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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어이야기
<7> 이미자씨를 흑산도에 모시자
#1 ‘파도’ 타며 간 흑산도
▶목포에서 흑산도, 홍도 등지를 오가는 쾌속선. 파도의 저항력을 줄이기 위해 배 아래 가운데가 뚫려져 있다. 목포에서 흑산도까지는 2시간 걸린다. 흑산도 예리항. 사진=최성환 신안문화원 사무국장
2006년 '홍어의 본향' 흑산도에 갔다.
수도권에서 KTX를 타고 목포로 온 서울 사람들과 함께였다.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동아리 ‘남도투어’가 수도권 사람들을 대상으로 ‘고품격 남도답사’ 프로그램을 하던 때였다.
학생들에게는 역사를 공부하고 현장을 답사하는 기회를 자연스럽게 제공하게 되는 것. ‘가장 편안하면서도’ ‘남도의 맛을 느끼게 하고’ ‘역사학 전공자가 현지에서 안내하는’ 개념이었다.
나는 이 일에 관여했다. 본지 수도권면에 기사가 나갔다. 혹시나 아침 일찍부터 전화할 수 있는 분들을 위해 아침 8시쯤 동아리방에 나갔던 학생이 깜짝 놀랐다. 동아리 사무실에 전화가 수없이 걸려왔기 때문이었다. 모집 인원 35명이 9시30분도 되지 않아 마감되었다. 30여명이 대기 연락처를 남겼다.
▶전남 신안군 대흑산도 예리항에 선 흑산도 조형물. '홍어의 고장' 답게 홍어를 닮은 표지석을 세웠다. 사진=최성환씨
이 때 흑산도와 홍도를 갔다. 목포에서 배를 탔다. 쾌속선, 두 시간이 걸렸다. 모두 들뜬 마음에 얼굴들이 환했다. 선장은 말했다.
“오늘은 파도가 조금 있습니다."
바람이 평소보다 있어서 파도가 높이 일겠거니 했다. 아주머니, 아저씨, 대학생들, 총각들, 아가씨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와 할아버지 등 쾌속선 안은 떠들썩 했다. 즐거움과 유쾌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쾌속선은 파도와 높이를 함께 했다. 파도를 따라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한 없이 반복했다. 서서히 얼굴들에서 웃음이 사라져갔다.
아침 먹은 것이 아래로 쏠리면서 움찔하다가 다시 위로 밀고 왔다. 오르고 내릴 때마다 “아~” “아~” 소리가 절로 났다. 그것도 모두 함께. 쾌속선 안은 어느 듯 ‘운명 공동체’가 돼가고 있었다.
10분, 20분, 30분, 40분, 50분, 드디어 한 시간. 목적지의 절반쯤 갔을 것이다. 이 때부터 상황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래로 쏠렸다’가 ‘다시 밀고 올랐다’가 계속 되었다. 그 주기가 계쏙 짧아졌다.
“워메, 죽겄네? 죽겄어!”
나이든 아주머니들로부터 “죽겠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따, 뭐가 죽겠다고 그러요!”
오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거무튀튀한 선실 안내자는 “무슨 호들갑이냐”는 반응이었다.
“워메, 저 말하는 것 좀 보세. 뭐시라고라!”
“(비닐)봉투는 안 갔다 주고 뭐한다요, 시방!”
그 안내자는 아주머니들로부터 원성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자, 조금만 참으세요. 비닐봉투는 바로 갖다 드리겠습니다.” 라고 했어야 했다. “뭐, 그것 갖고 그래샀소!” 라고 했으니, 한 순간 그가 표적이 될 수 밖에.
나도 20~30분을 남겨둔 때부터는 아랫배에 힘을 잔뜩 주면서 이겨내고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신안문화원 최성환 사무국장은 "오늘은 좀 (파고가) 높네요" 하면서 웃었다.
최 국장이야 전국에서 가장 섬이 많은 신안 곳곳을 배 타고 다니는 것이 다반사니 그럴만한 처지였다. 마침내 흑산도가 보이니 살 것 같았다.
