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나 혜석과 김 우영.
우리는 흔히 그시대의 흐름보다
앞으로 다가올 시대의 흐름을 예견하거나 행동하는 사람들을 先覺者라 부른디,
한문을 그대로 풀어 본다면 남보다 먼저 깨우친 사람이란 뜻일것이다.
문학 미술,등 창작부문과 정치 문화 등 전통을 답습하는 부분에서도 선각자가 있게 마련이고
선각자들의 적지않은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새로운 사조와 트랜드가 탄생하게된다.
19세기말 20세기초 까지만 해도 조선의 사회구조는 여성의 사회참여를 수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물론 일부 신 지식인들의 자녀들은 이방의 서구문화를 조금씩 체험하며
모던 여성으로써의 자아를 만들어 가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조선의 처녀들은 인습의 틀속에 같힌채
그 인습이 만들어 놓은 성문화 되지 않은 법을 따르며 살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작가이기도 하고 여성해방의 선구자 였던 나혜석의 생애를 알고있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녀가 여성해방을 주장했던 그당시 한국의 시대상황과 인습의 구조가
그녀의 주장하고 몸소 실천했던 페미니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받아들이지 못했으므로
그녀 역시 불쌍한 페미니스트, 실패한 선각자란 이름만 얻었을 뿐이다,
선구자의 생을 살다간 여인들의 삶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는 나는
그녀의 삶에 대해 깊이 알고 싶어서 그녀의 저서들을 찾아 남산 도서관도 여러번 찾았었다,
내가 그녀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은 그녀의 인생과 행동과 사상과 일치하는 부분을 찾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그녀만의 윤리를 만들어 놇고 그 윤리에 따르는 행동을 했으며
자신의 윤리와 논리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주장했던 궤변론자였다고 나는 결론을 내리기로 했다.
그녀의 미술작품과 수많은 논설과 문집은
나름대로 그 시대를 주도하던 문화적 흐름을 이끈 선구자적인 것 이었을지라도
모순된 그녀의 논리와 행동만큼은 큰 지탄을 받았으며
사교계 및 문화계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까지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다.
거리에서 말년을 보낸 불쌍한 선각자 어리석은 페미니스트 나혜석의 생애를 다시한번 돌아본다.
나혜석(1896-1946)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은
왕당주의와 사회주의가 격렬하고 복잡하게 얽혀가는 세계정세와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기말의 탐미주의와 음울한 퇴폐주의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게 했으며
조선의 장래를 진보와 보수의 선을 서서히 구분짓기 시작했던 1896년
경기도 수원에서 구한말 군수 집안, 나기정(羅基貞)의 5남매 중 2녀로 출생하였다.
다정다감한 부모 슬하에서 유복한 유년시절보낸 혜석은
14살때 에 수원 삼일여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여고 졸업후 부모님은 조선의 전통관례에 따라 혜석을 결혼 시키려고 했으나
여고시절 이미 서양의 미술에 깊이 매료된 혜석은 서울에 남아 미술공부를하려고 했다.
표면적으로는 미술공부를 위한 서울 생활이지만,
실제로 혜석의 마음은 자유연애가 아닌 부모님이 정해주는 혼처로
남편의 성품과 얼굴도 모르는채 결혼 하는것에 대한 거부였다.
혜석은 이미 신 학문을 공부했고 자유연애에 막연한 동경심에 젖어 있었다.
마침 동경에 유학했던 오빠의 권유로 부모님릉 설득했고
드디어 일본의 동경 여자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동경유학시절 혜석은 문학지망생인 수려한 청년 이광수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
그러나 이 광수와의 사이엔 결혼이나 연애등 구체적 사실은 기록 되어 있지 않고
다만 동경 유학생들 사이엔 공공연한 애인으로 염문을 뿌렸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춘원 이광수는이미 결혼을해서 자녀가 있었고 향리에 조강지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연애는 오래 가지 않았고 혜석은 졸업후 귀국길에 오른다.
