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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리들리 스콧
출연: 러셀 크로우 (막시 무스), 와킨 피닉스(코모두스), 코니 닐슨(루실라), 올리버 리드(프로시모)
느낄 수 있는가, 이 거대한 스펙터클의 전율을... !
{절정기의 로마제국은 그 영토가 광대하여 아프리카 사막에서 잉글랜드 북쪽까지 걸쳐 있었다. 그 당시
세계는 그 총인구의 1/4이 로마 황제의 지배 하에 있었다. 때는 서기 180년, 마르커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 황제의 12년에 걸친 게르마니아(Germania) 정벌이 거의 마무리되던 무렵이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적의 요새만 함락하면 이제 로마 제국은 평화가 온다.}
평화로운 '5현제 시대'가 막바지에 이른 서기 180년 로마. 어두운 삼림. 수백명의 부대가 숨을 죽이고
서 있다. 마치 폭풍전야와 같이. 장군의 신호가 울리고 거대한 함성소리와 함께 하늘에는 불화살,
불타는 점토 항아리가 난무하고, 땅위는 수많은 병사들의 피로 물든다. 철인(哲人)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리차드 해리스 분)가 아들처럼 친애하는 장군 막시무스
(General Maximus: 러셀 크로우 분)는 다뉴브 강가 전투에서 대승한다.
죽을 날이 머지않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막시무스를 총애하여, 아들이 아닌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한다. 그러나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이에 질투와 분노를 느껴 급기야 황제를 살해한다.
왕좌를 이어받은 코모두스는 막시무스와 그의 가족을 죽이라고 명령한다. 가족을 모두 잃고 혼자 겨우
살아남게 된 막시무스는 노예로 전락하고, 투기장의 검투사로 매일 훈련을 받는다. 그에게 남은 건
오로지 새로 즉위한 황제 코모두스에 대한 복수 뿐. 검투사로서 매 경기마다 승리로 이끌면서
살아남자 그의 명성과 인기는 날로 높아간다.
로마로 돌아온 그는 아내와 아들을 죽인 코모두스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다. 그러던 어느날, 오래전
사랑했던 황제의 누이 루실라(Lucilla: 코니 닐슨 분)를 다시 만나게 된다. 어느 새 민중의 영웅이
된 막시무스. 코모두스는 그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고 분노하지만 민중이 두려워 그를 죽이지 못한다.
드디어 막시무스는 예전의 부하들과 은밀히 만나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 존경하던 황제를 살해한
난폭한 황제 코모두스에 대한 복수를 결의한다. 아직도 막시무스를 사랑하고 있는 루실라는 동생
코모두스를 배신하고 막시무스의 반란을 도우려 하는데.......
고대 로마 시대의 검투사를 소재로 한 제작비 1억 달러의 대작 시대극. 로마, 말타, 모로코, 영국 등 4개국에서 촬영하였고, 주인공의 장대한 인생역정과 전투, 그리고 애절한 로맨스를 곁들여 흥행과 비평 모두 최고의 성적을 거뒀다. 아카데미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작품, 남우주연(러셀 크로우) 의상, 음향효과, 시각효과상 등 5개 부문 수상.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일찍이 사장된 장르로 치급되던 로마 배경의 스펙터클 대작에 도전하여, 고전적인 아날로그 방식과 디지털효과를 혼합한 방식으로 <벤허>나 <스파타커스>에 필적할만한 장관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여기에 < LA 콘피덴셜>과 <인사이더> 등 정상의 연기를 보이고 있는 뉴질랜드 출신 러셀 크로우가 눈부신 열연으로 평론가들의 격찬을 한 몸에 받으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는 2만 8천여 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으며 2500점의 무기와 검투사가 입는 3천 벌의 갑옷, 3만 개의 진흙 벽돌이 사용되었다.
영화는 소피아 로렌이 주연한 <로마 제국의 멸망>(1964)과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로마제국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리차드 해리스)는 자신이 노쇠하였음을 느끼자, 게르마니아 정벌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린 막시무스 장군(러셀 크로우)을 후계자로 선택하여 자신이 사망한 후에는 로마제국을 다시 공화국 체제로 복귀시킬 것을 계획한다. 이를 알아챈 마르쿠스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와킨 피닉스)는 권력에 눈이 멀어 그의 아버지를 살해한 후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막시무스 마저 살해할 것을 명령한다. 코모두스의 부하들에게 가족을 몰살당한 막시무스는 혼자서 도주에 성공하나 노예상인에게 붙잡이고 자신의 신분을 속인채 노예로 팔려 검투사가 된다. 기나긴 여정 끝에 명성을 날리는 검투사로서 로마에 돌아온 막시무스는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코모두스와 최후의 대결을 펼친다.
