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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유명인물 스크랩 윤관(尹瓘)장군의 묘
박유승(박노동) 추천 0 조회 252 10.03.25 09: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윤관(尹瓘) 장군

 

 

 

 

 

 

 

 

 

 

 본관은 파평(파평), 자는 동현(동현), 시호는 문숙(문숙)이다.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여러 벼슬을 거쳐 1095년(숙종 원년) 좌시낭중(좌시낭중)으로 요(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104년에는 동북면행영병마도통사)가 되어 여진을 정벌하다가 실패하였다.

 

그 뒤 별무반(별무반)을 창설하여 군대를 양성, 1107년(예종 2) 여진 정벌군의 원수가 되어 부원수 오연총(오연총)과 17만 대군을 이끌고 동북계에 출진, 이때 함주(함주), 영주(영주), 웅주(웅주) 등 9성(9성)을 쌓아 침범하는 여진을 평정하고 이듬해 봄에 개선, 그 공으로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 문하시중(문하시중)이 되었다.

 

 

 

 

 

 

 

 

 

 

 

 

                                    

                                   윤관(尹瓘)과 동북9성(東北9城)

 

 

 

여진족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윤관은 점령지에 성(城)과 진(鎭)을 쌓고 남방으로부터 75,000호에 달하는 많은부민을 이주시켜 본격적인 영토 개척에 나섰다. 여진 땅이 아무리 고려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하더라도 그 땅에 이민족(異民族)이 살고 있는 한 완전한 국토의 개척은ㅇ ㅏ니었기 때문이었다.

 

 

윤관의 출정은 단순히 여진족에 대한 응징이 아니라 고구려의 옛땅이었던 이 지역을 명실상부한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키려는 북진정책의 일환이었다.

 

 

 

 

                                      고려사 윤관전 (高麗史 尹瓘傳)

 

 

 

그 지방이 300里인데, 東으로는 대해(大海)에 이르고, 西로는 개마산(蓋馬山)에 닿았으며, 南으로는 장주,정주(定州)에 접하였다. 산천이 수려하고 토지가 기름져 능히 우리 백성을 살게 할 만한데 본래 고구려의 소유라 옛 비석들과 자취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무릇 고구려가 전에 잃었던 것을 지금 다시 얻었으니 어찌 天命이 아니겠는가.....

 

 

 

윤관은 이 지역에 함주(咸州),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선주(宣州), 공험진(公험鎭),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의 9城을 비롯해 많은 성과 진을 쌓고, 행정조직을 갖추었으며 선춘령(先春嶺)에 비(碑)를 세워 경계를 정하였다.  9성의 위치에 대하여는 종래부터 여러가지 의견이 구구하였는데, 특히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의도적으로 9성의 위치를 함흥평야의 일부 지역에 국한시키려고 노력하였다.

 

 

 

 

 

 

                                                세종실록 지리지

 

 

두만강을 넘어 10리쯤 가면 평원지대가 나온다. 그 벌판 위에 큰 성이 있는데, 이 것이 현성(懸城)이다. 여기서 북쪽으로 90리쯤 산 위에 옛 돌성이 있는데 어라손참(於羅孫站)이라고 한다. 그 북쪽 30리에 허을손참(虛乙孫站)이 있고, 북쪽 60리에 유선참(留善站)이 있다.

 

또 그 동북쪽 70리에 토성터가 있으니 이것을 거양성(巨陽城)이라고 한다... 이 거양성(巨陽城)은 윤관이 쌓은 것인데, 그 서쪽 60리 선춘현(先春峴)이라는 곳에 윤관이 세운 碑가 있다. 그 비문은 깎여 글자는 보이지 않으나 그 ?을 파보았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글자가 나왔다...소하강(蘇下江)변에 공험진이 있는데 여기가 윤관이 鎭을 둔 곳이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볼 때 윤관이 개척한 9성의 범위는 조선 초기 역사서나 지도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까지 이르는 드넓은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생활의 터전을 잃은 여진족은 결사적으로 항거하였으며, 윤관은 남은 무리들을 소탕하면서 침입을 격퇴하였으나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지세가 험준하여 점령지역의 안정적인 확보에 어려운을 겪고 있었다.