동경 유학을마치고 귀국한 혜석은 *학지광*이란 잡지와
동경 미대 교지에 여러 차례 글을 발표하게 되는데,
대부분 글의 내용은 조선의 여성이 구 시대의 인습의 틀에서 깨어나길 바라는 여성해방의 글들 이었으며,
그녀의 글은 그 당시 신학문을 공부하던 여성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학지광"에 다수의 순수시를 발표하기도 해서 한국 문학사에 그녀의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21살 때 *학지광* 의 편집발행인 최 승구(崔承九)와 사랑하여 부모님과 오빠들의 반대속에 약혼했다.
그러나 병약했던 최 승구는 이미 결핵에 몸을 몹시 상했던 후라
혜석과 약혼후 고향인 고흥에 낙향하여 요양을 하고 있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오직 혜석만을 사랑하고 기다렸던 그는
혜석이 마지막 그의 모습을 보려고 그의 집을 방문했을때
혜석의 얼굴을 한번 쳐다보고 혜석의 품에 안겨 짧은 인생을 마무리 했다.
춘원은 다만 연애와 염문의 상대 였다면 혜석에게 있어서 최승구는 첫사랑이었다,
앞으로 여러 남자들과 살게 되어도 혜석은 절대 최 승구를 잊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한 첫사랑 최 승구와의 이루어 지지 못했던 사랑의 한이
그녀를 나비처럼 남자들을 따라 훨훨 날아다니게 했는지도 모른다,
혜석은 연인 최승구가 결핵으로 요절을 하자 큰 충격으로 우울한 정서에 묻힌채 신경쇠약에 빠져 방황한다.
그녀가 동경에서 귀국했던 시점인 1918년 그녀는 첫 직업을갖게 된다.
함흥의 영생중학교와 서울 정신여학교에서 미술교사를 하였다.
동경에서 학연 지연으로 우정을 맺어온 김 마리아, 황 에스터와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고
민족독립운동을 계획하였으며 이를 도모하고자 이화학당 지하실에서 비밀히 모였다.
당시 이화학당 교사 김활란 등과 함께 3ㆍ1운동에 참가하는 등의 독립운동으로 체포되어 5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그때 총독부 소속인 국선 변호사김우영이 나혜석의 변론을 맡아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김우영은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딸이 하나있었다.
김우영은 외모부터 반골이었다.
선이 가는 얼굴과 선이 곱고 부드러운 작은 눈과 마르고 훤칠한 키와 아주 말이 없어서 과묵한 사람이었다.
이런 외양과 성품이 웅변을 좋아하고 늘 무언가 말하기를 즐겼던 혜석의 성품과는 아주 반대였는데,
아마 혜석은 김우영의 그런 과묵함에 끌렸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옥고를 치른 혜석은 김 우영과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둘은 1920년 결혼하게 된다.
김 우영은 나 혜석보다 10년정도 연상이었다.
동경 유학 때 이 광수와의 염문과 약혼자 최 승구의 죽음등
결코 자랑거리가 될수 없음에도
김 우영은 자신이 한번 결혼 했었다는 이유에서인지 이 모두를 담담하게 받아 들였고,
심지어 혜석이 죽은 첫사랑 최 승구의 묘에 비석을 세워주기 원하며
신혼여행지를 최승구가 잠들어 있는 그의 고향 선산으로 가자고 했을때도 그렇게 따라 주었다.
결혼후 그녀는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 동인지 "창조" 및 "백조" 의 뒤를 이어 출간된
"폐허"의 창간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되며, 본격적인 집필을 하기 시작했다,
금전 적으로 생활이 안정되고
또 신혼의 달콤함과 애정을을 남편 김 우영과 마음껏 누리며 미술작품에도 열정을 쏟게 된다.
김 우영과의 사이에 삼남 1녀를 두고 네째 아이가 100일이 채 되기전
두 사람은 꿈에 그리던 세계일주 여행에 나서게 된다.
남편 김우영이 변호사를 그만두고
조선 총독부에서 각나라에 영사자격의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게 된것이 여행의 계기가 되었다.
남편과 파리 체제중 남편은 불란서에서의 영사 일을 끝내고 미국으로 가게 되었지만 ,
그녀는 파리 루브르 미술학교에서 야수파 공부를 더 하길 원해서 그녀만 파리에 남게 되었다.
혜석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한 최최의 한국인이 되었다.
그때 프랑스에 종교학관련으로 체류중이던 최린과 가까워졌다.
