대병원 응급처치실로 들어갔다. 응급실에서도 너무 위급하니까 처치실에 갔는데 거기서 가까스로 아는 분들을 통해서 중환자실로 가게 되었다. 생사를 결정하는 중환자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왔다.
나는 죽어도 언제 죽는지 모르게 죽을 사람이다. 이산화탄소가 차이면 혼수가 오고 혼수가 오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그런데 나는 하루를 살아도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그러니 “나를 좋아해 안좋아해?”라고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 누구에게도 물어볼 필요가 없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다. ‘이러면 나를 좋아하는 것이고 이러면 나를 싫어하는 것이네.’ 이런 상황을 갖고 살 필요가 있겠는가.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하네.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하네.’ 하면 옹색하지 않은가.
그럴 필요가 없다. 좋아하냐 싫어하냐 할 필요가 없다. 나를 좋아하지 않으면 나를 싫어하는 것인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김성훈 형제도 이런 삶을 살아보면 좋지 않겠는가. 이분법, 삼분법을 할 필요가 없다. 다 같은 사람이다. 지식이 있어서 이분법, 삼분법을 하지 사람은 다 같다.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옳은 사람도 그른 사람도 없다. 다 같다.
바울은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다 치우쳐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애걸복걸하며 구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무익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르다고 했다.
인간을 너무 나쁘게 생각하고 있다. 세상 사람이 들으면 ‘나는 그렇지 않은데 왜 나보고 저런 말을 하는가?’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바울에게도 그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그렇게 말합니까? 나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내가 언제 피 흘리는 것이 좋다고 했습니까?” 항의하려면 끝이 없다. 그런 세계에 내가 살지 않으면 되지 굳이 남이 좋다하고 싫다 하는 데 살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좋아서 남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으면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다.
교회에서도 나를 너무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그래도 나는 전혀 상관없다. 왜냐하면 나는 잘난 것도 아니고 못난 것도 아니라 그냥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당연하지 ‘저 사람은 이것 때문에 좋고 저것 때문에 싫다.’고 하면서 살아야 하겠는가.
이렇게 한번 살아보면 어떨까? 십자가에 달려 내려오지 못한 예수를 싫어하지 않으면 좋아하는 것이라고 답답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젊으니까 죽든지 살든지 한번 해 볼 필요가 있다. 한번 뛰어들어 볼 필요가 있다. 젊을 때 하지 않으면 언제 하겠는가. 젊을 때 한번 뛰어들어 보자. 그렇다고 죽기야 하겠는가. 멸망받지 않을 사람이 멸망 받겠는가. 나이 들면 용기가 없어서 못한다. 젊을 때 뛰어들어봐야 한다.
전도할 때 젊은이들을 상대해 보면 그래도 젊은 학생이 순수하고 좋다. 그런데 자리가 잡혀서 결혼을 하고 직장과 가정이 있으면 배가 불러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젊었을 때 한번 뛰어들어볼 필요가 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렇게 미온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각해서 반대를 하든 좋아하든 한번 뛰어들어 보라.” 하기 전에는 이렇게 될까, 저렇게 될까 하지만 한번 뛰어 들어서 해 보면 알 것 아닌가.
타고르의 시에 ‘사랑이 너를 손짓하거든 그 품에 비수가 있을지라도 그 품에 안겨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저 사람 품에 무엇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혹시 칼이 들었으면 어쩌나?’ 하고 있으면 평생 사랑을 못한다.
나도 젊었을 때 연애를 한다고 해 보았는데 적극적으로 해 보았다. 동네 사람들이 놀랄 정도였다. 기왕 하려면 확실하게 해 봐야 되지 않겠는가. 나는 부끄러운 줄 모르고 바로 했다. 동네에서 빤히 보여서 내가 어디 가는지 다 아는데 해수욕장에 가자고 해서 갔고 마음대로 했다. 생전 그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그러니까 동네 처녀들이 ‘저 사람이 저럴 사람이었나. 저 사람이 저런 남자였나.’ 하고 다 놀랐다고 한다.
나는 여자와 말도 못해 보았다. 같이 자라면서도 이웃집 처녀와 말도 못해 본 사람이다. 그런데 내가 연애를 하고 여자와 해수욕장에 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기왕 하려면 확실하게 해 봐야 한다. 계산하고 하면 연애를 못한다.
그러다 어느 날 떠나버렸다. 왜 떠났는가? 내 형편이 너무 딱하니까 떠난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시집을 올래야 올 수 없었다. 전에 부터 돈 많은 집 아들이 기다렸는데 무슨 사정이 있어서 결혼을 하지 않고 있다가 그리 가 버렸다. 나와 결혼하면 안되겠으니까 훌쩍 떠나버렸다. 편지 한 장이 왔는데 “이 사람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이가 지금 옆에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정이 떨어질 텐데 일부러 정떨어지라고 그렇게 쓴 것 같았다.
