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淨慧法眼禪師宗門十規論(정혜법안선사 종문십규론)
第六(제육). 不經淘汰臆斷古今言句(불경도태억단고금언구)
6. 수행을 거치지 않고 억측으로 고금의 말씀을 단정하다
논왈(論曰)。기입총림(旣入叢林)。부위참학지인(夫爲參學之人)。수택선지식(須擇善知識)。차친붕우(次親朋友)。
말하건대 총림에 들어와 참구하는 납자라면 반드시 선지식을 선택해야 하며, 다음으로 도반을 가까이 해야 한다.
지식요기지로(知識要其指路)。붕우귀기절차(朋友貴其切磋)。기욕자료기신(祇欲自了其身)。칙하이계진후학(則何以啟進後學)。
선지식은 길을 가리켜 주는 일이 중요하고 도반은 절차탁마 해주는 일이 소중하다. 자기 자신만 깨치려 한다면 무엇으로 후학을 열어주겠는가.
진양종교(振揚宗敎)。접물리생(接物利生)。기의안재(其意安在)。간타선덕(看他先德)。제항산해(梯航山海)。불피사생(不避死生)。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날리고 중생을 이끌어 이롭게 하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 옛스님들을 보라. 산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면서 생사를 피하지 않았다.
위일량전지인연(爲一兩轉之因緣)。유섬하지의사(有纖瑕之疑事)。수빙결택(須憑決擇)。 귀요분명(貴要分明)。
한 두 번의 기연에 실낱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
반드시 결택하여 분명히 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작친위지잠규(作親偽之箴規)。위인천지안목(爲人天之眼目)。
그리하여 참과 거짓의 기준이 되고 인간·천상의 안목이 되었던 것이다.
연후고제종인(然後高提宗印)。대파진풍(大播眞風)。징인선대시비(徵引先代是非)。편달미료공안(鞭撻未了公案)。
그런 뒤에야 종지를 높이 제창하고 진실한 가풍을 널리 폈는데
옛 논의를 인용하여 따져 묻고 아직 깨닫지 못한 공안을 지도했던 것이다.
여불경도태(如不經淘汰)。억단고금(臆斷古今)。칙하이미학검이강무태아(則何異未學劒而強舞太阿)。불습감이망빙심섭(不習坎而妄憑深涉)。득무상수함족지환야(得無傷手陷足之患耶)。
그러므로 만일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고금을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검술을 배우지 않고 억지로 태아(太阿)의 보검으로 칼춤을 추며,
물에 익숙하지 않으면서 망령되게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을 다치고 발이 빠지는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부선취자(夫善取者)。여아왕택유(如鵝王擇乳)。불선취자(不善取者)。약령구교종(若靈龜矯蹤)。
잘 선택하는 자라면 물에서 우유만을 가려내는 거위 왕과 같으며,
잘 선택하지 못하는 자는 신령한 거북이가 발자국을 지우려는 격이다.
황기간유역순지기(況其間有逆順之機)。회호지어(回互之語)。출기생이각취사지(出其生而却就死地)。장기생이번기편문(將其生而翻寄偏門)。
하물며 그 사이에 맞고 안 맞는 경계와 자재한 말이 있는 경우겠느냐. 삶에서 나왔는가 하면 오히려 사지(死地)로 나아가고, 삶을 가지고 도리어 편문(偏門)에 붙이기도 한다.
비가사기광심(非可肆其狂心)。첩사측타성의(輙使測他聖意)。
미친 마음을 부려 그 마음으로 성인의 뜻을 헤아리게 해서는 안 된다.
황일자법문지요(況一字法門之要)。유만단건화지방(有萬端建化之方)。득불신제이방래자(得不慎諸以防來者)。
하물며 만 가지로 교화를 펴는 방편을 갖춘 일자법문(一字法門)의
요점에 있어서랴. 이 점을 조심하지 않고
찾아오는 자들을 상대해서야 되겠는가.
