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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하세요 !
오늘은 아브라함의 고향 우르[Ur)와 그 주변 지역을 공부해보아요.
창세기11장 31절에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 그 손자 롯과 그 자부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데아 우르에서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하였으며"라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
우르지역에 대해서 먼저 공부를 해 보겠어요
유프라테스 강이 흐르고 있고, 티그리스 강이 그 위로 흐르고 있는 그 사이에 비옥한 땅이 조성 되고 지중해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래서 비옥한 초생달 같은 모양이 되지요.
메소(사이)포타미아(강)는 헬라어로 “두강 사이의 땅”이라는 뜻이며,
히브리어 명칭으로“두 강의 아람”이라는 의미로“아람 나하라임”(창24:10,신23:4,삿3:8)이다.
여기서 두강은 티그리스강과 유브라테스강을 말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전형적인 충적토 평야를 이루어 페르시아 만으로 내려갈수록 넓어지며 약간 북동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며 동서의 길이가 60km,남북의 길이가 320km나 되는 광대한 시날 평지가 있습니다.
오늘날 이라크을 중심으로 시리아 북동부지역과 이란의 남서부가 포함되며 지도의 녹색부분이 초생달지역입니다
그리고 그곳의 끝 부분이 우르(Ur)지역입니다.
1.현재 Tall al-Muqayyar(또는 Tell el-Muqayyar), 고대 메소포타미아(수메르) 남부에 있었던 주요 도시이며. 우르에 있는 지구라트의 북동쪽 정면,경사면 부분이 복원된 바빌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225㎞, 지금의 유프라테스 강 하류에서 서쪽으로 약 16㎞ 떨어진 곳에 있었다.
고대에는 인접한 유프라테스 강 덕분에 비옥한 관개지 였으나 그 후 강의 물길이 바뀜에 따라 폐허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대영박물관의 H. R. 홀이 최초로 우르 유적에 대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실시했고 그 결과 대영 박물관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공동 탐사단이 구성되어 1922~34년 레너드 울리의 지도로 발굴이 진행되었다.
이 발굴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 우르 역사의 대부분이 밝혀졌으며 메소포타미아 역사에 관한 지식도 매우 풍부해졌다.
우르는 BC 4000년대경 메소포타미아 북부지역에서 이주한 것으로 보이는 정착민들이 도시를 만든것으로 보고있다.
토판에 기록된 우르지역 지도
발굴당시 사진
2.문학적인 문서들과 최근의 발굴들이 보여 주는 대로, 하란이 출생(창11:28)한 도성은 장구하고 영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우르의 유적은 바그다드와 페르시아 만의 중간쯤에 위치해 있는, 현재의 텔 엘-무카이야르(Tell el-Muqayyar)로 오래 전부터 알려져 왔다.
1922년과 1934년 사이에 영국과 미국의 합동 탐사반은 메소보다미아의 모든 발굴 중에서 가장 값진 수확으로 판명된 발굴을 이루었다.
초기 왕조의 왕릉들로부터 믿기 어려울 정도의 보고(寶庫)가 발굴되었다.
잘 보존된 집들과 신전들, 그리고 하나의 신전고탑의 유적은 풍성한 자료들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것들을 통해 우리는 역사의 여명기로 부터 바사 제국 때까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오던 이 도성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발굴 도성
BC 제2천년기 초, 아브람이 그곳에 살고 있을 때, 그 도성은 특별히 고도의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집들은 대개 2층 높이의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래층의 방들은 중앙에 있는 마당 주변으로 배치되었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도성은 심지어 오늘날 그 나라의 어떤 도성들보다 뛰어나고 더 효율적인 하수 설비를 갖추고 있었다.
복원된 여러 학교들의 수업 과정에 나타난 대로 우르의 학교들에서는 읽기와 쓰기, 수학, 지리 등을 가르쳤다.
구약에서는 이 도성을 흔히 “갈대아 우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표현은 아직까지 메소보다미아의 설형 문자 문서들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히 “우르”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알려진 대로, 우르 지역에 좀 더 일찍 왔을지도 모르는 아람 계통의 갈대아 족속들이 후에 거주하였다.
이 족속들은 데라의 가문과 가까운 관계였으며, 둘 다 아르박삿의 후손들이었다.