최린은 천교도 조선 부 총재였으며 3.1운동의 33인중 1인이었다.
최린 역시 귀공자의 풍모를 지닌 선이 고운 아름다운 남자 였다.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뜨거운 피를 가진 여자 혜석은 젊은 남자 최린과의 육욕의 급물살에 몸을 맡긴채 쾌락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후에 풍문으로 이 사실을 알게된 김우영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그의 섬세한 성격대로 우선 모든 사실을 조용히 덮으려고 하였고
일단 귀국하여 이혼을 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혜석은 결코 이혼에 동조하지 않았으나 김 우영의 완고함에 어쩔수 없이 이혼을하게 된다,
자녀들도 절대로 만나지 못한다는 단서와 함께 위자료 몇푼을 받은채 김 우영의 집안에서 쫒겨난것이다.
남편이 있는 몸으로 바람난 부정한 여자라는 낙인을 찍고.....
후에 나 혜석은 프랑스에서 최린과의 염문을 그녀의 저서 *이혼 고백서*에 이렇게 고백했다.
"남자나 여자나 다른 사람과 좋아 지내면
반면으로 자기 남편이나 아내와 더 잘 지낼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결코 남편을 속이고 다른 남자(최린)를 사랑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나이다.
오히려 남편에게 정이 두터워 지리라고 믿었사외다.
구미 일반 남녀 사이에 이러한 공공연한 비밀이 있는 것을 보고…
가장 진보된 사람에게 마땅히 있어야 할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녀는 또 정조(貞操)에 대해,
‘정조는 도덕도 법률도 아무 것도 아니오, 오직 취미다.
밥먹고 싶을 때 밥먹고 떡먹고 싶을 때 떡먹는 거와 같이 임의용지(任意用志)로 할 것이오,
결코 마음의 구속을 받을 것이 아니다.’
는 폭탄선언을 하였다.
또 혜석은 이런 글도 남겼다.
"조선 남성의 심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여자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이 어이한 미개의 부도덕이냐…’
또한 아이들에게는 이렇게고백했다.
“사 남매의 아이들아,
에미를 원망치 말고 사회제도와 도덕과 법률과 인습을 원망하라.
네 에미는 과도기에 선각자로 그 운명의 줄에 희생된 자이었더라”
혜석보다 60여년 늦게 이세상에 태어나 땅속의 혜석으로선 상상을 불가하는 초 현대를살고 있는나에게
그당시 했던 그녀의 발언은 자못 충격적이며 발칙하단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런 모순이 있단 말인가,
어쩌면 자신을 합리화 하길 이처럼 아이러니한 언변으로 할수 있단말인가.
이것이 혜석이 주장한 여성해방이란 말인가,,,,
나혜석의 생애를 존경까지는 아니더라도 좀더 심도 있게 알고자 했던 나에게
혜석의 말은 정말 충격적이었다.
혜석의 이같은 분방한 연애관과 여성해방 사상은
남편에게는 물론 당시 사회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주장했던 일부 페미니즘가운데 ,
예를 들면 가사노동으로 부터의 해방과 배울 권리, 남성의 권위주의로 부터의 해방과 여성적 자아를 찾을 권리,
육아의 노동에서의해방과 산아제한을 할수있는권리, 낙태, 혼전 동거등등,
가히 그 시대에 쇼킹할만한 이슈들중엔 몇몇가지 동조할수 있는 부분도 있다.
김 우영에게 이혼을 당한후 쫒겨나다시피 시댁을 떠나온 혜석은
몇차례 개인전을 가지며 명예를 회복 하고자 했지만,
미술계와 문학계의 인사들은 모두 그녀에게 등을 돌린채 차가워졌고,
그녀는 생활고에 지쳐 몇푼 돈이라도 만들려고 혈안을 하게 되었다.
타오르는 불꽃 처럼 뜨겁게 사랑했던 최 린 마저도 그녀가 이혼한뒤 젊은 여류 문인과 결혼을 하였다.
김 우영 이혼을 한뒤 최 린과 당연히 결혼 할줄 알았던 혜석은 배신감과 모멸감과 돈이 아쉬워서,
최 린을 상대로 소송을 하게 된다.
