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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아시아 국가) [Iran] 지도
국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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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IRAN國歌악보♬ 정부홈 | 대사관 | 문화탐방 | 현지시간 | 날씨정보 | 비자발급 | 여행정보 | 주요공항 | 전화거는법 | 사용전압 | 공식명칭 : 이란이슬람공화국(Islamic Republic of Iran)
인구 : 69,341,000
면적 : 1,648,200㎢
수도 : 테헤란
정체·의회형태 : 중앙집권이슬람공화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대통령/대통령
공식 언어 : 파르시어(페르시아어)
독립년월일 : 1906. 10. 7
화폐단위 : 리알(rial/Rls)
국가(國歌) : Shod Jomhoori-e-Islami bepah
("The Islamic Republic has been founded")
서남아시아에 있는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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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수도는 테헤란이다. 북서쪽에서 남동쪽까지의 최장거리는 약 3,540km, 북동쪽에서 남서쪽까지는 약 1,900km에 이른다. 북쪽으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카스피 해, 투르크메니스탄을 경계로 하며, 동쪽은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남쪽은 페르시아 만과 오만 만, 서쪽은 터키 및 이라크와 이웃한다. 면적 1,648,200㎢, 인구 69,341,000(2006 추계, 아프가니스탄 난민 약 100만 명 제외).
자연환경이란은 해발 460m 이상인 고원지대에 평균고도 2,000m가 넘는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실제로 저지대는 이라크와의 국경 주변에 있는 카룬 강 유역과 페르시아·오만 만 주변의 좁은 연안지대, 카스피 해 주변의 연안 늪지대뿐이다. 북쪽 엘부르즈 산맥에는 이란에서 가장 높은 다마반드 산(5,604m)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화산이 솟아 있다. 엘부르즈 산맥은 카스피 해 연안을 따라 뻗어나가다가 동쪽 국경을 이루는 호라산(후라산) 산맥과 만난다. 호라산 산맥은 남쪽의 발루치스탄 산맥과 함께 동쪽 내륙 고원지대의 경계를 이룬다. 대부분 불모지인 고원은 광활한 염분(鹽分) 사막이 특징적이다. 이란에서 가장 큰 산맥은 자그로스 산맥으로, 북서쪽 아르메니아 국경지대에서 뻗어나와 남동쪽 마크란 산맥까지 이어져 있다. 대체로 강수량이 적은 지형으로 카스피 해 주변의 좁은 연안지역만 연강수량이 1,000㎜ 이상이며, 내륙의 염분 사막은 100㎜도 되지 않는다. 강들은 대부분 계절천이며, 내륙을 흐르는 물길들은 대부분 해안 늪지대로 흘러들거나 지하수가 된다. 배가 다닐 수 있는 강은 카룬 강뿐이다. 지역에 따라 기온차가 아주 심해 페르시아 만 주변의 여름기온이 55℃인 반면, 북서부 아제르바이잔(아자르바이잔)의 겨울기온은 -37℃에 이른다. 국토의 1/2 이상이 황무지로 거의 사람이 살 수 없는 염분 사막이다. 전국토면적 가운데 약 1/10이 경작지이며, 1/4은 목초지로 이용된다. 농경지 중 관개가 이루어지는 1/3가량은 대부분 사막과 산맥 사이의 변두리 구릉지대에 위치한다. 국토의 약 1/8을 차지하는 삼림은 대부분 카스피 해 주변에 위치하는데, 수종은 떡갈나무·너도밤나무·린덴·느릅나무 및 활엽 상록수 등이 주종을 이룬다. 늑대·여우·표범·살쾡이·영양·사슴 등의 야생동물이 많이 서식하며, 야생염소와 양들도 있다. 풍부한 매장량을 자랑하는 유전은 남서부 페르시아 만 어귀에 몰려 있다. 세계 석유매장량의 약 9%를 차지하는 이란의 석유매장량은 세계 제5위이며, 천연 가스 매장량은 세계매장량의 1/7을 차지한다. 석탄·구리·철광석도 상당량 매장되어 있다.
국민이란은 여러 개의 언어를 쓰는 다양한 민족 사회로 구성되어 있다. 총인구의 45%를 차지하는 이란인(페르시아인)이 가장 인구가 많고 널리 분포된 민족이다. 서부 산악지대에는 정부의 동화 노력에 저항해온 유목민족인 쿠르드족과 페르시아 원주민으로 보이는 반(半)유목민족인 루르족이 살고 있으며, 에스파한(이스파한) 서쪽 자그로스 산맥에는 루르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바흐티아리족이 거주하고 있다. 루르족과 바흐티아리족 모두 페르시아어 방언인 루르어를 쓰며, 발루치스탄에 사는 발루치족도 루르어를 사용한다. 이란에 거주하는 또하나의 민족 집단인 아르메니아인들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고유 언어를 계속 쓰고 있다. 인구 가운데 투르크계의 비율은 적은 편이지만 이란인의 1/4가량이 튀르크어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한다. 3개의 주요 투르크계 민족집단은 이란 서북부 모퉁이의 아제르바이잔인과 페르시아 만 동쪽 시라즈 지역의 카슈카이인, 동북부 호라산 지역의 투르크멘족 등이다. 소수의 셈족(유대인·아시리아인·아랍인)도 거주한다. 이란인들의 대다수는 이슬람교도로서 대부분 공식 국교인 시아파 이슬람교를 신봉한다. 쿠르드족과 투르크멘족은 수니파 이슬람교도이며, 이밖에 소수 종교인 그리스도교·유대교·바하이교·조로아스터교 등이 있다. 출생률은 높고 인구는 비교적 젊은 편으로 2/5 이상이 15세 미만이다. 연간인구성장률이 세계 평균에 비해 비교적 높은 편이나, 중동에서는 평균에 가깝다.
