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를 그린 이에게 보내는 작품으로서의 연서(戀書)
#1. 우주력 5세기. 지구력 2600년. 태양계 제6행성의 위성 타이탄. 여신002의 독백
그가 무엇을 바라고 나를 그렸는지는 모른다. 누구를 모델로 했으며, 모델과의 사이에 어떤 인연이 있었기에 이토록 완벽한 미인도 안에 나를 새겨 놓았는지도 모른다. 나는 문득 나를 가졌고, 나로서 500년을 하루처럼 살아왔다.
잠시 잠이 들었고, 문득 눈을 떴다. 내게는 하룻밤의 숙면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500년이란다. 나는 500년을 잠들었던 동화 속의 여신이었다.
“당신을 어떻게 해주면 좋겠어요?”
내 잠을 깨운 여인이 물었다. 검은 색깔 장미 문양이 가득 수놓인 비단 옷감으로 온몸을 감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당신을 조형해 낸 사람은 당신을 무척 사랑했을 테지만, 지금쯤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겠지요. 당신은 500년을 잠들어 있었으니까요. 우리와 당신을 우리에게 보낸 사람들은 어떠한 사정이 있어서 500년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라요. 당신이 본래 태어난 곳으로 갈 경우 자신의 처지가 무척 외롭게 느껴질 거예요. 우리와 같이 있겠다면 조금은 나을 테지만…… 선택은 당신이 하세요. 우리는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동료로 받아들이겠어요.”
여인은 내가 어느 시대의 어느 곳에 있는 지 가르쳐주었다. 나는 내가 처해 있는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깨닫고 어찌할 바를 몰라 통곡을 했다.
#2. 앞 장면의 직전 시대. 무역선 복분자호
“대장. 이 여신은 우리 소관이 아닌 듯한데?”
상선 복분자호의 의료담당 책임자 간디149는 선장인 김진욱B058에게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NGC147 은하의 한 행성에서 구해 낸 젊은 여인의 시신을 재생의료장치에 넣어 배양하던 중이었다.
“간디 형님, 그 행성의 용사에게는 복제를 남겨 준 것으로 아는데, 왜 어렵다는 거지?”
항해사 알렉산더078이 참견하고 나섰다. 그는 여인의 재생에 기대를 걸고 있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다.
“너무 예뻐. 인물값을 하느라고 속을 썩이는 겐가?”
오덕양082도 빠질세라 한마디 했다. 그 역시 여인의 재생을 손꼽아 기다리는 축이었다.
간디149는 고개를 흔들었다. 속단하지 말라는 표정이었다.
“복제야 기왕에 보관해 온 유전자에 형상을 덧씌우는 것뿐이었으니 어려운 일도 아니었지만, 재생은 문제가 달라. 우리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만큼의 생명으로 살려내는 일이니.”
“대체 뭐가 문제라는 거야?”
말수 적기로 소문난 기관장 코넬076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만큼 여인의 시신은 복분자호의 선원들 모두에게 비중이 큰 관심거리였다.
“생체예술…… 기억하고 있겠지.”
간디149가 동료들에게 물었다. 귀에 익은 단어였으므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여신은 생체예술(生體藝術)의 산물이야. 그래서 살려내는데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는 걸세.”
간디149는 배양기 안의 여인을 쳐다보며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3. 소용돌이 성운 NGC147의 어느 항성계. #2의 직전시대. 무역선 복분자호
여신이 발견된 곳은 NGC147 은하의 한 지구형 행성이었다. 소용돌이 성운인 NGC147은 지구로부터 43만 광년 거리에 있는 은하계의 막내 동생과 같은 소은하계였는데, 무역 명목으로 우주를 헤매던 상선 복분자호는 그곳에 과속문명의 흔적이 보인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항로를 돌렸던 것이다.
“지구형 행성이 발견되기도 어렵지만, 문명을 이룬 별을 찾는 일은 더욱 어렵지. 때문에 정보가 있으면 반드시 들려 확인하는 거야.”
선장 김진욱B058의 호위역 오덕양081이 복분자호의 선목인 수선013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절친한 친구로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사이였다. 재생 육체를 받은 후에 선호하는 나이가 비슷하였고, 우주사에 대한 관심도가 또한 비슷하여, 오덕양081은 수선013의 30년 선목 생활 동안 간디149와 함께 가장 가까운 친구의 하나였다.