원오 보설
淨慧法眼禪師宗門十規論(정혜법안선사 종문십규론)
[第六(제육). 不經淘汰臆斷古今言句(불경도태억단고금언구)
6. 수행을 거치지 않고 억측으로 고금의 말씀을 단정하다]
법안스님의 마음거울에 비친 달그림자를 회광반조하여 심경(心鏡)에 비추이는 이 선명한 빛이야 말로 이 납승의 심경에 너무나 빛이나 어찌 형언할 수가 없다.
천년의 빛이 작금의 지금 여기 이 납승의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비추이는 이 말이 그대로 이 납승을 수 십년의 과거심으로 돌아가게 하니 신통묘용(神通妙用)이로다.
이 무명 납승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통도사 출신인 외숙인 법화스님이 부산 구덕산 아래 원각사라는 절에 계실 때 였는데. 하숙을 하고 있던 나는 외숙의 권유로 원각사로 옳겨 절에서 경남상고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거리이고 해서 조용해서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불교의 의식이나 행위불교를 하고 있는 법화스님에께서 많은 불교에 대해 훈습되고 있었던 것이였다.
그때의 불교와의 인연은 계속되고 있었고 항상 이 납승은 외숙을 보고 땡초라고 불렸다. 그러나 붓글씨를 쓰고 계신 스님에게서 남다른 흠모의 마음도 생기기 시작하였다.
염불은 아주 청상유수였으며 의식에서 연꽃이며 휘장등을 다 만들고 붓글로 쎴어 붙이는 그 부지른 함에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느꼈든 인연이였든 모양입니다.
사회생활은 무엇이든 처음하는 사업이라면 다 해보는 성품이라 흥망성쇠는 끝나지가 않았다 그 속에서도 왜 내가 이렇게 남이 하지 않는 일만 좋아서 하는지 궁금했고 이렇게 찾아 혜메이는 이 놈이 누구일까 언제나 바쁘고 빠르고 지름길을 찾는 나는 누구일까?하는 한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누구의 소개를 받고 찾아간곳이 절간이였다.
그래서 점이나 치는 무속인이라 불교에 대한 궁금증은 더욱 간절하게 찾다가 경전을 구해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참 신기하게도 다 보았든 책 같았으며, 옛날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 책같았어 논서나 선불교에서 찾아보려고 경전과 불교서적을 약 10년간 해독해 보았으나 내가 누구인지는 더욱 궁금하기만 하였다.
다시 외숙을 찾아 갔더니 소개해주는 스님이라고는 다 내 물음에 답을 해 주지를 못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책자가 없든 시절이라 어떤 스님이 가리켜 주는 방법이 일관법이라는 하나를 관하라는 촛불관법을 가리켜 주어 집에다 선방을 만들고 매일 무자화두에 촛불의 불꽃을 관하는 천태선사의 지관법인 촛불일관법을 생활화 하였다. 그렇게 항일하게 지어가기를 육개월만에 일원상으로 변한 촛불속에서 내 마음 속의 업식을 보게 되었다. 선정이 깊어지면 깊어 질수록 지난 과거의 세계가 펼쳐졌고 삼천대천 산하대지 비금조수 등공함령의 세계가 펼쳐졌고 전생의 윤회한 모든 인과의 법이 열려 윤회의 실상을 보게 되었으며 점점 형상의 세상은 사라지고 암흑의 정천이 열렸고 그 무엇도 없는 적멸의 세계 속을 유영하듯이 그렇게 수년을 찾고 찾았지만 아무 것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바로 무색계임을 알고 어느날 하나의 빛을 발견하였는데 그 빛이 어둠을 밝히자 천년의 어둠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비치는 곳곳마다 오색찬란한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하였고 다시 화엄동산엔 벌나비가 춤을 추고 비금조수의 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기기묘묘한 동물과 짐승들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다 이 한 빛이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심광이 만들어 내는 세계가 바로 이 심법계이며 심법계는 다 빛의 향연이였으며 빛이 굳어지면 물질이 되고 물질이 변화하면 또 빛이 되는 빛과 색이 서로 어우려 빚어내는 찬란한 세계가 그대로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그 존래성을 드려내고 사라지는 원융의 세계임을 그렇게 체득할 뿐 굳이 설명하려면 이미 사라져 버리니 모든 것은 찰나간에 일으키면 일어나고 흩어져 사라지는 신출귀몰하고 변화무쌍하여 잡을 수도 놓을 수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빛의 세계이며 무량수 무량광의 성품이 뒤 섞이고 어루려 형상을 만들고 있었든 것이며 지금도 그렇게 변하고 생기고 사라질 뿐 그 실체가 없는 것임을 알았으니 무엇이 있다고 하며 무엇이 없다고 하리요 그냥 그렇게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 일뿐인 것을 그렇게 한 빛이 일정명(日精明)을 통하여 본래공(本來空)을 의지처로 한 빛을 휘두러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그래서 천년의 시공을 뛰어넘어 법안선사의 마음 빛이 이렇게 작금의 선사들의 바름과 그름을 있는 그대로 비추이고 있는 것입니다.
