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훈(38)은 말을 참 ‘맛있게’한다. 적절한 은유와 비유를 섞어가며 대화하는 상대방이 ‘아하’라는 감탄사와 함께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재주가 있다.
남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겸손함도 갖췄다. 질문의 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려 애쓰고 그에 맞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노력한다. 현란한 화술을 자랑하는 사람일수록 그렇게 행동하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적어도 인터뷰에서만은 환상의 복식조라고 자부해오던(실은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다)
‘남과 여’에게 그는 신선한 충격을 안겨줬다. 대단히 위험스러운 편견이지만 그동안 숱한 연예인을 만나오며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가지게 됐던 ‘연예인은 단순하고 생각이 짧다’는 생각이 박중훈과 얼굴을 마주하고 나서 정확히 10분 만에 바뀌었다.
남=며칠 전 부산에서 안성기씨와 야쿠쇼 고지가 대담하는 자리에 예정에도 없이 불쑥 끼어드는 걸 봤다.
박중훈=제8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 사회를 위해 갔다가 우연히 대담하는 광경을 보게 됐다. 안성기 선배님이 워낙 ‘성실하게’(웃음) 말씀하시는 분이라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다. 취재진이 조금 따분하게 느끼는 것 같아 약간 까불었다.
여=후배들을 잘 챙기는 선배라 뭔가 다른 것 같다.
박=위로는 안성기선배님과 (최)민식이 형, 아래로는 (김)승우 (신)현준이 (장)동건이 (정)우성이 등이 있다. 배우는 어차피 외로운 존재다. 그래서 되도록 자주 모여 우리끼리 뭉치려 노력한다.
남=얼마 전 술자리에서 안성기씨에게 버릇없이 군 모 배우를 약간의 물리력(?)을 동원해가며 호되게 나무랐다는 소문을 들었다.
박=처음 듣는 애기인데…. 문제의 모 배우와 술을 마신 적이 한번도 없다. 헛소문인 것 같고, 솔직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잘못하는 후배들을 세게 다루는 편이었다. 예를 들자면 안성기 선배님이나 내 앞에서도 스타인 척 폼을 잡는 친구들이 있다. 그러면 그냥 놔두지 않았다. 요즘은 많이 유순해졌다. 포용하고 이해하며 설득하려 애쓴다.
여=영화 얘기로 돌아가자. ‘황산벌’(이준익 감독·씨네월드 제작)이 17일에 개봉된다. 거두절미하고 여전히 웃겨주나?
남=그건 내가 대답하겠다. 영화를 미리 봤는데 조금 당혹스러웠다.
박=뭐가 당혹스러웠다는건지 듣고 나니 참 당혹스럽네.
남=첫번째는 사극 분장이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잘 어울려서 놀랐고, 두번째는 기대만큼 웃기지 않았다. 영화가 전체적으로 웃기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박중훈씨가 무척 진지한 모습으로 나왔다는 얘기다.
박=한마디로 ‘소설인 줄 알았더니 에세이였다’, 그것 아닌가. 이준익 감독은 내게 진지해질 것을 원했다. 예전에 출연했던 ‘게임의 법칙’에서처럼 아마도 웃음 뒤에 감춰진 눈물을 원했던 것 같다. 나도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황산벌 전투에 나서는 계백 장군이 촐싹거리며 웃기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여=할리우드 진출에 사극 출연까지 나름대로 계획을 차곡차곡 세우고 사는 것 같다.
박=새해가 밝으면 처가가 있는 일본 나가노로 가 온천에 몸을 담그고 올해는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구상한다.
남=정치인 같다.
박=정치인만 신년구상하란 법이 있나. 연예인들은 즉흥적이고 단순하다는 선입견을 이제는 고쳐야 한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연예계에 많기는 하지만. 생각을 많이 하다보면 자기를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걸 즐기는 편이다.
여=마음먹은 대로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것처럼 보인다.
박=노력이 병행되긴 했지만 운이 따른 덕택이다. 6년 전 고만고만한 코미디 영화에 무더기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가 바깥에서 보면 가장 행복했을 것 같았겠지만 실은 제일 힘들었다.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났는데 더 이상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모든 활동을 중단했다. 여기까지가 노력한 부분이다. 이후 ‘인정사정 볼 것없다’에 출연해 좋은 반응을 얻게 된 것은 운이다.
남=가정생활이 궁금하다. 연예인치고 결혼을 비교적 일찍 한 편이다.
박=내년이면 결혼 10주년이다. 결혼과 동시에 ‘얻은 것은 안정이요, 잃은 것은 설렘’이다. 가끔은 ‘결혼한 뒤 내가 지나치게 안정을 꿈꾸는 것이 아닌가. 배우는 항상 예민해야 되는데’라는 고민도 한다. 그러나 얻은 부분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보물 1호다. 그들이 있어 내 연기생활은 더욱 윤택해졌다.
여=실제로도 1남2녀, ‘황산벌’에서도 1남2녀를 둔 가장인데.
박=정말 예리하다. 역시 ‘남과 여’는 다르다(웃음). 영화 속에서 내가 가족을 죽이는 장면이 나온다. 연기하면서 몰입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힘들게 찍고 나서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오늘 이러이러한 장면을 촬영하느라 파김치가 됐다’고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얘기하니까 아내가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가봐야 한다’면서 휙 나가버리더라. 무심도 하지.(웃음)
남=박중훈씨와는 밤을 새워 수다를 떨어도 시간이 부족할 것 같다. 앞으로 계획은?
박=우선 (차)태현이와 함께 새 영화를 찍는다. 그리고 할리우드에서의 출연 일정이 잡혀 있다. 예정대로 일이 잘 진행되면 내년 상반기까지는 바쁘게 살 것 같다. 마지막으로 그냥 가기 섭섭하니까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주겠다. ‘찰리의 진실’에서 함께 연기했던 마크 월버그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다. 2000만달러짜리 저택인데 집에 극장이 있다고 별 것 아닌 것처럼 얘기하더라. 그래서 나도 지기 싫어 ‘홈시어터 시스템은 한국에서도 웬만한 가정이면 다 갖추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이건 직접 보니 진짜 극장이었다. 그 순간 짜증이 확 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