본래의 고향을 갈대아에 있는 우르, 곧 “갈대아 우르”라고 소급해 말함으로 이런 관계에 대한 기억이 살아 남게 되었다.
아브람 당시의 발달된 문화의 수준으로 인해, 아브람을 무식한 유목민으로 낙인을 찍으려 하는 사람들의 조소가 잠잠케 되었다.
그는 문화가 고도로 발달되고 세련된 도성에서 부유한 시민들 중의 한 사람의 아들로서 그의 젊은 시절을 보냈으며,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또한 아브람은 발굴된 자료들이 보여 주는 대로, 다신론적인 우르의 종교 생활에 익숙해 있었음이 분명하다.
여호수아는 아브람의 부친 데라가 우르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고 말한다(수 24:2).
데라의 다른 아들들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추정하게 되는데, 왜냐하면 야곱의 아내 라헬이 아브람의 형제 나홀의 손자, 곧 그녀의 아버지 라반으로부터 우상들을 훔쳤기 때문이다(31:19).
그러나 아브람은 그를 둘러싼 이교의 영향을 받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초기 왕조시대(BC 29~24세기)]
우르는 제1왕조(BC 25세기)의 수메르 왕들의 통치를 받으면서 메소포타미아 남부 전지역의 수도가
되었다.
제1왕조 이전의 BC 26세기의 광대한 공동묘지 유적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금·은·동 귀금속과
준(準)보석류가 들어 있는 왕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이것은 우르 주민이 부유했고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또 왕이 죽으면 궁정관리·노예·여성 등 시종을 함께 묻는 관습이 있었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들은 사후 세계에서도 계속 왕을 섬길 의무가 있었다.
왕의 무덤에서 발굴된 악기, 금으로 만든 무기, 조개껍질 장식과 모자이크 그림, 조상(彫像), 조각한 원통인장 등은 이전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문화를 연구하는 데 특히 중요한 유물이다.
이 문화가 발전한 형태는 우르 근교 알우바이드에서 발굴된 새롭고 독특한 형태의 작은 신전에서 보이는데 이 신전은 조상·모자이크·금속부조로 호화롭게 장식되었고 기둥은 화려한 모자이크나 번쩍이는 동판으로 덮여 있었다.
제1왕조의 왕이 세웠다고 하는 신전 주춧돌 명판에는 설립 날짜가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고대 수메르 역사가들이 언급한 이 왕조의 역사적 성격이 입증되었다(현대 역사가들은 명판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이 왕조를 허구로 생각했음).
신상(身上)에 관한 몇 가지 비문을 통해 전설적인 왕 사르곤 1세가 BC 24세기에 아카드를 다스린 실존인물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사르곤 1세 시대의 물질문화는 공동묘지를 통해 알려졌다.
[제3왕조(BC 22~21세기)]
다음 시대인 제3왕조 시대는 우르가 다시 제국의 수도가 된 시기로, 현존하는 중요한 건축
기념물들이 바로 이때 지어졌다. 가장 뛰어난 건축물은 지구라트로, 진흙벽돌을 견고하게
쌓아올린 뒤 표면은 구운 벽돌을 역청으로 붙여 만든 3층짜리 계단식 피라미드 형식이다.
# 지구라트 꼭대기에는 작은 신전이 있는데 이 신전은 우르의 수호신이자 신들의 왕인 달의 신 '난나'(Sin)의 침실이다.
지구라트의 밑변은 가로 46m, 세로 64m이며 높이는 약 12m이다.
얇은 버팀벽이 붙은 3면의 벽은 깎아지른 듯 서 있다.
동북쪽 정면에는 각각 100개의 계단으로 된 거대한 층계가 3개 있는데 하나는 건물 가운데를
따라 직각 방향으로 앞으로 튀어나와 있고 나머지 둘은 벽에 기대어 만들어졌다.
개의 층계는 1층 테라스와 2층 테라스 사이에 있는 입구에서 만난다. 이 입구에 맨 위층 테라스와 작은 신전의 문으로 통하는 계단이 놓여 있다.
왕조의 시조인 우르 남무가 세운 지구라트 밑 부분은 놀라울 만큼 잘 보존되어 있었으며 윗부분은 복원이 가능할 만큼 충분히 남아 있었다.