이 뱃길이 30년전에는 7~8시간이 걸렸다. 보통 고기잡이 배로는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그나마 파도가 높으면 오가지 못하는 길이었다. 그 옛날을 생각하면 유배지를 삼을 만한 이유가 충분했다. 뭍과 떨어진 외딴 섬은 멀고 험했다.
#2 흑산도에 이미자씨 노래비가
흑산도 예리항에 내려다 보이는 상라산 고개.
예리항에서 버스를 타고 20여분 거리다. 산 고개에 올라가는 길이 꼭 S자가 고리처럼 이어져 있다. 그 끝에 서 뒤를 돌아보면 예리항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다시 앞쪽으로 하면 섬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보인다. 그곳은 천연습지보호구역으로 사람의 자취가 거의 없는 ‘자연 속의 원시’섬이다.
▶대흑산도 상라산 정상에서 순환도로와 멀리 예리항이 보인다. 산다는 것이 이렇게 굽이굽이일까. 고갯길 마루에 오르면 또 내려가야하는 것이 인생일 것이다. 이곳에선 아주 맑은 날이면 홍도를 볼 수 있다. 오른 쪽 원안이 흑산도아가씨 노래비이다. 사진=정정현
그 고개에 올랐더니 이미자씨 노래가 들렸다.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번 만번 밀려드는데
못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흑산도 사람들의 애환을 가장 잘 보여준 이미자씨의 '흑산도 아가씨'를 기리는 노래비이다. 현장의 느낌은 확연했다. 흑산도에서 들었던 그 노래는 나의 가슴을 여지없이 저미게 했다. 사진=정정현
‘黑山’의 지명에서 연상되듯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의 가슴은 길손의 마음을 충분히 젖게 했다. 육지를 동경하는 마음의 귀착지는 어디일까.
한없이 외로운 달빛은 가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 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왼쪽은 이미자씨가 1967년 노래한 '흑산도 아가씨'의 앨범 재킷. 요즘 홍어에 마음을 쏟다보니 재킷의 흑산도 아가씨의 黑글자가 홍어 모양을 닮은 듯 보인다.
오른쪽은 악보. 정두수 작사, 박춘석 작곡이다. 출전=세광출판사, 한국가요, 1979, 1567쪽
섬사람들의 뭍에 대한 동경과 그리움은 비단 이곳뿐이 아니었다. 이곳 사람들의 깊은 정서와 애환이었다. ‘아가씨’만 검게 탔으랴.
1960년대 조선일보 기자로 남도에서 활동한 김정호 선배가 있다.
그 선배는 남도에서 ‘향토사학자’ 제1세대이다. 수려한 외모와 인자한 웃음, 보통 사람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해박한 향토사 지식과 식견은 정평을 얻은 지 이미 오래이다.
향토사분야 저서만 50권을 헤아리니 전라도 말로 이것저것 아는 체하는 사람들 ‘안다니’들도 ‘족탈불급(足脫不及)’이다. 김 선배는 조선일보 대선배로서 나를 만날 때면 “향토사에 대한 공부를 깊게 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그 선배가 신문사를 옮기고 난 뒤인 1971년 전남일보에 연재했던 ‘섬-섬사람’시리즈는 섬을 헤아리는데 이미 고전이 되었다. 이런 글이 있다.
흔히 섬사람들의 식생활이나 비참함을 표현할 때는 ‘쌀 서말 먹어보고 시집간 처녀 없다’는 말을 쓰는 수가 많다.
섬생활을 잘 모르는 이들이 어쩌다 어떤 섬에 들러 먹고 사는 것을 보고 나면 마치 그 섬만이 쌀이 없어 고구마나 보리만으로 끼니를 잇는 듯이 말하지만 사실은 논이 없는 섬은 모두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전남의 유인도 388개중 면적 10㎢이내이거나 인구 2000이하 섬 300여개가 논이 없이 밭뿐인 셈이다. 평생 쌀 서말 먹어보기도 어려운 섬이 300개는 된다고 봐야 한다.