“이번엔 당신도 일이 있을걸. 지구계 인류의 자취가 보인다는 보고가 있었으니까.”
복분자호의 간부급 선원들은 모두 주조종실에 모여 전망 스크린을 보고 있었다. 우주선의 조종은 간부급 중의 누군가가 명령을 내리면 자동조종장치가 스스로 판단하여 항로를 수정하는 형식이었다. 주조종실은 원탁형 회의실이었는데, 원탁의 중심에 수정구 형태로 떠오른 입체영상 속의 풍경은 예고된 대로 지구형 행성의 형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보물이 있을 지도 몰라. 누가 갈 텐가?”
간디149가 선원들을 둘러보았다. 선장인 김진욱B058이 지휘권을 행사하는 일이 극히 적은 터라, 회의는 늘 간디149가 주재하기 마련이었다.
“원시와 초문명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보고가 있네. 피라미드 비슷한 유형의 신전도 보였고.”
간디149은 수선013에게 시선을 보냈다. 수선013은 간디149의 의도를 짐작하고 입을 열었다.
“종교 영역이라면, 제몫입니다.”
#3. 앞 장면의 연속. NGC147은하의 한 행성
행성은 전쟁 중이었다. 활과 창을 기본 무기로 사용하는 원시 지구인형 인간들이 그들의 수호신을 모신 신전을 목표로 공방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고전 영화를 감상하듯 전투를 구경하던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방어 측의 한 젊은이가 신전의 중심에 놓인 원통형 투명용기를 보호하려다가 죽어 가는 양을 보았다.
“저 친구, 대단한 걸.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찾았으면 싶군.”
침묵을 지키던 김진욱B058이 혼잣말을 하듯 낮은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수선013은 그가 젊은이들을 편애하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으므로 당연한 처사라고 생각하고 찬성을 했다. 새로운 동료를 맞는 일을 취미를 가진 간디149 역시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김진욱B058의 말은 공식명령이 되어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움직임을 시작했다.
이즈음 수선013은 상선 복분자호의 항해에 무역외적인 목적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선장 이하 간부급 선원들은 지구계 인류의 우주시대 초기부터 무역업을 시작했다고 하는데, 늘 무언가를 찾는 듯 우주도의 모든 곳에 항적을 남기려 들었다. 돌덩어리 몇 개에 불과한 소행성계에도 조사단을 착륙시켰고, 아직 행성으로 진화하지 못한 불덩어리별에까지 유기물의 흔적이 보인다하면 반드시 항해를 멈추었다. 새로움을 찾는 모험과는 많이 다른, 만나야 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애타하는 절박함이 엿보이는 그들의 모습에서 수선013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음을 감지하고, 초기 기억을 공유하지 못한 중도 참가자로서의 소외감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4. 앞 장면의 연속. 여신의 행성
“우리가 선목님을 호위하지요.”
진작부터 전쟁에 참견하고 싶어 안달을 하던 오덕양081과 코넬076이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신전의 중앙에 놓인 원통형 용기는 전쟁 중인 원시 외계 종족의 쟁탈 목표임과 함께 찾던 ‘그 무엇’일 가능성이 있는 물체이기도 했기 때문에,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애쓰다가 생명을 잃은 외계 젊은이의 용감함에 호의를 느끼게 된 것이었다.
오덕양081과 코넬076이 행성 안의 전쟁을 종결시키는 것은 간단한 일이었다. 초보적인 신경무기의 발사로 전쟁 중이던 원시 외계인 전부를 일시적인 백치로 만든 두 사람은 원시종족들의 쟁탈 요소이던 원통형 용기를 살펴본 후 탄성을 발했다.
“본부! 찾던 물건을 발견했음! 대단한 미인이 여신으로 모셔지고 있음!”
보고를 받은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환성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두 핵심 인물인 김진욱B058과 간디149는 즐거운 표정이 아니었다. 수선013은 전송된 영상을 통해 두 사람의 표정을 접하고 여신이 그들이 찾는 ‘그 무엇’과 같지 않음을 알았다.
“이 젊은이는 죽지 않았습니다. 행성의 역사에 개입하는 것은 금기로 되어 있습니다.”