경제이란 경제는 혼합경제체제로 재정은 대부분 석유 생산을 통해 조달된다. 1990년대초에는 1980∼90년 오랜 기간 계속된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외채와 여러 심각한 경제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석유수출이 재개되었고, 경제를 평화시 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력에 착수해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다. 국민총생산(GNP)은 중동에서 가장 높으나, 갑자기 증가한 인구 때문에 1인당 GNP는 평균 이하일 것으로 추산된다. 농업 부문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1/5에 지나지 않으며, 이란 노동력 가운데 1/4이 종사하고 있다. 경작기술이 취약하고 물이 부족한데다가 시장을 이용하기가 어려워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식량 생산이 국내 수요를 따르지 못해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작물은 밀·감자·보리·포도·쌀·옥수수·사탕무·사탕수수·담배 등이며, 목재도 해마다 상당량 생산된다. 근해 어업이 국내 소비와 수출(특히 철갑상어알)에 한몫을 한다. 석유 생산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광업 부문이 GNP의 1/4 이상을 차지하며, 노동력의 1/5가량을 담당한다. 1950년대에 국유화된 이란 석유산업은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난 후 아바단에 있는 정유공장을 비롯한 유전·정유소·수출항 등의 시설 전반이 파손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그결과 1990년대초 석유 생산량은 1976년도 생산량의 1/2 수준으로 떨어졌다. 막대한 매장량의 천연 가스를 비축·보급하는 국영시설은 중동 최대규모로 꼽힌다. 석유와 천연 가스를 제외한 다른 광물자원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밖에 직물(특히 전통 수출품인 직조 양탄자)·가공식품·자동차·전기기구·철·강철·시멘트 등이 생산된다. 1970년대에 석유 수출로 얻은 소득으로 산업 부문에 막대한 투자를 한 결과 경제발전이 가속화되어왔으나 숙련된 노동력의 부족, 사회간접자본의 부실, 원료의 부족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전력의 4/5 이상이 국산 연료를 이용해 생산되며, 나머지는 수력발전으로 충당된다. 전국적인 전력 공급망이 197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했으나, 건설 속도는 늦은 편이다. 1949년에 시작된 경제개발계획은 1979년 혁명과 함께 끝났다. 이란은 모든 주요산업·은행·보험회사를 국유화하고, 경제 자립이라는 궁극적인 목표에 따라 농업 부문과 일부 선별된 산업에 대해 막대한 투자를 약속했으나, 불안한 국내 상황과 이라크와의 전쟁으로 중요한 경제 조치들의 실시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사실상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석유 생산의 재개로 국가재정이 안정되었고 자유시장의 개시로 농업·공업의 국내 생산이 증가했다. 수출품은 석유와 석유 관련제품이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주요수입품목은 기계(전기 제외)·철강·곡물·운송장비 등이며, 주요교역상대국은 일본·독일·이탈리아·프랑스·영국 등이다.
정치·사회1979년에 채택된 이슬람 공화국 헌법에 따라 최고 정치권력은 국가의 종교지도자인 '발리이에 파키'에게 주어지며, 파키의 지위를 맡을 인물이 없는 경우에는 3∼5명으로 구성된 종교지도자 의회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종교지도자(또는 종교지도부)는 헌법수호위원회 위원 성직자 12명 중 6명을 임명한다. 헌법수호위원회는 단원제 국회인 이슬람 자문회의(마질레스)에서 통과된 법안의 합헌성과 이슬람 교리에 대한 충실성 여부를 심의한다. 마질레스는 국민투표로 선출된 270명의 의원으로 이루어지며,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 행정부는 대통령과 총리가 함께 이끄는데 임기 4년의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선출되며, 총리는 대통령이 임명한 후 마질레스의 승인을 받는다. 1987년 정당들이 해산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정당은 집권 이슬람공화당이었다. 최고 사법권은 대법원과 최고 사법위원회를 구성하는 종교 재판관들에게 부여된다. 수도 밖의 위생 상태는 아주 나쁜 편이며, 소도시들과 농촌지역에서는 비위생적인 환경이나 의료진·의료시설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성홍열·백일해·폐결핵·장티푸스와 같은 전염병이 널리 퍼져 있으며, 유아사망률도 세계 기준이나 중동 기준보다 상당히 높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평균수명은 남자 66세, 여자 69세이다. 5년 동안의 초등 의무교육이 규정되어 있지만 농촌의 경우 부모의 반대 또는 시설부족 등의 이유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어린이들이 많다. 중등교육 제도는 비교적 발전 수준이 낮은 편으로, 주로 소수의 학생들에게 대학입학 준비 수준의 교육을 실시하는 데 그친다. 문맹률은 다른 아랍 국가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언론은 이슬람 공화국 통신사에서 통제한다.
