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민의소의 ‘국채 1300만원 보상 취지서’ 전문 게재와 함께, ‘이천만 동포 가운데 조금이라도 애국 충정이 있는 사람은 이에 적극 참여해 달라.’며 국채보상운동의 구심점이 되었고 이후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를 결성하여 의연금을 접수·관리.
1907년 5월 23일
양기탁과 안창호가 뜻을 모아 국내 최대 항일 민족단체인 ‘신민회’ 본부를 영국인이 대표로 있어 치외법권인 대한매일신보 안에 두고 신민회 기관지를 자임, 5월 23일자부터 새로 한글판을 창간하여 민족계몽 교육운동에 앞장섬. 이로써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한글판, 영문판의 3개 신문을 발행.
1907년 7월 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의 고종이 보낸 3명의 특사 소식을 알림.
1907년 7월 18일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친일내각이 일제의 고종 퇴위 방침을 받아들여 고종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호외를 발행, 대신들의 파렴치한 행태와 고종의 거부 상황을 보도.
1907년 8월 18일
일제의 술책인 정미7조약에 따라 해산된 대한제국 군대가 의병으로 봉기하자 ‘의병소식’이라는 난을 따로 만들어 전국의 의병활동을 집중 보도하는 등 이후 날마다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의병봉기와 의병무장투쟁 소식을 보도하여 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촉구.
1908년 3월 6일
지금의 관보는 더 이상 한국인을 위한 소식이 아니라 일본인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대한매일신보 내의 정부 인사동정을 싣던 관보와 관정록사(官廷錄事)란을 폐지하고 그 지면에 애국계몽운동가와 계몽단체의 교육구국 활동을 주제로 한 ‘학보·학계’ 소식을 게재.
1908년 5월 27일
국한문판 8143부, 한글판 4650부, 영문한 463부 등 총 1만 3256부를 발행하는 국내 최고의 신문으로 자리매김.
1909년 5월 1일
배설, 건강 악화로 37세의 나이에 사망. “나는 죽을지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생(永生)케 해 한민족을 구하라.”라는 유언을 남김.
1909년 12월 2일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약력과 수감생활, 재판상황 등을 연속 보도하는 등 언론구국투쟁에 앞장 섬.
1910년대
1910년 5월 21일
일제 통감부가 2대 사장 만함(Alfred W. Marnham)에게 700파운드를 주고 대한매일신보를 인수. 대외적으로 통감부는 인수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6월 14일 발행인 및 편집인을 이장훈으로 변경. 이에 양기탁을 비롯한 신민회 동지들 모두 대한매일신보를 떠남.
1910년 8월 28일
국·한문판 1461호, 한글판 938호를 끝으로 한일병탄과 함께 대한매일신보 폐간, 통감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일개 부서로 통합됨. 폐간 전까지 대한매일신보는 국한문판 24차례, 국문판 21차례의 압수와 2차례의 정간처분을 받는 등 항일구국지로서의 독보적인 족적을 남김.
1910년 8월 30일
제호가 ‘매일신보(每日申報)’로 바뀌고 대한매일신보의 지령은 계속 이어졌으나(국·한문판 1462호, 한글판 939호) 한일합방 사유를 국민에게 알리는 순종(純宗)황제 조칙(詔勅)과 칙유(勅諭)를 1면에 크게 보도하는 등 총독부 입장을 대변하고 일제의 한반도 통치 합리화를 선전하기 위한 황국신민화의 도구로 전락.
1910년 11월 11일
104세 최장수 이춘광옹 부부 사진을 신문에 최초로 게재, 이후 정적인 뉴스사진에서 동적인 뉴스사진으로 전환하는 계기 마련.
1918년
우리나라 최초로 기자 공개채용 실시, 홍난파(洪蘭坡)와 유지영(柳志永)이 기자로 발탁.
1919년 8월
소설작품 현상 모집을 최초로 실시, 신춘문예의 효시가 됨.
1920년대
1920년 7월 2일
부인기자 채용 사고(社告)를 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인 이각경(李珏璟)이 9월 5일 정식발령을 받고 매일신보 기자로 활동. 당시 응시자격은 ①가장(家長)있는 부인 ②20세 이상 30세 이하 ③고등보통학교 졸업정도 이상으로 문필취미가 있는 부인이었음.
1937년
시민들에게 빠르게 뉴스를 전달하기 위해 종로 화신백화점 옥상에 전광속보대 설치.