소송의 내용은 유뷰녀의 정조를 유린하고 한가정을 파탄에 이르게 했으므로
그에 따른 정신적 경제적 손실을 배상 및 위자료를 청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어찌 생각하면 과연 타당한 소송인가 하는 의문도 생기고
혜석의 정신이 잘못된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당시의 그녀의 상황을 그려 본다면 조금은 이해가 가기도 한다.
어쨌든 최린으로 약간의 돈을 받아낸 혜석은 그 돈마저 생활비로 바닥이 나자
다시 전 남편 김 우영에게 자신의 이혼에 대한 부당함을 성토하며 재 결합을 원하였지만
혜석은 3남 1녀의 자녀와 김 우영에게 철처히 외면 당했으며 영원히 그들로 부터 격리 되었다.
이 두 사건은 그녀를 바닥으로 완전히 추락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세인들로 부터도 부정하고 몰염치하고 뻔뻔한 여자로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그녀는 사회의 이목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며 더 큰 좌절과 고독에 몸부림쳐야 했다.
그녀는 41세에 동가식서가숙 하는 방랑 생활을 시작하였다.
친정의 형제 자매도 그녀를 안보고자 했으므로 그녀는 갈데가 없었다.
더이상 기약없는 방랑생활도 할수 없고 몸도 병약해져 가고 정신마저도 희미하게 피폐해져 갈 무렵
혜석은 출가를 결심하고 충남 수덕사로 친구인 김 일엽을 방문하였으나
이미 혜석의 리비도와 감성을 알고 있던 김 일엽은 혜석의 출가를 허락 하지 않았다.
관념과 이성이 판이한 두 여성이 함께 생활 할 수는 없었다.
수덕사 밖 수덕 여관에 머물때
어린 청년 화가 이 응노가 혜석에게 그림을 배우러 다녔으므로
이 응노와 그림도 그리고 대화를 하며 무료함을 달랠수 있었으나,
혜석의 정조관념과 연애관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응노의 가족과 김 일엽의 냉담에
더 이상 수덕여관에 머물수 없어 다시 혜석은 유랑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금강산의 유점사와 동해안의 관동 팔경을 따라 몇 달씩 머물다가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지고 더이상 유리걸식 할 힘도 없어서
안양 양로원을 거쳐 48세에 서울 청운 양로원으로 갔다.
혜석은 지칠대로 지쳐 완전히 폐인과도 같았다.
1946년 어느날 혜석은 행려병자로 분류되어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쓸쓸히 사망하였다.
당시 혜석은 신분증등 유품이나 소지품 하나 없이 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단지 1948년 「관보(官報)」에 그 유명한 이름 석자도 없이 53세 사망으로 남아있을 뿐이다.
신학문을 배우고 동경 미대에서 빛나는 청춘 시절을 보낸뒤
나라를 구하고자 삼일운동에도 몸을 아끼지 않았고,
한국최초의 파리 유학생이었으며,
문학을 통해서 꿈꿔오던 자유연애를 몸소 실천 했던 여인 혜석,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모든 행동과 사고를 받아 들이지 않던 조선의 시대를 원망했고,
자기를 버린 김 우영과 최린을 원망했고,
조선의 여자로 태어난 걸 원망했고,
요절한 최 승구를 죽는 순간까지도 원망 했던 여인 혜석.
불덩이 처럼 뜨거운 꽃 한송이를 늘 가슴에 품고
그 꽃을 피우지 못한채 괴리의 늪속으로 가라앉은 여인 혜석,
아무리 치열한 정신으로 생을 살았다 해도,
그 삶이 평균치에서 벗어난다면 나는 그 치열함을 어떻게 평할수 있을까,,,,,??
나는 그녀 나 혜석에 대해 어떤 평을 할수가 없다,
그건 단지 그녀의 인생일 뿐이니까,,,,,
다만 그 시대를 이야기 할때마다 그녀의 이름이 언급되는것은
그녀가 남겨논 그녀의 선각자 적인 인생 때문이 아닌가,,,,하고 조용히 생각해 본다,
훗날, 그녀는 윤심덕, 김일엽 등과 함께 20세기 초반을 장식한 신여성으로서 현대사에 기록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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