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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간화선 수행체계 개관
4. 간화선과 묵조선의 융합
송대 이후 조동종과 임제종 두 종파는 ‘어떤 수행이 수행자에게 가장 적절한가?’라는 문제를 두고 끊임없이 논쟁을 벌여왔다. 그 근본에는『육조단경六祖壇經』의 핵심 주제인 "돈수頓修" 문제가 있다. 임제종에서는 조동종의 ‘지관타좌’를 신수의 ‘마음의 거울을 닦는’ 종류의 “점오漸悟”라고 보았고, 거꾸로 조동종에서는 지관타좌야말로 바로 육조혜능이 세운 “돈오頓悟”의 원리에 부합하는 수행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대로 수행에 있어 돈오와 점오가 삼팔선처럼 딱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수행법 또한 두부 자르듯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다. 두 가지 수행을 다 경험한 수행자들이 나오고, 서로의 장단점이 드러나면서 두 종파의 융합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1) 일본의 조동종과 임제종
일본의 조동종 선사인 순류 스즈키1 선사는 '선은 일상생활에 대한 집중이고 수행 자체가 선의 실현이지, 어떤 확철대오나 불성을 성취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수행이란 '묵묵히 앉아 자신의 타고난 불성을 관조하는 좌선을 통하여, 모든 사람이 이미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완전한 불성을 자연적으로 드러내는 데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정적靜寂”, 즉, ‘고요하여 괴괴함’의 달성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다.
선은 어떤 신나는 일이 아니고 날마다 벌어지는 일상생활에 대한 집중이다. 만약 당신이 너무 바쁘거나 흥분되어 있다면 마음이 거칠어지고 흔들리게 된다.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가능하다면 항상 고요하고 상쾌한 마음을 갖도록 노력하고 흥분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중략)
우리의 방법은 어떤 것을 얻기 위해서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참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수행이다. 마치 내가 점진적인 성취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사실 이것(조동종)은 신속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수행이 차분하고 평상적일 때 일상생활 자체가 바로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366. 그 전체적인 내용은 순류 스즈끼 지음, 강연심 옮김,『禪 (Zen Mind, Beginner's Mind) 』참조.)
일본 임제종 야스타니 하쿠운(安谷白雲, 1885~1973)2 선사는, '견성이 없다면 부처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수행자가 부처의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하면 된다는 말은 애초부터 성립이 되지 않는 난센스'라고 말한다. 조동종에서 계를 받기도 한 야스타니는 하라다 다이운 소가쿠(原田大雲朝岳, 1871~1961)의 문하에서 18년을 수행, 1938년 공안수행을 마치고 1943년에 인가를 받았다.
그는 정규의 임제종 공안수행과 더불어 조동종 공안집 공안수행 또한 수행과정에 포함시킨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는 조동종 방식을 도입, 조동과 임제 두 전통의 장점을 결합하였다. 야스타니 수행체계의 원리는 그의 미국인 제자 필립 카플리어(Philip Kapleau, 1912~2004)가 편집한『선의 세 기둥 The Three Pillars of Zen』에 소개되어 있다. 야스타니의 수행체계를 세 단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정력定力을 닦고 본질적 부처됨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는 것에 집중하는 예비적 수행 (호흡을 세는 것, 호흡을 따르는 것, 지관타자)
2. 스스로의 본성을 보는 ‘단박(頓)’의 경험(대의정에 의해 촉진되는 견성)과 이에 뒤따르는 공안참구라는 과정을 통해 그 직관을 명확히 하고, 심화시키며, 통합하는 ‘점진적(漸)’수행.
3. 수행자의 존재와 일상적 삶 전체에 걸친 그 깨달음의 실현(무상도의 체현).
