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1년(성종 22)∼1553년(명종 8).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여강(驪江)이씨 본관은 여주(驪州). 초명은 적(迪), 중종의 명으로 언(彦)자를 더하여 언적이라 함.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시호 문원(文元) 父는 성균관 생원 이번(李蕃), 母는 경주손씨(慶州孫氏)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외숙인 손중돈(孫仲暾)에게 글을 배웠으며 1514년(중종 9)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다.
<配置圖>
1) 母-찬성공(贊成公) 配位- 月城 孫氏(孫昭의 딸)
2) 父-찬성공(贊成公)
3) 弟-농제공위(聾齊公位)
4) 子-수암공위(守庵公位)
5) 配位- 문원공(文元公)配位- 함양 朴氏
6) 本人- 문원공(文元公)
<神道碑>
가) 유형문화제 제367-2호 지정됨
나) 1586년 대학자 회재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함
다) 글은 손엽선생의 글이다.
라) 전체 높이는 3미터 이며, 비석높이는 185센티 이다.
경주로 낙향하여 살다가 또 연일(延日)로 옮겼는데 어느 때 인줄 알지 못하여 배위(配位)와 분묘와 生, 卒 일자 및 기타 행정이며 관직 등이 모두 기록되어 전함이 없으니 자손의 한이 됨을 어찌 다 말로 하겠는가.
이로써 유추해 보면 양동이씨는 어느 때인가 일족의 중심이 양동마을에서 지금 문원공이 묻혀있는 연일로 옯겨졌다는 말이다. 연일은 양동마을에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후손들에게 일족이 고향을 잠시 떠난 때와 그 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당시 뭔가 다급한 상황이 있었음에는 분명한 것 같다.
아마 그것은 문원공이 정치 소용돌이에 휘말려 유배를 가게 되니 그 여파가 양동이씨 일족 전체에게 미쳐 그들이 고향을 등질 수 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조선시대 상황을 고려해 보면 멸문지화를 당할 상황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이런 이유로 문원공의 시신은 강계에서 경주로 운구되 왔지만 양동마을에는 묻히지 못하고 이곳에 묘가 세워진 것인지도 모른다.
유배생활을 하는 6년동안 그의 서자이자 유일한 친자인 이전인(李全仁)이 지극한 효성으로 그의 수발을 들었는데 그가 죽자 이전인은 그의 시신을 3달에 걸쳐 강계에서 경주로 운구하였다 한다. 이때 이전인이 문원공의 시신을 운구했던 상여의 일부가 지금도 옥산서원에 전해지고 있다.
<達田祭祀> <경북문화재 제202호. 지정일: 1987년 12월 29일>
조선 태종(太宗) 2년(1402)경에 창건한 건물이라고 구전될 뿐 확실한 근거자료는 없으며, 달전재사는 ㅁ자형 팔작지붕의 와가(瓦家)로 정면 6칸, 측면 6칸이며, 건물배치에 있어서 배면(背面)에 누(樓)마루를 위치시키고 좌측 협문으로 통해 정침으로 출입하도록 고려되어 다른 재사 건축에 보기드문 특이한 배치수법으로 되어 있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원래는 승려들이 거주하였다고 전하는 건물이지만 현재는 이언적선생의 묘소를 관리하기 위한 재실로 쓰고 있다.
이 건물은 약 80여년전 까지만 해도 불상(佛像)은 없지만 승도(僧徒)들이 거주하며 묘소를 수호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