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과 10․26사태 관련 역사의 잔인한 진실에 대한
정치인문학적 성찰
10월 26일, 박정희 전 대통령 33주기 추도식에서 박근혜 후보는 세상사람들이 ‘이제 아버지를 놓아 드렸으면 한다’고 했다. 본 기념사업회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살아 온 자식의 입장에서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아버지 박정희’를 ‘구국혁명의 영도자’로 오늘의 역사 공간에 다시 불러 오면서 온 나라를 과거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 온 장본인은 박근혜 후보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한다. 또한 박정희라는 존재를 ‘아버지 박정희’가 아니라,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 또한 그 자신이 ‘박정희의 딸’로서가 아니라 이 나라 헌정질서를 최종적으로 책임지고자 하는 후임 대통령 후보로서 엄정하게 이 나라, 이 민족의 역사를 객관화면서 과거사를 직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제 겨우 출발했을 뿐이다.
오늘 우리는 부마항쟁 자체가 아니라 10․26 사태와 관련한 외면할 수 없는, 불편함을 넘어 잔인한 역사의 진실을 상기하고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충격적인 10·26사태를 맞아 11월 3일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국장을 치르기까지 국민적 애도의 물결이 온 나라에 넘쳤다. 바로 이 때 전국의 감옥소에서 유신시대 정치범들이, 그리고 부마항쟁 당사자들 중 더러는 경찰서에서 죽음같은 고문이 끝나고 ‘이제 살았다’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가 하면, 더러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박 대통령의 죽음에 ‘살아남은 자’로서 망자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우리는 오늘 착잡한 심정으로 10․26 사태가 박정희의 유족이나, 부마항쟁의 시민에게도 선명한 이중적 결과를 낳았음을 밝히고자 한다. 10·26 사태의 쓰나미로 부마항쟁은 역사 속에서 잊혀지고, 박정희 전 대통령은 죽음으로 독재의 댓가를 치렀지만 국장(國葬)이라는 국가 최고 지도자에 대한 예우를 받음으로써 그 과오는 모두 은폐되고 ‘박정희 신화’의 주인공이 되었다. 동시에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독재 종식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음과 동시에 정반대의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민족의 영도자 박정희를 죽게 한 사건’으로, 최규하 정부 이래 유지되어 온 ‘부마사태’ 평가, 그리고 박정희 전 대통령 국장 당시 노산 이은상의 공식 조가(弔歌) 가사 등으로 에 공공연히, 혹은 은밀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우리는 부마항쟁의 시민들이 분명하게 ‘독재타도, 유신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내걸었지만, 그것이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의도한 것이 아님은 물론이며, 부마항쟁이 박정희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라는 여론이나 상당수 지식계층의 기계적 역사 인식이 허구적임을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우리의 견해는 누구도 깊게 주목하지 않은 절체절명의 짧고도 긴 역사적 시간, 즉 10월 16일-20일의 부마항쟁이 군사진압에 의해 끝난 이후 10․26사태에 이르는 기간을 용기있게, 정직하게 직면하는 인문학적 접근으로 자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이 기간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보자. 박정희 정권의 행정부는 ‘부마사태를 국가안보 차원에서 엄단하겠다고 밝혔고, 부마항쟁의 충격으로 정치계는 침묵에 빠져 있다. 그러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공화당과 유신정우회 등 여당 내에서 침묵을 강요당하던 국회의원들이 김영삼 야당 총재 제명을 앞장섰던 국회의장의 퇴진을 요구하고, 여당 지도부는 김영삼 총재 제명 관련 강경 자세에서 물러나기 시작하면서도 ‘정국 조기수습의 대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여당과 합세하여 김 총재를 제명한 신민당 내부 다수 기회주의적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이에 부산과 마산 시가지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하고, 야간 통행금지 시간은 밤 10시에서 12시로 환원되고, 계엄군이 시가지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당시 대표적인 언론사로서 유신체제에 순응하던 동아일보는 ‘오늘을 생각한다’는 사회 원로의 ‘기획 인터뷰’를 통해서 ‘역사가 강물이면 정치는 물 흐르게 해야 한다/야당이 약해지면 여당도 약해지기 마련’(홍종인, 10.22), ‘言路 터 놓아야 不信社會 가실 수 있다/ 經濟發展 뒷전서 國民 精神 퇴폐 一路’(고재호 10.23), ‘政治는 衆意綜合, 욕심이 中道 흔들어/여론이 등돌릴 땐 承服 필요(백락준, 10.24), ‘良心잊고 눈앞 利益 급급, 마찰과 혼란/立場 바꿔 생각하고 言行一致 政治를(전택부, 10.25) 등과 같은 파격적인 목소리를 연일 내 보냈다. 이것은 사실상 부마항쟁에 드러난 민심을 옹호하고, 정부․여당을 강력하게 질타하는 동시에 갈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다. 이 신문은 ’早速한 局面打開를 바란다‘는 제목의 사설을 통해서도 ‘與野의 의견은 다를 수 있어도 與野가 진정으로 국가의 앞날을 걱정한다면 私利나 黨利를 초월하여 合理的인 局面 打開策을 찾아내는 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與野가 하루속히 時局 收拾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기대하면서 이를 위해 먼저 與黨측이 誠意 있는 收拾方案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10.23)라고 정치권을 질타하며, 합리적이고 가능한 대안을 촉구했다.
