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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호 발행인 논단] DJ의 햇볕정책에 대한 포폄(褒貶)을 넘어 | ||||
독일 통일 과정에서 배우는 교훈과 배우지 못한 교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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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이 남긴 빛과 그림자
지난 8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요, 한국을 민주주의 국가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 대다수 국민이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투신과 남북 화해에 대한 그의 열정을 칭송했고 현 정부도 국장으로 그의 장례식을 치르게 함으로써 여론에 화답했다. 후광은 국장 예우, 국립묘지 안장, 그리고 전국적인 애도와 조문을 누리며 고단했던 인생역정을 잘 마무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국민 다수가 김대중 대통령이 민주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정치적 보복을 자제했으며 문민정부가 초래했던 IMF 위기를 극복한 점 등에 대해서는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대다수 국민 정서에 거슬러 후광의 국장에 격렬하게 반대하고 그를 민족반역자 김정일과 국가연합을 꾀한 역적이라고 매도하는 소수의 사람들도 있었다. 조갑제, 지만원, 서정갑, 반핵반김운동을 벌이는 새터민 출신의 자칭 망명 정치가들 등은 김대중의 햇볕정책이 북한 김정일을 이롭게 하고, 북핵 제조를 실제적으로 지원한 ‘악한’ 정책이었다고 비난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6․15 공동선언과 노무현 전 대통령의 10․4 남북정상회담은 남한 내 일련의 사람들에게 격한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남남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북한을 정부나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에 반기를 들고 있는 반역단체라고 본다. 그러므로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고 당국자 간 대화를 열어 화해․협력․포용․상호교류를 진척시키는 것은 북한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라고 판단한다. 이런 대북 적개심은 역사적 경험과 이념적인 판단, 그리고 분단체제가 심어준 분단적대 교육의 부산물이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현실적인 부피와 무게를 갖고 있다. 그래서 고도의 희생과 종교적 영성을 요구하는 남북화해와 통일과업은 어쩌면 정치권력 획득을 목적으로 삼는 당파적 정치가들에게는 벅찬 과업일지도 모른다. 이질적인 남북겨레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화해하며 결국에는 하나의 조국을 건설하기 위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통일담론을 넘어서는 하나님나라 중심의 통일과 화해담론
우리 겨레의 통일과 화해 성취는 국제정치질서의 도움도 필요하지만 남북한 겨레의 확고부동한 통일화해의지와 일치와 통일을 위한 희생강도에 달려 있다. 후광이 추진했던 햇볕정책이나 참여정부의 한반도평화번영정책은 남북한의 긴 평화공존체제를 전제하며 그 바탕 위에서 아주 점진적인 화해와 통일을 추구하는 정책이다. 이것은 남북 모두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우선 북한에게 정치적 희생을, 남한에게는 경제적 희생을 요구한다. 남북 모두의 극단적 분단주의자로부터 오해와 공격을 자취해가면서 평화의 길을 찾는 것은 종교적 영성으로만 가능하다. 여기에 참된 기독교적 지성과 영성을 가진 청년들의 결단과 희생이 요청된다.
왜 우리 겨레는 통일해야 하는가? 여기에는 자명한 대답이 있을 수 없고, 기독청년들이 스스로 대답을 정하고 그것을 구하기 위해 실천해야 한다. ‘단일민족의 역사’ 자체가 정치적 국가적 통일을 강제하는 자명한 원리가 아니다. 2500만 쿠르드족, 아프리카 르완다의 투치족과 후투족,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줄루족, 러시아 민족, 게르만 민족, 바이킹족 모두 단일민족이지만 서로 다른 나라를 구성하고 있지 않는가? 북한과 남한이 단일민족국가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라고 해서 반드시 재통일되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재통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남북한 겨레구성원이 통일을 원치 않고, 한국 분단의 책임적 당사자국가들이 전혀 도와주지 않으면 분단은 영속적 현실이 될 수 있다. 남북통일은 ‘2000년 이상 단일민족 국가를 이루어온 우리 민족’이라는 민족주의적 감성에 호소해서만 성취될 수는 없다. 또한 통일이 되어야 한민족 경제권이라는 거대한 경제블록이 생겨나서 수출하지 않고도 가동되는 기업체들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경제논리로도 안 된다. 통일해서 부국강병을 이뤄 동아시아의 주도세력이 되고 옛날 고구려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과장적 국운융성론으로는 더더욱 안 된다. 간도나 대마도를 놓고 중국과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일으키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강력한 통일한국’을 원하는 국제사회는 없다. 이 마지막 통일 이상은 너무나 위험한 발상이다.