 

 

이 때 무력으로 고려에 도전하는 것이 무모한 일임을 깨달은 여진족은 태도를 바꾸어 과거의 잘못을 백배 사죄하고, 9성의 반환을 애걸해 왔다. 때마침 윤관의 功을 시기하고 있던 문약한 문신들이 이 때를 놓칠세라 9성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하였고 예종도 마침내 이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윤관장군의 불굴의 투지와 각고의 노력 그리고 백성들의 피땀으로 개척한 9성을 싸움 한번 하지 않고 단지 대대로 조공(朝貢)하고 변경을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만으로 여진에게 내 준 사실은 우리 민족사의 커다란손실이었다. 이로써 고구려인의 기상이 넘치던 만주대륙이 우리 민족사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리게 되었다. 민족 사학자 신채호도 " 만일 예종이 처음에 품은 뜻을 굳게 지켜 한때의 힘든 사정을 극복하고 9성의 일을 모두 윤관에게 맡겼더라면 고려의 국세가 크게 흥성했을 것 "이라고 평가하였다.

 

 

 

 

 

 

 

 

 

 

 

 

 

 

 

 

 

 

 

 

 

 

 

 

                                         

                                             여진족  女眞族 ?

 

 

 

여직(女直)이라고도 한다. 이 민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肅愼), 한(漢)나라 시절에는 읍루(揖婁), 남북조시대에는 물길(勿吉), 수(隋),당(唐)나라 시절에는 말갈(靺鞨)로 불리웠다. 그리고 宋,明 시절에는 여진족이라 하였다가, 淸나라 시절에는 만주족이라 했다.

 

 

여진족이 우리나라와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故土)에 자리잡게 된 고려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압록강 유역의 서여진(西女眞, 西蕃)과 함경도 지방 일대의 동여진(東女眞. 東蕃)인데, 이는 고려의 왕건이 북방개척을 시행하였기 때문이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족은고려를 上國으로 섬기었고, 고려는 이들을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족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물자를 조공(朝貢)하였고, 의류, 식량,농기구,그릇 등 생활필수품으로 주로 수입하였다. 

 

 

 

 

 

 

 

 

                                                                  별무반   別武班

 

 

 

이와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는데, 숙종시절 하얼빈지방에서 일어난 완안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北間島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 영가(盈歌)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슈(烏雅束)는 더욱 南下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그러나 우야슈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여진족 무리가 있어 우야슈는 이들을 추격, 함경도 정평(定平)의 장성(長城)부근까지 진출하여 고려군과 충돌하게 되었다. 고려에서는 임간(林幹)을 보내어 정벌케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다시 윤관(尹瓘)장군을 보내어 패배하고 겨우 화맹(和盟)을 맺었다.

 

 

 

이와같은 두차례의 敗戰으로 정평,장성 외의 여진부락은 모두 여진족의 치하에 들어갔다. 윤관장군은 숙종에게 패전의 원인을 보고하고 별무반(別武班)의 조직을 건의한다. 이리하여 새롭게 편성된 군사조직인 별무반(別武班)은 騎兵인 신기군(神騎軍)과 步兵인 신보군(神步軍), 僧兵으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 그리고 도탕(跳蕩), 경궁(梗弓), 정노(精弩), 발화군(發火軍) 등의 특수부대로 구성되었다.

 

 

 

 

 

 

 

 

 

                                                                        별무반의 구성

 

 

 

 

신기군(神騎軍)은 문무산관(文武散官)과 서리(胥吏)에서부터 상인(商人), 노비(奴婢), 양인(良人), 농민, 백정(白丁)에 이르기까지 말(馬)을 가진 자들로 구성되었으며, 말(馬)을 갖지 못한 자와 20세 이상의 남자로서 과거 응시자가 아닌 사람들은 모두 特殊兵과 神步軍으로 편제하였다. 승려들은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제되었고...

 

 

그러므로 당시 장정(壯丁)으로서 별무반의 징발대상에서 빠지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오직 정직(正職)의 문,무반(文,武官)과 과거 응시자 그리고 승려가운데 일부만이 제외되었던 것이다. 즉, 별무반은 위로는 귀족에서부터 아래로는 농민과 노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계층에서 동원된 거국적인군사조직이었던 것이다.