제3왕조의 유적은 BC 3000년경의 수메르 건축가들이 기둥·아치·볼트·돔 등 건축의 모든 기본 형태를 잘 알고 있었음을 말해주는데 지구라트야말로 그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안쪽으로 기울어진 벽과 그 각도는 면밀히 계산된 연속적인 각 층의 높이와 함께 시선을 안으로 또는 위로 끌게 만든다.
또 계단 경사가 이 효과를 더욱 강조해 거대한 구조 전체의 종교적인 초점이 되는 신전에 눈길이 머물게 된다.
놀랍게도 이 구조물에는 직선이 하나도 없다.
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모퉁이에서 모퉁이까지 모든 벽은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직선이었다면 상부구조의 무게에 눌려 휜 것처럼 보였겠지만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약간 휜 곡선 때문에 매우 튼튼하다는 느낌을 준다.
결국 지구라트 건축가는 뒤에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건축가들이 재발견했던 엔타시스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엔타시스의 원리란-구조물의 모든 벽은 약간 볼록한 곡선을 이루고 있는데 그것은 거대한 물체의 윤곽선이 너무 직선일 경우 상부 무게감에 눌려 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는 효과(엔타시스원리) 를 준다.
고대 그리스의 건축에서 기둥의 시각적 좌굴 현상을 막기 위해 배흘림 기둥을 썼는데 이것을 엔타시스 원리라고 한다.
[BC 21~6세기의 왕조]
제3왕조 왕들의 거대한 벽돌 무덤과 그들이 세운 신전은 엘람족에 의해 약탈당하고 파괴되었으나, 신전은 제3왕조에 뒤이은 이신 왕조와 라르사 왕조의 왕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우르는 이제 수도는 아니었지만 강과 운하를 통해 페르시아 만으로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해외무역의 중심지였으며 종교적·상업적으로도 여전히 중요했다.
일찍이 아카드의 사르곤 왕 시대에 우르는 간접적으로 인도와 접촉했다.
제3왕조와 라르사 시대부터 인더스 문명 양식을 보여주는 도장이 우르에서 발견되었으며 수많은 점토판을 통해서 해외무역 방식이 밝혀졌다.
우르의 '해양왕들'은 수출품을 딜문(바레인)에 있는 중계항으로 운반했으며 이곳에서 동양에서 온 구리제품과 상아를 실었다.
점토판은 많은 부분이 발굴된 우르 시 주택가에서 발견되었다.
라르사 시대와 바빌론 함무라비 시대(아브라함이 우르에 산 것으로 추정되는 BC 18세기경)의 평민의 집은 편리하게 잘 지은 2층 집이었으며 사생활이 보장되고 기후에 맞는 건축양식으로 가족·노예·손님을 위한 편의시설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몇몇 집에는 가족 신 숭배를 위한 일종의 예배소가 있었으며 가족 구성원이 죽으면 그 밑에 묻었다.
국가적인 대 신전뿐만 아니라 평민이 믿는 여러 신을 숭배하는 작은 신전도 발굴됨으로써 바빌론의 종교관습을 잘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더욱 관심을 끄는 것은 이름 없는 가족 신에게 음식물과 제사를 드리는 가정예배소이며 히브리 족장들의 종교와 관계 있는 듯하다.
우르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신(新)바빌로니아의 네부카드네자르 2세(BC 605~562) 시대에 부흥기를 맞았는데 그는 우르 시를 실질적으로 재건했다.
바빌론의 마지막 왕 나보니두스(BC 556~539) 역시 이에 못지 않은 업적을 이루어 지구라트의 높이를 7층으로 늘리는 등 지구라트 개조에 힘썼다.
[마지막 시기(BC 6~4세기)]
우르를 건설한 마지막 왕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대제였다.
키루스 대제가 벽돌에 새긴 비문은 율법학자 에즈라가 인용한 예루살렘 신전 복구에 관한 '칙령'과 비슷하다.
키루스 대제는 새 정복지의 주민을 회유하기 위해 종류에 상관없이 그들의 신을 섬기게 했다. 그러나 이제 우르는 완전히 쇠퇴했고 아르타크 세르크세스 2세 시대까지 간신히 유지되었으나 그 내력을 전하는 문서판은 BC 317년 필리포스 아르히다이오스 시대의 것 1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무렵에 유프라테스 강의 물길이 바뀌고 관개시설이 파괴됨으로써 대지는 사막으로 변하고
마침내 우르에도 사람이 살지 않게 된 것 같다.