다 수행의 업보요 수행중에 얻음없이 얻어지는 것이며 본것없이 보게 되는 것이니 수행없는 깨달음은 없는 것이며 깨달음없는 수행도 없는 것입니다. 참선실참수행이야 말로 시작이며 끝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돈오돈수(頓悟頓修)도 시작이요 오후 수행역시 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을 개시오입(開示悟入)이라 열어서 보여주고 깨달아 들어오게 하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논왈(論曰)。기입총림(旣入叢林)。부위참학지인(夫爲參學之人)。수택선지식(須擇善知識)。차친붕우(次親朋友)。
말하건대 총림에 들어와 참구하는 납자라면 반드시 선지식을 선택해야 하며, 다음으로 도반을 가까이 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스승은 길을 안내하는 이정표이고 네비게이숀과 같은 것입니다.
평생을 출가하여 수행한다고 하지만 그 목표지점을 알지 못하고 수풀속을 혜메여 보아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선지식을 만나는 것은 맹구어목(盲龜於木)이요. 삼천년에 한번 피는 우담발화라 했습니다. 눈먼 거북이 망망대해에서 나무토막을 만나는 것은 전생선업이 없이는 만나질 수가 없는 것이며 선지식을 알아볼 수 있는 혜안도 없고 안목이 없이는 찾을 수가 없지요.
전도몽상(轉倒夢想)에 눈멀고 귀멀은 당나귀가 어떻게 선지식을 찾겠습니까? 그러니 그렇게 선지식을 찾지를 말고 스스로 기도하고 인연이 닿기를 기다리는 간절함만이 선지식도 다 인연지 소행입니다. 내 업장을 녹이 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연이 맺으지지를 않습니다. 오직 간절함만 놓지않고 오매불망 참회하고 업장을 녹이고 있으면 봄이 오면 꽃이 파어나듯이 수행을 스스로 하고 있으면 다 봄의 기운은 소리없이 닥아 오기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도반이란 함께 수행하는 벗입니다.
이 도반이야 말로 모든 것은 상대법입니다. 너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너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홀로는 설수도 없고 드러낼 수도 없습니다. 땅이 있어 설수 있고, 공기가 있으니 소리의 파장을 전달 받을 수 있는 도리와 같이 도반은 나의 경계가 되고 나는 도반의 경계가 되어 서로 선문답도 하고 같이 상호쌍입하고 상호쌍즉하여 법성원융 속에서 모든 것은 일어나고 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전기가 아무리 많아도 뿌라스와 마이느스가 함께 있으야 빛을 발하는 도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대대법이요 상대법인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식요기지로(知識要其指路)。붕우귀기절차(朋友貴其切磋)。기욕자료기신(祇欲自了其身)。칙하이계진후학(則何以啟進後學)。
선지식은 길을 가리켜 주는 일이 중요하고 도반은 절차탁마 해주는 일이 소중하다. 자기 자신만 깨치려 한다면 무엇으로 후학을 열어주겠는가.]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법안선사의 말씀은 상대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다 유위법(有爲法)입니다 그러니 선지식이란 미혹한 중생을 위하여 길을 안내해서 피안으로 인도하는 나룻배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길을 안해하는 것이 선지식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도반이란 이것도 상대법으로 세워야만 유위적 드러남이 됨니다. 혼자서 물으면 누가 답을 합니까?