김대중의 햇볕정책과 노무현의 평화번영정책은 완전한 정책이 아니다. 충분한 국민적 합의과정에서 도출된 것도 아니고 추진과정에서 야당과 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하려고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남갈등을 유발시키는 부작용도 있다. 그렇지만 당장 현재 남북의 적대적 분단체제를 평화롭게 종식시킬 수 있는 길은 햇볕정책 혹은 그에 준하는 정책 외에는 보이지가 않는다. 누가 보더라도 현재의 북한은 기가 막힌 모순에 빠져 있다. 국민의 실제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국가 기능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며, 보편적인 인권, 즉 사상과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거주 이전, 직업선택 등의 인권지수는 최악이다 하지만 핵무기를 만드는 세계 7강 중 일원으로 자임하고 있다. 자력으로 6000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들어내는 소위 강성대국의 길로 전진하고 있는 나라다. 북한은 군사적으로는 남한을 압도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북한은 한국전쟁의 휴전협정 당사자가 북한과 미국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국제정치질서의 재편을 논하는 일괄협의 구조에서 남한을 무시하거나 종속변수로 대한다. 이런 북한의 이중적 위상 때문에 우리는 남북문제를 우리 겨레 내부 역량으로만 풀 수도 없다. 우방인 미국과 중국․일본․러시아의 협조와 지지가 필수적이다. 그래서 세계 유일무이한 적대적 분단국인 우리나라를 통일시키기 위해서는 탁월한 외교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가득 찬 나라가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남북화해를 위해 요청되는 종교적 영성
아울러 반북 적대세력과도 소통할 수 있는 평화의 중재자들이 나와야 한다. 자신이 분단체제의 희생자에 속하면서도 하나님나라의 대의를 위해 자기희생과 이웃 사랑, 원수 사랑의 길을 개척하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이 두껍게 형성되어야 한다. 민족화해와 북한과의 공동번영을 추구하려는 정치가나 정치세력은 남한 내에 비등하고 있는 이 증오와 적대감과 직면해야 한다. 그들에게 진심을 토로하고, 그들의 진정성 있는 아우성과 원한을 흡수하고 이해하여야 한다. 그런 누적된 자기희생적인 소통과 증폭된 이해를 바탕으로 남북화해와 겨레 일치를 위해 사심 없는 대의를 추구하여야 한다. 남북한의 역대에 누적된 증오와 적개심을 해소시킬 자기희생적 정치가, 살신성인적인 정치가가 출현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남북화해와 겨레의 일치과업은 아주 높은 도덕적 이상과 경륜, 외교실력과 정치력을 요구한다. 이것은 하나님나라의 이상에 대한 기독청년들의 순도 높은 복종이 실험되기에 좋은 영역이다. 하나님만이 우리 겨레의 일치와 화해를 사심 없이 지원하실 수 있고 주도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겨레의 분단 시대는 나라의 주권을 잃고 식민지 백성으로 전락한 노예살이의 연장이며 민족을 갱생시키려고 하나님이 작정하신 마지막 연단기다. 우리 겨레는 아직도 이념적 노예살이를 강요당한다. 우리 힘으로 돌파할 수 없는 국제정치의 멍에 아래 분단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자유와 평화, 공평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나라에 근사치적으로 접근하는 국가를 건설할 신앙적 소명이 필요하다. 하나님나라의 보편적 이상 때문에 기독청년은 남북화해와 통일과업에 투신해야 한다. 원수 된 형제가 화해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대의이며, 굶주린 이웃과 나누는 것이 통일이기 때문에 우리는 민족상잔의 상처를 극복하는 남북통일과 화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현재 북한 동포들은 이념을 희생시켜야 하고, 남한 동포들은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여야 한다. 