우르 유적을 통해 얻은 완벽한 기록은 여러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로써 더욱 확고해졌다.
이제 우르의 역사, 주민의 생활관습, 직업, 예술에 관한 지식은 거의 완벽하며 매우 상세하다.
주택단지들을 파 들어가 보다가 고고학자들은 깜짝 놀라게 되었다.
지금 세계사 책에 보면 인류 문명의 최초의 문명으로 갈대아 우르 지역의 수메르 문명이라는 것이 나옵니다.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개의 방이 있는 건 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수메르 문명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현대 많은 국가들조차도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은 얼마전의 일임을 우리가 알고 있지요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래는 2005. 2. 26. 조선일보 기사 '대영박물관이 온다'에서 인용한 것 입니다.
“이라크 남부의 고대유적도시 우르. 1920년대 발굴에서기 전 2600~2400년으로 추정되는 여왕 푸아비의 무덤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10명의 여인이 순장(殉葬)됐는데, 한 여인의 주변에서 금빛이 번쩍였습니다. 황소의 황금 가면이었습니다. 황금 황소는 목제 11현 수금(竪琴·하프의 일종)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습니다.
발굴단장 L. 울리는 “순장된 한 여인의 손은 현이 있던 위치에 놓여 있었다”고 회고했습니다. 20세기 발굴 유물 중 최고품의 하나로 꼽히는 4500여년전 수메르문명의 수금은 이렇게 발굴됐습니다.“
우르 지역에 살던 수메르 인들이 섬기던 신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신이 '이난나' 여신인데, 사진은 "이난나 여신"의 상입니다.
머리에 있는 이것은 뿔이 아니라 '달'(초생달)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여신이 흥분도 하고 땀도 흘리고 하면, 비도 많이 오고 농사도 잘 된다고 생각하여, 봄철에 이난나를 숭배하는 기간동안 모든 여성들은 공공연한 음란의 장소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 이난나 여신이 가나안 지역에서는 아스다롯 여신으로 불렸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들어가면서 이쉬타르 여신이 되었으며, 그리이스로 가서는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되었으며, 결국 로마로 가서 비너스가 되었습니다.
비너스 신전의 모든 성직자들은 여자들인데 성은 완전 개방 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있습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쐐기문자입니다.
쐐기라는 것은 곤충 중의 풀쐐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를 고정시킬 때 박는 쐐기(Wedge)를 말합니다.
쐐기문자
한자로는 설형문자라고 부릅니다.
수메르인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놀라운 사실중의 하나는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라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여 밝힌 '길가메시 에픽'에 관한 기록입니다
수메르의 길가메시라는 족장이 기록한 서사시인데, 그 내용이 성경의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내용이 거의 같습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의 기록에 노아의 홍수 사건 기록이 나온다는 것인데, 이는 인류 최초의 문명 이전에 분명 노아의 홍수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메르 문명이 홍수 이후에 생겨난 문명임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수메르라는 말의 어원은 '세메르'에서 왔는데, '셈의 나라'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아들중에서 장자권을 가진 자 '셈의 나라'라는 것이지요.
(하란지역)
하란 지역은 지금의 시리아 땅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하란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견결과 과거에 매우 발달된 문명이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수메르보다 몇 백년 앞선 문명이라는 것이 이곳에서 나온 기록에 의해 증명되었습니다.
그 문명을 세웠던 나라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에블라' 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지역을 '에블라 문명'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발굴된 점토판에 새겨진 기록을 분석한 결과 에블라 문명을 세운 왕의 이름이 '에벨'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믿던 신의 이름도 발견되었는데, 그 이름은 '야'였습니다.
아마도 '야훼'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고고학적으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리아 북쪽 Tell Mar- dikh라고 불리는 이 지역에서 1964년부터 발굴이 시작되었는데, 거기서 1968년 Ibbit-Lim 왕조의 상이 발견되었다.
Ebla는 B.C. 2300년경에 세력을 펼치던 나라로서 약 260,000명의 인구를 갖고 있었으며, B.C. 2250년에 Nara-Sim에 의하여 멸망되었다.
