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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초 한국과 중국이 국교수교를 맺기전에는 중국을 가기 위해서는 홍콩에 있는 중국대사관에서 비자를 받고 들어가야 했다. 보통 1박2일 때로는 2박3일 정도 홍콩에서 기다려야 비자를 받을수 있던 시절이었다.
국내 최대 가전업체 G사 TV수출부에서 대양주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호주에서 21인치 TV 5000대 bidding이 있었다. 지금은 TV를 LCD로 만들어 OLED TV등 좋은 화면을 볼수 있었지만 당시엔 CPT(또는 CRT라고 부르는) TV시절이었다.
29인치 TV가 가장 큰 size여서 21인치만해도 중대형 TV였다. FST (Flat Square Tube)라는 CPT로 만든 당시엔 최신 기술을 적용한 TV였다.
호주엔 David Jones, Grace Brothers등 백화점과 Harvey Norman등 가구점과 전자제품을 같이 파는 캐나다의 Leons같은 대형 retailer들이 있었는데 이들에게 TV를 공급하는 구매조합에서 deal을 만들었다.
21인치면 40 Feet container에 최대 320개를 실을수 있었으니 5000대면 콘테이너 40 FT 16개 콘테이너 물량이어 전세계 많은 TV 제조사들이 이 비딩을 수주하려 경쟁하여 가격을 최대한 낮추었다.
G사는 TV공장이 있는 구미에서 생산해서는 제조원가가 올라가 인건비가 낮은 중국 주해(Zhuhai)에 있는 동대TV라는 임가공 공장(sub contractor라고 한다)생산 조건으로 대당 FOB U$ 140대로 offer를 하여 수주를 할수 있었다. 당시 구미에서 생산할경우 받는 가격이 U$200정도 였으니 엄청 낮은 가격이나 수량이 많고 인건비가 낮은 점을 활용 가능했다.
즉 한국에서 TV의 주요부품을 중국으로 선적하고 Box.포장재, manual등은 현지에서 생산하여 경쟁력을 가질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품질과 납기를 맞출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이를 위해 호주 담당자인 나와 공장 QA(품질보증)담당자와 같이 출장을 갔어야 했다.
출장 가기 일주일 전 즉 생산을 하기 일주일 전 쯤 pilot라고 부르는 시험 생산을 지도하기 위해 구미공장에서 근무하는 P기사(당시 현장직원 직급은 기사-기좌-기정 등으로 불렀고 기술직은 주임-선임-책임등으로 불렀다) 가 먼저 출장을 가기위해 구미에서 본사가 있던 여의도에 와서 회의를 하고 그날 저녁 김포공항근처에서 잠을 자고 다음날 아침 비행기로 홍콩을 들렸다가 1박후 비자를 받아 주해로 배타고 가는 일정이었다.
출장 가는 날 아침 회사에서 일하는데 P기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용은 김포공항 근처 여관에서 잤는데 아침에 늦잠을 자는 바람에 비행기를 놓쳤다는거였다.
결국 다음날 홍콩으로가게 되어 일정이 차질이나는 바람에 주해에 있는 동대TV라는 공장에 양해를 구해야 했고 G사 홍공지사에서도 매우 당황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P기사가 그다음날 홍콩에 갔다가 가든 호텔이란곳에서 잠을 잤는데 이번엔 호텔 숙박료를 안내고 check out을 하는 실수를 했다.
