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해금강이 아스라이 보이는 북녘을 보면서
늙수그레한 사내가 말했지
저기 송도진이 내 고향이야
해안선과 이어지는 작은 섬 봉우리
은빛 파도에 쓸리며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저기 역이 있었지, 오일장터도 대진 못지않았어야
비무장지대 고향을 내려다보는 사내는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갈 수 없는 나라에 왔다
여기서는 아주 먼 곳, 두 개 연봉連峰 너머로
내륙의 내금강이 손톱만큼 눈에 들어 온다
발아래 중동부 DMZ의 가을은 유난히 곱다
수많은 인골과 지뢰가 묻혀 있을 저 비무장지대
애띤 관측 소위의 얼굴처럼 말갛고 고요하다
남쪽의 펀치볼과 북녘의 내금강을 번갈아 보며
스무 몇 해 전 북고성 출신의 그 늙수그레한 사내가
문득 떠오른다
머지않아 눈앞에 보이는
저 송도진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던 그 사내
이제 팔순이 되었을 그 사내
오늘도 대진항구에서 북쪽 고향바다를 보고 있을 것이다
- 2012년 10월 중순 양구 을지통일전망대에서, 서성옥
을지전망대에서 바라본 펀치볼 마을
펀치볼마을은 양구군 해안면의 만대리, 현1,2,3리, 오유1,2리의 여섯개 리로 구성되어 있다.
펀치볼마을이라는 이름은 먼 옛날 해안(海安)의 해자는 바다 해(海)자를 썼는데 그 당시 해안분지에는 뱀이 많아 주민들이 밖에 나가지 못 할 정도로 뱀이 많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조선시대 초 해안 주민이 시제를 지내면서 유명하신 스님 한분을 모시니 스님은 "뱀은 돼지와 상극이니 바다해 자를 돼지해자로 바꾸어 쓰면 되겠다."라고 일러주었다. 그 다음부터 주민들은 돼지 해(亥)자로 고치고 집집마다 돼지를 많이 길렀다고 한다. 그 후 신기하게도 뱀이 없어져서 주민들은 집밖 출입을 자유롭게 하게 되었다고 한다.
기록으로는 고려시대 이전에는 이 분지를 "번화"라고 불렀으며 그 후 "해안(亥安)"으로 불렀다가 해안으로 바뀌었다가 1885년 (고종32년)엔 해안면이 설치되기도 했다.
1956년 휴전 후 난민정착사업의 일환인 재건촌 조성으로 100세대씩 입주시키며 농민들의 개척에 의해 마을의 틀이 만들어졌다. 원래 동면 관할 아래 있었던 해안 출장소가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동면 북부를 분리 승격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또한 6.25격전중 해안을 바라본 종군기자가 이곳을 형태를 본따 펀치볼이라 부른데서 세계적으로는 펀치볼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다
출처 : http://punchbowl.invil.org/






첫댓글 배경도 詩도 단풍빛이군요. 멋져요^^
좋은 곳 다녀 왔네요.시도,사진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강동수 시인의 스튜디오에 가면 나무 한 그루 있습니다.
스마트폰에다 여러장 담아 왔지만 올릴만하지 못하여서 복사를 허락한 곳에서 사진 몇장 빌려 왔습니다. 김선배님 그날 동생 강수씨도 함께 다녀왔습니다.
고성 통일전망대는 여러번 다녀 왔지만 20년 전 처음 갔을 때 그곳 현내면 부면장님이 안내해 주셨는데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있던 50대 후반 분이셨는데 발 아래 저 섬같은 곳이 송도진이고 일제 때는 장이 크게 서는 큰 마을이였다고 하더군요. 자신이 그 역전 거리에서 뛰 놀던 어렸을 때 말씀을 하면서요... 이제 팔순이 되었을 그 분도 60년 동안 고향마을을 코 앞에 두고도 못가보며 그리워만하고 있겠지요(금강산 개방 때 마을 옆을 지나가셨겠군요)
말로만 듣던 펀치볼이였습니다. 전쟁 막바지에 엄청난 전투가 있있던 곳인데 근방 도솔산 전투, 백암산 전투와 함께 3대 전투였는데 무려 3만의 희생이 있었답니다. 홰채그릇 처럼 생긴 분지인데 그래서 미군 종군기자가 펀치볼이라 명명하였다고 합니다. 저 분지 내에 양구군 해안면 사람들이 모두 생명줄을 걸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