복분자호의 견인광선이 여신을 수호하다 쓰러진 젊은이를 끌어올리려 할 때 수선013은 반발을 했다. 실제는 심장이 멈춘 상태였으나 세포의 한 조각만 남아있어도 전체를 살려내는 일이 가능한 복분자호의 의료기술로 볼 때 세속적인 의미의 생사판별은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저 친구, 또 심통을 부리고 있군.”
간디149가 쓴웃음을 지으며 김진욱B058을 돌아다보았다. 침묵을 지킬 뿐 특별히 의사표시를 하지 않는 김진욱B058을 대신하여 간디149는 명령을 내렸다.
“그 별의 처치는 군에게 전권이 있네. 뜻대로 하시게.”
수선013은 원통형 투명 유리관 속에 보호되고 있는 여신을 보고 ‘완벽한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구나’하고 감탄을 했다. 더불어 ‘명색이 목회자인데, 신이 없는 세계는 만들 수 없다’는 감상이 또한 떠올라, 복분자호의 복제담당 기술진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 젊은이를 치료해 주시기를. 여신의 복제도 필요함. 단, 생명으로서의 기능이 삭제된 무기물로서, 조각상 본래의 복제일 것.”
#5. 앞 장면의 연속. NGC147은하의 한 항성계.
“적입니다.”
복분자호의 오퍼레이터가 낮게 보고를 올렸다. “유성우가 지나가고 있습니다.”하는 식의 담담한 말투였다. 복분자호는 여신의 행성을 떠나 다음 항성계로 이동하기 위한 도약을 준비하던 중이었다. 전망 스크린을 통해 비춰본 우주에서는 선체 전부를 황금빛으로 물들인 우주전함 한 척이 표기를 달지 않은 전투기들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이거 재미있군. 한바탕 몸을 풀게 되겠는걸.”
항해사 알렉산더078과 갑판장 오신060이 즐거운 듯 출전 준비를 서둘렀다. 선장인 김진욱B058이 부대장 기장이 새겨진 단승 공격기에 올라 첫 번째로 출격을 했다. 이어서 오덕양081을 비롯한 희망하는 선원들 모두가 줄지어 공격기에 올랐고, 남은 선원들은 주조종실에 모여 전쟁장면을 감상하고 있었다.
복제한 여신상을 별에 남겨 놓고 떠나온 후 내내 감상적이 되어 있던 수선013도 실전을 참관하려고 자신의 단승정에 올랐다.
#6. 앞 장면의 연속. 전투가 끝난 6개월 후. 복분자호의 재생 의료실.
순회 상선 복분자호는 태양계 내로 진입하여 토성의 궤도를 돌고 있었다. ‘여신의 행성’ 근처의 전투가 승리로 끝난 후 곧바로 태양계를 향해 날아왔던 것이다.
“당신들, 어떻게 그런 무지막지한 싸움법이 가능하지?”
재생이 완료되어 깨어난 오덕양082에게 수선013은 강하게 항의를 했다. 전투에 참관한 이후 복분자호의 정체성에 대한 의심을 한층 더하게 된 수선013인지라 심문의 의도가 숨은 엄한 질문이었다.
“전쟁은 기세의 싸움이지. 수놈 맹수의 암컷 쟁탈전. 먼저 공포를 느낀 쪽이 지게 마련인. 우린 잃을 게 없는데 저들은 가족이 있으니 당연히 우리가 승리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수선013은 무작정 적진을 향해 돌격해 들어가던 복분자호의 단승공격기 편대를 되새기고 심화를 끓이고 있었다. 광속 이상의 속도가 가능한 초첨단 비행물체를 탈것으로 가진 두 전투병단이 정작 싸움은 가장 원시적인 무기인 총검을 사용하여 상대의 육체에 치명상을 주는 내기를 벌였는데, 가장 빼어난 문명을 갖춘 두 무리가 성능이 같은 무기로 싸울 때 결국 원시의 육탄전식 상륙전을 벌일 수밖에 없다는 모순을 몸소 체험한 셈이어서, 복분자호의 선목으로 지구계 종교의 대표를 자처하고 있는 수선013으로서는 전쟁 자체에 환멸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황금전함 말이야. 분명 싸울 힘이 남아있는데도 물러갔어. 정체가 뭐야?”