그런데 실컷 해봐서 그런지 밉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참 잘했구나. 현명하구나. 지혜로운 여자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리석은 여자 같으면 그 정에 못이겨서 나와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어찌 되었겠는가. 그러면 행복했겠는가. 형편이 안되는데 돈이 있어야 살지 어떻게 살겠는가. 그래서 ‘잘했다. 지혜롭다. 나에게도 해방이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바이바이 하고 말았다 .
4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세상에 그렇게 달라질 수 없었다. 그때 그 사람의 얼굴이 안보였다. 길에서 만나면 전혀 모를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저 사람을 왜 좋아했던고?’ 하고 자세히 보아도 알 수 없었다. 그때는 굉장히 예뻤는데 어디가 닮았는지 보니까 한 군 데 닮은 데가 있고 그 외에는 전혀 몰라 보았다. 격세지감이라는 말 그대로였다. 가져간 테이프를 주고 이리저리 해서 이러저러하게 살았노라고 한 시간 정도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했다.
하려면 확실하게 하자. 되든지 안되든지 돈 내라는 것이 아니니까 확실하게 하자. 내가 이 복음을 받아들인다고 돈을 내라고 하겠는가. 그렇지 않으니까 확실하게 해 보고 아니라고 생각되면 가버리면 된다. 차 버리고 간다고 죽은 예수가 좇아오겠는가. 한번 화끈하게, 확실하게 해 보자. 후회없이 “나는 젊은 날에 예수를 찾아서 이렇게 저렇게 살아보았다.”고 할 추억이라도 있는 것이 좋다.
나는 옛날에 한번도 목숨 걸고 못해 보았다. 그래서 안된 것 같다. 나는 속이 아파서 금식도 한번도 못해보았다. 그래서 ‘내가 정성이 부족하구나. 열심이 부족하구나.’라며 늘 미련이 남아 있었다. 방언을 한번 해보려고 해도 안되었다. 뒤로 생각해 보면 늘 ‘저 사람들만큼 열성이 없구나.’라고 하게 되었다. 화끈하게 죽을 판으로 해 보았으면 좋을 텐데 나는 그렇게 못하는 성질이다. 그래서 항상 후회가 남아 있었다.
화끈하게 해 보면 후회가 없다. 연애도 하려면 확실하게 해 보자. 확실하게 해야 후회하든 말든 결정하게 되지 해 보지도 않고 미지근하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 항상 인생이 그 모양이다.
나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물어 볼 필요도 없고 또 내가 남을 알아볼 필요도 없다. 저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찾아볼 필요도 없다. 내가 바른 길로, 내 갈 길로, 이 길밖에 없는 길로 가면 된다. 나에게 ‘이 길밖에 없구나.’ 하는 길로 가면 된다.
그렇다고 함부로 살라는 말이 아니다. ‘이 길 외에 더 좋은 길, 더 합당한 길이 있는가?’ 검토해 보고 없으면 더 나은 것을 골라야 한다. 나에게 이 길밖에 없다면 적극적으로 해 봐야 되지 미지근하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되겠는가. 성경에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하였다. 미지근하면 여기에도 못쓰고 저기에도 못쓴다.
확실하게 해 봐야 후회가 없다. 공부도 실컷 해 보면 후회가 없는데 공부를 안한 사람들이 늘 후회한다. 하려면 확실하게 해 보고 안되면 접고 다른 것을 하면 된다. 공부하다가 안되거든 군고구마 장사라도 하면 된다. 공부를 못하면 군고구마 장사라도 해 보라고 하면 ‘내가 공부를 하면 될 텐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군고구마 장사도 못한다.
확실하게 공부를 못한다고 알면 풀빵 장사라도 할 수 있다. 나는 젊은이들에게 “확실하게 해 보고 안되면 버리라.”고 권하고 싶다. 예수도 믿어보고 안되면 버리면 된다. 확실하게 믿 어 보고 안되면 버리면 된다. 누가 와서 전도를 해도 “나는 이러저러하게 믿어 보았는데 안되었다.”고 하면 뭐라고 하겠는가. 한번 용기있게 해 보자. 용기 있게 믿어보고 안되면 버리면 된다.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그러니 후회없이 살라는 것이다.
나는 늘 전에도 만족했다. 만족하지 않아서 내가 이러는 것이 아니다. 만족했어도 늘 부족한 것이 있어서 그것을 채우려고 예수를 찾았던 것이지 내가 온 길이 틀려서 찾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젊은이들에게 꼭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젊었을 때 한번 해 보자. 확실하게 해 보자. 사랑이 내게 손짓하거든 그 품에 비수가 있을지라도 그 품에 안기자. 사랑이라고 인식이 되거든 죽어도 그 품에서 죽으면 행복하지 않겠는가. 죽더라도 그 품에서 행복하게 죽으면 되지 않겠는가. 뜨겁게 해 보자.