백은의 임제종 수행전통을 따르면서도 조동종 수행법인 지관타좌를 포함시키고 있다. 주목할 점은 공안 수행에 있어 ‘돈오’를 중시하면서도 공안 참구에 있어서는 규봉종밀(圭峰宗密, 780~841)의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론을 들어 “점진적 수행”이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종래 선종에서 기피하던 단어를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실재로 일본의 임제종 간화선수행은 공안참구의 과정이 길고 복잡할 뿐 아니라, 사다리 형식의 점진적 수행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단순히 사실을 사실대로 표현한 말일 뿐이다. 공안참구 수행의 전체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초관初關: 무자無字 공안
2. 점검질문(찰소拶所)
3.『무문관無門關』: 무문혜개(無門慧開, 1184~1260)가 자신의 비평과 시 그리고 스스로 고안한 공안을 추가해서 1229년 편집한 48개의 공안집
4.『벽암록碧巖錄』: 설두중현(雪竇重顯, 980~1052)이 모은 100개의 공안과 이에 대한 송고에 원오극근(園悟克勤, 1063~1135)이 수시, 착어, 평창을 더해서 편집한 공안집
5.『종용록從容錄』: 굉지정각(宏知正覺, 1091-1157)이 모은 100개의 공안과 이에 대한 송고에 만송행수(萬松行秀, 1196~1200)가 수시, 착어, 평창을 더해서『벽암록』을 모델로 편집한 공안집으로 조동종에서 주로 사용됨.
6.『전광록傳光錄』:옥산소근(莹山紹瑾, 1264~1325)이 편집한 조동종 법맥의 전등사
7. 동산洞山의 오위五位 : 정중편正中偏, 편중정偏仲正, 정중래正中來, 겸중지兼中至, 겸중도兼中到
8. 계戒 : 도원의『불조정전보살계교계수문佛祖正傳菩薩戒敎戒受文』에 기초함; 세 가지 관점에서 닦는 삼보三寶, 삼취정계三聚淨戒, 십중계十中戒.
전체 과정을 살펴보면 묘심사파에서 갈라져 나간 임제종 향악사파向嶽寺派 코지마 타이잔[소도대산小島岱山]3 스님이 제시한 향악사 스님들의 수행과정과도 대부분 일치한다. 코지마 타이잔으로부터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자.
일본 임제종에서 獨參은 다음과 같은 내용과 순서로 실천되고 있다. 먼저『無門關』제1칙인 趙州無字를 참구하는 데서 시작한다. 무자공안에는 찰처拶處가 약 250개 있고 (白隱의 隻手音聲의 공안과 그 拶處도 포함된다), 著語는 약 40句 있다. 제2칙의 百丈野狐부터 제49번째의 雜則·黃龍三關까지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이 약 100군데이고, 著語는 약 80句가 있다.
다음에『碧巖錄』에 들어가기 전에,「碧前의 雜則」으로서『갈등집葛藤集』이나『짐우집䲴羽集』에서 약 20則정도 뽑아서 참구한다.『碧巖錄』에서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180個所이고, 착어는 약 100구 있다. 다음에,『臨濟錄』에 들어가기 전에「臨前의 雜則」으로서『葛藤集』에서 약 25칙 정도 뽑아서 참구한다.『臨濟錄』에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이 약 75개소이고, 착어는 약 40구 있다.
다음이 五位十重禁인데, 그 전에 「臨後의 雜則」으로서 葛藤集에서 종래 투과하기 어렵다고 간주되어온 칙을 중심으로 약 25칙 정도 뽑아서 참구한다. 五位에서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100개소이고, 착어는 약 10구 있다.『十重禁』에서는 견처를 보여야 할 곳은 약 70개소이고, 착어는 약 15구 있다. 최후는『허당록대별虛堂錄代別』인데, 100칙이 있다. (코지마 타이잔 (小島岱山/ 臨濟宗 向嶽寺派 向嶽寺 僧堂師家)「일본 禪界의 현황과 전망 日本の禪界の現狀と展望」(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 168.)
결국 야스타니의 수행체계는 임제종 간화선 수행에 조동종 수행체계를 결합된 형태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5~8번의 조동종 수행을 제외하면, 일본 임제종 묘심사파의 수행과정과 그 맥을 잇고 있는 현 선도회 수행체계와도 같다.
주목할 점은 야스타니 선사는 종래 묵조사선이라고 기피하던 지관타좌를 수행에 도입하면서, 지관타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구분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조동종에서 하는 지관타좌와 임제종에서 모든 공안을 투과하고 하는 지관타좌 수행을 다르다고 구분해서 본 것이다. 같은 지관타좌 수행이지만 그 깊이의 차이점을 지적한 것이다.
