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그램명 : KBS순천R. 삼산이수 투데이(20130806 / 17:40~17:50)
<우리 지역 문화유산 답사기8>
❍ 주제 : 한일합방에 음독 자결한 매천 황현선생
❍ 인터뷰 :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
Ann : 우리나라의 마지막 선비로서 관료를 팽개치고, 일생동안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한일합방의 치욕을 참지 못하고 음독자살한 매천 황현선생!!! 일본에게 나라를 잃어버린 치욕에 누구 한사람 목숨을 끊는 사람이 없었어야 되겠느냐며 절명시를 짓고 목숨을 끊었는데요. 매천선생은 선비로써 과거에 나아가 급제하여 나라에 충성을 하고자 하였으나 부정부패로 합격순위가 뒤로 밀리는 부당한 이유가 시골출신이라는 것과 이미 조정에는 부정이 싹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황현 선생은 선비로서 무언의 도전을 한 것인데요. 선생의 출생지가 광양입니다. 광양에 생가가 복원되어 있고, 생가 위쪽에 매천공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황현 선생에 대하여 남해안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에게 듣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Q-1.우리 조상들을 볼 때, 수많은 선비로써 조정에 나아가 나라를 위한 충신들이 있는 반면, 묵묵하게 선비의 도리를 지키면서 시골이나 산골에서 글을 벗 삼아 일생을 지낸 이들도 많습니다. 황현선생의 곧은 선비정신이 행동으로 뚜렷하게 나타나는데요, 황현선생은 어떤 분이며, 약력에 대하여 간단하게 말씀해 주시죠.
Answer_ 예, 황현선생은 15세에 과거에 급제한 매헌 이건창(李建昌) 그리고 창강 김택영(金澤榮)과 더불어 구한말 삼재(三才)로 불려 졌는데요, 순국지사이면서 시인이고 문장가인데 광양시 봉강면 석사마을에서 1855년에 출생하셨습니다. 본관은 장수(長水)이고요. 자는 운경(雲卿), 호는 매천(梅泉)으로 시묵의 아들이죠. 먼 조상으로는 황희 정승인데, 황희는 청렴한 생활로 가계가 몰락했기 때문에 농민과 다름이 없었는데요. 그러나 황현의 아버지가 매천의 앞날을 위해 천권의 책을 서재에 쌓아 놓고 교육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계를 볼 때, 황현은 대대로 학문을 중시한 집안의 후손이었고, 선비로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애국심이 몸에 배어 있었다고 보아야할 것 같습니다.
Q-2.매천 선생께서 세상으로 나가 나라에 충성코자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였는데도 나가자 않았다고 하던데 무슨 이유라도 있었나요.
Answer_ 예, 있고 말구요. 매천 선생은 고종 20년인 1883년이 29세가 되는 해인데요. 그동안 늘 익힌 학문을 발휘하여 조정으로 나아가 포부를 펼쳐보려고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하여 초시 초장에서 장원으로 뽑혔는데도 몰락한 가문이고,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장원에서 차석으로 밀리게 되죠. 이에 선생은 회시와 전시에 응시하지 않고 부정부패로 물든 과거제도와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조정의 현실을 보고는 벼슬에 뜻을 접고, 낙향해서 대부분 광양과 구례에서 기개 있는 선비로 정착하게 되죠.
주로 구례에서 작은 서재를 마련하여 삼천여권의 서책을 쌓아놓고 독서와 시문 짓기 그리고 역사연구와 경세학 등 공부에 열중하였다고 하는데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행동을 못 마땅히 여기고 과거에 응시하라 독촉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1888년에 다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합격하게 되죠. 그러나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관료계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고 귀향하게 됩니다.
Q-3.선생께서는 관료로서는 나가지 않았지만,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만은 대단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나라 잃은 설음에 목숨을 버렸다는데, 내용을 말씀해 주시죠.
Answer_ 예, 먼저 그 당시 사회정세를 보면,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을 시작으로 갑오경장, 청일전쟁이 연이어 일어나 나라는 급박한 상황에 이르렀는데, 매천 선생은 이러한 국가의 위기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면서 본인이 경험하거나 견문하고 느낀 것을 매천야록, 오하기문의 기록으로 남기게 되죠.
