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전체적으로 보면 가속과 중력의 효과는 같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힘의 작용이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개미
에게는 지구 표면이 평면이나 다름없지만, 전체적으로 지구표면은 둥그렇게 구부러져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아인슈타인
은 미분기하학을 배우며 일반상대성이론을 연구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상당히 까다로운 수학을 사용하면서 수학자들에게도 새로운 연구주제를 제공했다. 당대 최고의
수학자였던 힐버트는 아인슈타인을 초청해 공동연구를 하기도 했다. 그 결과 1915년 말,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완성했고, 힐버트도 몇 주 늦게 거의 같은 결과를 얻었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1916년 3월, ‘일반상대성이론의 기초’
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대중적 신화 vs 학계의 반응
일반상대성이론이 발표됐을 무렵은 아인슈타인의 중력연구에 자극을 받은 여러 중력이론이 등장했던 상황이었다. 그 중에
서도 핀란드의 노르드스트룀(Gunnar Nordström)의 이론은 일반상대성이론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1919년 5월 29일 영국의 천문학자들은 남미에서 일식 사진을 찍었는데, 노르드스트룀의 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 중 어느
이론이 수성 궤도의 변화를 더 잘 예측하는지를 검증하기 위해서였다. 관측대가 영국으로 귀환해 검증작업을 한 끝에 11
월 6일, 영국왕립학회와 영국왕립천문학회의 특별합동회의에서 아인슈타인 이론이 맞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은 다음날
런던의 <타임스> 지 1면에 ‘과학의 혁명/새로운 우주론/뉴턴주의는 무너졌다’라는 제목으로 크게 실렸다. 실제로는 관측
오차가 너무 커, 두 이론 중 어느 이론이 맞다고 단언하기에는 곤란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국 과학자들은 1차 세계대전
동안 소원해진 독일학계와 영국학계의 관계를 다시 좋게 만들려는 의도로 영국의 뉴턴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독일의
아인슈타인이 뛰어넘었다는 식으로 과잉 해석한 것이었다. 어쨌든 이 보도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를 뛰어넘어 대중
적으로도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됐다.
상대성이론을 둘러싼 오해와 신화
하지만 불행하게도 일반상대성이론에 대한 관심은 ‘시간과 공간이 상대적이다’, ‘4차원’과 같이, 오해와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모호한 관념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물리법칙의 보편성이나, 측정과 이론적 개념의 관계와 같은 핵심적인 문제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때문에 추상개념만으로 현실세계를 재단하는 일들이 벌여졌다. 일부 유물론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눈에 보이는 물질을 보이지 않는 에너지라고 착각했다고 공격했고, 반유물론자들은 아인슈타인이 ‘유물론은 틀렸다’라고
증명했다고 믿었다. 프랑스의 한 유명한 철학자는 심리적 경험으로서의 시간과 물리적으로 측정하는 시간을 혼동하기도
했다.
피카소와 달리는 상대성이론에 자극을 받아 미술 분야에서 독자적인 성취를 이룩한 케이스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이론
이 자신의 주장을 증명한다고 우기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인슈타인과 상대성이론들을 둘러싼 오해와 신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아인슈타인이 대중적으로 명성을 얻는 기폭제가 됐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학계 내부
에서는 아인슈타인의 물리학 업적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덜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래서 일반상대성이론의 발표 이후에도
또 다른 경쟁이론들이 계속 출현했다. 그러다가 1960년대를 전후로, 대체로 일반상대성이론이 옳을 것이라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상대성이론의 응용과 미래
1930년, 영국의 물리학자 디랙(폴 디랙, Paul Adrian Maurice Dirac, 1902~1984)은 상대론적 양자역학이론에 근거해
양전자의 존재를 예언했다. 양전자는 1932년에 발견 됐는데, 현재 의료장비인 양전자 방출 단층촬영(PET) 장치를 동작
시키는 데 사용되고 있다. 병원에서 PET 사진을 찍을 때마다 특수상대성이론의 혜택을 받는 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