(1) 무자無字화두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마음을 가라앉히고 정력定力을 기르는 데에 유익한 예비적 수행
(2) 공안 참구의 전 과정을 완료한 후에 하는 수행의 절정絶頂
수행을 하기 전에 하는 지관타자(1)와 견성을 체험하고 나서 하는 지관타좌(2)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는 이 과장을 모두 거친 수행자라야 알 수 있는데, 그는 체험후 이 둘을 구분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선도회 간화선 수행을 하면서 "모든 화두를 다 타파하고 나면 뭘 참구해야 하지?"하는 것이 화두가 된 적이 있었다. 간화선 수행을 하다 보면 화두가 없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생활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를 참선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다는 선배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럼 고민이 없다면? 지금은 그 의심이 사라졌지만 간화선 수행자는 구조적으로 한번은 겪게 되는 문제라고 하겠다. 간화선 수행 이후 화두 없이하는 좌선수행이 바로 야스타니가 말하는 두 번째의 지관타좌(2)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이 경지에 이르면 마음을 집중하려는 노력(1)없이도 자연스레 무심히 앉아 있을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2) 타협과 융합
초기 임제종과 조동종은 주로 화두를 갖느냐 갖지 않느냐를 근거로 비교되고 있지만, 하버드대 제임스 랍슨 교수는 그 차이점을 단순히 "문화적 배경"이라고 정의하였다.
“거기에 앉지 말고 어떤 일을 해라.” 이것은 임제선의 수행 방식으로 수행자들이 화두를 드는 능동적인 신앙의 탐구수행이다. “어떤 일을 하지 말고 거기에 앉아 있어라.” 이것은 조동종의 수행방식으로 수행자들이 일상생활의 흐름에서 자리를 잡고 계속적으로 본래의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고 나타내도록 하는 수행이다. 이는 문화적 배경의 차이로 형성된 간화선과 조동종의 상반된 차이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제임스 랍슨 James Robson, Harvard University,「大死大悟의 선: 종교유형으로서의 간화선에 대한 고찰 Born-Again Zen Again: Reflections on Kanhua Chan as a Religious Style」(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371~372.)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어떤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두 선종 종파의 특성을 이론이 아닌 평범한 한 마디로 갈무리하고 있다. 화두를 드느냐 들지 않는냐는 방식의 차이일 뿐 결론은 같다는 의미로 들리기도 한다. 이어 교수는 향후 간화선과 조동종 중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이며, 호소력이 있는지에 대해 보다 더 심층적인 연구를 필요하다고 결론짓고 있다.
일본에서 임제와 조동의 사원 모두에서 수행을 했던 수행자이자 두 종파 모두에서 사용하는 계율, 의례 문헌, 그리고 의례교범을 수집, 연구했던 학자의 입장에서, 필자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현재에도 불교 수행과 관련해서 임제종과 조동종이 공유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차이점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그리피스 포크 T. Griffith Foulk, 사라 로렌스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도원道元이 사용한 여정如淨의 ‘지관타좌祗管打坐’와 다른 공안들 Rujing’s “Just Sit”(shikan taza祗管打坐) and Other Kōans Used by Zen Master Dōgen」(2011 제2회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2 <간화선, 그 원리와 구조>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종학연구소) p. 31.)
역사적으로 보면 선종이 일본에 전파되었을 때, 임제종은 조정과 막부 장군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크게 흥성한 데 반해, 조동종은 지방의 영주, 하급무사, 농민 등 피지배층에 퍼져나가 “임제장군臨濟將軍 조동사민曹洞士民”이란 말이 있었다고 한다. 그 전통은 오늘날 까지 이어져 임제종에서는 뛰어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어 그 맥을 잇고 있는데 반해, 조동종에서는 조직을 통하여 교세를 확장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인물人物의 임제, 조직組織의 조동”이라는 말이 회자膾炙되기도 한다.4
적어도 定慧는 손에 들어오기 때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든가 ‘집중력이 증가했다’든가 ‘장대한 기분이 되었다’라는 自利의 세계는 체험할 수 있으므로, 오로지 자기의 행복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선이고, ‘보통의 인간이야말로 가장 훌륭하다’라든가 ‘좌선을 하자마자 바로 佛인 것이다’라고 설하기 때문에 대중에게 맞는 선인 것이다.