1974년 이래로 17,000개의 Ebla와 관련된 서판들이 발견되었다. Ebla 서판이 성경학적으로 가진 의미는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모세 시대에는 쓸 수 있는 문자가 제정되기 전이라고 성경 비판론자들이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세가 살았었던 그 지역에 존재하였던 Ebla 나라의 서판은 모세가 나기 1,000여 년 전의 법과 풍습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이 단순한 가설이었음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특별히 이 서판에 기록된 법률들은 신명기에 기록된 규율들과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법률적인 구조를 가진 구약의 신명기가 다른 책들보다도 더 늦게 기록되었었다는 주장이 틀렸음이 밝혀졌다.
또한 Ebla판이 밝힌 중요한 또 하나의 사실은 창세기 14장을 증거한 것이다.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창 14:1,2).
창세기 14장은 최근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주장되어졌었다. 아브라함이 그돌라오멜과 다섯 도시의 왕들과 싸워서 이긴 이야기를 하나의 이야기처럼 여겼었다.
그런데 Ebla 서판은 위에 기술된 다섯 나라의 이름을 창세기에 기록된 그 순서대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 나라들이 있었던 지역의 풍습과 연대들도 기록하고 있어서 창세기 14장의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 것이었는지를 증명하였다.
발굴된 모습들
창세기 10장 21절에 보시면 하란에 있었던 에블라의 대문명을 암시하는 족보가 있습니다.
여기서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인'의 어원은 어디서 왔을까요?
이 '에벨'이라는 이름에서 온 것이 '히브리'입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결국 노아의 아들 셈, 셈의 아들 아르박삿, 그 아들 셀라의 아들인 '에벨'에서 기원한 것입니다.
이 에벨이 큰 문명국가를 이루었고, 에블라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정통 셈족의 국가인데, 어떤 원인에 의해 수메르인에게 멸망당합니다.
강 아래쪽의 더 강성한 국가 수메르의 사르곤 왕이 에블라를 멸망시킨 뒤 아브라함의 조상들도 끌고 갔는데, 이들이 그곳에서 우상을 만들면서 사는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므로 새로운 땅 가나안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자기 조상 에벨이 세웠던 찬란했던 나라 '에블라'의 고토 하란 땅에 머물러 있던 중에 거기에서 죽었어요, 아버지 데라를 장사한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시 가나안을 향하여 출발을 하였어요.
이와 같이 아브라함에게 임한 시험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 요구된 희생도 작은 것이 아니었죠.
그를 조국과 친족과 고향에 붙들어 매는 강한 줄이 있었어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르심에 순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어요.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관하여 묻지 않았어요.
곧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가 건강에 적합한지, 그리고 그 지방은 유쾌한 환경을 제공하며 재물을 쌓을 기회를 줄 것인지 묻지 않았어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으므로 순종해야 하였어요.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곳은 하나님께서 있기를 원하시는 곳이었죠.
여전히 아브라함이 시험을 당하였던 것처럼 오늘 우리들도 시험을 당한다.
하늘로부터 직접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는 않으나, 말씀의 교훈과 섭리의 사건들을 통해 부르신다.
마음에 품은 계획과 친밀한 교제를 단념하고 섭리의 부르심에 응할 준비가 된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일을 행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손해를 이익으로 간주할 사람은 누구인가?
이와 같이 하고자 하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진 사람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창 11:31)에 살 때에 처음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이 그에게 임하였고, 그것에 순종하여 하란으로 옮겨갔다.
아브라함의 아버지(데라)의 가족(나홀)은 하란까지 그와 동행하였는데, 이는 그들이 우상을 숭배하는 동시에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도 연합하였기 때문이었다.
하란에서 아브라함은 데라가 죽기까지 머물렀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그에게 가나안으로 가라고 명령하였다.
그의 형제 나홀과 그의 가족은 그들의 고향(하란)에 머물기를 원하였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 외에, 오래 전에 죽은 하란의 아들 롯만이 아브라함과 함께 동행하였어요
아브라함은 이미 동방에서는 부로 간주되는 허다한 양떼와 가축떼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그의 주위에는 수많은 종들과 가신(家臣)들이 있었다.
그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고 조상들의 땅을 떠나고 있었으니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창 12:5)을 함께 이끌고 갔어요.
오늘도 우리에게 가라하시는 하나님 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 가십시다.
자! 오늘은 여기 까지 하고 다음 시간에 만나요^^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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