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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반상식 알아두기 스크랩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
정암 추천 0 조회 82 07.11.15 11: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2007년 8월 31일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진부령에서.

 

2003년 7월 근교산행에 한참 빠져있을 때, 부산일보 김해 백두산 산행기사를 접했다.
신문기사의 말미에는 김해백두산은 낙남정맥 및 함경북도의 백두산과
아무 관련이 없는 글이 올라와 있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김해 백두산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한번은 찾아보아야지 하는 생각을 했다.
오래전에 소개된 국제신문 다시 찾는 근교산-김해 백두산 동신어산 종주 편의 기사와
부산일보 테마산행 백두산 자료를 가지고 김해시 대동면사무소 앞의 대동초등학교에 도착했다.
국제신문 옛 산행기사를 보고 근교산을 찾았다가 곤욕을 치렀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라서
부산일보 테마산행기사를 이용하여 들머리를 찾으려했지만 내용이 빈약하여
현인두님과 집사람이 보는 앞에서 우왕좌왕했다.
대동초등학교 우측능선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겨우 찾아냈지만 태풍매미가 지나간 후라서
등로에는 큰 소나무들이 넘어져있었고 나뭇잎들이 소복하게 싸여있어 쉽지 않은
‘다시 찾는 근교산-김해 백두산 동신어산 종주’ 편을 6시간 30분에 걸쳐 걸었다.
2003년 9월 14일의 산행기를 국제신문 홈페이지에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산행지: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김해 백두산 동신어산 종주.
산행일자: 2003년 9월 14일 일요일.
산행참석자: 현인두, 이재수 부부산행.
산행일지:
10:28 백두산 정상 도착.
백두대간이, 백두산과 지리산을 연결하고,
낙남정맥이 지리산과 백두산(김해)을 연결한다고 보면,
큰 백두산과 작은 백두산이, 능선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 됨.(개인적인 생각)“

부산일보 기사의 말미에 "백두산이란 이름은 왜 붙여졌는지 정확하게 아는 곳이 없다.
취재 과정에서 몇몇 관련 기관에 문의했으나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백두대간의 끝자락이라는데서 연유했다는 추론도 있으나 산꾼들은
김해 백두산이 백두대간과 무관하다고 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었고,  
TV에서는 “신동엽의 있다 없다”는 프로그램에서 “경상도에 백두산이 있나요 없나요?”를
방영하면서 장난스럽게 다루었던 김해백두산이다.
김해시 대동읍에서 태워나 이곳에서 자랐다는 지역 주민은 함경북도의 백두산은
진짜 백두산이요, 집 뒤의 백두산은 가짜 백두산이라고 했다.
모두들 김해백두산에 관하여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하여 나 또한 잊으려고 했다.
그런데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더 오묘한 미련으로 다가왔다.
계속되는 김해백두산의 생각이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나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내손으로 찾아내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지만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풀기위하여 국제신문 및 B일보 홈페이지에서 김해지역의 산들을
모두 찾아 A4 용지에 출력하였다.
그리고 그 산들을 찾기 시작했다.
2003년 2월 4일 부산일보 굴암산.
2003년 3월 23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3311)-무척산 북릉.
2003년 6월 22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344) 부산 강서 봉화산.
2003년 8월 24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352) 김해 용지봉.
2003년 9월 28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271)-부산 강서구 보배산.
2004년 5월 26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309> 김해 신어산 종주.
2004년 3월 1일 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375>김해 금동산.
2004년 10월 2일 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402>김해 분성산.
2004년 12월 3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금동-석룡산 종주.
2004년 12월 10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김해 까치산-신어산.
2004년 12월 24일 국제신문 다시찾는 근교산-김해 돛대산-신어산.
2005년 4월 2일 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427> 창원 비음산~김해 용지봉.
2005년 4월 3일 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412> 창원 비음산~봉림산.
2005년 5월 1일 장복산~덕주봉~불모산~용지봉.
2005년 5월 5일 창원 성주사~불모산~화산(공군부대)~진해 성흥사.
2005년 5월 9일 국제신문 근교산&그너머<431> 김해 봉화산.
2005년 9월 16일 부산시 강서구 성고개~장고개~보배산~너더리 고개~지사동.
2005년 9월 19일 부산시 지사동~너더리 고개~굴암산~화산~불모산~상점령~장유폭포.