호텔에서는 홍콩지사에 claim을 했고 그걸 마무리하느라 홍콩의 Y과장이 난감해졌고 매우 화가 나있었다. 내게 전화가 왔다. 아니 뭐 이런 어쩌구 저쩌구 국어 대사전에는 안나오는 욕을 하면서 P기사 이름을 들먹이며 하고 있었고 난 유감스럽다고 하면서 달래고 있었는데 갑자기 Y과장의 목소리 톤이 바뀌었다. 즉 전화에다 P이름에 뭐 이런어쩌구 하고 있었는데 홍콩 현채인 여직원이 회사건물 앞에서 사무실을 찾던 P기사를 발견 Y과장자리로 데려온거였다. 그러자 Y가 어 그런데... 그분께서 이 방금 이리로 오셨는데...하며 말을 흐리더니 잠깐 여기 앉으세요 하며 잠시 있다 통화하자고 하고 전화를 끈었다. P는 Y의 전화에다 대고 나한테 막 본인 욕을 하는걸 들었을것이고 그걸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Y과장은 이후 G사명이 90년대 중반 L사로 brand명이 바뀐후에도 계속 성과를 내어 부사장까지 진급하여 60대 초반까지 다녔고 지금도 가끔 연락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P기사의 좌충우돌 시작이 된 5000대 생산을 위해 홍콩을 통해 주해로 갔다.구미에서 생산하면 3일이면 생산할수 있는 물량이나 이곳에서는 하루 600대이상 생산하기 어려워 10일 일정으로 갔다. 내가 중국말을 잘 못하니 영어를 구사하는 통역을 동대TV에서 10일간 아침부터 저녁 식사후 호텔에 도착할때까지 동행을 해주었다. 북경대를 졸업한 젊은 친구인데 영어를 아주 잘했다. 호텔 아침식사 부터 동행을 했고 점심먹을때는 주해시에서 가장 좋은곳으로 데려갔고 저녁엔 짜장면을(중국식)사준적도 있었다.
친해져서 나중에 급여가 얼만지 물어봤고 월 한국돈으로 5만원정도 받는걸 알게 되었다. 당시한국 대기업 대리 월급이 100만원~110만원에 600%상여금 받던 시절이어서 한국과 중국의 인건비 차이를 확실히 느낄수 있었다.
우선 인건비는 싼데 자삽기(auto inserting machine을 이용 부품을 기계로 PCB라고 불리는 기판에 박는 일)가 없어 수삽(사람이 손으로 부품을 직접 끼우는 작업)을 해야 했고 생산성이 낮았고 가장 걱정한게 품질 문제였다.
같이 출장을 동행한 QA(품질담당) 동료가 중간에 생산을 stop시키는 일도 가끔 있었고 우여곡절 속에 5000대 생산을 하여 호주 멜버른 으로 선적할수 있었다.
난 이곳에서 선적일정을 멜버른의 거래선과 전화및 Fax로 매일 생산 결과와 선적 일정을 협의 하면서 현지 생산과정을 지켜봤다.
식사때마다 날 좋은 요리집으로 데려가서 하루는 공장에서 그곳 근로자들과 같이 먹고 싶어 공장밥을 먹자고 제안했다. 나도 어렸을땐 후진국에서 자라 먹는건 아무리 열악해도 잘 먹을 자신이 있었고 논산훈련소 잠밥정도는 자신있게 먹을 수있어 문제 없을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밥그릇은 군시절 야외훈련시 사용하는 반합통(Mess tin)에 밥을 주고 보통 중국식당에 가면 사용하는 사기 스푼을 이용하는데 한국처럼 반찬은 없고 그냥 반합통에 밥하고 무국말아 먹는거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처음 한수푼을 입에 넣어먹으니 돌이 씹혔다.결국 다 먹을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 공장에서 지켜본 종업원들의 얼굴은 무척 행복해 보였다. 9시에 일 시작 5시면 일끝나고 모두 통근버스로 집에 데려다 주는거였다.
난 한국에서 통근버스 타려면 7시에 집을 나와야 7시15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탈수 있었고 퇴근은 평균 9시30분에 퇴근했고 토요일도 5시까지 일을 했었고 일요일도 나오는 날이 많아 그들이 일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부러워 보였다.
가장 부러워 던게 그들은 집에서 가족과 매일 식사를 할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매일 매일 긴장속에 경쟁속에 살지 않아서인지 대부분 표정이 밝아보였다.