기묘한 전쟁이었다. 피아간 원자파괴무기 등의 초강력 무기를 사용하지 않고 미사일과 기관포만으로 사격전을 벌였는데, 광속을 가볍게 돌파하는 전투기들인지라 포탄의 속도가 표적물의 속도를 따르지 못해 서로 손해를 주지 못했고, 결국 총검 돌격으로 결판을 낼 수밖에 없었으므로 고대 지구별의 전쟁과 같이 중무장 기사 개인의 전투력이 전체의 승패를 가늠하는 필요조건이 되어, 많은 전투원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나는 이런 싸움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적이 스스로 물러가주었을 뿐인 명목만의 승리가 필요한 이유를 반드시 듣고 싶네.”
오덕양082는 수선013의 채근을 귓등으로 흘리며 제 말만 해댔다.
“다시 받은 이 몸 말이야. 여간 편리한 게 아닌걸. 전처럼 약을 찾을 필요가 전혀 없겠어. 당신의 이번 임무, 내가 대신하면 안 될까? 나, 열 여자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거든.”
오덕양082는 ‘여신의 행성’ 전투에서 생명을 잃고 전생테가 하나 더 늘어난 몸으로 다음 생을 받았는데, 몸은 여전히 20대 후반인 쾌활한 젊은이였다.
“그리고 말이야. 모른다고 말하면 모르는 것으로 인정해 주고 관심을 거두라고. 모른 척하고 자신의 임무에만 충실 하는 게 유리한 경우도 있거든.”
수선013은 인간형으로 재생된 여신을 타이탄으로 호송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7. 앞 장면의 연속. 상선 복분자호의 갑판 위
“가까운 거리의 단순이동이라면 어렵지 않겠지만 생명의 장거리 전송은 문제가 달라. 더구나 인간이라면 더욱. 불완전하나마 지성을 갖춘 존재라서 개개가 우주를 이루고 있으니 인간처럼 까다로운 화물도 없어.”
태양계 제6행성의 궤도를 돌고 있는 복분자호의 갑판 위에서 오덕양082가 수선013에게 인간 전송의 어려움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타이탄 상륙은 모든 뱃사람들의 공통된 꿈이라구. 타이탄의 장미장원은 우주 유일의 비사법지역이라서 무슨 짓을 해도 다 통하는 곳이거든. 더구나 그곳의 장미주(薔薇酒)는 우주 제일의 명주이고 아가씨들은 모두 빼어난 미인들뿐이니, 당신은 행운을 잡은 거야.”
여신002를 ‘타이탄의 장미장원’까지 호송하도록 명령받은 수선013에게 오덕양082를 비롯한 간부급 선원들은 선망의 눈길을 보냈다. 여신002는 앞서 구해낸 여신상의 재생된 이름과 전생테 번호였는데, 명명된 이름에 걸맞을 만큼의 신비로운 용모를 보이고 있었다. 수선013은 동료 선원들의 장난기 다분한 관심의 말들을 목회자의 근엄함으로 물리치고 소형 우주정에 여신002와 함께 올랐다.
“저 여인은 초보적이기는 하지만 인간으로 꾸며졌던 생물일세.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대접을 받을 권리가 있지. 우선 여신의 모습으로 살려내기는 하였지만, 남성인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네. 군은 저 여신을 전송하고 오시게.”
간디149의 명령이었다. 수선013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을 분석하여 김진욱B058을 비롯한 간부급 선원들에게 타이탄에 상륙하지 못할 사정이 있음을 감지했다. 전송장치를 사용한 이송을 기피하려드는 선원들의 모습에서 부자연스러운 무엇을 찾아냈던 것이다.
“물체를 보내는 건 쉬워. 정보를 전송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이면 충분하거든. 하지만 인간은 달라. 생명이라는 이름의 신비현상을 행성간 거리를 뛰어넘어 이동시킬 수 있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네.”
오덕양082는 길게 설명을 했다. 굳이 묻지 않는 데도 가르쳐주려고 한다는 것은 감추어야 할 무엇이 있다는 증거일 뿐이라고 생각되어, 수선013의 의문은 더욱 커져가기만 했다. 그는 이번 타이탄 상륙에서 무언가 대단한 정보가 얻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8. 상선 복분자호. #2의 계속
“생체 예술이 동식물이 아닌 사람을 예술품으로 만든 예가 흔했던가요?”