오랜만에 보는 로마 시대극에 대한 미국 평론가들의 반응은 가히 열광적이었다. 특히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앞 다투어 주인공 러셀 크로우를 칭찬하였다. 뉴욕 포스트의 조나산 포어맨은 "스펙타클한 걸작"이라고 칭하면서 덧붙여 "이 영화의 진정한 영광은 러셀 크로우에게 돌려야 한다. 그는 한마디로 정말 훌륭하다. 제임스 메이슨처럼 불완전한 대사들을 마치 세익스피어의 대사처럼 들리도록 할줄 아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고 크로우의 연기에 극찬을 보냈고, 월 스트리트 저널의 조 모겐스턴도 크로우의 연기에 대하여 "그의 연기는 고전적인 헐리우드 영웅의 것과 같다. 그는 이를 위하여 오래된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겉잡을 수 없이 강하면서도 과감하게 침묵할 줄 아는 것이다."고 크로우의 연기에 박수를 보냈다.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데스몬드 라이언은 "빛나는 로마식 승리."로 이 영화를 평하였고, 뉴욕 데일리 뉴스의 제이미 버나드는 "만일 당신이 검투사 서사극에 다소 관대한 면이 있다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미칠듯한 즐거움에 기절할 것."이라고 호평을 보냈다. 반면, 워낙 기대치가 높았던 이 영화에 대하여 다소의 실망감을 나타낸 평론가들도 없지는 않았는데, 워싱턴 포스트의 스티븐 헌터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세익스피어의 어투로 "친구들. 그리고 워싱턴 시민 여러분. 나는 이 영화를 찬양하러 온 것이 아니고 이 영화를 죽이려 왔소. 형을 집행하시오.(Thumbs down!) 단검을 그의 펄펄뛰는 가슴에 꽂고 그 속편 여부에는 조금의 관심도 기울이지 마시오. 이 영화는 잘 만든 영화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오. 이 영화는 위대한 걸작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망스럽소. 그러니 어서 이 영화에 대한 형을 집행하시오."라고 큰 기대에 따른 실망감을 표했다. 이와 유사하게 시카고 선 타임즈의 로저 에버트 역시 그의 엄지손가락을 내리면서, "<스팔타커스>와 <벤허>에 대한 짧은 기억을 가진 이들이라면 실망할 것."이라고 평하고, "마치 스팔타커스 '라이트' 같다"고 결론내렸다. (장재일 분석)
프랑스 개봉시 평을 보면, 대체적으로 호의적이다. 피가로 스코프는 "스콧 감독은 이 한편의 웅대한 서사시로 완벽하게 재기하였다"라고 최고의 찬사를 보냈다. 셰익스피어를 연상케 하는 대사나 현란한 편집은 언론마저 사로잡았는데, 랙스프레스는 "명작과의 조우"라는 표현을 사용했고, 리베라 시옹도 "놀랄만한 스펙터클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까이에 뒤 시네마는 "러셀 크로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를 보느니 산책을 권장했을 것이다"라고 혹평을 했고, 르몽드도 "철저한 쇼 비지니스의 논리"를 따른 감독을 비난했다.
국내 개봉시 서울 132만의 관객을 동원, <공동경비구역 JSA>에 이어 두번째 높은 흥행 기록을 냈다. 또 아카데미 시상식을 맞아 이듬해 3월 12일 재개봉되었다.
제작자 더글러스 윅은 "옥스포드의 학자들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말하지만, 역시 영화다보니, 실제와 다른 것이 많다. 검투사를 양성하는 프록시모(올리버 리드)는 늘어선 사내들에게 곧 다가올 죽음의 순간을 알려 주지만 사실 경기장에서 죽는 검투사는 십 분의 일에 불과했다. 결투는 죽음이 아니라 부상이나 굴복으로 끝나곤 했다. 막시무스(러셀 크로)가 야수와 전차들 사이에 던져지는 모습도 고대 로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관객이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우며 검투사에게 자비를 내리라고 요구하는 장면은 사실과 정반대다. 그것은 죽음의 표시였다. 관객이 손가락 두 개를 일자로 세워야 검투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러셀 크로우가 연기하는 주인공 막시무스 장군은 허구의 인물이지만, 이 영화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틱터는 실존했던 인물이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이기도 한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세습이 아닌 양자상속으로 즉위한 다섯명의 덕망있는 황제가 로마를 다스린 오현제 시대(96∼180)의 마지막 군주다. 에드워드 기본의 <로마제국 쇠망사>에 따르면, 아우렐리우스는 시민들에게 철학을 강의하고 전쟁을 인간성에 대한 모욕으로 간주한 평화주의자였으나, 부득이 무기를 들게 되면 영화에서 보듯 몸소 변방의 전선에 나갔다. 그의 죽음도 전장에서 얻은 역병 탓이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코모두스와 동시대를 살았던 역사가 디온 카시우스는 영화에서처럼 아들 코모두스가 황제를 독살했다고 기록한다(영화 <로마 제국의 명망>에서는 코모두스의 측근에 의해 독이 묻은 칼로 자른 사과를 먹여 독살된다). 하지만 마르쿠스 황제는 천연두 같은 전염병으로 죽었으리라는 것이 정설이다. 영화와 달리 온후하고 의심을 모르는 아우렐리우스는 아들 코모두스를 무척 아껴 일찍부터 권력에 개입시켰다고 전해진다. 응석받이 코모두스는 '로마인들에게 내려진 가장 극악한 저주'로까지 불리는 폭군이 됐다. 현명한 아우렐리우스가 후계자 선택만은 이상하게 어리석었다는 역사의 평가로부터 <글래디에이터>의 상상력은 발동한 셈이다.