당시 난 해외 영업실적 즉 해외에 얼마나 TV를 많이 선적하느냐를 신경써야 했고 매년 부서 별로 내려오는 소위 캠패인 이라고 불렀던 제품을 반기에 한번정도 팔아야 했다. 즉 낮엔 회사 본연의 수출업무를 하고 퇴근 후엔 여름엔 주로 에어컨, 어떨땐 TV, 냉장고, 나중에 무선 전화기가 나왔을때는 mobile phone 20대가 할당나온적이 있었고 같이 일하는 후배 사원은 본인 한달 월급 전액을 들여 사서 전화기 20개를 주위에 무상으로 나눠주는것도 봤다.그렇게 경쟁과 과로가 일상이 되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당시 밤늦게 일할때 마다 같이 늦게일하는 동료직원이 지나가면서 왜 사냐? 를 반복했던 기억이 난다.
주해에서 있으면서 업무 끝나고, 또는 주말에 주해시 주변 중산시, 마카오 등을 갈수 있었다. 당시 한국에 비해 인프라나 시설은 열악했으나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지 않아 보였다.
야시장에서 물건 흥정할때는 재미있는 표정을 많이 볼수 있었다. 시 변두리의 화장실은 천장이 없었고 열악해 보였고 어렸을때 내가 살던 고향이 생각나고 초등학교 6학년때 반에서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 친구들이 생각났다. 당시 콩나물 시루라고 불렸는데 우리반의 인원이 100명이 넘었었다. 그중 30%는 가정 형편으로 중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다.
나보다 공부를 잘했던 친구도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진학을 못해 고등 공민학교라고 불리던 학교로 진학을 하면서 일과 학업을 병행해야 했었다. 대부분 삼광초자라는 유리공장에 대부분 취업을 했었고 그 어린나이에도 그 친구들이 중학교 진학을 못하는게 안타까웠던 기억이 난다.
한국에서 의료대란이 나면서 어느 의사가 방송에 국민들이 학급 반석차가 상위권이 아닌 사람이 의사가 되는걸 싫어할 거라는 말을 한 기사를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사람은 본인이 뛰어나서 의사라는 사회적 위치를 갖고 비교적 경제적 풍요로움속에 살지만 본인보다 훨씬 역량이 뛰어났어도 가정형편상 진학을 못해 학업을 포기하고 어린나이에 산업전선에 나가 일하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생각을 못하는듯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누군가 돈을 많이 벌어 은행 빚을 다 갚고 더 큰 투자를 하면 누군가는 그 여파로 파산을 하고 있다는 양면성이 있다.현재까지 역사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할 더 좋은 대안이 없으니 이대로 갈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동대TV에서 일하면서 그들이 경제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하지만 정신적으로는 그렇게 불행하거나 힘들어 하는 모습은 별로 안보였다. 1996/7년도에는 지금 전쟁중인 이스라엘에 파견나가서 일할때 가자지구와 서안(West bank)를 많이 다녔다. 1996년도 가자 지구 인구가 정확히90만이었다. 얼마전 전쟁전 230만이란 이야길 듣고 놀랐다. 그곳은 정말 인프라가 열악하고 같은 팔레스타인인 West bank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으나 1세대가 지난 지금 한국은 인구 5000만 그대로인데 2.5배이상이 된것이다. 한국의 인구감소는 사회적 불평등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한다. 즉 다같이 평균적으로 살면 못느끼나 누군가 나보다 잘사는 사람과 비교하면 느끼는 박탈감이 더이상 자식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읺은마음이 들게하는거라고 한다.
혹자는 감사하는 마음을 너무 지나치게 가지면 발전을 못한다고하는 글을 읽은적 이 있다. 틀린말은 아니다. 너무 지나치게 감사한다면 더 발전된 상황이나 혁신적인일을 하는데 저해가 될수도 있다. 하지만 우린 현재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는데 인색함을 느낀다. 나보다 많이 가졌지만 결코 나보다 행복이 보장되는게 아니고 나보다 못가졌다고 덜 행복하지 않다고 본다. 내가 가진 환경을 감사하면 지금보다 좋은 환경이나 그렇지 못한 환경에서도 우린 감사할수 있다고 본다.
사회가 각박해지고 바쁜 가운데 살다보면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어려운 환경이 될수 있다. 그래도 항상 어디선가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며 감사할 이야기가 있음에 감사한다.
첫댓글 마음에 와 닿는 글입니다.
사회를 보는 시선이 따뜻하시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