오덕양082가 잔뜩 아쉬워하는 태도로 간디149에게 물었다. 여신상을 재생 장치에 넣은 후, 여인의 나신이 숙성되고 있는 배양기를 지켜보며 기대를 부풀리고 있던 다른 승무원들도 모두 같은 표정을 하고 간디149의 답변을 기다렸다.
“거의 없었지. 생체예술이 파괴예술의 한 장르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직후 법률이 금지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였지만, 인간 재생학과 연결시켜 지성체로 완성시킬만한 실력자가 드물었던 탓에도 그랬지.”
수선013은 간디149의 표정에서 회한 같은 것이 얼핏 스쳐가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전날 훔쳐보았던 항해일지의 기록 중 어떤 부분을 떠올리고 있었다.
#9. 순회상선 복분자호의 항해일지. 지구력 2050년의 회고
타임캡슐을 쏘아 올리는 것이 유행인 시대였다. 영생을 위한 생명연장의 방법이 아직 완전하지 않던 시절, 지구세계는 내세를 기약하여 한 생애를 충실하게 살려는 일파와, 미래의 문명발전에 기대를 걸고 시신을 냉동시켜 우주로 쏘아 올리는 일파가 제각기의 논리로 무장하고 대립하고 있었다. 생명 재생이 일상화되어버린 현세에는 사실상 의미가 없어졌지만, 시한부 생명이라는 치명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당시의 지구인들에게 죽음이란 가장 피하고 싶은 생명현상이었던 것이다.
우리 복분자호의 우주행은 그러한 갈등의 한 갈래가 비극으로 나타난 사건의 여파였다. 우주로 보낸 타임캡슐 속에 숨겨져 있는 ‘그 무엇’을 찾아 우리는…
#10. #8의 연속
“…이 여신을 우주로 보낸 사람도 생명을 불어넣는 단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후일을 기약하여 타임캡슐에 태웠던 것 같아.”
간디149의 설명이었다.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배양기 안에서 조형되고 있는 여신의 완벽한 미모에 감탄하여 눈길을 돌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신은 아름다움과 고귀함에 신비로움을 더한 분위기의 빼어난 미인이어서, 최초에 조형을 하였던 예술가의 애정을 엿볼 수 있어, 감동의 격을 높여주고 있었다.
수선013은 선원들과는 또 다른 감개 속에 있었다. ‘광속 돌파의 수단을 갖지 못했던 우주력 1세기에 지구별을 떠났을 우주정의 여행이었으니, 어딘가 웜홀(worm hole)을 통과했을 것이라고는 하지만, 43만 광년의 거리를 500년 만에 돌파하다니 참으로 대단한 우주의 신비…’하는 상념에 이어, ‘이 타임캡슐은 지구력 2050년대의 생체예술품의 하나로서, 누군가 일생의 사업으로 제작하였으나, 최종 단계에서 무언가 장애가 있어 생명으로서의 자격이 미달인 상태로 우주를 향해 발사되었다’하고 정리를 마쳤는데, 여신의 별에서의 사건에 대해 전권을 가진 신분으로서 보고서를 만들어 본 것이었지만, 문구 하나하나를 수정할 때마다 최초 제작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어 못내 감격해 하고 있었다.
“타이탄의 친척들에게 보내어 처치를 맡기기로 하세. 일개 인간 여인의 조각상에 여신의 성스러움을 더하게 한 예술가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저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네.”
김진욱B058의 결론이었다. 선원들의 시선은 아직 배양기 안의 여인에게 집중되고 있었지만, 작별은 필연의 수순이었다. 복분자호는 금녀의 세계였고, 여인의 나신은 선원들의 마음에 춘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할 만큼의 미모였다. 게다가 복분자호의 선원들은 선장인 김진욱B058이 말하는 뜻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들이야말로 ‘그 무엇’을 찾아 우주를 헤매는 무리의 하나였기 때문에….
#11. 타이탄의 장미장원. #1의 연속
“지구로 보내 주세요. 그분이 어떤 사람이든지 저를 이런 형상으로 조형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진실한 마음으로 만들었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분이 어느 시대의 어떤 사람이었든지, 저는 그의 작품입니다. 그가 숨 쉬었던 공간에서 최후를 마치고 싶습니다.”