나는 원래 뜨겁지 못한 사람이어서 이런 말을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이지적인 사람이다. 이성으로 인정되지 않으면 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형편이 조여드니까 어쩔 수 없이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집을 떠나온 후에 한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한번도 뒤돌아본 적이 없다. 하나님은 늘 나를 더 좋은 길로 인도하셨지 못한 길로 인도한 적이 없다. 그러니 감사한 일이 아닌가.
절망적인 것 같았는데 더 좋은 길이 열리고 절망적인 것 같았는데 더 좋은 길이 열렸다. 교단에서 4년 동안 진저리나게 싸웠다. 내가 싸운 것은 아닌데 교인들이 막아주어서 4년 동안 버텼던 것이다. 본부에서 나를 밀어내려고 작정을 하고 왔어도 나는 4년을 견뎠다. 견딜만큼 견디다 마지막에는 ‘더 이상 안되겠다. 나도 안되고 교회도 안되고 아무것도 안되겠다.’는 생각에 한 주간 내에 다 결정하고 말았다. 나도 이렇게 단순할 때가 있다. 하도 진저리나게 했기 때문에 주일날 선포하고 월요일에 나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나를 말리거나 잡는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내가 이사 나가는데 도움을 주었다. 돈 한푼도 없는데 나가겠다고 결정했다. 안되니까 그렇게 결정했던 것이다. ‘이래 갖고는 너도 안되고 나도 안되고 다 안되겠다.’ 싶어서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그때 돈 한푼도 없었다. 우리 교회 집사님들이 급하게 10만원을 모아서 방 한칸을 얻어주었다. 그래서 나오게 되었다. 식구가 다섯이었는데 방이 좁아서 세 명도 못잤다. 있을 데가 없어서 우리 집사람은 은혜를 업고 충주 친정으로 내려갔다.
그렇게 나오고 나니 내일 일은 모르지만 얼마나 시원한지 해방감에 너무 좋았다. 나와 있으니까 누가 밥값을 가지고 왔다. 그래서 먹고 살았다. 그 밥값이 다 되어갈 때 누가 와서 나를 CCC에 넣어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내일 일을 모르고 살았는데 다 그렇게 해 주셨던 것이다.
여러분도 꼭 이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말이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살아보고 안되면 빠져나오면 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되겠는가. 한번 해 봐야 되지 평생 어떻게 그렇게 살겠는가.
연애도 한번 해 보고 나니까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만나 봐야 또 가버릴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나는 조건이 채워질 때까지는 결혼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 나이가 서른 다섯이었어도 아예 생각을 안하고 살았다. 친구들은 다 결혼하고 나 혼자 남았으니 잘못 생각했다면 얼마나 비참했겠는가. 옆에서 하라고 했기 때문에 했지만 나는 한번도 비참하다는 생각을 안해 보았다.
집사람이 와서 자기가 기도했는데 내가 그 기도의 응답으로 찍혔다고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이 결혼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이 나를 처음 만나서 한 말이 사진을 보고 한달 동안 기도했는데 자기에게 ‘이 사람이구나.’ 하고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올라왔다고 하기에 황당했다. 한달간 연락이 없기에 안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결정적인 날에 왔던 것이다. 안되는 줄 알고 다른 사람을 소개받고 다음날 광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는데 오늘 왔던 것이다. 그날 안왔으면 나는 광주에 가서 그 사람으로 결정하고 왔을 것이다. 결정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집사람의 말을 듣고 나니까 그 사람을 결정하기 어려웠다. 할 수 없이 그냥 올라왔는데 결국은 기도한 사람이 이겼다.
기도하고 왔다는 말을 듣고 겁이 났다. 저렇게 기도하고 온 사람을 아니라고 해 버리면 나는 뭐가 되겠는가. 하나님 보고 뭐라고 말해야 되겠는가. ‘마지막 하나님께로 가는 문은 열어놔야 되지 그것까지 닫아버리면 갈 데가 없다. 하늘만은 열려져 있어야 한다.’ 그 생각으로 살았다.
나는 한번도 결혼한 것에 대해 후회한 적이 없다. 마음이 딱 맞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맞지 않는 것도 많다. 하지만 ‘내가 결혼을 잘못했구나. 잘못 결정했구나.’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그런 기도를 안했는데 기도했다는 사람을 내가 어찌하겠는가. 기도한 사람에게는 기도 안한 사람이 진다. 지금도 집사람이 들어앉아서 기도한다면 나는 겁이 날 것이다.