이것이 앞서 말한 통일에 필요한 ‘종교적 영성’이다. 남북통일은 종교적 영성이 견실하게 함양된 이후에 가능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분단 역사를 평화롭게 종식시키고 통일과 화해의 대업을 성취시킨 독일 통일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통일사는 형제 사랑을 위한 경제적 희생의 역사요 그 결과 정치적 희생을 유도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사민당 총리 빌리 브란트와 기민당 통일총리 헬무트 콜의 통일 동역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되어 1990년 10월 3일 통일독일(Deutsche Einheit)에 이르기까지 독일인들이 내린 신속하고도 단호한 결정은 마치 히브리 노예들의 출애굽을 연상시킨다. 통일의 날은 도적처럼 찾아왔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30여 년 만에 이뤄진 결실이었다. 진보적인 사민당(SPD)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1969년에 입안하고 파종했던 평화통일의 씨앗을 보수적인 기민당(CDU) 총리인 헬무트 콜이 30년 후에 수확한 것이었다. 빌리 브란트가 시작한 동방정책은 당시 엄청난 논란과 반대를 촉발시켜 국론을 분열시켰으나, 결국에는 독일 통일을 이뤄냈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은 대적자들을 설복시키며 분단 독일인들의 마음속에 통일담론으로 스며들어갔다. 독일 통일사를 총리들이 내건 정책들을 중심으로 일별한다면, 동방정책의 역사적 의의를 파악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포츠담회담에서 전승 4대국은 패전국 독일을 네 조각(크게는 두 지역: 서방연합군의 서독과 소련군의 동독)으로 쪼개는 데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하지만 1948년의 베를린 봉쇄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긴장이 고조되었고 독일은 독일연방공화국(FRG)과 독일민주공화국(GDR)으로 분열되었다.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수상은 보수적인 기독교민주당(CDU) 출신 콘라트 아데나워이다(1949~1963). 그는 나치 청산에 온 힘을 기울이고 독일의 국제적 지위, 문명국 클럽회원증을 얻는 데 투신했다. 그는 독일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며 나치 하의 독일 3제국 과거사를 철저히 반성하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홍보하는 한편,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독일경제를 부흥시켜야 했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성취하기 위해서 서방 자유주의 진영에 확실히 가담하고 공산권 국가들과의 대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그는 동독을 고립 및 봉쇄하려는 정책, 곧 할슈타인 독트린(the Hallstein Doctrine)을 구사했다. 지극히 친서방적인 이 정책으로 독일은 라인강의 기적이라는 경제발전, 나토 가입, 유럽통합의 기틀을 마련한 석탄철강공동체 산파 등을 성취했다. 이런 경제적 성공과 유럽공동체로의 복귀, 이것이 훗날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가능케 한 토대임이 드러났다. 아데나워의 후임자인 루드비히 에르하르트(1963~1966) 총리는 경제적 업적은 이루었으나 분단시대를 극복할 민족통합적 경륜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같은 당의 다음 총리 쿠르트 게오르그 키징거(1966~1969)는 독일연방공화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연정을 실시하였는데 괄목할 만한 정치경제적 업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소련과 동구권과의 관계개선을 약간 시도했다.