코모두스의 누이 루실라(루킬라)는 영화에서와 달리 아버지와 공동 황제 자리에 있었던 루키우스 베루스의 아내였으나 그가 젊은 나이에 죽자 아버지의 뜻에 따라 속주 출신의 장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폼페이아누스과 정략적으로 재혼을 했다. 코모두스가 황제에 오른 후, 황후 지위에 대한 권력욕으로 원로원 의원들과 연합해 코모두스에게 암살자를 보냈다. 실패한 그 암살자는 죽기 전에 경솔하게도 자신의 배후를 발설했고, 루실라는 카프리 섬으로 귀양을 갔지만 곧 살해당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폭군 코모두스는 잔인하고 난폭한 인물이었다. 12살 때 그는 목욕물이 지나치게 뜨겁다는 이유로 노예를 용광로에 던져 버렸으며, 술과 도박을 좋아하던 그는 젊은 여자 300명과 소년 300명을 하렘에 두고 섹스에 탐닉했다고 전한다. 누이 루실라와의 관계도 영화에서 묘사한 것처럼 순수한 사랑을 애걸하는 것과는 실상 달랐다. 그는 "눈에 띄는 여자 친척과는 모두 동침한" 인물이었고, 루실라도 거기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고. 영화에서처럼 코모두스는 육체적인 강인함을 과시하기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신이 헤라클레스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해 신화가 전하는 헤라클레스의 모습 그대로 사자 가죽을 걸치고 곤봉을 들고 다녔다. 자신이 불굴의 검투사라고 생각한 그는 황음과 잔혹을 즐기며, 실제 콜로세움에 나아가 야수와 납검 든 검투사를 상대로 무수히 살육 경기를 벌여 대전료까지 받았다고 전해진다. 막시무스를 향한 질투에 미쳐 단 한 번 검투장에 서는 <글래디에이터>와 달리 코모두스는 735번 검투장에 나타났다. 한 역사가는 "코모두스는 피로 뒤범벅이 되지 않고서는 결코 대중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황제에게 저항할 수 없었던 검투사들이 수없이 그의 손에 죽어 갔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을 바위로 분장시켜 과녁으로 삼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의 복장이었다. 735번 경기를 치를 때마다 코모두스는 은조각 2만 5천 개를 이어 만든 갑옷을 입었다고.
로마는 코모두스의 취미 때문에 파산했다고 한다. 즉위 초에 자객의 습격이 있은 뒤부터 코모두스는 원로원을 겁내고 멀리했다. 코모두스는 제위에 오른지 12년이 지난 192년 12월 31일, 애첩 마르키아에게 독살됐으나 독이 늦게 퍼져 그의 레슬링 코치였던 청년 나르시수스에게 목졸려 죽었다. 시체는 갈고리에 걸려 검투사들의 탈의실로 운반됐다고 한다. 그가 죽었을 때 로마의 재정은 거의 바닥 상태였다. 코모두스에게는 후계자도 없었다. 다섯 달 동안 네 명의 황제가 혼란스러운 로마를 지배했다. 용병은 반란을 일으켰고 권력에 눈이 먼 정치가와 군인들 때문에 내전이 끊이지 않았다. 로마의 영광은 코모두스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영화 초반의 스펙터클한 전투 장면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철저하게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프닝으로 나오는 오마하 해안 상륙작전에 대한 자존심 대결에서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영군 판함 근처의 숲에서 진행된 이 장면은 거대한 숲이 불바다로 변하는데, 전투신 촬영 도중 때마침 영국 산림관리위원회가 이 숲을 벌채할 것을 알고, 1600개의 불화살과 불타는 점토 항아리, 투석기를 이용해 숲을 모두 태워버렸다고.
한편, 막시무스를 군중의 영웅인 검투사로 지도하는 프록시모 역의 올리버 리드가 이 영화의 촬영 도중인 99년 5월 2일 말타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결국 제작진은 그의 남은 2분여의 연기를 위하여 320만불을 들여 컴퓨터 그래픽으로 살아있는 그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영화 마지막 크리딧에 'To Our Friend'라고 하여 그를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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