섬 생활은 고달팠다.
가거도(소흑산도)에서 1982년 조태일, 송기숙, 황석영, 이문구 등 문인 일행을 안내했던 고의숙씨 부부는 지금도 가거도에서 살고 있다. 요즘은 병원 치료 때문에 목포에 나와 있다.
고의숙씨는 가거도에서 인천앞바다로 해산물을 싣고 갔다가 표류, 중국에서 14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다가 1964년에 돌아온 특이 경력의 소유자다.
고씨와 결혼한 김남숙씨가 가거도에 들어간 때가 1976년이었다. 김남숙씨는 1주일 전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분은 정확하게 표준어를 썼다.
“가거도에 들어갔을 때 쌀을 구경하기 조차 힘들었어요. 거의 대부분은 고구마 신세를 졌지요. 보리와 쌀을 먹던 집은 몇 곳이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좋아졌다고 하지만, 그 옛날은 정말 말을 해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기본적인 의식주 조차 어려웠던 곳이 섬이었다.
교육과 문화는 말할 것도 없었다. 흔히 하는 말로 소외지대였다.
산업화가 진척되면서 농촌을 떠난 이들로 서울이 북적대고, “한번 잘 살아보겠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올 때 섬은 변방으로 남아 있었다. 섬을 벗어나고 싶은 바램에는 적어도 그 행렬에 동참하고 싶은 욕구가 뒷받침하고 있었을 것이다.
▶ 가거도(소흑산도)의 새벽 바다 일출. 이 섬은 9.18㎢로, 해안선이 22㎞이다. 목포 남서쪽 136㎞, 흑산도 남서쪽 65㎞ 지점에 있다. 사진=정정현 기자
전광용의 소설에 ‘黑山島’가 있다.
섬 사람의 운명에서 벗어나고픈 그들의 아픔이 잘 그려져 있다.
소설의 부분 부분을 옮겨보면 이렇다.
까막개 사람들은 바다와 싸우면서 바다를 의지하고 살아왔다.
폭풍우를 만나면 바다가 적이었고, 고요하게 잠자는 날이면 바다보다 다사로운 벗은 없었다. 이 섬에서는 일 년의 넉달은 농사가 살려주고 나머지 여덟 달은 바다가 키워주어 미역과 좌반과 생선으로 목숨을 이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나고 바다에서 죽었다. 용바우 아버지도 그랬고, 복술이 아버지도 그러했다.
원수인 바다에 끝없는 저주를 보내면서 바다에 대한 지성은 그들의 신앙이었다.
까막개의 아낙네들은 그리다가 목마르고, 기다리다 지쳐서 쓰러지면서도 바다와 더불어 살았다.(고기잡이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는 남편들을 기다리는 아낙네들이다)
흑산도! 숙명처럼 발목을 매어 잡는 이름이었다.
할아버지의 배가 영산 모퉁이에서 옮겨진 복술이의 눈은 하늘을 건너 아득한 육지 쪽에 얼어붙었다. 해풍에 나부끼는 머리카락 밑으로 저녁 노을에 빗긴 양 뺨은 흠뻑 젖어 들었다.
‘잉아, 복술이 니는 뭍(육지)에 한번 가 봤제’
‘나도 꼭 한번 목포에…’
큰애기 머리채처럼 치렁치렁한 좌반포기를 바구니에 주워담던 그들은 허리를 폈다. 그들의 눈길은 멀리 동쪽 가좌도, 팔금도의 희미한 능선에 머물렀다.
까막개 큰애기들에게는 뭍이 향수(鄕愁)처럼 그리웠다. '인자 뭍에 가 살았으문...'
새댁은 바위 끝에 주저앉으며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매로 복술이를 쳐다보았다. 복술이의 마음도 그러했다. 바다를 떠나서는 살 수 없으면서도 해마다 그 꼴로 되풀이되는 섬 살림이 이젠 진절머리가 났다.
이미자씨가 부른 노래 중에 ‘섬마을 선생님’이 있다.