20년간 계속된 보수적 기민당 정권 시대를 종식시킨 사람이 사회민주당(SPD) 출신 첫 총리 빌리 브란트(1969~1974)였다. 1961년 서베를린 시장 재직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것을 목격한 그는 동서냉전이라는 국제질서가 독일 통일을 가로막으며 독일민중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근본 모순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무엇보다도 서독의 대외정책인 할슈타인 독트린을 폐기하고 동구권에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동방정책(Ostpolitik)을 실행했다. 그것은 ‘접근을 통한 동독변화 정책’이었다.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과의 외교관계 정상화와 동독과의 공존정책이었다. 동독과 외교관계를 맺는 어떤 나라와도 외교관계를 단절한다는 할슈타인 원칙이 동독의 변화를 유도하거나 독일 통일의 역량을 비축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확신한 브란트는 미국 닉슨과 중공 모택동 사이에 벌어진 미중 수교라는 1970년대 초의 데탕트 분위기에 편승하여 동방정책을 시의적절하게 구사했다. 그는 1970년에 동독 수상 빌리 쉬톱(Willi Stoph)을 만나 양독 정상회담을 가졌고 1972년에는 ‘기본조약’(the Basic Treaty)을 맺었다. 이런 과감한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중에도 그는 전통 서방우방들과의 관계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데탕트 이후에 독일이 더 강해질 것을 우려한 유럽 인근국가들에게 양독 화해가 유럽화해 및 유럽 통합에 더욱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설득한 것이다. 특히 브란트는 유럽 공통농업 정책추진과정에서 독일이 큰 재정 부담을 감수함으로써 프랑스의 지지를 획득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동독에 종주권을 행사하던 소련의 협조가 필수적임을 알고 1970년 모스크바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을 통해 서독의 무력 사용 포기와 현재 유럽 국경 준수를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앙금과 상처가 가장 깊었던 폴란드를 달래기 위해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며, 당시의 폴란드와 독일의 ‘유동적이고 불안정한’ 국경선이었던 오데르-나이스 국경선을 준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하여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의 조약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혁신적인 외교 행보와 양독 화해 정책은 당시 서독 내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동독과 맺은 1972년의 ‘기본 조약’이었다. 양독이 존재하나 그들은 결코 외국일 수 없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보수적 기민당은 기본조약 비준을 반대했다. 서독의 입장을 너무 많이 포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논란 중에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인 사민당과 자유민주당(FD) 연합정권은 기민당에 패했다. 1972년에는 기민당 총재 레이너 바르젤이 새 수상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두 석이 모자라 바르젤이 수상이 되지 못했다. 동독이 양독 통일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 사민당 브란트 정부에게 화답하고자 CDU 두 의원을 매수, 바르젤에게 반대표를 던지도록 공작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은 빌리 브란트에게 최대의 정치적 곤경이 될 수 있었으나, 그 해 재선거에서 브란트 정부는 다시 승리했다. 서독 국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의 효용성과 통일지향성을 도덕적 시비 위에 둠으로써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것이다. 1973년 5월 11일에 더 늘어난 의석수를 가진 브란트의 여당연합이 ‘동서독 기본조약’을 비준해주었다. 