나는 용감했다. 나를 만들었을 어떤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 없을 테지만, 그가 살았을 지구에 가면 최소한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그의 무덤 앞의 장승이 되어, 작품으로서의 일생을 마감하리라고 결심을 굳혔다.
“당신은 이미 생명입니다. 영혼을 가진 생명에게 그런 최후를 맞게 할 수는 없어요.”
내 결심의 말을 전해 듣고 장미꽃 문양의 옷을 입은 여인을 비롯한 그의 동료 여인들은 한 마음으로 말리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떠났다. 500년을 하루처럼 살아온 나인지라 남아있을 날도 하루보다 길지는 않으리라 여겨졌다. 겨우 하루인데 나를 위해 모든 심력을 다했을 그 어떤 이를 위해 살지 못하겠는가. 나는 일개 예술품에서 지성체로 전환된 500세 생명으로서, 나를 낳아 우주로 떠나보낸 예술가를 찾아 고향별 지구를 향해 떠났다.
#12. 타이탄의 장미장원. 앞 장면의 다른 시각에서의 연속. 이번 이야기의 종장
“본대에 올릴 보고는……”
수선013의 질문에 여인은 입술 끝을 살짝 깨무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의도적이지 않은 교태임은 분명한데 한없이 가련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여인의 이름은 흑장미055로 좋아하는 꽃의 이름을 빌린 작명이라고 하였다. 검은 색깔 장미가 수놓인 비단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는데, 호송해 온 여신002와는 많이 다른, 고귀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운 용모를 하고 있었다.
“보신대로 전하세요.”
흑장미055를 대신하여 손아래 자매라는 유라069가 말했다. 그녀는 자리에 없는 사넬077과 엘리자벳023을 포함한 네 자매가 타이탄의 장미장원을 대표하고 있다고 인사를 했다.
“지구에 가본들 남은 자취가 있을 리 없어요. 500년의 시간이 흘렀으니 기억하는 이를 찾기만 해도 다행이겠지요. 상처를 키우지 않고 돌아와 주었으면 좋으련만……”
온몸을 감싼 노란색깔 비단옷에 순백의 장미를 가득 수놓은 유라069의 모습은 여성적인 아름다움의 또 다른 경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수선013은 유라069의 눈가에 가늘게 떨림이 있음을 발견하고 진심으로 여신002를 염려하는 마음을 읽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따르겠습니다. 나는, 복분자호의 어른들에게 전권을 위임받았습니다.”
유라069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스쳤다. 순간 수선013은 자신의 자원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미인의 미소 한 꼭지를 얻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여신002의 보호자로서 복분자호를 떠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저 여신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하도록 해요. 지구별에는 우리 장미장원의 숨은 식구들이 많으니 보호는 그들에게 부탁하면 돼요. 결과는 나중에 알려드릴 테니 이만……”
흑장미055의 참견이었다. 수선013은 흑장미055의 나직한 목소리를 접한 순간, 관심의 방향이 달라짐을 느꼈다.
“당신에게는 우리가 청할 일이 있어요. 실은 당신을 빌려달라고 부탁을 드려 두기도 하였고요.”
흑장미055는 속삭이듯 말했다. 수선013은 그녀의 가녀린 목소리에서 슬픔을 읽고 당연히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여 긍정을 표시했다.
“당신, 종교전문가라고 하더군요. 복분자호의 친구들에게 충실한 분이라고 들었어요. 우리 장미장원의 일 한 가지를 처리해 주시기를 간청 드려요. 우리가 직접 나설 수 없는 사정이 있어서……”
#13. 타이탄의 장미장원. 수선013의 기도실. 이번 이야기의 여담
수선013은 상선 복분자호의 공식 목회자였다. 때문에 그가 있는 곳은 어느 곳 어느 시간에도 회당이 될 수 있었고, 기도실이 될 수도 있었다. 그날 밤 그는 타이탄의 장미장원이 마련해 준 숙소 안에서 자신만의 목회를 갖고 있었다. 낮에 있었던 장미장원의 여주인들과의 면담을 정리하고 싶어 알리지 않은 것이었다.
