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프랑스월드컵에서 한국은 네덜란드에 0-5라는 충격적인 완패를 당했다. 네덜란드는 그때도 유럽 최강을 호령하던 축구강호였다. 당시의 대패는 큰 트라우마가 되어 이후로도 한동안 '오대영'은 한국축구에서 치욕적인 참패를 일컫는 고유명사처럼 인용되기도 했다. 당시 네덜란드를 이끌었던 감독이 바로 훗날 한국대표팀 사령탑이 되어 한일월드컵 4강신화를 견인하게되는 거스 히딩크였는데, 한국에 첫 5골차 패배의 굴욕을 안긴 히딩크역시 초반 강팀과의 평가전에서 큰 점수차로 잇달아 패배하며 '오대영'이라는 별명이 따라붙기도 했다.
'한 오렌지 하실레예?~~~" 1998년 그때, 우물안 개구리 태극동자들을 오줌지리게 만들었던 공포의 오렌지 군단.
15년만에 비슷한 사태가 이번엔 야구에서 재현됐다. 종목만 달랐을뿐, 스코어와 상대, 심지어 일방적이고 굴욕적인 경기내용까지 판박이처럼 흡사했다. 같은 결과라도 더욱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래도 축구라면 모를까 설마 야구에서 이런 상황이 벌어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못했기 때문이다. 한국은 베이징올림픽 우승을 비롯하여 두 번의 WBC에서도 4강과 준우승을 기록한, 자타공인 야구강호였고, 네덜란드는 유럽최강이라고는 하지만 변변한 프로리그도 없는 야구 변방이나 마찬가지였다.
15년의 격차를 두고 야구와 축구에서 벌어진 두 번의 오대영 사태가 남긴 공통점은 무엇일까. 상대가 한국의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는 점도 있겠지만, 결국 가장 큰 원인은 '우리가 우리의 경기를 전혀 하지못했다.'는데 원인이 있다. 상대의 수준이나 경기력에 대한 기술적인 분석을 떠나, 이미 자기 자신과의 멘탈 싸움에서 지고들어간 것이다.
프랑스월드컵 당시 한국은 네덜란드전을 앞두고 시작도 하기전에 속된말로 '쫄아'있었다. 첫경기였던 멕시코전 역전패로 이미 분위기가 가라앉아있었고, TV에서나 보던 스타들이 즐비하던 네덜란드들을 직접 보고서는 한국 선수들은 잔뜩 겁을 집어먹고 위축된 상태였다. '되든 안되든 부딪쳐보자', '이길수있다.'는 자신감보다는, 지지말아야한다는 압박감이 오히려 선수들의 몸을 경직되게 만들었고 결국 1년반동안 준비해온 것을 아무 것도 펼쳐보이지못하고 무너지게 했다. 한국은 2연패로 탈락이 확정되고 차범근 감독마저 중도경질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벨기에와의 최종전에서 오히려 마음의 짐을 덜고 정상적인 경기를 펼쳐보일수 있었다.
지난 WBC 네덜란드전에서는 다른 종류의 압박감이 야구대표팀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이 싸워야할 상대는 네덜란드 이전에 '앞선 두 번의 WBC대표팀과의 비교'였다. 한국야구는 지난 1,2회 WBC 때도 객관적인 전력면에서 약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결국 미국, 일본 등 내노라하는 야구강호들을 격파하며 예상을 뛰어넘는 성적을 올렸다.
올해 대표팀은 사실 이전보다 상황이 더 나빴다. 류현진, 추신수, 김광현, 봉중근 등 해외파와 국제 경기 경험이 풍부한 스타급 선수들이 대거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WBC에 대한 세간의 기대치는 여전히 높았다. 대만, 호주, 네덜란드와 한 조에 편성되어 아무리 전력이 약해졌어도 이 정도 상대들을 데리고 설마 1라운드야 가볍게 통과하지못할까하는 자만심이 자신감을 앞지른 면도 없지않았을 것이다.
