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한 게르만 여성
러시아의 역사에서 '대제'의 칭호를 얻은 사람은 표트르 1세와 예카테리나 2세(Yekaterina II Velikaya)
단 두 사람뿐이다.
그리고 여자로서 '대제'나 '대왕'의 칭호를 받는 사람도 전 세계에서 예카테리나 2세 단 한 사람뿐이다.
"그들(프랑스인)은 나를 '카트린느 르 그랑(Catherine le Grand)'으로 부른다.
여성형이 아니라 남성형 'le Grand'이다."
더욱이 예카테리나는 러시아인의 피는 거의 섞이지 않은 순수한 게르만이다.
그녀의 원래 이름도 그리스의 성인 카테리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소피아 아우구스테(Sophia Auguste)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강대국 프로이센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작은 공국
-체르브스트의 국왕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 대공(Christian August, Prince of Anhalt-Zerbst)으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 휘하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장군이었다.
그녀의 결혼은 정략적으로 결정된 것이었다.
옐리자베타는 자신이 정식 결혼을 해서 후계자를 낳을 생각이 아예 없었기 때문에
다음해에 일찌감치 후계자를 결정했다.
그 후계자는 요절한 한 살 위의 언니 안나 페트로브나가 남긴 유일한 혈육인
홀슈타인-고토로프 공작 카를 페테르 울리히(Karl Peter Ulrich)였다.
그는 표트르 대제의 공식 혈통 중에서 남아 있는 유일한 후손이었다.
그는 갓난아기일 때 어머니를 잃은 데 이어 열 살 때 아버지까지 잃어 공작의 지위를 계승하고 있었는데,
옐리자베타가 그를 러시아의 차기 차르로 지명하면서 러시아 황태자의 공식 명칭으로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Grand Duke)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후계자가 결정되자 옐리자베타는 황가의 후계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서
당시 열네 살이었던 표트르 3세의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 반프로이센 정책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러시아 총리대신 베추체프의 영향력이 약화되기를 갈망하고 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관여했다.
옐리자베타 역시 소피아의 집안을 잘 알고 있었다.
소피아 아우구스테의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Johanna Elisabeth)2) 는
옐리자베타가 젊은 시절에 약혼했다가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고토로프 가의 카를 아우구스테의 여동생이었기 때문이다.
소피아는 당시 결혼 적령기를 앞둔 유럽 왕가의 여인들 중에서
좋은 평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합의는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1729년생으로 표트르보다 한 살 아래인 소피아는 약혼이 결정되자,
년 1월에 어머니 요한나 엘리자베트와 함께 러시아로 들어와 옐리자베타의 왕궁에서 생활했다.
그녀는 열성적으로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러시아 문화에 대해서 배웠으며,
옐리자베타와 표트르에게 순종적으로 행동했다.
때문에 차리나와 귀족들, 그리고 일반인들까지 그녀에 대해서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소피아가 남긴 당시의 일기에 의하면, 그녀는 러시아로 오면서 러시아의 황후로서 필요한 모든 것을 배우고
필요한 모든 행동을 할 것이라고 굳게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면서
‘예카테리나 알렉세예브나’라는 이름을 받았으며
1745년에 표트르 페테로비치 대공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다.
표트르는 열일곱 살, 예카테리나는 열여섯 살이었다.
표트르와 예카테리나는 애당초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러시아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가 완전히 상반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러시아의 문화와 전통을 존중하고 그곳 사람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던 반면 표트르는 자신이 그 이름을 따른
위대한 할아버지 표트르 대제의 유일한 후손이었는데도 좀처럼 어릴 적에 받았던
교육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향수병을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통치해야 하는 러시아를 후진국이라며 경멸했다.
특히 그는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러시아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정의한 프로이센의 야심가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존경해서 손가락에 프리드리히가 조각된 반지를 항상 끼고 다녔다.
어릴 적에 부모를 모두 잃은 표트르는 정신적인 성장이 무척 더딘 편이었다.
유아적인 성향이 강해서 하루 종일 장난감 병정을 가지고 놀았으며,
십 대인데도 음주벽이 있었다.
