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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포 와우산에서 굽어 본 모습이 마치 밤알을 닮았다 해서 밤섬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길고 깨끗한 은빛 모래밭과 그 주위로 펼쳐진 버드나무 숲, 바닥이 훤히 드러나 보일 정도의 깨끗한 강물은 오랫동안 마포 8경의 하나로 꼽혔다. 밤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왕조 한양천도 때로 배 만드는 기술자들이 처음 정착하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뽕나무와 양초(감초)를 심고, 염소를 방목하며 살았으며 67년까지 주로 조선, 도선업, 어업과 땅콩, 채소농사 등을 생업으로 했다.
해방후 밤섬의 행정구역 명칭은 마포구 율도동. 폭파후에는 아랫밤섬과 윗밤섬으로 갈라져 아랫밤섬은 마포구, 윗밤섬은 영등포구로 행정구역이 나뉘어져 있다. 폭파후 10여개의 조그만 섬의 형태로 남아 있던 밤섬은 해마다 상류에서 내려오는 토사 등이 쌓여 생태계보전지역 지정 당시에는 241,313㎡에 달할만큼 면적이 넓어졌다. 밤섬에 새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86년 한강관리사업소가 생겨 일반인들의 출입을 통제하면서부터 86년 한강종합개발을 하면서 철새도래지로 인정받아 88년에는 갈대, 갯버들, 버들강아지, 찔레 등 5만 8000포기의 식물을 심기도 했다. 서울시는 99년 밤섬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하여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중지도라고도 불린다. 강북의 용산이나 강남의 노량진 부근을 주행할 때 시선을 사로잡는 섬.
한강대교를 중간에서 떠받치고 있는 타원형의 땅이 바로 이곳이다. 면적은 4만5300평.
▲올림픽대로에서 원효대교를 지나 한강대교로 들어가거나 ▲강변대로에서 이촌동 방면으로 빠진 뒤 한강대교 북단 교차로에서 우회전 한강대교로 들어가면된다. ▲걸어가려면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또는 국철 용산역에서 내려 한강대교쪽으로 1㎞쯤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그리고 철제계단을 내려가면 섬을 일주하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산책하는 보폭으로는 15분정도의 거리.
2000여㎡의 헬기 이·착륙장이 있으며, 섬 끝에서 보는 한강의 모습은 일품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중 동료 구하고 순직한 이원등(李源登)상사의 동상이 있음‘노들’은 예부터 ‘서울 한강의 남쪽 동네‘를 가리키는 지명이었고, ‘백로가 놀던 돌’이라는 뜻의 ‘노돌’에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노들나루는 한강 5대 나루 중 하나로, 지금의 노량진은 이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섬을 만들면서 중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95년 일본식 지명 개선사업에 의해 비로소 노들섬이라는 우리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노들섬은 본래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이어진 모래벌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래밭 마을’이라는 의미의 ‘사촌’이라 불렀으며, 해지는 풍경이 아름답다하여 용산 8경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들어 철제인도교를 건설하면서 주변의 모래를 모아 언덕을 쌓아올리고 이를 중지도라 이름붙이면서 모래벌판이었던 노들섬 주변이 섬이 되었다.
근대화 이전까지는 노들섬 주변의 한강 백사장이 넓게 남아있었으므로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물놀이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68년부터 한강개발계획에 따른 현 강변북로의 건설에 백사장의 모래가 사용됨에 따라 모래밭은 사라졌고 노들섬 주위로 강물이 흘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
'살곶이벌'이라고도 한다.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칩거하던 조선 태조가 서울로 돌아온다는 소식에 태종이 뚝섬에서 맞았는데, 태조는 태종을 보자마자 화가 치밀어 태종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는 고사에 연유된 것이다.
1949년 서울로 편입되기 이전에는 한강의 하항(河港)과 근교농업지로 유명했으나 1940년대 후반부터 도시화가 시작되었다.
한강 수운의 쇠퇴로 뚝섬은 하항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여 한강변은 유원지로 조성되었고, 1950년대 후반 이래 공장이 건설되면서 도시화가 가속되었으며, 1960년대에 들어와서는 대규모 주택단지와 상가도 형성되었다.
뚝섬지구의 도시화는 서울 동부 교외지역 도시화의 대표적인 경우로서 현재 뚝섬의 서부지구인 성수동은 서울의 대표적 공업지대의 하나이다.
반면에 동부지구인 자양동 ·구의동 일대에는 주택단지가 조성되었으며, 건국대학교와 세종대학교가 자리하고, 어린이대공원이 건설되어 서울 교외의 주택지 ·학원지구 및 녹지지대를 형성한다. 1989년까지는 이곳에 경마장이 있었다.
난지도(蘭芝島)는 한강 지류인 모래내와 홍제천,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한강 하류 저지대에 흙모래가 쌓여 자연스레 만들어진 섬. 난초와 지초가 자라는 섬이라고 해서 난지도라 이름 붙여졌다.오리가 물에 떠 있는 모습과 비슷하다 해서 오리섬(鴨島),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한다고 꽃섬(中草島)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난지도는 홍수가 날 때마다 모래가 쓸려 섬의 모양이 바뀌고 물이 넘쳐 피해를 입었다는 조선시대 문헌기록으로 볼 때 조선 초기에 이미 사람들이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8년 쓰레기 매립 이전에는 꽃 배추 무 땅콩 재배가 이루어졌는데,땅콩은 전국 생산량의 30%를 차지할 정도로 수확량이 많았고 개구리참외는 맛도 좋은데다 굵기가 어른 팔뚝만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서울의 거대도시화 과정에서 쓰레기매립장으로 지정된 난지도는 1993년까지 15년간 3,470,952㎡에 생활쓰레기,건설폐자재, 산업폐기물 등 약9,200만㎥의 쓰레기가 매립돼 남북으로 98,94m나 되는 거대한 쓰레기산 2개가 만들어졌다.