문화이란은 네자미, 페르도우시, 사디, 오마르 하이얌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인들을 배출해왔으며, 모스크를 비롯한 건축으로도 유명하다. 페르시아 양탄자는 아직까지 그 예술성과 장인정신으로 감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역사이란에 사람이 정착한 시기는 구석기시대 초기(BC 100000년경)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문자로 기록된 역사와 문명은 BC 3000년경 후제스탄의 엘람인들과 함께 시작되었다. BC 2000년 이후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이란인들이 나타나 여러 왕국을 이루기 시작했다. BC 728∼550년 메디아 왕조가 번영을 누렸으나, 키루스 2세가 이끄는 페르시아군에 무너졌다. 그후 중동지역에 광대한 제국을 세우고, 로마 제국이 나타날 때까지 가장 큰 제국으로서 번영을 누리던 페르시아 대제국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침략으로 사라졌고, 뒤이은 마케도니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도 원주민인 파르티아인들의 손에 차츰 무너져갔다(BC 247∼AD 226). 파르티아인들은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제국을 세웠으나, 거의 끊임없는 로마와의 전쟁으로 약화되어 1,000년 전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인들을 배출했던 파르스에서 온 이란 민족인 사산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삼았던 사산 왕조가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으로 많은 희생을 치른 후 세력이 약화되자, 아랍 이슬람교도들이 침략하기 시작해 640년에는 쉽게 이곳을 정복하기에 이르렀다. 그후 850년 동안 이란은 사파르·사만·가즈나·셀주크 왕조를 비롯한 비(非)이란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502년 아랍 정복 이후에야 비로소 이란에 거주하기 시작한 이란계 가문인 사파위 왕조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사파위 왕조시대에 국교로 제정된 시아파 이슬람교는 오늘날까지 이란의 국교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사파위 왕조시대(1502∼1736) 이후 벌어졌던 수많은 내전 끝에 1779년 카자르 왕조가 지배권을 확립했으나, 유럽의 정치 개입으로 이란의 장래는 심각한 영향을 받았다. 즉 중동을 향한 러시아 제국의 남하정책이 인도 대륙에 세력을 구축하던 영국을 위협하자 이 두 국가가 이란에서 교역과 외교 문제로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으며, 그결과 이란은 경제적으로 유럽의 두 강대국의 지배를 받는 반(半)식민지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카자르 군주인 나세르 옷 딘 샤의 지배에 항거하는 폭동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무능한 그의 아들 모자파르 옷 딘샤는 1906년에 국회(마질레스)를 소집하여 헌법을 승인하기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이은 기근과 경제적 붕괴로 1921년에 쿠데타가 일어나자, 레자 한이 권력을 잡고 1925년 카자르 왕조를 무너뜨린 후 스스로를 레자 샤 팔라비로 칭하고 왕위에 올랐다. 나치 독일과 협력했다는 이유로 왕위에서 물러난 그의 뒤를 이어 아들 모하마드 레자 샤 팔라비가 권력을 계승했다. 팔라비는 이란의 현대화·서구화 계획에 착수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소외되고 권력이 제한된 결과 1970년대에 그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게 되었으며, 1979년에는 결국 정부가 무너지고 팔라비는 망명길에 올랐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시아파 지도자 루홀라 호메이니는 이란으로 돌아와 1979년 이슬람 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움직임을 주도했다. 혁명 후 이슬람 근본주의에 바탕을 둔 법이 제정되었고, 서유럽은 이란에 대해 더이상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1980년 이라크군이 기존의 국경선을 규정한 조약(1975)을 파기하고 이란을 침공하면서 두 나라 경제를 모두 파탄으로 몰고 간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막대한 인적·물적·경제적 손실을 끼치며 계속되다가 1990년에 종전되었다. 1989년 호메이니가 죽고 1990년 전쟁이 끝난 후 이란은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한국과의 관계1962년 10월 수교에 합의했으며, 1967년 4월에 한국의 테헤란 상주대사관이 개설되었다. 중동지역에서 한국의 건설진출이 처음 이루어진 나라이며, 1969년 5월 우호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한국과 문화협정(1974. 7)·경제기술협력협정(1975. 7)·무역협정(1976. 2)·수산협력협정(1977. 5, 1979. 5)·사회보장협정(1977. 5) 등 7개 협정을 체결했다. 북한과는 1973년 4월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남북한 등거리정책을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란-이라크 전쟁을 치르면서 북한과 밀착해 상호간에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오고 있다. 통상에 있어서는 1996년 현재 대한 수입 8억 8,390만 3,000달러(선박류·섬유류), 대한 수출 16억 3,435만 4,000달러(원유·금속광)이다. 1997년 현재 한국인 교민은 44명, 체류자는 215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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