이 기본조약에 따라 양독은 서로의 대사를 받아들였고 유엔 동시가입도 이뤄냈다. 1982년에는 기민당(CDU) 총재 헬무트 콜이 수상이 되었으나 이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 심지어 1983년에는 기본 조약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기민당 의원 프란츠 요셉 쉬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까지 동독에 10억 마르크(달러)의 차관을 제공하자는 콜 수상의 제안에 동의했다. 동방정책이 초당적인 통일정책이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잘 새겨볼 대목이 아닌가 한다. 사민당의 후임 총리 헬무트 슈미트(1974~1982)는 브란트가 일구어놓은 동방정책을 각론에서 성취했다. 가족왕래, 서신왕래, 경제원조 등을 통하여 구체화했다. 그러나 미․소의 핵무기 경쟁으로 재개된 냉전은 일시적으로 이러한 교류를 중단시켰다. 그는 나빠지는 경제사정으로 의회 불신임을 받아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 결과 기민당의 헬무트 콜(1982~1998)이 새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동구권 공산국가들의 체제 모순이 극에 달할 때에 유럽의 국제질서가 재편되는 시의를 잘 이용하여 독일 통일 총리가 되는 영예를 안았다. 1980년대가 되기가 무섭게 동구권의 체제 모순은 국제적으로 관찰되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는 동구권 사상 처음으로 그다니스크 조선소 노동자들이 자유노조를 구성하여 파업함으로써 공산당에 대한 정면 도전에 들어갔고, 때마침 미국의 공화당 대통령 로날드 레이건은 절대 우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소련 공산당과의 체제경쟁을 가속화시켰다. 콜은 고르바초프의 소련이 자발적인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통해 체제변동을 주도하고 미국과의 적대적 대결구도를 스스로 허무는 것을 보면서 적어도 유럽에서는 전후 냉전질서가 종결되고 있음을 보았다. 전후 냉전질서의 산물이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독일분단의 시대도 이제 종료되고 있음을 예감하며 기민하고 단호한 결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1989년 10월 7일 동독(독일민주공화국) 건국 40주년기념 행사장은 인민 주권과 자유에 대한 열망과 통일을 염원하는 동독시민들의 시위장으로 바뀌었다. 당황한 전승 4대국은 동독 시민들의 반체제 시위와 독일 통일은 서로 무관함을 천명하지만 콜 수상은 2+4회담을 전격 제의하며 독일 통일을 위한 국제정치적 환경을 조성했다. 독일 통일은 4대국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하며 오히려 이득이 될 것임을 설득하며 종전 45년 만에 통일을 성취했다.
급속한 ‘독일 통일’ 과정 배후에 있는 ‘길고 긴’ 평화공존 실험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로 급류를 타서 1990년 10월 3일에 완성되었으나 실제로 훨씬 긴 준비과정이 수반되었다. 전체 독일 통일(Deutschland als Ganzes)은 ‘통독기본 조약’과 ‘2+4 조약’이라는 국제조약(1990년 9월 12일)에 의해 성취되었다. 이 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 전승국들(미․소․불․영)이 독일에 대하여 가진 정치적 기득권을 온전히 폐지했다.
1985년에 착수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Glasnost und Perestroika)은 동유럽 위성국가들에 대한 이념적 통제의 약화를 초래했고 1980년대 동독 정치와 경제는 최악의 단계로 나아가고 있었다. 동독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쇠락, 인권 상황 악화, 밀고와 고발, 감시체제의 일상화, 여행 통제, 민주적 시위를 통한 의사표시 억압, 10만 명의 비밀경찰 스타지(Stasi)와 2만 명의 특수비밀요원 활동에 대한 민심 이반 등이 동독의 국가기능을 사실상 파탄내고 있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의 베를린 지부(Anatoli Nowikow)는 징벌적인 사찰보다는 개혁적인 동독시민들을 선동해서 고르바초프적 의미의 민주주의를 동독에 심어주려는 목적을 갖고 활동했다. 1989년 7월 6일에 고르바초프는 동독에 일어날 예상되는 소요를 진압하기 위한 소련 군대의 개입 가능성을 부정했다.
1989년 5월 2일에 헝가리는 동독 국경에 쳐 놓은 국경경계방벽을 철거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수백 명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를 거쳐 서독으로 탈주했다. 9월 11일에 오스트리아로 가는 헝가리 국경이 열렸고 동독주민들의 도피 행렬은 계속 줄을 이었다. 9월 30일에 프라하, 바르샤바 등 동구권 국가들 주재 동독대사들의 서독 탈주가 따랐다. 같은 달에 헝가리는 동독과의 협의 없이 약 3만 명의 동독주민이 헝가리를 통해 서방세계로 탈주하는 것을 허용했다.