공은 둥글다. 한국이 메이저리거들로 구성되어 객관적인 전력에서 앞서는 미국이나 일본을 이길수 있었던 것처럼, 한국도 언제든 복병들의 희생양이 될수있는게 스포츠다. 축구에서 한국은 1996년 아시안컵에서 이란에 6-2의 참패를 당한바있고, 지난 2011년 브라질월드컵 3차예선에서는 레바논에 덜미를 잡혀 아예 최종예선조차 오르지못할뻔한 적도 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 하지만 축구도 아닌 야구에서, 네덜란드에 또 오대빵 게임이 나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야구대표팀에서 최악의 대회로 기억되는 것은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이다. 당시 한국은 같은해 열린 초대 WBC에서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기세등등했다. 프로 정예멤버로 나선 대한민국은 아시안게임 정도는 쉽게 우승하리라 자신만만했다. 하지만 정작 뚜껑을 열자 대만에 덜미를 잡히고 사회인 야구선수들로 구성된 일본에게까지 일격을 당하며 동메달에 그쳤다. 이 대회는 지금도 '도하 참사'로 회자되며 잘못된 국제대회 운영의 실패사례를 거론할때마다 빠지지 않는다.
축구도 그렇고 야구 역시 세계적으로 평준화는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WBC만 해도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한 대만이나 네덜란드에는 미국야구를 경험했거나 심지어 메이저리거에서 맹활약했던 선수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다. 일본이 예전에 한국을 한 수아래로 보다가 올림픽과 WBC에서 호되게 당했듯이, 한국 역시 단기전에서는 언제든 방심하다 덜미를 잡힐수 있다.
여기서 실패한 국제대회들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상대보다 우리가 스스로 무너졌다는데 있다. 프로선수들, 자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스타들이 나서는 국제대회에서 '시간이 부족했다.' '전력분석이 덜됐다.' '경기감각이 떨어졌다'는 이유들은 패전의 변명거리가 될수없다. 결국 우리가 제대로 준비하지못했거나, 준비한 것을 제대로 펼쳐보이지못했거나 둘중 하나일뿐이다.
스포츠를 흔히 멘탈싸움이라고 한다. 특히 국제대회같은 단기전은 기량이나 기술보다는 정신력에 의하여 승부가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이들이 흔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직도 스포츠에서 정신력을 강조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는 선입견이다. 그러나 정신력은 단지 악착같이 이기겠다는 투지나 승부에 대한 집착, 실력이 안되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다는 식의 단순무식한 헝그리 근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상대를 만나도 평정심을 잃지않고 기복없이 자신의 경기력을 유지할수 있는 '클래스'야말로 진정으로 수준높은 정신력이다.
돌이켜보면 구기종목에서 한국스포츠가 국제무대에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얼마되지않았다. 오히려 매순간이 위기의 연속이었다. 지난 2회 WBC만 해도 감독선임과 준비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잡음이 있었고, 특히 1라운드에 숙적 일본에 충격적인 콜드게임패를 당하자 여론은 들끓었다. 하지만 한국은 거기서 주눅들지않고 대만을 잡으며 기사회생했고, 일본과의 재대결에서는 짜릿한 1-0 영봉승을 거두며 결국 조 1위로 2라운드에 진출했다. 초반의 위기가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케이스다. 감독과 선수들의 당장의 결과에 흔들리지않고 끝까지 팀워크와 집중력을 잃지않았기에 가능했다.
지금 류중일호가 처한 상황도 그때와 비슷하다. 어쨌든 네덜란드전은 이미 지나간 과거다. 이제는 남은 호주와 대만전에만 집중할때다. '2라운드에 반드시 나가야하는데..' '경우의 수는 계산하면 대만과 호주를 큰 점수차로 이겨야하는데..'같은 복잡한 계산도 불필요하다. 우리가 할수 있는 것은 일단 그라운드에서 한국야구가 보여줄수있을 것을 다 보여주고 그 다음의 결과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첫 출발에 잠시 미끄러졌다고, 가야할 목표가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출처: 일생에 단 한번, 아주 특별한 순간 원문보기 글쓴이: 구사일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