두뇌를 사용하기 싫고, 힘든 것은 하고 싶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 즉 남의 뒤를 쫓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선, 일반서민용의 선이 只管打坐의 道元禪이고, 지도자계급·지식계급·엘리트층 상대의 선이 간화선이라는 식으로 구분되어졌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이와 같다. 때문에 조동종이 압도적으로 신자수가 많다. (코지마 타이잔(小島岱山/ 臨濟宗 向嶽寺派 向嶽寺 僧堂師家)「일본 禪界의 현황과 전망 日本の禪界の現狀と展望」(2010 간화선 국제학술대회 Day 1 <간화선, 세계를 비추다>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pp. 174~176.)
두뇌를 사용하기 싫어하고 힘든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선, 일반서민용 선이 조동종의 도원선이고, 지도자계급, 지식계급, 엘리트층 상대의 선이 간화선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임제종 향악사파 스님의 말이라서 어느 정도는 편파적인 발언이라고 하겠지만, 사실 조동종은 도원이후 도원과 비교되는 그렇다할 제자가 없어 그 명맥만을 유지하다가 요사이 교세를 다시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승려가 세습되기도 하는 일본의 경우, 조동종 사찰에서 태어나 조동종 승려가 된 경우도 있고, 학자로서 수행자로서 활약이 두드러지는 조동종 승려도 있어 그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다. 도원의 철저한 수행정신이 오늘날까지 빛을 발하고 있고, 그가 만든 엄격한 영평청규永平淸規가 지금까지 지켜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수행이란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얻어 자비를 실천하고 자유자재한 삶을 사는데 있다고들 한다. 그러므로 어느 수행법이 좋은가? 어느 수행체계가 잘 짜여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이것을 규정하는 순간 거기에 빠지거나 그 프레임에 갇혀 발전을 저해하며 안목이 제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마다 그 성향에 따라 인연에 따라 그 배경에 따라 맞는 수행법이 다를 수도 있다. 기본으로 돌아가 숙고해보아야 할 것이다.
종교상, 비록 어떠한 종교이든 아(我)라는 것은 없애야한다. ‘아’가 있으므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이 생기는 것이다. ‘아’를 없애버리면 거기에 참다운 종교의 빛도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어느 종교에서나 가르치고 있는 것인데, 종교인처럼 자만심이 많은 사람도 없다. 그래서 불교에도 여러 종파가 생겨서 서로 헐뜯고 있다. (鈴木大拙 著/金知見 譯,『禪, 그 世界』 pp. 112~113.)
필자가 보기에 둘의 차이는 단순히 “어느 종파에 입문하였느냐!” 로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입문한 후 수행자의 노력여하에 의해 결실을 맺을 뿐이지 종파의 명칭에서 기인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수행자에 따라서는 둘을 넘나들면서 진리가 무엇인지 온 힘을 다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사정에 따라 혹은 인연 따라 이것이 안 되면 저걸로, 저것이 안 되면 이걸로 라는 열린 마음으로 수행에 임하는 자세가 더욱 중요할지 모르겠다. 깨달음을 향한 마음이 시들지 않는다면 어떻게든 탁마가 이루어질 것이고 노력여하에 따라서 진리는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종파는 오랜 세월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단점을 보완, 상생, 발전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요약要約하자면, 처음 무문혜개 선사가 당시 유행하던 화두들을 모아『무문관無門關』을 엮을 때는 그 화두에 대한 정답(경계) 또한 어느 정도 확립되어 있었을 것이다. 수행자를 지도할 때 소위 모범답안이라고 하는 것을 바탕으로 점검이 이루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수행체계는 임제종 간화선이 사자전승하면서 같이 전해져 내려왔을 것이다.
그러나 종주국 중국은 청대에 이르러 이미 일화오엽一花五葉의 각종 특색을 잃어버렸을 뿐 아니라, 원元·명明 시기까지 존재하던 임제와 조동의 법맥 또한 그 전통이 오롯이 계승되지는 못했다. 우리나라도 정치적인 이유 등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고, 타의에 의해 통불교로 뭉쳐져 종파는 구분조차 어렵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여건이 좋았던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전해진 수행법이 계속 유지 발전하면서 오늘에 이르렀고, 임제종과 조동종의 경계 또한 허물어지면서 두 수행법의 장점이 결합된 형태로 진화 발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 날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 선사가 약산유엄(藥山惟儼, 745~828)에게 물었다.