그런데 운명의 26일 밤, ‘박정희 대통령 유고’ 사태가 발발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죽음에 이르는 이런 비극적 사태와 정권 내부의 적대적 모순을 막는 것은 당시 언론의 사설대로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엄중하게 묻고자 한다. 정녕 무엇이 세계를 놀라게 한 ‘10․26 사태’를 초래했는가 ? 우리는 주장한다. 단적으로는 국가안보, 경제발전을 빌미로 한 10월 초, 김영삼 총재 제명에 이르는 정부․여당과 기회주의적 야당 다수 세력의 광기어린 폭정, 마침내 터진 박정권 치하 최초의 범시민적 항쟁을 겪고도, 그리고 이후 사리사욕과 당리․당략 버리고 국가의 앞날을 생각하라는 고언을 접하고도 이 ‘삶의 소리’를 들을 감수성의 마비, 달리 말하면 국가 지도자나 한 인간으로서 자기성 성찰력의 결여, 중증 사회적 소통장애라는 정신문화적 문제가 이 비극을 자초했다. 초미의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공론을 피하고, 권부의 어두운 ‘안가’에서, 더욱이 국가공권력으로 자신들의 딸보다 어린 여대생, 가수를 끌어다 놓고 술판을 벌이며, 전국적으로 더 확산될 가능성이 큰 이 ‘부마사태’ 이후 캄보디아 사태와 같은 대량학살도 불사할 수 있다는 가공스럽고, 추악한, 안타깝기도 최고 권력자들의 정신적 파산이 최후의 비극을 자초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김재규에 대해서도 ‘패륜아’와 ‘의로운 장군’의 양론이 오랫동안 격돌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김재규의 대통령 살해에 대해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견해를 드러낸 바 없다. 10·26 사건은 박정희 정권 핵개발과 관련한 미국의 음모설 등 아직 국내나 미국의 기본적 정보 공개를 기다려야 상황이라서 그 총체적 진실을 판단하기 힘들다. 본 사업회는 우선 부마항쟁을 옹호하다 ‘거사’에 실패한 김재규 중앙정보보장과 부하들에 대한 전두환 신군부의 수사와 재판이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한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에 대한 김재규의 ‘민주혁명적 거사’ 자체는 그 진정성과 불가피성에 대해 우리 내부에 아직도 다양한 견해들이 있다는 것을 밝혀둔다.
과거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라 한다. 한국현대사의 틀을 만들다시피 한 박정희 정권말기의 부마항쟁과 10․26 사태 전후의 33년 전 역사는 어쩌면 국민대중들이 신음하고 죽어가는 오늘의 현실과도 닮아 있다. 어떤 값비싼 교훈을 얻을 것인가 ?
우리는 박근혜 후보가 엊그제 박정희 전 대통령 추도식에서의 사과를 처음으로 부마항쟁 당사자에 대한 사과도 포함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과 말 한마디로 넘어갈 수 없는 사안임을 너무나 자명하다. 그것이 진정성을 가지려면, 고통스럽지만 마음을 비우고 박정희 시대의 빛과 어둠을, 시작과 끝의 역사를 다시 보기를 진정으로 권한다. 그리고 부마항쟁 진상조사 등과 관련하여 ‘부마민주주의 재단 특별법’이 아닌 ‘부마항쟁 특별법’을 요구하는 우리의 소리에 하루빨리 응답하기 바란다. 그리고 ‘박정희의 딸’이 아닌 ‘대통령 후보 박근혜’는 그 존재 자체가 온 국민들에게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빛과 영화를 상기하게 하는 동시에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짙은 어둠과 악몽을 야기하는 것이 특정인의 의지나 희망과 무관한 역사적 숙명임을 분명하게 자각하기 바란다.
2012년 10월 29일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