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늘 있어왔다.
오늘 아침 티브이 드라마를 잠시 보았다. 마침 한 중년(?) 부인이 결혼한 딸의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친정 어머니와 딸의 대화는 늘 격의없이 다정함이 넘치는 게 당연하다. 어머니는 오후에 구청 문화단체에서 진행하는 노래교실에 가기로 약속된 듯했다. 하지만 딸의 요청은 “엄마, 내가 바쁜데 귀여운 손주 좀 잠시 봐주면 어떨까? 부탁해요.” 이런 내용인 듯했다.
친정 어머니는 간단히 “알았다”면서 표정으로만 아쉬움을 나타내면서 딸의 요청을 수락하고 말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이런 모녀간의 대화에 무슨 함정이 있는 것일까? 어머니는 60대 초반의 모습으로 보였다. 아니 요즘이면 70 나이에도 충분히 그런 모습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1998년도에 이미 평균 수명이 80에 이르렀다. 이대로 간다면 2020년대엔 90세를 넘어 100세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60 이후에 자신만의 생활 프로그램과 경제력을 갖추지 않으면 또 다시 어설픈, “자식들의 노예”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경고가 담긴 예시 드라마를 나는 본 것이었다.
“외롭게 살지 말고 우리 함께 살아요”라는 자식의 간절한 효성엔 “악마의 속삭임이 들어있다”라는 신종 격언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금쪽보다 귀하고 옥잎같은 손주 자식들을 보살피며 재롱을 받는 것도 노후에 들어선 인생의 즐거움이 분명하지만 충분한 건강, 충분한 경제력, 충분한 의욕, 호기심이 아직도 넘쳐나는 60대 후반의 젊은 전환기의 인생들에겐 또 다른 도전과 개척의 시간들이 KTX의 레일처럼 깔려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최근 40대 총리후보가 사회적으로 신선한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다. 삼십년 삼김시대처럼 칠팔십대가 권력의 중추에 선 장로정치의 구습을 과감히 벗어나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으려 했던 이명박정부는 오히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눈 매운 양파껍질’ 이력에 얼굴까지 붉히면서 철회해야만 했다.
다시 드라마로 돌아가보자.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애야 내가 너희들 키우느라 좀 시간을 내지 못했는데 이제야 짬을 내 취미 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함께 기뻐해주거라. 내가 건강해야 너희들이 나주에 고생 안 한다더라. 내가 열심히 배워서 우리 손주들에게 자랑좀 해야겠다. 그래도 되겠니? 정말 고마워 그런데 이번 수강 신청엔 10만원이 들었다. 네 아이들에게 즐거운 노랠 들려줄테니 이번만은 네가 대납해주겠니?” 이렇게 응답을 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인생과 노후설계가 조금 마련된 입장이 아니겠는가?
왜 또 내 차례냐며 투덜대며 손주들을 마지못해 끌어안은 나날들은 손주에게도 내 자신에게도 배우자에게도 그 자식에게도 어려움만 가중될 뿐이다.
평생의 동반자는 자신의 몸이며 배우자가 그 다음이다. 최근의 실버연령들은 대부분이 어느 정도 변화하는 신세계에서 듣고 보고 체험하며 살아왔다. 세상정보에 그리 어둡지도 않고 먹는 문제나 주거환경도 수십년 전에 비해 월등히 좋아졌다. 예방의학도 발달되어 장수의 여건이 갖추어졌기에 그 자신만의 또 다른 경이로운 인생을 찾아나서야 할 권리가 주어진 셈이다.
자식들에게 누가 되는 그런 노후인생은 그리 많지 않다. 오히려 이것 저것 부탁하며 유산에만 촉각을 세우는 자식들의 간곡한(?) 제안이 두렵기만 할 때도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제대로 건강한 경제사회주의와 다른 독재 개발주의와 천민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이념세례를 받은 우리사회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피폐한 농촌, 지방과 대도시의 커지는 격차, 사회교육문화 인프라의 특정지역 집중화가 주는 인구 흡입력이 시골공동화로 노인들을 더욱 외롭게 하고 있다.
모처럼의 여름철 고향에 와서 부모님의 건강을 살펴보고 몇 년 뒷면 묵어질 텃밭들을 정성스레 가꾸고 집수리도 해 주고 다음 추석날엔 맛있는 고향음식을 넉넉히 맛보겠다며 뜻있는 휴가를 보내면 어떨까? “다음 번엔 손주 녀석들 외국어 체험도 좋지만 여그서 좀 놀다 게가 하거라” 정담이 절로 나오지 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