열여덟  번을 산행하면서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출발한 능선이 지리산 영신봉을 돌아
이곳 김해백두산까지가 가장 긴 마루금인데 무엇 때문에 백두대간은 지리산에서 멈추고,
낙남정간은 동신어산으로 진행했는지 의문을 품었지만 김해 백두산이 백두대간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2005년 8월 낙동정맥을 준비하면서 서점에서 조선일보 신산경표를 우연히 발견한다.
신산경표에서 백두대간의 시작점이 지리산 천왕봉이 아니라 영신봉에서
섬진강의 하구 금오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백두대간이라는 글을 접하게 된다.
그리고 낙남정간은 낙동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에 낙남정맥으로 명명하여야하며,
하동옥산에서 서낙동강 하구 부산시 강서구 봉화산까지가 낙남정맥이라는 주장을 했다.
처음에는 이글이 맞는 것으로 착각하고 쓸데없이 김해 백두산에 관하여 연연했다는
때 늦은 후회를 하면서 2005년 8월 27일 낙동정맥 천의봉을 떠났다.
송경호님과 차문환님에게 너무도 많은 부담을 주며 그해 12월 금정산을 지나
백양산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에 흘렸는지 뒤를 돌아보니 김해 백두산이 들어왔다.
김해 백두산은 나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슬픈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김해 백두산을 바라보며 문득 낙동강 하구가 서낙동강의 녹산수문이 아니라
김해 백두산 아래의 대동수문이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지금 내가 걷고 있는 백양산 바로 아래가 구포이지만 낙동정맥은 낙동강하구에서
끝내지 않고 능선을 따라 몰운대로 가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맥이 하구에 도착하여도 능선이 계속된다면 바다까지 따라간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하동 옥산에서 수십Km밖에 안 되는 섬진강하구 금오산으로 가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낙남정간을 따라 200여Km 진행하여 낙동강하구 김해백두산을 가는 것이 맞을까?
삼척동자(三尺童子)라도 알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백두산에서 끝난다.”는 불멸의 진리가
200여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전문산꾼의 블로그에는 “한강기맥의 분기봉에서 백두대간을 떠 올려본다.”는 제목이
백두대간의 시작점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올라와 있다.
마지막으로 그 글을 떠올려보며 백두대간의 이야기를 끝내려고 한다.


남한지역의 백두대간을 북진하다보면 마지막으로 분기되는 마루금이 한강기맥이다.
한강기맥은 오대산 두로봉에서 분기되어 서쪽을 뻗어나가는 능선으로
인문학의 시각에서 보면 한강기맥이고 자연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차령산맥이다.
두로봉에서 시작하여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에서 맥을 다하는데,
총거리는 165Km이고 오대산, 계방산, 용문산 등 큰 산을 세우고도 바다에
도달하지 못하여 정맥 이름을 얻지 못했다.

그런데 산경표에 의하면 금남정맥은 전라북도 무주의 주화산(珠華山)에서 북서로 뻗어
계롱산에 이르고 다시 서쪽으로 뻗어 부여의 부소산(扶蘇山) 조룡대(釣龍臺)에서 끝난다고
하는데 그 거리는 약 118km에 이른다.
  