그러는 사이에 동독에서의 시민시위는 격화되었다. 라이프지히 니콜라이 교회의 평화를 위한 주례기도회의 지원을 받은, 이른바 그 유명한 ‘월요일 시위’가 일어났던 1989년 4월 이래, 반체제 시위는 일상화되고 격화되었다. 1989년 10월 9일에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라는 구호를 갖고 7만 명의 시위대가 평화시위를 벌였다. 그 구호는 정치적 회합과 담론 권리를 요구한 것이었다. 11월 3일 이후 동독 주민들은 허가증 없이 체코슬로바키아를 여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갱신된 외국여행 행렬을 초래했다. 11월 4일에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에 거의 100만 명이 운집하여 동독 역사상 최대시위를 벌였다. 11월 7일에 동독 내각과 정치국 모두 사퇴했다. 무정부 상황이 된 것이다. 1989년 11월 9일에 동독 집권당인 사회주의통일당 대변인 귄터 샤보스키는 기자회견을 통해 11월 9일 오후 6시 57분에 당국 허가 없이 외국에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마침내 1989년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것이다. 대환희의 장면이 전개되었고 외국인들도 기쁨에 동참했다. 서독은 당시에 기본적으로 100마르크 정도(1인당)의 기본 경비를 갖고 오는 서베를린 및 동독주민을 허용했다. 그 결과 1989년 11월 말까지 1800만 동독주민이 서독을 방문한 것으로 통계가 잡혔다.
서독 총리 헬무트 콜은 폴란드 국빈방문을 즉각 중단하고 11월 10일 저녁 서베를린 서쪽 지역에 있는 시청에서 동독과 서독 주민들 3만 명 앞에서 하나의 선언을 발표했다. 그곳은 서독 사민당(SPD) 총리이자 동방정책의 창시자였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함께 속한 민족이 이제 함께 성장하는 도상에 들어섰다’라고 말했던 곳이다. 독일 통일에 도움이 되는 국제정세와 동독정세를 지혜롭게 분별한 콜 수상의 신속하고 단호한 행동, 미국을 비롯한 우방들의 지지는 통독의 국제적 승인을 얻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했다.
1000페이지가 넘는 양독통일조약은 1990년 9월 20일에 서독 연방의회와 동독 인민회의에서 압도적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1990년 10월 3일 자정에 통일축하행사가 베를린 국회빌딩과 알렉산더 광장 사이의 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동베를린에서 행해졌다. 이처럼 극적이고 급속한 통일을 민족통일이라는 대의명분에 대한 투신이 오랫동안 축적되어 왔던 것이다.
하지만 독일분단사에는 없는 ‘한민족 동족상잔사’
독일 통일사는 우리 겨레가 잘 보고 배워야 할 감동적인 드라마지만, 독일분단사는 우리 겨레의 분단사와 너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이요, 패전국으로서 응분의 책임을 지기 위해 한 세기 이상의 분단체제를 감수했다. 국제사회의 문명국가 정회원으로 자활갱생하기 위한 일종의 보속적 통과의례로서 분단 멍에를 멨다고 볼 수 있다. 독일분단은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서 나온 산물일 뿐 독일자체의 내부적인 적대화 과정은 거의 없었다.
반면에 우리나라의 분단은 독하고 격렬한 적대심으로 유지되고 심화된 분단이다. 우리나라는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로 있다가 독립되지 못한 채 이념적 완충국가로 재식민화되어 분단되어버린 것이다. 소련은 북한지역을, 미국은 남한지역을 이념적으로 식민화함으로써 민족의 자주적인 힘으로 통일된 독립국가를 건설하지 못했다. 1949년에 완성된 김구의 <백범일지>는 자주적인 민족통일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가져올 민족사적 비극에 대한 염려어린 전망으로 가득 차 있다. 결국 1950년 한국전쟁은 이런 강요된 냉전질서의 심화를 초래했고, 그만큼 국제적 냉전세력들이 남북 간의 적대적 분단체제를 관리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그것이 북한의 통일전쟁이건 소련의 한반도 전역 적화책략으로 일어났건 간에 한국전쟁은 우리 겨레의 분단사를 동족상잔의 역사로 규정짓도록 만들어버렸다. 민족화해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이적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아주 위험한 일이 되어버린 것이다. 남한현대사는 민족통일과 남북화해를 말하고 주창한 선각자들에게 가혹한 운명을 안겨준 역사다. 