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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 화승총의 세계사(8)
작성자 : 손상익
사르후의 조선 화승총부대
국산 화승총
빈핍한 농업 국가인데다 왜국과 전쟁까지 치러야하는 조선은 화승총 만드는 일이 버거웠다. 일본은 진즉에 화승총 국산화에 성공했고 명나라도 그에 못잖은 화포를 찍어냈지만 조선만은 철(鐵) 생산량이 적고 단조(鍛造) 기술이 빈약하여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제 성능을 발휘하는 정교한 화승총제작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명나라의 화승총 제작은 일본에 화승총이 전래됐던 시기와 맞물리는 16세기 중반이다. 당시 아시아에 진출했던 유럽 밀무역 상인이 저장성 양쯔강 하구 삼각주의 닝보(宁波)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화승총을 팔아먹었던 탓에 중국 민간에 유럽 화승총이 전래된 시기는 일본보다 오히려 빨랐다. 일본의 타네가시마 섬에 화승총을 팔아먹은 포르투갈 상인도 중국 닝보항을 향하던 중 태풍을 만나 그곳에 표착했던 것이다.
중국의 명나라 군대가 화승총으로 무장하게된 직접적인 계기는 1548년 경이었다. 화승총을 든 왜구가 닝보 인근의 솽위(雙嶼)항을 점령하고 분탕질 쳐대자 명나라 군사가 왜구를 몰아내며 화승총을 노획하면서 였다. 명나라 군부는 왜구 포로를 시켜 화승총을 복제시켰고 그 기술을 전수받았다.
명나라는 공부(工部)와 내부(內府)아래 무기를 생산하는 군기국(軍器局)과 병장국(兵仗局)을 두었는데 병장국에서 주로 화승총 생산에 나섰고 화약국(火藥局)이 염초생산을 맡았다. 왜구로부터 복제한 화승총은 10년만인 1558년에 이르러서는 연간 1만정이나 생산해냈다.
이렇게 만들어진 화승총은 척계광(戚繼光) 장군이 이끈 저장성 남병(南兵)이 주로 무장하여 복건성과 저장성일대 왜구를 소탕하는데 쓰였다. 척계광의 절강병법이 담긴 ‘기효신서’가 그때 집필됐고 이 병서는 임진왜란 이후 화승총부대 중심으로 군사편제를 짜는 조선 군부의 지침서 노릇을 했다.
▲ 청나라의 대형 화승총 징겔(gingall)의 발포. 징겔은 조선 화승총에 비해 구경이나
총신이 월등히 크고 길어서 실탄을 수백미터까지 날렸다. 그러나 폭발반동이 커서
사격수 혼자 감당하기 어려웠다. 부사수가 총목을 잡거나 굄대를 받쳐야 했다.
눈을 감고 괴로워하는 부사수의 모습이 재미있다.
임진왜란을 맞닥뜨렸을 때 조선의 총포제작은 군기시(軍器寺)가 맡았다. 고려 말 최무선장군이 설치했던 화통도감 기능을 20여년 만에 승계한 조직이었다. 왜병의 뎃포 소리가 금수강산을 진동할 때 군기시가 보유한 무기와 화약은 천자총통 등 대형 화포와 손으로 불을 붙여 발사하는 지화식(指火式) 승자총통류 개인화기, 흑색화약 27,000근(16.2톤)이 고작이었다.
선조 임금은 1598년 정유재란이 끝나던 해 조총청(鳥銃廳)을 신설해 국산 화승총의 대량생산을 꾀했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은 세자시절에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참으로 끔찍한 경험을 했다. 아버지 선조 임금은 삼도(三都 : 한양·개성·평양)가 왜군 수중에 떨어지자 중국 요동(遼東)으로 망명할 준비의 일환으로 압록 강변 의주로 피난 가서 그곳에 원조정인 행재소(行在所)를 설치하고 세자에게는 소조정인 분조(分朝)를 맡겨 조선 내에 머물게 했다.
광해군은 영의정을 비롯한 일부 조정 중신과 군사를 끌고 왜군의 침공을 피해 종묘사직을 보존하느라 혼신의 힘을 쏟았다. 평안도와 항해도, 강원도 심지어는 호남지역까지 피해 다니며 의병활동을 독려하고 유공 병사를 포상하고 군 조직을 강화했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다니느라 왜군의 화승총 위력에 치를 떨었고 왠만한 군사전문가이상의 국방지식을 쌓았다.