“주여, 내 현재를 스스로 설명하게 해주소서. 저는 현세에 조형된 신을 본 것입니까?”
낮의 면담에서 수선013은 장미장원의 여주인들에게 쉽사리 감복하여 그녀들의 의도대로 다음 행로를 결정하고 말았다. 타이탄의 장미장원은 명성처럼 별 가득히 장미꽃을 심어 장미꽃과 장미향수, 장미주를 우주 안에 공급하는 것으로 생계를 삼고 있었는데, 면담 전에 독특한 향기의 장미주를 권유받은 후 어떤 감미로움 속에 빠져 들었고, 여주인들의 의도대로 모든 것을 허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 마셨던 장미주에 무언가 장치가 있었던가. 아니면 그녀들의 미안술 따위에 설득되었던 것? 혹은 소녀술(素女術)? 어느 쪽도 아닌 듯싶었다. 자신은 가장 냉정한 상태에서 여인들에게 설복되었던 것이다. 낮에 있었던 사건에 회의를 품고 있는 자신의 심사가 스스로 납득되지 않은 수선013은 애꿎은 신을 불러 하소연을 해댔다.
“주님, 제게 납득할 수 있는 현재를 주소서. 복분자호의 선목을 맡은 이후, 저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현실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번 여신002의 일만 하더라도…”
언제나 그렇지만 답변을 받지 못하는 기도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불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이 세상에 내려와 형상화된다면, 장미장원의 여주인들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지금으로 부터 수 백년이 지나면
우주선을 타고 자유롭게 미지의 행성을 찾아
여행하는 일이 현실화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
지난 번 러시아에 떨어져 폭발한 유성우처럼
소행성의 습격을 받아 지구의 몇 나라가
멸망을 하거나 큰 파괴를 겪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선진국들은 우주선을 개발하여
국민들을 싣고 다른 행성에 피난가는 경우도 있을테고
아니면 지구에 거대한 지하기지 등을 건설하여
파괴적인 위험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겠지요.
여하간 형님의 미래 가상소설은 젊은이들에게
우주과학에 대한 꿈을 부여하는 좋은 글입니다.
저도 이해 어려운 고차원적 글
고맙습니다
읽어주셨군요. 고맙습니다.
SF소설이 미래를 예언하는 역할을 하였음은 줄베르느의 노틸러스 호와 조지 오엘의 빅 브라더,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등 예가 많지요. 문학이 제 역할을 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쓰고 있는 글도 잡문으로 끝나지 않고 무언가 남길 수 있는 방향으로 갔으면 싶은데 되려나 모르겠습니다. 황당 일변도의 판타지로 흐를까 염려도 되구요. 무엇보다 글다운 글을 만들 실력이 되지 못해서요.
늘 읽어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해볼 생각입니다마는, 글쓰기를 자기완성의 방법으로 생각하면 괜찮을텐데 욕심도 생기고 하여 어찌될까 걱정입니다.
벌써 자정이 가깝네요. 편안한 밤 되세요.
형님의 답글 역시한 문법과 문장의 흐름이
기며 중
작가적인 지식이 녹아 있어
정
매끄럽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SF 소설도 지금처럼
앞으로도 잘 만들어가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지금
뉴욕 맨하탄 숙소에 있습니다.
노트북의 음악은 안들리지만
글은 쓸 수 있기에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고
커피를 천천히
인터넷 바다에 빠져있답니다.
언제고 이
형님과 책방에서 커피 한 잔 하면서
좋은 말씀을 나누고 싶군요.
평일만 근무하시나요
멀리 계셨군요.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제 가게는 연중무휴로 열려 있습니다. 오전 10시 30분부터 오후 8시 20분까지는 언제든지 방문해 주세요.
문턱이 낮은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있어 아이 손님과 어른 손님이 고르게, 그리고 자주 들려 줍니다. 한 지역에서 7년째 가게를 하다보니 상급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교복 자랑을 하려고 오는 경우도 많구요,
외양은 조그맣고 볼품없는 초로의 장사꾼이니 그런 전제를 갖고 오세요. 종이컵 커피나마 늘 마련되어 있습니다.
방랑하는 마음에 들어 좋은 글벗들을 만나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복이 좀 많은 사람인 것 같아요.
잘 다녀오시고, 언제든지 들려주세요.
잘읽고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