허공을 향하여 혼자 의문을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른 대답이 없지요 대답이 없으니 분간할 수가 없고 바르고 틀림을 스스로 판단할 뿐이지만 이것은 항상일로(恒常一路)나 최초일구는 고사하고 탁마자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도반은 탁마를 할 수 있는 서로가 서로에게 주가되고 객이 되면서 탁마를 통하여 새로운 항상일로(恒常一路)가 열릴 수도 있으니 그렇게 도반이 필요하며 만약 홀로 깨달아 수미산 정상에 홀로 앉아 있다해도 보는 자가 없고 그 행리처를 전할 사람이 없다면 그 것은 홀로핀 들국화와 같은 것입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상대에게 마음법을 전하는 길은 오직 상대가 있어야 하며 그래야만 행록이든 행리처든 말씀이든 몸짓 등이 서로가 서로의 마음에 전해 져야만 법통과 품성도 후학에게 전해져서 정법이 혈류를 이룰 수 있음을 밝히는 대목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진양종교(振揚宗敎)。접물리생(接物利生)。기의안재(其意安在)。간타선덕(看他先德)。제항산해(梯航山海)。불피사생(不避死生)。
부처님의 가르침을 드날리고 중생을 이끌어 이롭게 하는 그 의도가 어디에 있겠는가. 저 옛스님들을 보라. 산에 오르고 바다를 건너면서 생사를 피하지 않았다.]라고 하십니다.
구도를 위하여 목숨도 피하지 않고 불원천리 신라인들이 왜 당나라 석존의 35세손 마조 도일 스님의 법을 구하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갔을 까요. 오직 승은 위법구망(爲法求望)을 위하여 불원천리길을 갔든 것은 다 법을 구하려 갔든 것입니다. 한국불교의 뿌리인 구산선문의 아홉분의 선지식들은 다 마조스님의 제자인 자장스님과 남전스님 등에게 갔어 수십년을 조사선을 배워 깨달음을 이룬후에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미 나라는 없어지고 고려국으로 바뀌어 있었으나 각자마다 선원을 세웠으니 이것이 한국불교의 뿌리이며 조사선이였든 것입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그 맥이 끊어짐이 없었으니 조사선인 깨달음이야 말로 사람이 태어나 근본 대원은 바로 깨달아 나와 자연이 그대로 하나임을 깨달아 활발발한 선기방편으로 행복하게 살기위해서임을 밝히고 있는 부분입니다.
[위일량전지인연(爲一兩轉之因緣)。유섬하지의사(有纖瑕之疑事)。수빙결택(須憑決擇)。 귀요분명(貴要分明)。
한 두 번의 기연에 실낱만큼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
반드시 결택하여 분명히 하기를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인간의 삶속에서 지식과 상식과 지성과 감성으로 살아가는데 이 모든 것은 다 자기적 이익이란 자리적 삶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이 자리적 삶은 어디서 왔을까? 바로 욕심에서 왔을 것이다. 그럼 욕심은 어디서 왔을 까? 미혹에서 온 것이다 그럼 미혹은 어디서 왔을까 남을 믿지 못하는 의심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의심(疑心)이 불신(不信)이며 모든 악의 근본 뿌리가 되었든 것이다. 그러니 의심과 악심(惡心)으로 살아가니 미혹하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남을 믿지를 않으니 신심(信心)이 없으니 불행(不倖)과 시기하고 질투하고 묘락하고 싸우고 다투며 전쟁도 불사하는 악의악식(惡衣惡食)의 아수라세계 축생의 세계 악마의 세계로 변해가는 것이니 이제 남은 것은 지옥밖에 무엇이 남겠는가?
이것이 말법시대의 오탁악세의 세상이 열리고 있는 것이다.
물질 만능이라는 욕망의 세계가 바로 작금의 혼란과 타락과 욕정과 마약과 사기와 도박과 불확실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와 실페가 인생을 바꾸어 놓는 실정은 바로 바른 안목(眼目)이 없으니 사람마다 다 불성이라는 양심(梁心)이 있지만 악에 물든 오탁악세에는 이미 우리의 세상사는 다 악심(惡心)에 물들고 훈습되어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여 이제는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시절로 들어서고 있다.