특히 결혼을 앞두고 천연두를 앓고 나서 얼굴에 심한 마마 자국이 남게 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정도가 더욱 심해졌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표트르에게 한 가지 문제가 추가되었다.
성기에 결함이 있어서 육체적인 관계를 할 때 심각한 장애가 발생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결혼 첫날부터 갈등을 빚게 되었다.
그녀는 《회상록》에서 이때의 심경을 간단하게 적고 있다.
만약 그에게 나를 사랑하고자 하는 의사가 조금이라도 있었다거나
최소한의 사랑이라도 받아들일 줄 알았다면 나는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나는 결혼 첫날 남편에게 잔인할 정도로 심한 비난을 퍼부었다.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만약 네가 이 남자와 사랑을 나누게 된다면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될 거야.
조심해, 예카테리나.
이 남자와의 애정 문제에 관한 한 항상 자신을 먼저 생각해야 해'라고.
결혼 후 예카테리나는 남편 대신 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당대의 볼테르에 이르기까지 유명한 철학자들의 저술을 거의 모두 독파했다.
그녀는 이 시기에 볼테르의 저술에 감동해서 그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으며,
이들의 교류는 볼테르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표트르와 성 관계를 전혀 갖지 못하고 있던 예카테리나는 스물두 살 무렵에 처음으로 남자 경험을 했다.
명문가 출신의 미남 청년인 세르게이 살티코프(Sergei Vasilievich Saltykov)였다.
살티코프는 대략 열두 명 정도로 집계되는 예카테리나의 진지한 애인 중에서 첫 번째 남자였다.
예카테리나는 스물다섯 살인 1754년에 첫 아이 파벨 페트로비치(Pavel Petrovich)를 낳았다.
이러한 이유로 후일 파벨이 표트르의 아들이 아니라 세르게이 살티코프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예카테리나는 세르게이와 평생 우정을 나누며 살았으나,
두 사람의 육체적인 관계는 파벨이 태어나기 2년 전쯤에 잠시 동안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이 시기에는 표트르가 성기 수술을 통해서 성 기능을 회복했으며,
예카테리나의 《회상록》에 의하면,
그녀는 결혼 초기의 결심을 철회하고 약간의 양보를 하고 있었다.
우리처럼 두 인간의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예는 찾기 힘들 것이다.
공통점은 아무것도 없고, 사고방식도 전혀 달랐다.
우리의 의견은 항상 너무나 달라서 그 무엇에 대해서도 일치하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너무 그를 모욕하지 않기 위해서 자주는 아니었지만 그에게 몸을 맡겼다.
파벨이 태어나 로마노프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자 이번에는
표트르가 애인들을 연이어 갈아치우고 있는 예카테리나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그가 선택한 여인은 옐리자베타 보론초바(Yelizaveta Vorontsova) 였다.
보론초프 가는 러시아 최고의 명문 귀족 가문 중 하나로 11세기에 성립된 노브고로드 대공을 계승한 집안이다.
당시 보론초프 가에는 세간의 주목을 받던 두 자매가 있었는데,
언니인 옐리자베타와 동생인 예카테리나였다.
옐리자베타 보론초바가 표트르와 공공연하게 연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데 반해서
동생인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황태자비인 예카테리나와 긴밀한 친구 관계였다.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는 열다섯 살의 나이에 다른 명문가 출신인
미하일 다쉬코프 대공(Prince Mikhail Dashkov)과 결혼해 예카테리나 다쉬코바 대공녀로 불리고 있었다.
그녀는 후일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의 원장을 지내고 러시아의 대표적인 계몽주의자로 이름을 남기게 될 사람이다.
예카테리나가 파벨을 낳자마자 차리나 옐리자베타는 파벨을 빼앗아 자신이 직접 키웠다.
예카테리나는 파벨을 한 달 후에 세례식에서 볼 수 있었으며,
여섯 달 후에야 재회할 수 있었다.
옐리자베타가 이런 식으로 잔인하게 행동한 이유는 예카테리나에게 차르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국가의 소유임을 인식시키기 위한 목적이었으며,
동시에 실망스러운 표트르 3세를 거울삼아 파벨을 표트르 대제의 진정한 후손답게 키우려고 했던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이 시기에 그녀의 생애에서 대단히 소중한 남자를 만났다.
