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문학 제17집(2009)에 실었습니다.
안경 착용 이십 주년/ 심양섭
나는 컴퓨터 화면 상에서 무엇을 읽기보다는 인쇄해서 읽는 것을 좋아한다. 프린터 잉크를 너무 많이 쓴다고 아내에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그 버릇을 못 고친다. 컴퓨터 황제 빌 게이츠는 “종이 없는 세상”(paperless world)의 도래를 선언했지만, 정작 그가 세운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직원들도 종이를 많이 쓴다고 한다.
인쇄해서 읽되 종이도, 잉크도 아끼는 방법은 없을까. 이면지를 많이 사용하고, 인쇄할 때 ‘모아 찍기’를 하면 된다. ‘모아 찍기’는 종이 한 장을 이등분, 혹은 사등분하여 한 장에 두 쪽 내지 네 쪽을 함께 인쇄하는 것이다. 쪽수가 늘어날수록 글씨 크기는 작아진다. 한 장에 네 쪽을 인쇄해 놓으면 글씨가 깨알만하다. 그걸 읽으려면 힘이 든다. 그래도 수십 쪽 짜리 논문을 읽을 때는 그렇게 해서 읽는다.
그러면 주위에서 “그게 보이느냐”고 묻는다. 나이가 오십 줄에 접어드는데도 아직은 작은 글씨가 보인다. 내 친구 여러 명이 벌써 노안이 와서 책을 못 읽는다. 나보다 젊은 사람들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비록 내가 안경을 썼고, 조금씩 그 도수도 높여가지만, 그래도 가까이 있는 글씨가 보인다는 게 참 감사하다.
문제는 조금 멀리 있는 게 잘 안 보인다는 것이다. 어쩌다 교회 예배 때 뒷자리에 앉게 되면 멀리 화면에 있는 성경구절이 흐릿하게 보인다. 가까이 있는 게 잘 보인다고 좋아했던 것이 부끄러워진다. 매사 음양(陰陽)이 있는 법이거늘, 가까이 있는 것을 잘 보면서 멀리 있는 것도 잘 보기를 기대했단 말인가.
일 년 동안의 미국 연수를 앞두고 집 앞 안경점에 들러 선글라스를 하나 맞추면서 시력검사를 했더니 두 눈 사이의 시력차이가 더 커졌으므로 한 쪽 안경알의 도수를 좀 높여야 한다고 했다. 잠시 후 도수를 새롭게 조절한 안경을 썼더니 안경점 안팎의 풍경이 한결 또렷하다. 멀리 있는 글씨도 전보다 잘 보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가까이 있는 글씨가 어리어리하다. 안경을 괜히 고쳤다는 후회가 엄습했다. 원거리와 근거리를 함께 잘 볼 수 있는 누진다초점렌즈(progressive addition lens)가 있다고 하니 다음에는 그것으로 맞춰야겠다.
내가 안경을 처음 낀 것은 이십 년 전 운전을 시작하면서이다. 눈이 나빠서가 아니라, 신호등과 이정표 같은 것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였다. 일종의 보안경(保眼鏡) 개념이었다. 안경알은 꽤 큰 ‘둥글린 사각형’을 쓰다가 좀 작은 타원형으로 바꾸고, 안경테는 금테, 뿔테, 무테, 반무테를 오가다가 지금은 반무테를 쓴다. 작고 예쁜 안경을 쓰고 싶지만 내 큰 얼굴에는 안 어울린단다. 어떤 때는 유행하는 안경테로 좀 튀고(?) 싶지만 아내의 반대로 주저앉고 만다. 친구도 ‘이십 년 친구’는 많지 않다. 그러고 보면 안경은 내 친구 중에서도 아주 특별한 녀석(?)이다.
그동안 시력은 퍽 나빠졌다. 안경을 썼을 때와 벗었을 때가 예전에는 별로 다르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뭇 다르다. 그래도 안경을 일찍부터 쓰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안경사협회 홍보대사는 아니지만, 안경을 쓰면 눈이 나빠진다는 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내 고향 청송, 그 중에서도 내가 태어나 자란 부동면 부일 동네에는 안경을 낀 사람이 없었다. 전기도 안 들어오던 두메산골이었다. 안경 낀 사람을 중학교 들어가서 처음 보았다. 영어 선생님이었는데 세수할 때 안경 벗은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말(韓末) 외국인 선교사가 안경을 끼고 나타났을 때 그 때 조선 사람들이 받았던 충격이 바로 이렇지 않았을까. 그런 촌놈이 이제는 안경 없이 살 수 없게 되었다. 아내도, 아들도 안경을 낀다. 안경가족이다.