그래서 바른 진리라는 양심을 밝히고 악성(惡性)이 빠진 인류를 구원코자 수많은 부처님들이 태어나고 또 수많은 방편으로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이라는 것이 종교가 되었지만 종교마져도 악성에 물들어 진리를 추구하고 양심적 인간세상을 만들어 보고자 수많은 선지식들이 교육이다 모임이다 법회를 열어 파사현정(破邪顯正)을 부르짓고 있으나 보고도 보지않고 들어도 듣지 않고 자기적 이익에만 눈이 멀어 자기 욕망을 위하여 오직 사리사욕과 자기편향적 사고와 철학과 종교로 물들어 아수라 세상을 만들고 있으며 서로가 종교끼리도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맞다며 서로 전쟁까지 벌어지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라고 할 수 밖에 더 있겠는가?
부디 한 마음 발심하여 양심회복의 길인 믿음을 바탕으로 불성을 향하여 보고 듣고 감각하며 한 마음을 바른 지견으로 체워가시길 빕니다. 돌~~~~~!!!!!!!!
[작친위지잠규(作親偽之箴規)。위인천지안목(爲人天之眼目)。
그리하여 참과 거짓의 기준이 되고 인간·천상의 안목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바른 법을 믿음으로 참사람이 되고 거짓인 악성을 물리칠 수 있는 반야지헤로 무장하여 인간의 범부와 천상의 극락을 꿈꾸며 인간들의 안목을 열러주는 선지식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부디 스님들이여 눈을 뜨고 바른 안목을 길러 가십시오.
[연후고제종인(然後高提宗印)。대파진풍(大播眞風)。징인선대시비(徵引先代是非)。편달미료공안(鞭撻未了公案)。
그런 뒤에야 종지를 높이 제창하고 진실한 가풍을 널리 폈는데
옛 논의를 인용하여 따져 묻고 아직 깨닫지 못한 공안을 지도했던 것이다.] 그렇게 바른 안목과 지헤정견을 깨달아야만이 부처님의 종지를 세울 수 있고 옛날의 조사들의 바른 안목과 행리처와 견처를 종지로 삼아 미혹중생들을 인도하여 피안으로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엄중히 다짐을 받고 계십니다.
[여불경도태(如不經淘汰)。억단고금(臆斷古今)。칙하이미학검이강무태아(則何異未學劒而強舞太阿)。불습감이망빙심섭(不習坎而妄憑深涉)。득무상수함족지환야(得無傷手陷足之患耶)。
그러므로 만일 수행을 거치지 않고 고금을 억측으로 단정한다면
검술을 배우지 않고 억지로 태아(太阿)의 보검으로 칼춤을 추며,
물에 익숙하지 않으면서 망령되게 깊은 물을 건너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손을 다치고 발이 빠지는 근심이 없을 수 있겠는가.]
그럼으로 수행도 실참수행도 하지 못한 알음알이와 견문각지로 조사님들의 바른 안목을 억측으로 글짜로 끼워맞추고 검술를 배우지 못한 자가 자객인양 함부로 칼을 휘두러며 수영도 배우지 못한 사람이 깊은 물을 건너겠다며 하는 아만을 부린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런 목탁이나 치고 깽가리나 두들기며 내가 선지식이라고 외쳐보아야 뭇 사람들에게 욕이나 얻어먹고 자기 자신 마져 저버리는 불쌍한 중생이 아니고 무어라 해야 겠느냐고 꾸짓고 계십니다.