“너는 거기서 무얼 하느냐?”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가만히 앉아 있느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생각하면 그것은 무엇을 하는 것이 됩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하니, 하지 않는 그것은 무엇인가?”
“일체의 성인들도 모릅니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한다.’5고 한다. 진화는 유전적 다양성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으며(다윈), 섞여야 건강하고 섞여야 아름답다.6 임제종 수행과 조동종 수행도 합해져야 훌륭하다. 화두 공부하는데 순수를 주장할 필요는 없다. 융합融合이 필요한 것이다. 방법에 있어서도 보수적인 수행풍토를 떠나 사이버 수행 또한 고려되어야 하겠다.
1. 스즈키 순류(鈴木俊降, 1904∼1971)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영적 스승 중 한 사람으로 그는 서구 최초로 조동선 선원을 설립했습니다. 그의 저서『선심초심禪心初心(Zen Mind, Beginner's Mind)』에서 ‘선심禪心’이란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을 뜻하며, ‘초심初心’이란 모든 것에 대해 열려 있는 마음을 뜻합니다.『화엄경』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이란 말이 있습니다. 곧 “처음에 올바로 마음을 일으키면 바로 정각(깨달음)을 성취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선가禪家에서는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라 하여 단박에 깨달음의 경지에 든다고 하는데, 그 만큼 초심은 거의 절대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법보신문 발행호수 1146 호 / 발행일 : 2012-05-16, 스즈키 순류 Zen Mind, Beginner’s Mind <선심초심(禪心初心)>에서 인용.
2. 야스타니 하쿠운 Yasutani Hakuun(安谷白雲, 1885~1973) 선사는 전후 미국 및 서구에 선(불교)을 전파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삼보교단三寶敎團 창설하였다. 야스타니 하쿠운은 전시 군국주의에 적극 협력한 바 있다. 그는 “당연히 우리는 죽여야 하며,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죽여야 한다. 우리는 용감하게 싸워야 하고 적군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죽여야만 한다. 그 이유는 자비와 충성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선은 돕고 악은 처벌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살생을 하는 순간 죽이되 죽이지 않는다는 진리를 마음에 품고, 우리의 눈물을 삼켜야만 한다." (전쟁과 테러리즘, 데미언 키언, 허남결 번역, 불교평론 2007년 12월 인용)고 하였다. 현재 삼보교단의 우두머리인 구보타 쥰은 2001년 봄 선불교지도자 야스타이 하쿠운이 전시에 행한 “그릇된 말과 행동”에 대해 사과하였다.(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 지음, 정혁현 옮김,『전쟁과 선, Zen At War』 p. 26).
3. 코지마 타이잔 Kojima Taizan[소도대산小島岱山, 1947~ ] 스님은 임제종 향악사向嶽寺 파에 속한 스님으로 중국 무한武漢대학 철학부 명예교수. 동경대학 문학부 인도철학과 졸업 및 동경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박사논문은「중국 오대산계 화엄사상의 연구(中五台山系 華思想(李通玄)の 硏究)」. 주요 저서로『신화엄론 新華厳論 자료집성新華厳論 資料集成』,『동아시아불교학체계 자료집성(東アジア仏敎学体系 資料集成)』외 다수가 있다.
4.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 p. 53.
5. Nature abhors pure stands. 윌리엄 해밀턴(William Hamilton, 1936~2000)이 한 말이다.
6. 우리가 순수하다고 믿고 있는 자연은 생각만큼 그리 순수하지는 않다. 즉, 인류를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다른 종류의 것들과 유전자를 섞어왔으며, 현재의 모습은 그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진화(Evolution)’는 다른 말로 하면 ‘다양화(Diversification)’라고 할 수 있다. (아론 지브 지음, 김순미 옮김,『우월한 유전자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이 책의 감수 및 추천사를 쓴 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는 ‘혼혈의 순수성’을 주장한다. 섞여야 건강하고, 섞여야 아름다우며, 섞여야 순수하다고 설명한다. (EBS 특강, 공감의 시대, 왜 다윈인가, 2012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