한강기맥에 비하면 금남정맥은 나지막한 산들로 이루어져있고, 산줄기도 훨씬 짧다.
금강의 남쪽 울타리를 형성하고 있다고 해서 금남정맥으로 부르고 있는데,
남한강과 북한강의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한강기맥은 금강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그 규모가 대단하고 광대한 수계(水系)를 담당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한강정맥으로 불러야하는데 무엇 때문에 한강기맥으로 부르는가?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 때문이다.
‘산자분수령이란,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른다.
산은 물을 넘지 못하고 물은 산을 건너지 않는다.
두 능선 사이에는 계곡이 하나 있고 두 계곡 사이에는 능선이 하나 있다.
산 없이 시작되는 강이 없고 강을 품지 않는 산이 없으니 산과 강은 하나이다.
고로 산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반듯이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처음에 이글을 대했을 때 무슨 뜻인지 몰라 몇 칠을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 이유는 아주 쉬운 내용을 너무도 어렵게 표현하여 상당이 혼동스러웠다.
쉽게 표현하면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강 하구에서 끝난다는 내용이다.
한반도 백두대간에서 분기한 산줄기가 10개의 강을 만들고,
그 강의 울타리가 정맥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백두대간을 비롯하여 모든 산줄기가 바다에서 끝나야한다는 원칙은 절대적이지만,
18세기경 산경표를 만들면서 이런 원칙은 모체( 母體)부터 지켜지지 않았다.
한 개의 백두정간이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간으로 세토막이 나버렸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간이 쪽을 나뉘지 않고,
같은 영역의 산줄기로 표기하고 있지만 이름은 각각 다르다.
17세기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 권 1천지문(天池門)에는
백두정간(白頭正幹)이라는 제목이 나온다.
백두정간(白頭正幹)의 정(正)은 ‘바르다’는 뜻보다 ‘으뜸’이라는 뜻이 강하다.
정일품(正一品) 할 때의 정으로 큰 大자와 같은 뜻이라고 한다.
18세기경 산경표를 만들었던 저자는 하나의 백두정간에서
임의로 백두대간, 장백정간, 낙남정간 세 토막을 내어버렸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산경표를 만들었던 작가는 풍수가 유행하던 당시 세태에 끌려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라말 도선(道詵)의 옥룡기(玉龍記 : 道詵記)에는,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고 되어 있다.
백두정간에서 장백정간과 낙남정간을 분리하여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산줄기만 백두대간으로 명명함으로서 모체부터 왜곡되기 시작했다.

백두정간 모체에서 토막 난 낙남정간은 제대로 표기되었는가?
조선 영조 때에 편찬한 여지편람(輿地便覽) 건책(乾冊)의 내제목(內題目)이 산경표인데,
백두대간 편의 낙남정간은 지금의 분성산(분산: 盆山)에서 끝을 맺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분성산 아래의 김해시 구산동은 낙동강 하구인가?
옛 자료 어디를 보아도 분성산 아래의 구산동은 낙동강과 전혀 관련이 없다.
저자는 무엇 때문에 낙남정간의 끝을 분산이라고 했을까?
김해시 구산동은 500년간 가야연맹의 맹주국 금관가야의 도읍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반천을 중심으로 김수로왕릉, 허황후릉, 구지봉, 대성동고분등이 흩어져 있고,
분성산에는 가야시대에 축성된 분산성과 해은사(海恩寺)가 있다.
해은사는 허황후와 장유화상이 가락국에 무사히 도착한 후 풍랑을 막아준
바다의 은혜에 감사의 의미로 지은 사찰이다.
해반천은 분성산과 나란히 남북으로 뻗어있다.
현재도 김해시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행정관서가 위치를 하고 있지만,
조선시대의 관청도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성산 주변은 김해시의 중심으로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원칙을 벗어나 예우를 했다.  
백두정간에서 떨어져 나간 낙남정간은 제자리를 못 찾고 200년간 방황을 한다.