그리고리 오를로프(Grigory Grigoryevich Orlov)는 노브고로드 시의 행정관
그리고리 오를로프의 아들로 나이는 예카테리나보다 다섯 살 아래였다.
애국주의자이며 개혁주의자였던 그는 7년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에 입문했으며,
조른도르프 전투5) 에서 부상당해 후송되었다가 부상이 회복된 후에는
동생 알렉세이(Alexey Grigoryevich Orlov)와 함께 근위대에 배속되어 중위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 시절에 표트르와 예카테리나의 관계가 더욱 심각하게 꼬여 가면서
표트르는 점차 주변이나 일반인들로부터 지지를 잃은 반면 예카테리나는 동정을 받게 되었다.
표트르는 그리 영리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예카테리나를 모욕하거나 무시했다.
예카테리나 역시 표트르를 모욕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가급적이면 공개석상은 피했다.
또한 표트르는 공식적으로는 부적절한 관계임이 분명한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도 보란 듯이 동행하곤 했다.
1762년 1월, 차리나 옐리자베타의 장례식에서 표트르는 시종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려고 했지만, 행복에 겨워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예카테리나는 사람들의 눈에 진정으로 옐리자베타의 죽음을 애도하고 슬퍼하는 것으로 보였다.
서른네 살에 차르가 된 표트르는 자신에게 주어진 막강한 권력을 즐기면서,
그 자리가 쉽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대단히 위험한 자리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표트르는 즉위하면서부터 군부의 지지를 잃었다.
그는 연이은 승전을 기록하면서 프로이센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던
러시아군에 대해 즉각적인 철수를 명령했다.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프리드리히 2세가 자살까지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군을 개혁한다는 명분으로 군복을 프로이센식으로 바꾸고,
프로이센의 장교 출신 인사들을 영입했다.
또한 홀슈타인 출신 인물들과 정부 옐리자베타의 가문인 보론초프 가문에게 권력을 안겨줬다.
그러자 표트르는 다른 귀족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어설프게 개혁군주의 흉내를 내어
'농민의 러시아'를 선언하고 '하층민 생활 개선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의 상황을 무시한 비현실적인 것인데다
아주 예민한 문제인 농노들의 신분 문제를 건드리는 것이었다.
이는 광대한 토지를 보유한 대귀족들까지도 그에 대한 반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가 범한 가장 결정적인 실책은 예카테리나와 이혼하고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와 정식으로 결혼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것이 1762년 여름에 발발한 친위 쿠데타의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오를로프 형제와 예카테리나 다쉬코바가 주도한 이 쿠데타로 인해서
표트르 3세의 치세는 불과 6개월 만에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1762년에 발생한 쿠데타의 공식적인 상황 기록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차르의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의 친동생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는
표트르 3세의 정책에 불만을 갖고 그리고리와 알렉세이 오를로프 형제,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과 같은
라이브 가르드(Leib Guard)6) 의 초급 장교들과 1만 명 정도의 병력을 동원한
대형 쿠데타를 사전에 치밀하게 모의해서 실행에 옮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건의 실제 진행에서 치밀한 사전 계획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는 원래의 근거지가 모스크바였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왕궁에 눌러앉아 황태자비 예카테리나와 붙어살다시피 했다.
두 사람의 예카테리나 모두 볼테르 등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에게 심취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예카테리나(다쉬코바)는 나이 든 예카테리나에게 표트르가 그녀와 이혼하고
자신의 언니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다.
여기에서 두 사람과 그들과 자주 어울렸던 라이브 가르드의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
표트르에 대한 쿠데타가 모의되었을 수도 있지만,
그 후의 진행 상황을 보면 그저 어울려서 표트르를 심하게 성토한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멤버 중 중위 한 사람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표트르에 대한
\욕을 심하게 하다가 비밀경찰에게 체포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이 사고는 이혼할 기회만 노리고 있는 표트르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할 것이 분명했다.
동료가 체포되는 현장에 함께 있었던 알렉세이 오를로프는 1762년 6월 28일 새벽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위치한 차르의 여름 별장 담을 뛰어넘어 예카테리나의 침실에 침입했다.