나는 전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책을 읽는다. 걸어 다니면서도 읽는다. 밥 먹으면서도 읽는다.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read. Therefore I am)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눈은 내게 소중하다. 읽을 수 없게 되는 순간 나는 사실상 죽음에 들어가는 것이다. 늙어서 신문을 못 보고 라디오를 귀에 꽂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재미로 살까 싶다. 하지만 나도 곧 그런 때를 맞게 된다. 그 때면 독서용 안경을 따로 맞추어야 할 것이다.
노안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시나브로 다가온다. 연전에만 해도 조수석에서 지도를 보며 길 안내를 잘 하던 아내가 이제는 지도를 잘 못 본다. 결혼 다음 해에 내가 안경을 맞추었으니 우리 부부의 결혼 햇수는 나의 안경이력과 비슷하다. 지난날 내가 아내를 고생시킨 까닭에 아내의 눈이 나빠진 것만 같아 미안하다.
어떻게 시력을 유지할 수 있을까. 뾰족한 수는 없다. 정기적으로 시력검사를 받는 수밖에 없다. 안과와 안경점을 부정적으로 생각지 말고 오히려 친하게 지내야 한다. 안경이 헐거워졌을 때 안경점에 가면 그냥 조여 준다. 한 번은 안경 조이는, 아주 작게 생긴 드라이버도 주기에 받아왔다. 안경 닦는 헝겊도 언제든지 공짜로 얻을 수 있다. 요즘은 안 보이게 된 눈도 보이게 해 준다. 개안수술이 그것이다. 날로 발달하는 안과영역의 의학기술, 그리고 문명의 이기(利器)인 안경, 그 혜택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눈을 보호하려면 과로를 피해야 한다. 눈을 혹사하면 안 된다. 잠은 눈을 위한 보약이다. 군대시절 백 킬로미터 행군을 할 때면 시간마다 십 분씩 쉬는데 그 때는 잠이 안 와도 눈을 감는다. 이른바 가면(假眠)을 취한다. 그것이 피로를 푸는 데 상당한 효과가 있다. 건강을 위해 금식(禁食)이나 절식(節食)을 하듯이, 눈을 위해 인터넷과 텔레비전 같은 미디어 금식도 함이 어떨까. 눈을 생각하면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눈을 찡그리지 말고, 휴일이면 산이나 강으로 가서 멀리 바라보라는 조언도 참 그럴싸하다. 웃는다고 눈이 좋아지진 않겠지만 찡그리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 않겠는가.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자연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을 보면, 눈은 마음의 등불이므로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말한다(마태복음 6장 22절). 안경을 닦지 않으면 눈이 잘 안 보이고, 그러면 마음도, 영혼도 흐려진다. 나는 날마다 안경을 찬물에 씻어준다. 안경을 닦을 때는 휴지를 쓰지 않고 꼭 안경 닦는 헝겊을 쓴다. 눈이 곧 보배이며, 안경은 곧 내 눈이다.
날마다 닦아야 하는 것 외에도 안경은 여러 모로 불편하다. 더운 공기를 만나면 안경은 뿌예진다. 운동할 땐 땀이 눈썹을 타고 안경알에 묻어나 시야가 흐려진다. 자주 헐거워진다. 나는 코가 높지 않은 탓에 안경이 곧잘 흘러내린다.
그러나 안경과 선글라스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한국 같이 햇빛이 강한 나라에서 선글라스는 눈을 보호하는 데 요긴하다. 그런데도 나는 선글라스 착용하는 게 영 습관이 안 돼 있다. 피부를 위해 선크림은 바르면서 더 중요한 선글라스를 까먹는 게 우습다. 아내는 외출하거나 여행 갈 때 어김없이 선글라스를 챙기고 모자까지 쓰는데 나는 두 가지 다 빼먹는 수가 많다. 아내가 자기 눈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내 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일까. 안경과 선글라스로 눈도 보호하고 멋도 추구하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