낙남정간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혹자(或者)는 얼토당토 않는 부산시 강서구의 봉화산이리고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김해시 용지봉에서 불모산, 보배산을 지나
서낙동강 하구 녹산수문 부근에 봉화산이 위치하고 있어 낙남정간의 끝이라는
주장은 부산, 경남의 환경변화를 모르는 수도권의 산꾼들의 입에서 나왔다.
타 지역 산꾼이면 몰라도 영남산꾼은 이런 주장에 대해서 현혹되면 안 된다.
20세기 초까지는 서 낙동강의 하구 녹산은 바다였다.
봉화산을 모산으로 여기는 녹산이 바다라는 사실은 옛 자료에도 올라와 있다.
녹산(菉山)이라는 지명은 녹두처럼 작은 섬인 녹도(菉島)에서 유례 되었다고도 한다.
녹도가 여지도서의 김해부지도상에 표시되어 있고 조선왕조실록 순조 11년의
염전 관계기사에서도 명록양도라고 하여 녹도라는 지명이 보이고 있기 때문에,
봉화산은 서 낙동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였다.
백두정간의 끝인 낙남정간은 용지봉에서 신어산방면의 향한 것은 틀림없다.
대부분의 산꾼들은 동신어산을 낙남정간의 산줄기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어느 산악회에서는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라는 동판까지 설치해 놓았다.
산자분수령의 용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산꾼들은 강에서 산줄기가 끝나면
대간(정간)이고 정맥이라고 하는데 답답한 노릇이다.
요즘에도 웅석봉에서 출발하는 백두대간종주산악회를 종종 볼 수 있는데,
낙남정간의 동신어산처럼 웅석봉도 백두대간과 전혀 관련이 없다.
지리산 영신봉에서 촛대봉, 제석봉, 천왕봉, 중봉, 하봉, 쑥밭재, 새봉, 왕등재, 도토리봉,
밤머리재, 웅석봉을 지나 산청군 어천마을로 내려서면 낙동강의 지류 경호강이 있다.
언뜻 생각하면 산자분수령에 의한 백두대간 산줄기로 착각할 수 있지만
낙동강의 하구가 아니라 수계로서 지리산 주능선에 불과하다.
우리는 여기서 재미있는 상황에 접근하게 된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는 산꾼들도, 낙남정간을 운행하는 산꾼도 낙동강을 찾고 있다.
낙동강의 동쪽 울타리에는 낙동정맥이 자리를 하고 있고, 서쪽울타리에 해당하는
백두대간과 낙남정간이 낙동강의 하구를 찾고 있으니 정말 해괴한 일이다.
산경표의 10대강 좌우로 두개의 정맥이 둘러싸고 있고 이들 산줄기는
강 하구에서 맥을 다하는데 낙동강의 서쪽 편 하구는 백두대간과 낙남정간이
서로 자기 것이라고 다투고 있다.
강 하구에는 두개의 산줄기로 형성되어야 하는데, 낙동강 하구는 백두대간, 낙남정간,
낙동정맥이라는 이름으로 세 개의 산줄기가 둘러싸고 있으니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산경표의 괴리로 인하여 백두정간이 세 토막(백두대간+장백정간+낙남정간)나면서
이러한 현상이 발생했지만 백두대간과 낙남정간은 같은 산줄기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낙동강 하구 서쪽 어느 봉우리에서
끝난다는 나의 주장에 대하여 증명을 해주려하고 있다.
이제 백두대간의 끝인 낙동강 하구의 봉우리를 찾으러 가보자.  
산경표에 기록된 분성산을 지나 동쪽으로 향하면 신어산이 있다.
신어산에서 낙동강 하구방면으로 분기된 산줄기는 세 개가 있다.
신어산에서 가장 가까운 첫 번째 산줄기는 생명고개에서 뻗어나간 돛대산 줄기로서
현재의 서 낙동강인 선암다리(김해교)로 이어진다.
두 번째는 생명고개에서 장척산으로 향하다 까치산으로 뻗은 산줄기로서
역시 현재의 서 낙동강이 위치하고 있는 성안마을(성고개)이다.
세 번째는 동신어산의 직전의 분기봉(510m)에서 김해시 백두산으로 내려서는 산줄기로서
현재의 낙동강과 서 낙동강이 나누어지는 대동수문이 위치하고 있다.
세 개의 능선 중에서 어느 산줄기가 백두대간의 끝일까?
말 그대로 김해시 백두산으로 내려서는 산줄기가 백두정간이며 백두대간이다.