당시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의 명명식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보다 먼저 별장에 도착해 머물고 있었다.
알렉세이는 곤하게 잠자고 있던 예카테리나를 다급하게 깨워 심각한 상황을 설명했다.
이즈음에 예카테리나의 연인인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급하게 임대한 낡은 마차를 몰고 별장의 정문에 도착했다.
차리나 옐리자베타의 상중이라 검은 상복을 입고 나타난
예카테리나를 태운 오를로프 형제는 마차를 전속력으로 몰아 라이브 가르드의 두 개 보병 여단 중 하나인
이즈마일로프스키 연대(Izailovskiy Regiment)로 향했다.
그들이 이 여단을 선택한 이유는 여단장이 바로 키릴 라주모프스키 백작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코사크의 군장 출신인 키릴은 차리나 옐리자베타의 영원한 연인 알렉세이 라주모프스키의 친동생으로,
예카테리나와 성향이 비슷한 개혁주의자라 그동안 줄곧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예카테리나 일행이 여단 사령부에 도착한 것은 이른 아침이라 키릴은 아직 출근하기 전이었다.
병사들은 검은 상복에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채 창백하고 겁먹은 표정으로
나타난 예카테리나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보호를 받고자 여기에 왔습니다. 차르는 나를 체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가 나를 죽일까 두렵습니다."
남자의 보호본능이 작동되기 위한 모든 조건이 갖춰지자 병사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손이건 옷이건 닥치는 대로 키스를 퍼부었으며,
여단의 종군 신부가 맹세를 서약하는 절차에 들어갔다.
오전 8시 정각에 나타난 키릴 라주모프스키 여단장이 예카테리나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서약하면서 이 쿠데타에서 가장 어려웠던 절차는 모두 마무리되었다.
키릴 라주모프스키 백작이 지휘하는 보병 여단은 예카테리나가 타고 있는
낡고 초라한 임대 마차를 호위하고 행진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카잔 대성당을 향해 행진해 가는 동안 다른 근위대 병력이 합류하면서
점차 쿠데타가 당연히 갖춰야 할 비장한 분위기는 사라졌다.
군악대까지 합류하자 완전히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고,
병사들은 음악에 맞춰 노래를 부르거나 "예카테리나 만세"를 외쳐댔다.
카잔 대성당에 도착했을 때 이미 많은 성직자들이 모여 예카테리나와 그녀의 혁명에
동참한 병사들을 축복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신부들이 그녀를 축복하는 동안 이번에는 일반 군중들이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예식이 끝나고 성당의 종소리가 울릴 때에는 엄청난 인파가 모여들어
환호성이 함께 울려 퍼졌다.
예카테리나의 임대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근위대 병사들과 일반인들이 뒤섞여 함께 움직였다.
초라한 마차는 파벨이 살고 있던 동궁 앞에 멈췄다.
파벨은 상원의원들과 함께 나와 있었는데,
잠옷 차림이었으며 아직 잠이 덜 깨어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상복 차림의 예카테리나가 파벨과 나란히 서서 상원의원들의 충성서약을 듣는 동안
이 쿠데타를 주도면밀하게 계획했다는 다쉬코바는 열광하는 군중들의 틈새를 비집고
예카테리나와 합류하느라고 고생하고 있었다.
그날 오후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는 오늘의 상황이 분명히 혁명이고,
혁명에는 반드시 성명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행히 그녀는 문장력이 뛰어났기 때문에 성명서는 불과 수시간 만에 작성되었으며,
그날 밤부터 인쇄에 들어가 다음날 아침 배포되기 시작했다.
이 쿠데타가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것이었다고 해도
그 계획과는 많이 다르게 진행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떠들썩한 혁명이 진행되고 있을 때,
표트르는 정부인 옐리자베타 보론초바, 그녀의 큰아버지이며 부총리대신으로 권력의 실세였던
미하일 보론초프(Mikhail Illarionovich Vorontsov), 프로이센 대사 등과 함께
여름 별장으로 향하던 중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당시 그에게는 그의 아버지가 창설한 홀슈타인-고토로프 공국의 막강한 정예 기병대
성 안나 기사단이 붙어 있어 쿠데타군에 대해 충분히 반격이 가능했다.