1938년 4월 29일
경성일보 산하에 있던 조직을 독립, 주요 경영진이 모두 한국인으로 바뀌고 매일신보 제호 한자를 ‘신(申)’에서 ‘신(新)’으로 변경. (每日新報)
1938년 6월 30일
매일신보 경영독립을 기념하기 위해 ‘역대명가유필진적(歷代名家遺筆眞蹟)’이라는 한국의 역사적 인물들과 글씨체를 소개하고 전문가의 설명을 곁들인 별쇄 부록판을 총 8회에 걸쳐 발행. 당시 일제의 극심한 언론탄압과 총독부 산하에 있던 매일신보의 상황에서 보면 굉장히 이례적인 사건임.
1945년 11월 22일
해방 후 3·1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오세창이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며 매일신보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대한매일신보의 위대한 유산과 매일신보의 아픈 유산을 모두 물려받는다는 취지로 ‘혁신 속간’이라는 소개와 함께 지령 제13738호로 시작. (당시 하루 앞당긴 석간을 발행하여 발간일자는 1945년 11월 23일자)
1946년 2월
월간 시사·문화예술 종합지 ‘신천지(新天地)’ 창간. 광복 후부터 6·25전후에 이르기까지 종합지 중에서 첫손 꼽히는 대표적 중립적 종합지로 만 9년 동안 통권 68호를 발간, 신천지의 국판 크기는 훗날 우리나라 월간지의 판형으로 자리 잡음.
1946년 3월 9일
2월 6일자 사고를 통해 서울신문 상징마크를 일반독자에 공모, 서울 흑석동에 거주하는 한녹원씨의 작품이 당선되어 현재까지 사용 중.
가운데 자리한 펜촉은 언론·보도의 일반적 사명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양편은 한 쌍의 학 날개가 하늘로 솟을 듯이 활짝 편 자세로 휘감고 있는데 바로 이것은 서울신문의 ‘서’자, ‘신’자 두 개의 시옷 자음을 변형한 아이디어로서 ‘해방된 민족의 대변기관’으로서 무궁한 발전을 약속하는 상징임.
1948년 10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시사주간지 ‘주간(週刊) 서울’ 창간. 합동통신이 47년 7월 5일 발간한 ‘주간 서울’을 서울신문사가 인수, 지령 8호로 시작하여 49년 9월부터 잡지명을 ‘週刊 서울’로 확정하고 신천지와 마찬가지로 대표적인 시사교양지로 인기를 끌며 통권 93호까지 나왔으나 6·25 전쟁으로 발간 중단.
1949년 5월 3일
서울신문은 혁신 속간 이후 중립지를 고수했고 이후 광복 정부의 탄생을 축하하고 실정(失政)에 대해서는 비판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건국 직후 반공을 국시로 한 이승만 정부는 발행부수가 많은 서울신문이 반정부적이며 정부와 민간을 이간한다는 명목으로 공보처를 통해 5월 3일 정간 조치를 내렸고 결국 임시주총에서 중역과 편집진이 전면 경질되고 우익 진영 간부들이 배치되면서 6월 17일 국무회의에서 비로소 정간이 해제되고 6월 22일자부터 다시 발행됨.
이 정간조치로 인해 서울신문은 혁신 속간 이후 유지해온 중립적 논조를 반공 성향의 친정부적 논조로 바꿀 수밖에 없었으며 귀속주의 주주권리를 행사하는 정부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고 52년 4월부터는 주총 정관개정으로 공보처장이 서울신문 회장을 겸하는 당연직 취임이 1960년대 자유당 정권 말까지 이어짐.
1949년 8월 15일
광복 이후 최초로 조석간제(朝夕刊制) 실시.
1949년 10월
시, 동요, 동화에 국한되었던 당시 신춘문예에 단편소설을 추가하여 4개 부문으로 확장한 새로운 형식의 신춘문예 공모를 시작, 6·25 이후 5년 동안 중단됐다 1956년 다시 부활해 한국문학을 살찌운 문단의 산실로 자리매김.
1950년대
1950년 6월 27일
6·25 전쟁이 발발하고 서울신문은 26일 6차례, 27일 12차례의 호외를 발행, 북한의 남침 및 전황을 알렸고 중앙언론사 중 유일하게 간부진과 사원이 27일 자정까지 회사를 지켰으며 그 중 종군기자였던 한규호와 사장 비서 이승로가 피살되고 간부들이 납북되는 등 총 8명의 희생자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