김해시 대동면이 무슨 이유로 낙동강 하구인가?    
일제강점기시대에  대규모의 낙동강 제방(堤防)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대동마을(김해시)에서 물금마을(양산시)까지만 강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1,300리를 흘러온 낙동강은 현재의 대동수문에서 부채꼴의 형상으로 퍼져나갔다.
만약 돛대산 선암다리의 서 낙동강을 하구로 추정한다면 구포제방까지  
10Km가 넘는 강폭이 만들어진다.
중국의 황하도 아닌데 어떻게 10Km가 넘는 강폭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지역은 낙동강 삼각주로서 동서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바닷물도 들락거렸다.
대동면의 부근의 지명에서도 구포, 호포라는 이름이 바닷가의 포구였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일제는 바다도 강도 아닌 비옥한 삼각주 염분 피해를 막기 위해
현재의 낙동강과 서 낙동강을 둘러싸는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다.
그 후 낙동강의 하구는 현재의 위치로 바뀌게 되었다.
김해시 백두산의 이름은 우연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함경북도 백두산과
이어지는 장대한 산줄기에 의해 명명된 것은 분명하다.

장백정간도 백두대간인가?
당연히 백두대간이다.
오천년 단군신화가 숨 쉬고 있는 백두산은 우리민족의 영산이다.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뻗어나간 산줄기는 두류산(2,309m)에서 북상하여
2,000m급의 함경산맥(자연과학에서 명명) 산줄기를 따라가다가
동해바다의 끝이며 두만강의 하구인 서수라에서 끝난다.
장백은 무슨 뜻인가?
함경북도 관모봉(2,540m)아래의 경성군에서 태어난 선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로는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불러왔다고 한다.
산경표에서 장백정간이라는 표기는 백두정간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시작한 백두대간은 북으로 동해바다의 끝인 서수라에서
운명을 다하고 남쪽으로 내려간 산줄기는 김해시 백두산에서 맥을 다한다.
이런 내용은 애국가에도 올라와 있다.
애국가의 첫 절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은 백두대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백두대간은 장백정간, 낙남정간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산줄기이며
북쪽 서수라(두만강 하구)에서 남쪽 김해 백두산(낙동강 하구)으로 이어지는
대간이 동해바다를 만들고 있다는 뜻이다.
애국가는 우리나라 산줄기를 가장 정확하게 꿰뚫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했다.  
애국가의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청북정맥(淸北正脈), 청남정맥(淸南正脈),
해서정맥(海西正脈), 임진북예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한북정맥(漢北正脈),
낙동정맥(洛東正脈),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한남정맥(漢南正脈), 금북정맥(錦北正脈),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금남정맥(錦南正脈), 호남정맥(湖南正脈), 그리고
두만강, 압록강, 청천강, 대동강, 예성강, 임진강, 한강, 금강, 섬진강, 낙동강을 담고 있다.

다시 산경표를 되돌아 가보자.
앞에서 언급했듯이 백두대간을 지리산에서 끝내버린 것은 풍수사상을 따라 갔기 때문이다.
모체(母體)인 백두대간이 풍수사상을 따라 갔다면 분기된 정맥들은 어떤 모습을 보일까!
금남정맥은 다른 정맥과 달리 하구에 이르지 않고, 내륙인 부여 부소산에서 끝났다.
주행도중에 에워싸기로 포기한 이유는 최고의 풍수터인 왕도 계룡산에서 연유한다.  
한북정맥은 임진강-한강 두 물머리의 오두산으로 진행하지 않고 수도의 진산
삼각산(북한산)을 예우한다고 방향을 돌려 버렸다.
호남정맥은 섬진강의 하구 망덕산(望德山 197m)으로 향하지 않고,
백운산(白蕓山 1,218m)에서 멈춘 것은 섬진강 건너편에 지리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말 도선(道詵)의 옥룡기(玉龍記, 道詵記)에는 “우리나라가 백두에서 시작하여
지리에서 마쳤으니, 그 형세가 물을 뿌리로 하고 나무를 줄기로 한 땅인지라...“고
되어있으니 광활한 지리의 정기를 받으려고 주행 중에 멈춰 버렸다.