 

 

후일 여진족과 강화(講和)가 이루어지면서 별무반도 해체되지만, 별무반의 조직은 병농일치(兵農一致)에 입각한 군사조직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하나의 단계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사회적 의의가 있다. 또한 이러한 군사조직에 참여하게 되는 良人,농민들의 사회적 지위와 그들의 사회의식에도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별무반의 활약

 

 

이렇게 조직된 별무반이 여진정벌에 나선 것은 1107년(예종 2) 12월이었다. 별무반으 ㅣ설치와 여진정벌의 이면에는 당시 비대해진 문벌귀족(門閥貴族)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예종과 윤관의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어쨋건 윤관(尹瓘)을 원수(元首)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副元首)로 하는 17萬의 별무반은 정주관(定州關 .. 定平)을 떠나 기습작전으로 여진족을 소탕하고 갈라전(曷懶甸)일대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 곳에 9성(9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1108년 4월에 윤관장군 부대는 일단 개성으로 개선하였다.

 

 

 

 

 

 

  

                                                                    고려지경   高麗之境

 

 

 

 

 

 

 

1107년 고려 예종시절, 윤관(尹瓘)장군이 17만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물리친 뒤 국경을 넓혀, 그 곳에 육성(六城)을 쌓고 마침내 선춘령(先春嶺)에  " 고려지경 高麗之境 " 네 글자가 새겨진 碑를 세움으로써 경계를 삼은 사실을 그린 그림이다.

 

 

 

 

 

 

 

 

 

 

 

 

  

 

                                               별무반의 해체

 

 

윤관이 구성(九城)을 축조한고 개성으로 개선한 후, 여진족은 완안부(完顔部)를 중심으로 곧바로 조직적인 무력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戰勢가 다시 고려에 불리하게 되자, 윤관과 오연충 등은 다시 출전하였으나 여전히 고전을 면하지 못하였다. 

 

 

이러던 차에 여진족은 9城의 반환을 조건으로 和親을 요구하여 왔다. 그려로서도 장기간의 전쟁준비로 막대한 물자와 인명피해의 부담을 견디기 어렸웠던 데다가, 개성과 9城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지형조건상 지키기도 어려운형편이었다. 

 

 

고려 조정에서도 和親으로 의견이 모아지게 되었다. 마침내 1109년 7월에 9城을 돌려 주기로 결정하고, 주둔하였던 군사와 백성을 철수시켰다. 이렇게 女眞과 강화가 성립됨에 따라 별무반도 해체되었다. 

 

 

 

 

 

 

 

 

                                        

 

                                            

                                                                   윤관의 친필 편지

 

  

奉關外久竊이라 天恩이 罔極하여 其中에 行過使命之與라.. 瓘有素者하여 或爲之陞堂하여 說酌以榮之하니 亦一天恩也이어늘 今適令鑒이 與潤卿으로同來라 하니 分義不比他人이라..明日에 待潤卿到는 明明准擬나 設小酌하여 以慰臨年之老라 하니 明明毋負로다. 厚望也切切.  敬白 瓘

 

 

 

 

관북에서 명을 받은 후 오랫동안 적조하였소. 천은이 망극하여 그중에서도 사명을 다하였소. 나에게 성심있는 자가 있어 관직에 있을 때처럼 주연을 베풀어 영화롭게 하니 이 또한 천은이거늘 이제 마침 영감이 윤경과 더불어 오신다니 분에 넘치는구려.

 

명일에 윤경과 같이 오심은 분명히 나의 벗이 되어 주려는 것이며, 주연을 베풀어 나이 많은 늙은이를 위로한다고 하니 틀림없이 나를 아주 저버리지 아니함이로세. 거듭 바라는바 간절하구려.

경백 관......

 

 

 

 

 

                                         척준경(척준경) 장군

 

 

 

 

 

 

  

 

 

 

 

 

 

 

 

 

              교자총(轎子塚). 전마총(戰馬塚) .. 윤관이 타던 가마와 말이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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