나는 이 노래를 대학 시절 몇 번 선배들과의 술 자리에서 부른 기억이 있다. 사범대학을 다녔던 당시 ‘선생님의 길’을 생각한 적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림동 막걸리 집이었다.
돌이켜보면 ‘선생님의 길’을 생각하면서 약간의 낭만에 젖어 불렀지 않았나 싶다. 계속 부르지는 않았다. 1980년대 초중반 그 시절 학원가 술집은 그런 낭만성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영등포 신길동에 있는 남녀공학인 대영고등학교에서 2학년 12개반을 대상으로 세계사를 가르친 적이 있다. 정확하게 1년이었다. 당시 학교는 나에게 ‘떠나야 할 섬’이었다.
내 나이 스물 일곱.
아홉살 아래인 고교생들에게 “여러분들의 꿈을 마음껏 펼쳐라, 인생에 도전하라”라는 말을 했지만,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해야 할 내 자신의 목소리였다.
물론 교직 자체, 후속세대의 교육 그 자체에 선생님으로서의 꿈을 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그때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에게 '뭍'은 '운동장 바깥의 사회'였다.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할 때
...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나는 그 때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를 마지막 수업시간에 읇조리고 학교문을 나섰다.
그리고 조선일보에 입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섬마을 선생님’ 노래를 어쩌다 듣게 되면 인생의 교착지였던 ‘섬’이나 ‘갈림길’을 생각하며 옛 생각에 가끔 젖곤 한다.
해당화 피고지는 섬마을에
철새따라 찾아온 총각 선생님
열아홉살 섬색시가 순정을 바쳐
사랑한 그 이름은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연정(戀情)의 색이 있다면 아마 이런 색이지 않을까. 해당화이다. 사진=이덕훈
구름도 쫓겨가는 섬마을에
무엇하러 왔는가 총각 선생님
그리움이 별처럼 쌓이는 바닷가에
시름을 달래보는 총각 선생님
서울엘랑 가지를 마오 가지를 마오
섬 아가씨들이 뭍으로 나가고 싶은 바램이 ‘총각선생님’에 투사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이국헌의 시 ‘흑산도 아가씨’도 있다. 섬을 떠나거나, 남는 사람도 ‘검게 타는 마음’은 한가지. 섬에 태어난 숙명이라 해야 하나.
그리움이 쌓이면 검게 타야 하시더니
육지로 시집보내 주신 울 엄니
가시내가 가시나 시집간다야
시집가던 날 등짝 밀어붙이며
뒤돌아 보지 마라
항시라도 언능 가거라
등쌀에 부는 바람 떨리는 울음소리
뒤 돌아 보지 마라 가시내야 가랑께
훨훨 갈매기 떼 뱃고동 소리 따라서 가시내 시집간다
그리움이 쌓이면 촛대 바위 생각할 랑께
엄니 갈매기 날개짓하듯이 멀어지는 울 엄니
#3 “흑산도에서 이미자씨의 노래를 듣는 게 소원”
흑산도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진리 마을 중턱쯤이었다. 예리항이 내려다 보이는 곳이었다.
그날 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졸업생의 부모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저녁을 들었다. 성찬이었다. 흑산도에서 키우는 전복이 식단이었다. 날 것으로 먹고, 구워서 먹고, 죽으로 먹고 이날 밤은 전복잔치였다. 아들이 다녔던 학과의 선후배들이 서울 손님들을 모시고 왔으니 '칙사 대접'이었다.
▶흑산도 바다 풍경. 바위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어 이색적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데, 좀 더 왼편에서 보면 한반도 모양으로 보이는 각도가 있다. 바다색이 천연 그대로다. 사진=최성환씨
저녁을 마치고는 최성환씨와 예리항을 ‘순찰’했다. 그곳에서 홍어를 아니 먹을 수 있으랴.
바닷가 쪽으로 난 평상에 앉아 ‘본격적으로’ 홍어를 ‘탐식’했다. 작은 항아리가 두 개였다. 하나는 홍어가 어른 손바닥 크기만 하게 썰어져 있었다. 또 하나는 막걸리.
