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문동(普門洞은 안암동과 안감내(“즉,, 성북천)을 경계로 하고 있다, 1955년 이전에는 동대문구 신설동이 였는데 안감내 서쪽지역 일대에 위치한 보문동 3가 168번지에 보문사(普門寺)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조선 초부터 이곳은 한성부에 속했는데 고종 4년 1867년에 발간된 육전조례에 보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신설계(新設契)로 칭하였고 갑오개혁 때에는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 동문외계 신설동이라고 했다,
한일합방후 일제(日帝)는 1911년 4월 1일(경기도령 제3호)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신설계 탑동(塔洞) (탑동을 탑골 승방(僧房)이라고도 부른다,) 우선리(隅仙里)로 칭하다가 1914년 4월 1일(경기도령 제1호)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로 명명했다, 그 후 1936년 4월 1일(총독부령 제8호) 일제가 경성부 구역을 확정할 때 경성부에 편입되어 신설정이 되었는데 1943년 6월 10일(부령 제163호) 구제 실시로 동대문구에 속했다, 광복 후 1946년 10월 1일 신설정을 신설동으로 개칭되었다, 이어서 1955년 4월 18일(시조례 제66호) 동제 실시 때 신설동에서 보문동으로 분리하여 보문 1, 2, 3, 4, 5, 6, 7가로 구분하였는데 1975년 10월 1일(대통령령 제 7816호) 구, 동의 관할구역을 재편할 때 신설동 일부를 보문동 6가에 편입시키고 보문동 1가~7가를 성북구에 소속시켜 현재에 이르렀다,
보문동은 보문동 1가,~7가 일대의 행정을 담당하고 있는 동장관할구역 명칭이다, 이 동은 1936년 4월 1일 경성부에 편입되고 나서 고사남부정회(高砂南部町會)와 고사북부정회로 불리워졌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1946년 10월 1일 고사북부동회 고사남부동회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후 1955년 4월 18일(시조례 제66호) 동제 실시로 동대문구 보문제1동과 보문제2동사무소로 개칭되었다, 이 당시 보문제1동은 보문동 4, 5, 6, 7가 일원, 보문제2동은 보문동 1, 2, 3가 일원을 관할하였다, 1975년 10일 1일에는 성북구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7월 1일(시조례 제1413호) 서울시가 인구 감소추세에 있는 동을 통폐합에 따라 보문동1, 2동은 보문동사무소로 되어 현재에 이르렸다,
보문동은 동쪽에는 안암동 산록 서쪽은 삼선동 산록 사이에 있어서 지형이 긴 골짝기로 되어 있고 큰 도로도 신설동에서 돈암교로 나가는 보문로가 있을 뿐 사통팔달의 시가지로서의 교통 조건은 갖추어 있지 않았으나 인촌로를 연결하였고 보문사거리 와 종로구 숭인사거리를 2002년 12월 동망봉(東望峰)산을 뚫어 동방터널이 6호선 위로 개통되어 교통이 원활하여 졌으며 2000년에는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어 보문역이 생기고 지하철역 옆에는 1961년 제래시장으로 등록된 보문시장이 있고 성북전화국(보문동 5가 159-3)이 있고 성북등기소(보문동 5가 35-2)는 2000년 길음동에서 이전하였다, 교육기관으로는 1965년 12월 1일에 설립한 대광초등학교(보문동 7가 111번지), 1948년 11월 1일에 설립한 동신초등학교(보문동 3가 산 11번지),가 있다,
※ 보문사(普門寺)
이 동의 명칭이 된 보문사는 탑골(塔洞)에 있어으므로 탑골 승방이라고 불리우던 절로서 비구니(比丘尼) 즉 여승(女僧)들이 거쳐하는 조용한 암자이다,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된 보문사는 처움 고려 예종(睿宗) 10년(1115) 담진국사(曇眞國師)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그 후 여러 차례에 거쳐 중수(重修)되었다, 옛날 건물로는 영조(1721~1776)에 건축된 대웅전이 남아있다, 일정감점기에는 절이 황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광복과 함께 주지 송은영(宋恩榮)이 취임하면서 30여 년간을 불사중흥(佛事中興)과 건물 중창에 전심 노력하여 현재에는 많은 건물이 세워졌는데 경주 석굴암(石窟庵)을 모방한 석굴암과 사리탑(舍利塔), 큰 범종(梵鐘)을 주조해 놓았다,
그런데 탑골 승방은 보문사보다 이 절 좌측의 미타사(彌陀寺)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절 대웅전 뒤에는 6층 석탑이 세워져 있는데 아래쪽 3층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절은 광종(光宗) 원년(905)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창건하여 미타사라고 명명하고 문종 원년(1047)에 석탑을 쌓아 탑골 승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 동망봉(東望峰)의 유래는 조선시대 단종(端宗)이 어린 나이로 숙부(叔父)인 세조(世祖)에게 몰려 멀리 강원도(江原道) 영월(寧越)로 귀양 가 있을 때 단종왕비 송씨(宋氏) 가 서쪽 산록 청룡사(정업원(淨業院)에 우거(寓居)하면서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 동쪽으로 단종이 개신 영월을 바라보았다 하여 봉우리 이름을 동방봉이라 하였다, 영조 47년(1771) 6월에 왕이 이곳에 거동(擧動)하여 친필로 쓴 <淨業院 舊基>(정업원 구기)라는 비를 세우고 바위에도 동망봉이라 3자(字)를 친필(親筆)로 써서 새기게 하였다고 한다,
동망봉 쉼터는 보문동과 종로구 숭인동사이 청룡사(靑龍寺) 앞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가 있는데 이름 하여 동망봉이라고 한다, 2005년 6월 준공된 동방봉 쉼터는 운동과 휴식을 겸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더욱이 종로구 숭인 4거리에서 성북구 보문 4거리를 잇는 동방터널까지 개통되어 한층 가까이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