동아시아 정세와 조선 국방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게 된 광해군은 선조 임금이 승하하고 왕위를 물려받자 곧바로 화승총생산에 나섰다. 1614년 7월14일에는 선조 임금이 설치했던 조총청을 화기도감(火器都監)으로 확대 개편하고 1619년부터 전국 17개소의 철점(鐵店; 철광산 및 제련소)에서 총기생산에 쓸 연철(練鐵)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납철급체제(納鐵給帖制)도 실시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광해군 14년(1622년)에는 10월 한 달에만 조총 9백 여정과 화포 90문, 기타 병장기까지 만들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쿠데타(반정)로 광해군 뒤를 이은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도 국방력 강화를 위한 화승총 생산에서만은 선대의 뜻을 따랐다. 인조 5년, 1627년에는 화기도감의 연간 화승총 생산량이 2천정에 달해 그때까지의 연평균 생산량에 비하면 두 배나 됐다. 그 화승총으로 도감군(都監軍)을 무장시켰고 그래도 남는 총은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의 북방 진관 군영에 지급했다.
신무기 개발에는 외국인도 거들었다. 임진왜란 발발 다음날로 조선으로 귀화한 왜국 뎃포부대장 김충선(일본명 사야카)과 1628년과 1655년 두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 표류한 벨테브레(한국명 박연)와 하멜이 화기도감의 신무기 개발부서에 배치됐다. 하멜의 경우 도감군 소속으로 보포(保布; 무명이나 베로 거둔 군포)를 급료로 받으며 화승총 제작에 참여했다.
북벌을 준비하던 제 17대 임금 효종(孝宗, 재위 1649-1659) 때인 1655년에는 국경지역에만 화승총 6,499자루가 지급됐고 포수군 5,049명이 배치됐다. 비교적 평화로웠던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임금시절인 1681년 왕조실록에 따르면, 한양의 중앙 5군영이 보유한 화승총만 6천정에 달했다. 당시 화승총 1정 생산비용은 백미 3.3섬 혹은 무명포 8.3필 값에 해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국산 화승총의 성능 문제는 여전히 난제(難題)였다. 담금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정철(正鐵)로 만든 무른 총신은 걸핏하면 약실이 터졌고, 정교하지 못한 총신가공은 왜국이나 청국 화승총에 비해 폭발압력이 뒤져 만족할 만한 사거리를 확보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북벌을 준비했던 효종마저도 성능 좋은 왜국 화승총 수천 정을 수입하여 비축할 정도였다.
강홍립의 화승총부대
조선의 처지에서 만들기 거북했던 화승총이었지만, 어렵사리 화승총을 거머쥔 조선군 화승총수의 사격솜씨와 기개는 17세기 중반이후 중국을 넘어 러시아에 까지 그 명성을 떨쳤다. 하드웨어의 부진을 뛰어넘은 소프트웨어의 승리였다. 그러나 17세기 초반만 해도 조선 화승총부대의 전력은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일본은 온 나라의 기를 전쟁에 소진한 탓에 바쿠후(幕府)가 서둘러 평화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백 수 십년간 피비린내 풍겼던 내전(전국시대)과 7년간의 끔찍했던 조선 침략전쟁이 종지부를 찍으면서, 바쿠후는 총질로 사람 죽이는 일은 그만하기로 결심했다. 일본 열도 방방곡곡에 널브러져있던 수십 만정의 화승총을 모조리 수거해 폐기하면서 에도(江戶) 평화시대가 도래했다. 화승총이 강제 퇴장당한 일본에는 또다시 닛폰도 칼춤 추는 사무라이가 활개 쳤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군부는 일본과 반대로 화승총부대 전력강화에 전념했다. 그것 없이는 나라꼴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조정과 군부의 판단 때문이었다. 훈련도감을 중심으로 화승총부대를 훈련시켰던 조선은 정유재란이 끝난 지 딱 20년 만에 또 다시 예상치 못한 전화(戰禍)에 휩쓸리고 말았다. 여진족이 일으킨 후금이 명나라를 치고 나서자 명나라 조정이 급히 조선 원군을 요청한 것이다.
광해군 11년, 1619년 2월초에 5도도원수(五道都元帥) 강홍립(姜弘立)과 부원수 김경서(金景瑞)는 13,000명 명나라 지원 조선군을 끌고 압록강을 넘었다. 여기에는 5,000명의 조선 화승총부대가 포함됐다. 한양 오군영 가운데 삼영(三營)인 훈련도감과 어영청(御營廳)에서 각각 1,500명 그리고 금위영(禁衛營)에서 2,000명의 화승총수를 차출했다.