여러분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후회없이 살아 보기 바란다. 안되면 안되는대로 후회없고, 되면 되는대로 후회없이 감사하고 살면 된다. 안됐다고 후회하고 됐는데도 다른 미련이 있으면 인생이 피곤하다. 그런 사람 옆에 살려면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무엇이든지 하려면 적극적으로 하고 안하려면 말아야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안된다고 생각돼야 다른 것을 할 수 있지 ‘될 것을 내가 열심히 안해서 안됐구나.’라고 생각하면 다른 것도 못한다. 그러니까 무엇이라도 한번 해 보고 안되면 빨리 다른 자리로 옮기면 된다.
예수도 한번 잘 믿어보고 안되면 교회를 떠나면 된다. 진짜로 해 보고 안되면 떠나면 되지 누가 못떠나게 하는가. 안돼서 갔으면 하나님께 할 말이 있다. “나는 이렇게 해 보았는데 안돼서 나왔습니다.”라고 하면 된다. 하나님이 모르시겠는가. 내가 적극적으로 했으면 하나님이 다 아신다. 그렇게 한 사람에게 “너는 왜 나왔느냐.”라고 물어보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먼저 아시니까 줄 사람에게는 주시고 안줄 사람에게는 안주시는 것이다. 주고 싶어도 받을 사람이 받을 마음이 없으면 못준다. ‘받을까 말까?’ 하고 있는데 어떻게 주겠는가. 인생은 간단하다. 단순하게 살 때도 있어야 되지 항상 생각만 하고 있으면 되겠는가. 단순할 때도 있어야 재미가 있다. 업치락뒤치락해도 재미있는 사람이 있고 깐깐해도 재미없는 사람이 있다. 나도 재미없는 사람이 될뻔했는데 묘하게 재미있는 사람이 되었다. 여러분이 나를 연구해 보면 알 것이다. 나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재미있게 살아 보시기 바란다.
나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할 필요가 없다. 결혼한 어떤 자매가 그런 말을 했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상대방이 나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 말을 듣고 놀랐다. 그렇게 거침없는 자매는 처음 보았다. 너무나 시원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한이 없다. ‘1번은 좋다. 2번은 싫다.’밖에 없는 것이 옹졸해 보인다고 했는데 그런 것을 찾고 있을 필요가 없다. 1번, 2번 가릴 것도 없고 자기 마음에 들면 하고 마음에 안들면 안하면 된다. 이것은 내 인생 철학이고 하나님을 믿어온 역사이기도 하다. 믿으면 확실히 믿고 안믿으려면 말아야 되지 믿는둥 마는둥 하면 안된다.
나는 하나님을 찾고 싶어서 일부러 구했다. 교회도 누구보다 열심히 다녔는데 속에서 뭔가 해결이 안돼서 하나님을 찾았던 것이다. 그런데 딱 못찾게 되니까 교회밖에 갈 데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가 갔다. 다른 데 갈 데가 없어서 교회에 가니 너무 재미있었다. 다른 일을 할 것이 없어서 교회에 가니 할 일이 많았다.
무엇이든지 한 가지를 끝내야 다른 것을 할 수 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면 안되고 확실하게 해야 한다. 안되는지 되는지 모르고 평생 살다가 죽으면 되겠는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 “우물쭈물 하다가 나 이럴 줄 알았다.”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그렇게 살면 되겠는가. 하루를 살아도 확실하게 살면 하루를 천년같이 살 수도 있고 천년을 하루같이 살 수도 있다. 오늘이고 내일이고가 없다. 인생은 재미있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철학책을 보았다. 한문 공부를 했기 때문에 책 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한자가 가득 차 있는 철학책을 보고 나서 ‘나는 절대로 인생을 살면서 광대 노릇은 하지 않겠다. 나는 관객으로서 영원히 관망하고 살겠다.’고 생각했다. 극장에 가서 구경은 해도 광대처럼 뛰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인생은 재미가 없다. 나가서 춤도 추고 뛰기도 해야 재미있지 앉아서 ‘저것은 잘한다. 저것은 못한다.’ 하고 있으면 재미없다. 화끈하게 춤도 추고 해야 되지 내 인생을 내가 사는데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유럽 어디서 보았는데 사람들이 공항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카우보이 복장을 한 사람 몇이 단에 올라서더니 큰 악기를 메고 크리스마스 캐롤을 신나게 불렀다. 그러니까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나더니 빙빙 돌았다. 나도 한번 하고 싶었는데 돌릴 줄 몰라서 못했다. 정말 부러웠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자리 전체가 무대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 결혼식을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잘 안되고 말았다. 결혼식장에서는 그렇게 못하지만 연회실이 따로 있으면 신나게 파티를 벌이지 않겠는가.
확실하고 재미있게 살아 보자. 이것 저것 가리지 말자. 내편 네편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가를 필요없이 재미있게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