악취와 파리떼만 들끓게 된 난지도와 쓰레기를 뒤지는 넝마주이는 가난한 한국의 상징으로 외국 매스컴에 단골로 등장했으며 이곳에 형성된 판자촌은 서울의 대표적 빈민촌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난지도에는 폐품을 수집하는 사람이 1000명을 넘어섰을 정도며 얼기설기 지은 판자집만 수백여채나 됐다.
서울시는 쓰레기 매립이 포화상태에 이른데다 쓰레기가 썩으면서 분출하는 메탄가스가 자주 폭발을 일으키고 침출수가 여과없이 한강에 유입되는 등 난지도가 위험한 상태에 이르자 1993년부터 쓰레기 반입을 막고 흙을 쌓는 복토작업에 들어갔으며 월드컵을 앞두고 1년여에 걸쳐 생태공원으로 바꾸는 작업을 해왔다.
지난 2002년 5월 평화의 공원,노을공원,하늘공원,난지한강공원,난지천공원 등 5개 공원을 조성,월드컵 공원이란 이름으로 탈바꿈한 난지도는 21세기 환경주의 모델로 각광을 받으며 서울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버려진 땅 난지도는 지금 새로운 생명이 움틀거리고 있는 희망의 땅으로 변해가고 있다.
옛날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라서 섬 이름이 유래되었다. 일명 "옥수동 섬"으로 불리운 금호동과 옥수동 남쪽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으로 1970년 초에 이 섬의 흙을 파다 압구정 아파트 건설, 개발에 사용한 관계로 지금은 물속에 잠겼으며 경치가 좋아 선경을 이루던 이 섬은 일찍부터 기우제를 지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도는 해마다 홍수에 씻겨 겨우 옥수정쪽에 모래섬이 되었고 강 건너 압구정도 빈터만이 남아 전일의 풍경과는 크게 달라져 갔다.
이 모래섬은 여름 장마철이면 완전히 물에 잠겼으며 주로 여름철에 금호동(무쇠막)에서 나룻배로 건너 다녔고 섬과 압구정 사이에 물길을 샛강이라 부르기도 했다.
1965년 전까지는 강변에서도 수영과 물놀이를 하였으며 60년경에는 주민 아낙네들이 강변에서 빨래터로도 이용하였다. 청계천에서 생활하수등 드러운 물이 흘러내려와 한강물의 반인 강변쪽은 시커멓케 흐르고 있었고 이후 강물 전체가 오염되어 이용할수 없게 되었다.
배밭이 많았던 압구정과 섬사이에는 물이 얕게흘러 샛강이 있었고, 샛강은 물론 강변 및 섬에서 주민들이 여름철이면 수영을 즐겼으며 많은 시민이 무수막에서 나룻배로 옥수동섬으로 건너가 텐트를 치며 여름을 나기도 하고 겨울에는 강물이 얼어 썰매와 스케이트 등을 즐겼다.
서해안이 밀물, 썰물의 영향이 저자도까지 영향이 있었으며 6.25후 한남동 외인주택의 외국인들도? 5, 60년대에는 강변쪽을 이용 한강을 오갔으며 이 옥수동 모래섬에서 스상스키와 주로 모터보트를 즐기기도 했다.
1968년 현대건설이 저자도 건너 압구정지구의 매립면허 신청면적은 175,002㎡평이었고 매립목적은 당초건설공사용 각종 콘크리트제품공장설치대지조성 및 강변도로설치에 일익을 담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이후 실시계획인가 과정에서 택지조성으로 변경되었다.
당초 면허면적보다 24,792㎡정도가 제외지 쪽으로 더 많이 매립되어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이후 한강하류부의 수리모형 실험결과에 비추어 지장없다는 결론이 나와 1971년 10월 23일 건설부는 원상회복의무 면제조치를 서울시에 지시했고 이후 1973년 3월 29일 준공인가가 나왔는데 총매립면적은 158,910㎡이고 그중 제방 4,667㎡과 도로 22,005㎡은 국가에 귀속하고 잡종지 132,236㎡은 현대건설에 귀속하게 됨에 따라 오늘의 압구정동지구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였다.
현대건설이 압구정동공유수면 매립과정에서 압구정동과 대안인 성동구 옥수동 사이에는 물위에 떠 있는듯 있어 왔던 저자도(楮子島)의 흙을 파서 매립용 토사로 사용함으로써 하중도(河中島)의 하나가 없어졌는데 이 섬이 사유지였던 관계로 이후 지주와 현대건설과의 사이에 10년에 걸친 송사(訟事)가 있었으며 원래 이 섬은 한강 본류와 중랑천의 물줄기가 만나는 관계로 생겨난 삼각주로서 토사가 퇴적하여 조성된 것인데 1930년경만 해도 동서의 길이 2,000m, 남북 885m나 되는 118,002㎡에 이르는 섬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는 등성이도 있었고 넓은 밭과 집들도 들어선 특유한 섬풍경을 이루고 있었다. 섬풍경이 이러한지라 고려말의 한종유 (韓宗愈)는 여기에 별장을 짓고 그 노후를 보냈고 조선시대에는 세종이 이 섬을 둘째딸 정의공주(貞懿公主)에게 하사하여 공주의 아들 안빈세(安貧世)에게 전해져 내려 왔다. 조선조 말기에 이르러서는 철종의 부마인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되었으나 박영효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여 한때 몰수되었다가 다시 되돌려 받기도 했다.
그후 1925년 을축년대홍수 때 사리퇴적으로 경작이 불가능해졌고 1937년경에는 사리채취허가신청이 있었는데 지목은 전과 잡종지로 표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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