결혼식 날짜를 잡고 서울서 이곳에 왔다는 20대 후반의 한 쌍과도 합석, 술잔을 주고 받았다.
이어서 낮에 흑산도를 일주하는 관광버스를 운전했던 나이가 지긋하신 분과 함께였다. 이 분이 뜻밖의 말을 했다.
“우리 흑산도 사람들의 소원이 뭣인중 아시요?
우리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고 노래를 불러준 이미자씨를 이곳에 모시고 노래 한 번 들어보는 것이요. 그 분은 지금까지 한번도 흑산도를 오시지 않았답니다.
흑산도라면 전국에서 가장 잘 알아주는 홍어가 있지 않소. 홍어축제 할 때 한번 모시면 흑산도가 온통 잔치판이 벌어질거요.
꼭 그런 날이 오기를 우리는 정말로 바란다오.”
▶2007년에 처음 열린 흑산도 홍어축제. 주민들이 홍어를 안주로 탁주를 마시고 있다. 이 때 주민들이 이미자씨를 흑산도에 모시고자 했었다. 사진=최성환씨
아하! 그랬구나. 이미자씨가 흑산도의 땅을 밟지는 않았구나.
지난 2월 이미자씨는 노래인생을 회고하는 방송프로그램에서 “흑산도를 가본 적이 없다”고 했다. 흑산도의 높은 고갯길에 ‘흑산도 노래비’를 세웠던 사람들로선, 꼭 이뤄보고 싶은 ‘희망사항’이었다.
흑산도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알아주었던 이는 다름 아닌 이미자씨였던 것이다. 감사의 표시를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로 한 데 이어, 꼭 한번 모셔 보은(報恩)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싶은 섬사람들의 바램이었다.
이미자씨가 ‘흑산도 아가씨’를 1967년부터 노래했다.
이미자씨는 1959년 19살에 ‘열어홉 순정’으로 데뷔했으니, 가수인생 50주년을 훌쩍 넘었다. 그의 가수 인생길에서 8년만에 부른 노래이다. 그가 부른 2100곡의 노래중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등과 함께 손꼽히는 곡이다.
▶이미자씨 노래 인생 50년이 이 사진들에 담겨 있다. 오른쪽 아래는 인생과 노래의 스승인 작곡가 박춘석씨.
나는 흑산도를 갔다 온 뒤 나름대로 이미자씨의 흑산도 방문건을 추진한 적이 있었다. 신안군과 함께 였다. 그러나 여러 사정에 따라 성사되지 못했다. 아쉬움이 아직도 남아있다. 마치 흑산도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지고 있는 것 처럼.
그 때 흑산도의 밤, 바닷가에서 자리를 옮겨가며 ‘쏘주’를 마시며 ‘흑산도 아가씨’ 얘기를 나누었던 그 분의 다정하고 인자한 표정이 지금도 선하다.
다음 <8>편은 '남도인들의 술독 빼는 비결을 공개한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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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자 몇자는 볼 수가 없그마이.. 워낙 긴 글이라 스페이스바를 움직여서 읽을 수가 없네그려... 하지만 사진과 함께 홍어에 본향 흑산도를 나녀온 느낌이 든다. 가수 이미자선생의 노래는 10곡이상 부를 수있는데...ㅋㅋㅋ 암튼 늦은 시간에 잘 읽었네..
몇년전에 남편 사진 찍는데 따라 갔다 왔음...
앨범재켓의 黑자가 홍어를 닮은듯 하다에 동감 ㅎㅎ~배멀미를 내가 하는듯한 착각을 나도 겪었음에 팍팍 꽂힌다..한반도 몬양을 보여주는 구멍 뚫린 바위도 생각나고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도 기억에 선하네..머무는 동안 노래가 계속 흘러나왔었지~아직도 이미자씨가 흑산도를 안갔나~?글탐 다시 경안친구가 추진해보지 왜 ..나도 아쉽네 그랴~잘 읽었쑤^^
연정의 색이 있담 해당화색 일거란 표현...아주 멋진표현이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