김구, 여운형, 조소앙, 장준하, 함석헌, 문익환 등이 그 희생자들이다.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는 종교적 영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함석헌의 말처럼(함석헌 전집 <생활철학>에 실린 ‘민족통일의 종교’), 이렇게 위험한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그 성격상 고도의 자기희생적인 종교적 영성을 가진 자들에게 맡겨진 과업으로 보인다. 김대중과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의 남북화해정책에 대한 남한의 극렬반대자들을 감안하면, 남북화해와 통일을 추진하는 이 일은 보통자유민주주의 선거에서 얻은 종다수파의 지지로 간신히 얻은 대통령직을 걸고 추진하기에는 너무 엄청난 과업처럼 보인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추진했던 햇볕정책은 실용주의적 이해타산가들이나 남북한 간에 엄격한 상호주의를 적용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길이다. 퍼주기에 불과한, 북한에게 이용당한 정책이다. 북한 지원은 북한정권 유지를 위한 것이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북한은 지원하면 안 된다는 응징적 상호주의는 인간의 원시적 보복감정을 충족시키는 면이 있다. 하지만 북한 정권유지를 돕는 금강산 관광, 식량, 비료, 분유 지원도 다 중단해야 하고 북한이 무너지도록 방치해야만 하는 정책은 정상적인 정치행위가 아니라 준전시상황적 대결이다.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와 전두환 군부독재에 이르는 30여 년의 독재 시절을 회고해보면, 이런 전시상황적 대북 강경론은 북한이라는 절대악을 이용해서 언론 자유·정치적 활동·인권 탄압을 정당화하려는 유혹에 시달리는 정부 때 득세한 담론임이 금세 드러난다. 햇볕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최선 무결점의 정책이라서가 아니라 이전까지 미국과 남한의 적대적 위협과 대북 적대시 정책들이 통일과정을 촉진시키기보다는 북한을 강성대국화정책을 추구하도록 몰아갔다고 보기 때문이다. 대북화해 포용정책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남는 유일한 대안은 군사적 경제적 대북봉쇄와 압박 정책뿐인데 이것은 정치행위가 아니라 준전쟁행위다. 대북봉쇄자들이 꿈꾸는 시나리오 중 가장 빈번한 것은 북한 체제붕괴 시나리오일 것이다. 모든 국제외교관측통들과 북한전문가들은 한결같이 현재 북한이 체제붕괴로 무너지면 그것은 남한에게 전무후무한 대재난이 될 것이라고 본다. 북한의 체제붕괴는 남한에게 결코 승리의 기쁜 소식이 아닌 것이다.
남한이 상대하는 북한은 기아에 시달리지만 자칭 핵보유국으로 자임하는 군사강국이다. 현재 북한경제는 1990년의 동독보다 더 열악하다. 동독은 서독 개인총소득의 3분의 1이었다(서독-US $2만 5000; 동독-US $8500). 남한과 북한은 15:1이다(남한-US $2만 7100; 북한-US $1800). 이 격차는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통독 때 동독 인구는 1700만 명으로 서독(6000만 명 이상)의 3분의 1이었다. 현재 북한 인구(227만)는 남한(486만)의 반 정도다. 독일 경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통독 후유증을 앓고 있다. 급격한 통일로 동독에 쏟아 부은 돈은 2조 달러나 된다. 북한의 체제 붕괴로 대규모 난민이 남한으로 흡수되면, 남한경제를 붕괴시킬 가능성은 거의 100%다. 평화통일을 원한다면 남한은 가능한 북한의 붕괴도 막아야 하고 북한이 붕괴되더라도 대규모 난민 쇄도 사태를 막아야 한다. 순전히 남한식으로 말하면, 남북한의 평화통일은 북한경제의 재건과 주체사상으로 단련된 북한 동포들을 자유시민으로 재활 복구시키는 과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 비적대적 분단공존시대를 뒷받침하는 햇볕정책이나 이에 준하는 남북화해 정책만이 북한을 재활 복구시킬 수 있는 말미를 줄 수 있다.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본지 발행인) haekwon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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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게 설교 때 말씀하셨던 자료군요...
우와! 찾아보려했는데^^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