그러던 중 1905년 11월에 일본이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을 금치 못하고 중국에 있는 김택영과 국권회복운동을 하려고 망명을 시도하였지만, 실패를 하게 됩니다. 세월이 흘러 1910년 8월. 일본이 강제로 나라를 빼앗자 이에 통분하여 절명시 4수를 남기고 다량의 아편을 먹고 56세에 자결하게 되는데요. 이에 앞서 1909년 55세 때 매천선생은 소경자찬(小景自贊)이란 시를 지었죠. “세상과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높고 큰 뜻을 지리산 두메에 묻고서 재야 사람을 고수하는 면모를 상상하게 한다.”라고 하는 자찬시를 남겼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일찍이 세상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 曾不和光混塵
비분강개 토하는 지사도 못 되었네 / 亦非悲歌慷慨
책 읽기 즐겼으나 문단에도 못 끼고 / 嗜讀書而不能齒文苑
먼 유람 좋아해도 발해를 못 건넌 채 / 嗜遠游而不能涉渤海
그저 옛사람들만 들먹이고 있나니 / 但嘐嘐然古之人古之人
묻노라, 한평생 무슨 회한 지녔는가 / 問汝一生胸中有何壘塊
황현선생은 자기의 무능함을 한탄하는 것 같지만 이 시에는 나라를 걱정하는 깊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한때는 최익현이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해 대마도에서 “원수가 주는 밥을 어찌 먹겠느냐”며 단식 끝에 목숨을 끊고 그의 시신이 부산항에 들어오게 되는데요. 황현은 죽음을 애도하는 만사(輓詞)를 지었는데, “고국에 산 있어도 빈 그림자 푸르를 뿐, 가련타 어디메에 임의 뼈를 묻사오리”라고 했죠. 즉, 돌아온들 빼앗긴 강산에 뼈를 묻을 곳은 없다는 것입니다. 나라 잃은 슬픔을 어찌 글과 말로 표현하겠습니까?
Q-4. 매천이 음독자살하기 전에 쓴 절명시가 유명한데요. 절명시에 대하여 설명해 주시죠.
Answer_ 예, 매천선생은 자결하기 전에 아들과 동생에게 글을 남기게 됩니다.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할 만한 의리는 사실상 없지만, 다만 이 나라가 5백년 동안 선비를 길렀는데 나라가 망한 날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느냐면서 이것은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라고 하였고,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절명시를 남겼는데요. 이 절명시(絶命詩) 4수는 강제로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울분으로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결국은 조약체결 16일 후에 아편을 먹고 자결하기 전에 시로써 남기게 된 것이죠. 먼저 절명시를 한번 살펴보죠.
亂離袞到白頭年 (난리곤도백두년) 난리를 겪다 보니 백두년(白頭年)이 되었구나.
幾合捐生却末然 (기합연생각말연)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다 이루지 못했도다.
今日眞成無可奈 (금일진성무가내) 오늘날 참으로 어찌할 수 없고 보니
輝輝風燭照蒼天 (휘휘풍촉조창천) 가물거리는 촛불이 창천(蒼天)에 비치도다.
妖氣掩翳帝星移 (요기엄예제성이) 요망한 기운이 가려서 제성(帝星)이 옮겨지니
九闕沉沉晝漏遲 (구궐침침주루지) 구궐(九闕)은 침침하여 주루(晝漏)가 더디구나.
詔勅從今無復有 (조칙종금무복유) 이제부터 조칙을 받을 길이 없으니
琳琅一紙淚千絲 (임랑일지루천사) 구슬 같은 눈물이 주룩주룩 조칙에 얽히는구나.
鳥獸哀鳴海岳嚬 (조수애명해악빈) 새 짐승도 슬피 울고 강산도 찡그리네.
槿花世界已沈淪 (근화세계이침륜) 무궁화 온 세상이 이젠 망해 버렸구나.
秋燈掩卷懷千古 (추등엄권회천고) 가을 등불 아래 책 덮고 지난 날 생각하니
難作人間識字人 (난작인간식자인)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 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曾無支厦半椽功 (증무지하반연공) 일찍이 나라를 지탱할 조그마한 공도 없었으니
只是成仁不是忠 (지시성인불시충) 단지 인(仁)을 이룰 뿐이요, 충(忠)은 아닌 것이로다.
止竟僅能追尹殺 (지경근능추윤살) 겨우 능히 윤곡(尹穀)을 따르는 데 그칠 뿐이요,
當時愧不躡陳東 (당시괴불섭진동) 당시의 진동(陣東)을 밟지 못한 것이 부끄럽구나.
라고 절명시를 읊었습니다.
Q-5. 후대인들은 이러한 매천선생의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어떤 일들을 하고 있는지요.
Answer_ 네, 현재 광양시 봉강면 석사마을에 매천 황현 선생의 생가와 묘가 있는데요, 2002년에 광양시에서 생가를 복원하여 깨끗하게 주변정리가 잘 되었고 묘가 있는 곳은 동산으로 꾸며져 있구요. 그가 살던 구례에는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매천사와 그의 유품을 전시한 유물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1911년에 영호남 선비들이 정성을 모아 매천집(梅泉集)을 발간하였고,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에 최초로 매천야록을 역사서로 간행하였는데, 매천야록은 1865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의 역사 사건뿐 아니라 민중의 목소리까지 실은 귀중한 역사자료로 평가되고 있죠.
국가에서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고, 1999년 8월에 문화인물로, 2005년에 11월에는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습니다. 그리고 광양과 구례에서는 2009년에 매천정신을 주제로 한 학술세미나, 학생 학예경연대회, 시조경창, 시낭송대회 등으로 제1회 매천황현문화제를 개최하기도 하였죠.
Ann :오늘은 광양 출신 매천 향현 선생의 애국심과 선비정신이 담겨 있는 이야기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남해안 역사문화연구소 정의연 소장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