훈련도감은 삼수병 양성이 목적이어서 화승총수 자원이 충분했고 금위영은 수도 한양을 방비하는 막중한 임무를 띤 부대여서 화승총수 선발은 어렵지 않게 이뤄졌다. 또 어영청은 광해군이 북벌을 대비해 화승총수를 따로 배치했던 군영이었다.
강홍립부대는 눈보라를 뚫고 중국대륙을 강행군하여 명나라 유정(劉挺) 도독 휘하로 편성됐다. 명나라의 90,000 병력과 조선군 13,000명으로 구성된 10만의 조명(朝明) 연합군은 후금의 누르하치(努爾哈赤)와 그의 여덟 번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이끄는 2만1천명 팔기(八旗) 기병대에 맞서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했다. 나중에 누르하치와 홍타이지는 대청(大凊)제국의 태조와 태종 황제로 등극했다.
만주 여진족은 1616년 누르하치(努爾哈赤)가 후금을 건국하면서 교역과 국경문제 등으로 사사건건 명나라 부닥쳐 관계가 악화됐다. 중원과 만주국간 땅따먹기 경쟁이 시작되면서 자잘한 전투가 이어지다가 1618년, 누루하치가 마침내 중원내륙을 치기위해 요동의 무순(撫順)을 공격하고 함락시키자 명나라 조정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후금정벌에 나섰다.
1619년 초에 명나라 대군은 4개 군단으로 나누어 누르하치 본거지인 허투알라(赫圖阿砬)를 포위하고 조여들었다. 이때 강홍립의 조선 원군도 합세하여 허투알라와 무순의 중간 지점인 사르후(薩爾滸, 현재의 遼寧省 彰武縣의 得力村)지역 일대에서 후금 군과 대접전 채비를 차렸다.
▲ 조선은 후금과 일전을 앞둔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1619년 강홍립을 위시한 군사 1만3천명을 만주로
출병시켰다. 이 그림은 정조 때 간행된 충렬록에 실린 것으로, 조선군과 후금군이 맞서 있는 장면이다.
조선군의 앞줄에는 총을 든 조총수, 그 뒷줄에는 활을 지닌 궁수가 도열해 있다. 그림 왼쪽 장창을 든
후금 기마병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결과는 비참했다. 명나라 군사가 야음을 틈타 들이닥친 후금 기마병에게 후차고개(富車嶺)에서 대패하자 장수들이 잇달아 자살했고 강홍립 부대는 삼하(三河)의 고지에 진을 쳤지만 이틀간 후금 군의 포위가 계속되자 굶주림과 추위에 지쳐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에 강홍립은 3월4일, 휘하장수 김흥서(金應瑞)를 후금 진영에 보내 항복의사를 밝히고 말았다. 강홍립부대는 출병하기 전 광해군으로부터 “전세가 불리하면 항복해서 휘하 부대원의 목숨부터 건사하라”는 밀명(密命)을 받았던 터였다.
사르후 전투는 화승총으로 무장한 조선군 부대가 외국에서 치른 첫 전투다. 일부 소전투에서는 조선군 화승총수의 뛰어난 사격솜씨가 발휘되었다. 어영청 화승총수를 이끈 김응하(金應河)장군은 수천군사를 이끌어 포진했다가 기세등등하게 밀려드는 후금 철기 병을 향해 화승총 세례를 퍼부어 초반에는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갑자기 불어 닥친 서북풍으로 화포가 무용지물이 되면서 어영청 진용이 괴멸되기에 이르렀다. 김응하 장군은 화승총 사격을 포기하고 활로 대적하다가 기마병의 창에 몸통 곳곳이 찔려 사망하고 말았다.
조명연합군의 사르후 전투 대패는 결국 명나라의 소멸과 청나라가 중원대륙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분수령이 되고 말았다. 조선 군부의 명나라 파병은 여진족이 두고두고 “괘씸죄”를 묻는 원인이 됐다. 후금시절 사르후 전투에도 참여했던 홍타이지는 명나라에만 사대(事大)하는 조선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하여 쑥대밭으로 휘저은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을 일으켰다.
정묘호란때는 조선을 형제나라로 만들었고 그래도 분이 안풀린 홍타이지는 10년 뒤 청나라를 건국하던 해에 병자호란을 일으켜 한양일대를 피빛으로 물들이고 조선 전쟁사상 최고의 치욕스런 패배를 안기고 '아들나라' 삼기에 이르렀다. 사르후 전투에서 명나라 편을 든 조선에 대한 구원(舊怨)이 그처럼 컸다.
계속 - (9) 병자호란과 화승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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