그의 측근들은 병력을 모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진격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겁을 먹은 표트르는 반대 방향으로 도망갔다.
그는 핀란드 만의 코틀린 섬에 위치한 크론슈타트의 요새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덴마크와의 전쟁을 위해서 병력을 집결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군부는 표트르가 코틀린 섬에 상륙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예카테리나의 행동은 표트르와는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그녀는 근위대의 기병 여단을 소집해서 표트르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근위대의 군복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직접 선두에 섰다.
그들은 한밤중에 크린스키 카박이라는 작은 마을에 도착해 허름한 여인숙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미하일 보론초프 백작이 나타나 표트르의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표트르는 순순히 양위 각서에 서명했고,
예카테리나는 표트르를 일단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의 롭샤 성에 연금했다.
이날 예카테리나를 수행했던 예카테리나 보론초바(다쉬코바)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표트르는 차르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을 오히려 홀가분하게 여겼으며,
양위의 조건으로 작은 영지에서 연인인 옐리자베타와 함께 조
용히 은퇴 생활을 하게 해 줄 것만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요구는 공허한 것이었다.
표트르는 이로부터 6일 후에 살해되었으며,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예카테리나에게 자신의 범죄 행위를 고백했다.
표트르의 살해에 예카테리나가 직접 관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종식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이 사건을 일으킨 알렉세이와 네 명의 근위대 장교들에 대한 처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카테리나가 대부분의 귀족들과 평민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즉위는 법률적으로 전혀 정당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차르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는 로마노프 가 남자들의 비극적인 종말은
표트르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았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차르가 되었다가 그 다음해 퇴위당해 줄곧 수감되어 있던
이반 6세는 표트르가 차르에 즉위했을 때 스물한 살이었다.
그는 16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부근에 있는 라도가 호수 한가운데 위치한 작은 섬
슐리셀부르크 요새의 독방으로 옮겨져 이름도 없이 '죄수 제1호'로 불리고 있었는데,
표트르 3세가 그를 방문해 동정심을 보이자 석방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안고 있었다.
차리나 옐리자베타가 이반 6세에 대해 내린 명령은 철저하게 세상과 격리하고 교육을 금해서
글을 전혀 읽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반 6세는 스스로 글을 깨우쳐 매일 성경을 읽었으며,
자신을 '짐(Gosudar)'이라고 불렀다.
예카테리나는 감옥의 간수들에게 한 가지 명령을 더 추가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누구라도 죄수 제1호의 석방을 요구하면 설사 그것이 자신이 직접 서명한 문서에 의해
내려진 명령일지라도 그 명령을 무시하고 즉각 그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요새 수비대에 소속되어 있던 바실리 미로비치(Vasily Mirovich) 중위는
우연히 죄수 제1호의 신원을 알게 되었다.
이반 6세에 대한 처사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그는 병사들을 지휘해서 요새를 장악하고,
감옥의 간수들에게 이반 6세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자 간수들은 예카테리나의 명령을 즉각 집행했다.
미로비치 중위는 참혹한 시신이 된 이반 6세를 발견했다.
표트르 3세와 이반 6세가 살해되면서 로마노프 가의 남자 계승자는
예카테리나의 아들 파벨 단 한 사람만 남게 되었다.
예카테리나가 대제의 칭호가 부끄러울 정도의 통치자는 아니었다.
러시아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공헌도에서는 오히려 표트르 대제를 능가하는 업적을 남겼다.
표트르 대제의 시절부터 러시아의 외채 문제는 국가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규모로 커졌고,
언제 지불불능의 상태가 닥칠지 모르는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다.
비록 중과세에 따르는 농민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예카테리나가 즉위한 지 15년 만에
외채의 75퍼센트를 청산해 국가부도의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자본주의적인 산업체제가 자리를 잡으면서 상공업이 경쟁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교역량이 급증했다.