[부선취자(夫善取者)。여아왕택유(如鵝王擇乳)。불선취자(不善取者)。약령구교종(若靈龜矯蹤)。
잘 선택하는 자라면 물에서 우유만을 가려내는 거위 왕과 같으며,
잘 선택하지 못하는 자는 신령한 거북이가 발자국을 지우려는 격이다.] 실참수행으로 스스로 마음을 밣힌자라면 물에 뜨는 기름을 오리왕이 걷어먹듯이 지혜와 반야의 힘으로 안목을 밣히는 자라면
저 신령한 거북이가 자기 발자욱을 지우려는 격으로 모래를 파 알을 묻어놓고 모래로 덥어놓고 자리를 피해 다른 조수나 동물들이 알이 있음을 숨기려고 자기 꼬리로 모래를 이리 저리 쓸고 지나가지만 그 딱딱한 꼬리로 모래를 쓴다는 것이 오히려 다른 동물들에게 흔적을 남겨 알을 잃는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계신 것입니다.
[황기간유역순지기(況其間有逆順之機)。회호지어(回互之語)。출기생이각취사지(出其生而却就死地)。장기생이번기편문(將其生而翻寄偏門)。하물며 그 사이에 맞고 안 맞는 경계와 자재한 말이 있는 경우겠느냐. 삶에서 나왔는가 하면 오히려 사지(死地)로 나아가고, 삶을 가지고 도리어 편문(偏門)에 붙이기도 한다.]라고 하고 계십니다. 하물며 그 사이에 맞고 안 맞는 경계와 자재한 말이있는 경우라는 것은 사실 맞고 안맞고는 자기의 생각일 뿐 자기가 행한 그대로 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적 삶을 가지고 도리어 편문이란 편견(偏見)이니 자기적 견해가 맏다고 하는 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오직 중도실상(中道實相)적 치우침 없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여 절대평등의 대원경지로 살아가라고 엄중히 꾸짓고 계십니다.
[비가사기광심(非可肆其狂心)。첩사측타성의(輙使測他聖意)。
미친 마음을 부려 그 마음으로 성인의 뜻을 헤아리게 해서는 안 된다.] 미친 마음을 부린다는 것은 편견과 편집(偏執)을 말한다 여기와 저기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여기는 여기 그대로 이고 저기는 저기 그대로를 인정하여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것이 바른 정견으로 살아가시를 바라는 마음임을 전합니다.
[황일자법문지요(況一字法門之要)。유만단건화지방(有萬端建化之方)。득불신제이방래자(得不慎諸以防來者)。
하물며 만 가지로 교화를 펴는 방편을 갖춘 일자법문(一字法門)의
요점에 있어서랴. 이 점을 조심하지 않고
찾아오는 자들을 상대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시면서 마감을 하십니다. 하물며 만 가지로 교화를 펴는 방편을 갖춘 일자법문이란 바로 화엄경의 일불성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니 보살도 연각도 성문도 없다 오직 부처인 일불승이 있다라고 하신 석존의 말씀을 인용하여 바른 요점에 세우는 것이 있어서 어찌 방편과 이론을 붙이겠는가 오직 바른 정견인 팔정도가 있을 뿐이라고 하시면서 바른 지견으로 상대를 대하고 바른 안목으로 상대에 맞는 견처를 보아 중도정견에 입각한 바른 법으로 대해야만 하는 것이지 시기와 질투나 욕심으로 상대를 속이거나 낮추어 보아 함부로 이상하고 괴상한 법을 설한다면 이것이야 말로 속인이며 범부이지 어찌 선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며 “수행을 거치지 않고 억측으로 고금의 말씀을 단정하다”라는 짓을 아주 엄숙히 꾸짓고 계시는 부분입니다.
성불인연 맺으소서 옴 바아라 믹 !!!!!!~~~~
조사선(祖師禪) 법안록(法眼錄)을 들어시어
인연성불(因緣成佛) 하시어서 붓다(佛陀) 같이 살아가소!
매주 일요일 오후2시~4시에 원오선원에서 명상법회가 열립니다.
수희동참 하시어서 인연성불 하옵시어 대원성취 하옵소서
원오선원 명상쉼터 대구광역시 달서구 새방로 10(용산동577-4) (053) 586 6606
무명 납승 원오선사 010 8748 6006 옴~바아라 믹!!!_()_
탁발성원 보시구좌 농협 351 1042 1598 93 대한불교 정토회

첫댓글 조사선 법안록을 통하여 인연성불 요인성불하시어서 본불본락 하옵소서 옴~바아라 믹!!!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