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古梅)에서 느끼는 하얀 기쁨
소흔 이한배
올해엔 봄이 빨리 오려나 보다.
“여보! 이리와 봐요. 매화꽃망울이 벌써 부풀어 올랐어요.”
아내가 담장옆 양지쪽에 있는 매화나무를 바라보며 나와 보란다. 벌써 매화가? 반신반의 하면서 가보니 정말 부풀어 올랐다.
지난겨울 예상과 달리 별로 안 춥더니 입춘이 아직 인데 벌써 매화는 부지런히 봄을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반가웠다.
예순을 훌쩍 넘겨 일흔에 가까운 나이인데도 매년 맞는 봄은 언제나 설렘 그 자체다.
봄은 아기 걸음마 속도로 온다고 한다. 그만큼 올 듯 말 듯, 오는 듯 마는 듯 그렇게 온다는 뜻일 게다. 또 화신풍이라고 해서 모두 스물네 가지의 꽃소식 바람이 있다고 한다. 그중에 매화가 필 무렵 부는 바람이라 하여 매화풍(梅花風)이 가장 먼저고 멀구슬 나무 꽃이 필 무렵에 부는 바람이라 하여 연화풍(楝花風)이 가장 나중이라고 한다. 소한(小寒)부터 곡우(穀雨)까지 닷새에 한 번씩 화신풍이 불때마다 꽃이 한 가지씩 핀다고 한다.
사진을 하면서 안 것인데 사실 초봄에 피는 꽃은 많다. 복수초, 변산 바람꽃, 노루귀, 현호색, 설강화 등 유명한 동백, 매화, 벚꽃보다 더 일찍 피기도 한다. 복수초 같은 경우에는 눈 속에서 눈을 스스로 녹이며 샛노랗게 피어난다. 그런 꽃을 만나면 신기하기도 하고 자연의 섭리에 놀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꽃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가 않다. 요즘은 식물원이 많아 조금은 쉬워졌지만 옛날에는 여기저기 물어물어 찾아가 사진에 담곤 했는데 그렇게 사진에 담아냈을 때의 희열은 참으로 그 꽃만큼이나 고귀하다. 몇 년 전 대전 역전에 우연히 지나다가 복수초를 파는 것이 있어 사다가 심었는데 작년에 꽃을 봤는데 눈이 안와서 못 찍고 올 해는 어떨까 모르겠다.
그렇게 이른 봄꽃을 찾아 봄마다 남도를 헤매 다니다 매화를 보기 시작했다. 옛날 선인 들이 울안에 심어 놓고 감상하던 몇 백 년씩 된 고매(古梅)를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매화꽃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것은 90년대에 어느 지인인 광양에 가면 계곡 전체가 하얀 꽃으로 뒤덮인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 간 것이 시초다. 광양 다압마을에 청매실 농장, 이어 구례 지리산 밑 산동마을에 산수유, 화계마을에 벚꽃 이렇게 세트로 봄이면 화려한 꽃잔치를 벌려 매년 봄이면 달려갔었다. 그러다 고매를 알아가며 매료되기 시작하여 요 몇 년에는 아예 탐매여행을 시작했다. 남도에 흩어져 있는 고매들을 찾아 감상하고 사진에 담으며 봄을 만끽하는 거다.
옛 선인들이 심어놓고 풍류를 즐겼던 정자 옆에 피는 고매(古梅)들의 고고함은 형언할 수 없는 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없이 포근한 것 같으면서도 쌀쌀한 이른 봄 햇살을 받으며 수줍은 듯 피어나는 매화는 바라만 봐도 하얀 기쁨으로 가득해진다. 또 그 고고함은 옛 선인들의 풍류나 기개와 매화를 바라보는 그 마음들이 생생하게 전해 오는 것 같아 나도 그들과 동급의 뭔가를 느껴지는 것 같아 으쓱해지기도 한다.
맑고 은은하게 번지는 매향(梅香)은 따로 암향(暗香)이라고 불렀단다. 선비들은 ‘매화는 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매일생한불매향)’며 고결한 정신을 가다듬었고, 스님들은 ‘추위가 한바탕 뼛속 깊이 사무치지 않고서야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꽃 향기를 맡을 수 있겠느냐(爭得梅花撲鼻香·쟁득매화박비향)’며 용맹정진의 결기를 다잡았다고 한다.
옛 그림에 탐매도가 많은 것을 보면 옛 선비 사회에는 탐매(探梅)라는 풍류를 무척 즐겼었나 보다. 하긴 문외한인 나도 바람결에 실려 오는 매향을 좇아, 춘설(春雪) 속에 피어는 매화를 찾아다니는 여행의 재미가 쏠쏠 할진데 옛 선비들이야 당연하다 싶기도 하다.
전라도 승주 선암사에서 낙안읍성으로 넘어가는 고갯마루에 있는 금둔사에 피는 매화는 납월매(納月梅)라 하여 그 곳 스님의 말로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핀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가들에게는 제주도 빼고 육지에서 제일 먼저 피는 곳은 거제도 구라조 초등학교에 있는 70여년 된 매화가 제일 먼저 피는 걸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해의 봄 아가씨의 맘일지도 모른다. 통상적으로 그렇단 얘기일 것이다.
통도사, 선암사, 화엄사, 백양사 등 전라도와 경상도지방에 고매가 많다. 특히 담양지방이나 청도, 함양 등지에 있는 정자나 고택에는 의례 고매가 있어 선비의 호나 절 이름, 정자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도 갖고 있다.
원동 순매원, 광양 청매실 등 에는 다량으로 심어 놓아 갈 때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곤욕을 치르는데 그보다도 어느 유서 깊은 선비집 담장이나 고찰 뜨락을 몇 백 년씩 지켜온 매화나무와는 격조가 다르다.
몇 개의 가지는 이미 죽어버린 그런 고목 등걸에 보석처럼 매달린 매화를 보고, 그 향기를 음미하는 탐매여행. 올해에도 탐매여행 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