더욱이 미국 독립 전쟁 중에는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미국과의 교역로를 방어함으로써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예카테리나는 상공업과 무역을 통해 축적한 경제력을 기반으로 '강력한 러시아군'을 육성해 영토의 확장에 나섰다.
현재 러시아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영토는
그녀의 시대에 확장한 영토보다 오히려 상당히 줄어든 것이다.
동방으로의 확장은 순조로워서 작은 부족들을 복속시키면서 육로로 얼어붙은
베링 해를 건너 알래스카에 도착했다.
1784년에는 알래스카에 최초의 정착지를 건설했고
러시아-아메리카 회사(Russian-America Company)를 설립해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섰다.
이에 반해서 튀르크와 폴란드가 막고 있는 서방의 진출은 상당한 출혈을 각오한 것이었다.
러시아는 예카테리나 시절 튀르크와 두 차례의 격렬한 전쟁을 치렀다.
1768년에 발발한 제1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폴란드 사태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uania Common wealth)의 마지막 국왕이었던
스타니슬라브 2세(Stanisław II August Poniatowski)는
예카테리나 2세와 관계를 가졌던 열두 명의 애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대사 신분으로 러시아 왕궁에 머물렀던 30대 초반에 세 살 위인 예카테리나에게 완전히 빠져들었다.
예카테리나는 1764년에 러시아군을 동원해 폴란드 왕궁에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애인인 스타니슬라브를 국왕으로 세웠다.
당시 폴란드는 여러 정파가 대립하고 있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다.
이 쿠데타는 1768년에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와 모의해서
나라가 폴란드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이어지게 되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와 튀르크의 첫 번째 전면전의 원인이 되었다.
쿠데타에는 당연히 저항이 뒤따랐고,
이 저항 세력을 러시아군이 튀르크의 국경 지역까지 추격하자
오스만 튀르크의 술탄 무스타파 3세(Mustafa III)는 러시아군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 첫 번째 전쟁은 러시아 역사상 최고의 장군 중 한 사람인 알렉산드르 수보로프(Aleksandr Vasilyevich Suvorov)
장군이 그 이름을 알린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보다 더욱 러시아에게 고무적인 것은 알렉세이 오를로프가 지휘하는 흑해 함대가
지중해에서 튀르크의 해군을 사실상 궤멸시켰다는 사실이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러시아는 흑해로 통하는 두 개의 항구와 크림 반도에서의 우선적인 권리를 확보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예카테리나의 군사적인 모험주의를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 러시아는 상당히 위험한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전쟁 직후의 제1차 폴란드 분할에 이어 러시아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면서 실익을 챙겼다.
또한 미국 독립 전쟁이 발발하자 1780년에는 대영제국의 막강한 해군을 상대로 스웨덴,
덴마크와 연합해서 무장중립연합(League of Armed Neutrality)을 결성해 교역로를 방어했다.
예카테리나의 영토 확장은 1780년대에 클라이맥스에 오르는데,
여기에는 러시아 역사에서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인
그리고리 포템킨(Grigori Alexandrovich Potyomkin Tavricheski)이 크게 공헌했다.
포템킨은 1762년의 쿠데타에서 초기부터 오를로프 형제를 도왔던 근위대 소속의 청년 장교였다.
예카테리나에게 영원한 연인일 것 같았던 그리고리 오를로프가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그녀의 신뢰를 저버리자 포템킨이 1770년대 중반부터 오를로프를 대신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리 포템킨은 성향이 예카테리나와 똑같았다. 내면적으로는 급진적인 계몽주의자였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권력과 러시아의 영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예카테리나와 포템킨은 러시아를 고대의 로마 제국과 같은 모습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함께 키워갔다.
그들은 파벨이 첫 손자를 낳자 알렉산드르(Aleksandr Pavlovich)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서 따온 것이다.
둘째 아이의 이름은 콘스탄틴(Konstantin Pavlovich)이다.
이것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의식한 것이었다.
예카테리나와 그리고리 포템킨의 의도는 명확했다.
그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마찬가지로 오리엔트의 정복을 목표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의 오리엔트는 현재의 오스만 튀르크였으며, 마지막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이었다.