산경표에 많은 오류가 있었는데 왜 현대인은 몰랐을까?
산경표는 18세기의 역사관(풍수사상)과 측량수준을 반영한다.
현대과학문명에 의해 만들어진 지형도와는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도 많은 산꾼들이 오류투성이의 산경표를 따라 간 것은
산을 다루는 언론사가 한 몫을 담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1980년 인사동 고서방에서 이우형님에 의해 조선광문회본 ‘산경표’가 환생하였다.
1986년 언론매체에 이우형님이 태백산맥이라고 하지 말고 백두대간에서 권유하는데서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고 백두대간을 완전히 이해한다고 생각했다.
1984년 태백산맥(낙동정맥)을 한반도의 기둥산맥으로 알고 금정산에서 진부령까지
76일간 단독산행으로 걸어갔던 남남희님의 업적이 희석되고 말았다.
나라기둥 길을 새로이 열기위하여 1980년대 말 대학생들이 나섰고
대간길이 열리자 언론사에서는 산경표와 관련한 아무여과도 없이
마구잡이식으로 소개하기 시작했고 많은 산꾼들이 그 길을 따라 나섰다.  
백두대간은 함경북도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 천왕봉에서
맥이 다한다는 생각이 일반화되고 있었지만 일부산꾼들은 의문을 품었다.
지리산 천왕봉은 산자분수령을 적용할 수 없는 봉우리다.
천왕봉 부근에는 강이 없다보니 웅석봉을 지나 경호강이 있는
산청군 어천마을까지 끌고 가는 해프닝( happening)이 발생되기도 했다.
1990년대는 월간 ‘사람과 산’에 연재되었던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자가 발간되는데 금남의 벽까지 허물어버린다.
산경표는 인문과학으로서 역사학자가 논하여야 할 고서인데,
무슨 근거로 자연과학의 지리학(지질학)까지 침범하여 이 땅에는
산맥이 없다는 부끄러운 이야기를 전개하는 실수까지 범한다.
미국의 로키산맥, 러시아의 우랄산맥, 남아메리카의 안데스산맥은 무엇이라 말인가.
산경표는 농경사회를 대표하는 고서로서 10대강유역의, 뱃길, 육로, 농수로를
논하는 서적으로 인문학과 관련된 책자다.
산경표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함으로서 현실적인 눈으로 제대로 보지 못했다.    

나는 오류투성이의 책들을 보고 한동안 혼란스러웠다!
25년간의 산행경험, 2000년 10월부터 2005년 8월까지 국제신문 산행기사를
정독하면서 어렴풋이 대간과 정간을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있었는데
2005년 낙동정맥 산행 중에 산경표를 접하고는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모체인 백두대간의 정의부터 잘못되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2006년 3월 1일 백두대간 여행을 떠날 당시 동신어산이 아닌 백두산을
선택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산경표의 오류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부령이 가까워지면서 이제 백두대간을 바로 알릴 수 있는 기회도 네 번밖에 없다.
역사는 기억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훗날 김해시 백두산을 출발하여 함경북도 백두산을 향하는 대간꾼들은
영남지역의 가난하고 이름도 알려지지 않는 어떤산꾼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가난한 산꾼에 관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수많은 종주꾼들이 백두대간과 낙남정간을 걸어갔지만
백두대간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그 길을 걸었던 '최초의 산꾼'은
2006년 3월 1일 김해시 대동면 백두산을 떠나
2007년 8월의 마지막 날 강원도 진부령에 도착했다.“    

 

 

 

         2007년 8월 31일 강원도 백두대간 진부령의 모습. 

  (인제군 북면()과 고성군 간성읍을 잇는 태백산맥의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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