포템킨은 흑해 연안을 확보하고 그곳에 도시를 건설했으며,
1783년에는 크림 반도를 합병했다. 포템킨에게는 타우리스 대공(Prince of Tauris)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타우리스는 고대에 크림 지역을 부르던 이름이었다.
다시 한 번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은 러시아와 튀르크 모두 알게 되었다.
1788년에 제2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역시 튀르크의 선전포고로 시작되었지만,
러시아는 완벽하게 전쟁 준비를 하고 시기만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외교적인 준비도 철저해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공동보조를 취했다.
오스만 튀르크는 양쪽 방향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협공을 받으며 급속히 무너졌다.
그리고리 포템킨 대공이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인 오차코프를 점령하자 무스타파 술탄은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
명장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는 난공불락의 이즈마일 요새를 함락시켰고,
흑해 함대는 다시 한 번 튀르크 해군을 궤멸시켰다.
1792년 러시아와 튀르크의 국경이 현재의 모습으로 바뀌면서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1795년에는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졌다.
약 20년 동안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가 세 번에 걸쳐 영토를 분할해 합병한 것이다.
역사가 오랜 이 왕국의 주민들은 거세게 저항했으나 이에 대한 잔인한 탄압이 뒤따랐으며,
저항과 탄압이 반복되다 결국 나라가 사라지는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다.14)
예카테리나는 문화 측면에서도 러시아에 크게 기여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에르미타주 박물관이다.
현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겨울 궁전 전체를 차지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그녀가 개인적으로 전시품을 수집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러시아 과학원이 세계적인 권위를 갖게 된 것도 그녀의 공헌이었다.
남편을 잃고 프랑스와 영국에서 15년을 보낸 예카테리나 다쉬코바를 1782년에 과학원장에 임명하고
외국의 석학들을 초빙해서 과학원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기관으로 변모시켰다.
예카테리나는 개인적으로는 분명히 문화인이었고 계몽주의자였다.
그녀는 외국의 계몽주의자들과 꾸준히 서신을 주고받았을 뿐 아니라 스스로
분명히 계몽주의 계열에 속하는 희곡과 소설을 쓰기도 했다.
입법을 위해 소집한 1776년의 회의는 실패로 끝났지만,
1785년에 그녀가 기초한 〈귀족 헌장(Charter to the Nobles)〉과 같은 수십 개의 법률이나 선언문은
분명히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사상에 입각한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본질적으로 절대군주였으며,
군주들 중에서도 권력에 대한 욕구가 가장 강했던 사람들 중 하나였다.
예카테리나는 말년에 점차 권력욕의 화신으로 변모했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젊은 시절의 열정과 이상은 사라지고
그 빈자리에 탐욕과 집착이 채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국왕인 루이 16세가 처형되자 계몽주의자
예카테리나는 완전히 사라지고 권모술수에 통달한 늙은 여우만 남았다.
그녀는 대제국 러시아의 여왕벌과 같은 존재였다.
남녀의 사랑조차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같이 하는 영광은 신분의 수직 상승을 의미했다.
그녀는 숱한 애인들을 만들고, 그들과 그 가족들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물했다.
다음은 잠시 예카테리나의 총애를 받았다 버림받은 한 사나이가 차리나에게 받은 작별의 선물 목록이다.
백작의 작위
5만 루블의 현금
매년 5천 루블의 연금
우크라이나의 농노 4천 명
그 시대의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혹은 여러 달이나 여러 해 만에 다시 그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였다.
혈통으로는 도저히 차르가 될 수 없었던 외국 여인이 무려 34년간 러시아를 통치했던 비법이 여기에 숨어 있다.
권력과 사랑, 만약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최소한 젊은 남성들의 헌신적인 봉사를 누렸으니
개인적으로는 행복했던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카테리나는 죽기 바로 전 해인 1795년에 '대제'라는 칭호를 제의받았다.
그녀는 이때 자신에 대한 평가는 역사에 맡긴다며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녀의 치세는 분명히 러시아 역사에서는 영광스러운 황금시대였다.
그렇지만 예카테리나가 폭력을 통해 잠재운 러시아의 구조적인 모순은
한 세기 후에 러시아 혁명이라는 격렬하면서도 참혹한 모습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