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텔레비전에 출연한 어느 주부의 손가방 속에 들어 있는 내용물을 보고 웃음을 머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주부 못지 않은 내 손가방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건망증이 많아 늘 이것저것 챙기게 된다는 그 주부는 화장품은 물론 심지어 못이나 작은 망치, 포크, 과도까지 가지고 다녔다. 얼마간 집을 떠나 생활한대도 불편함이 없을 것이라고 사회자는 너스레를 떨었다.
건망증으로 고민인 나도 항상 고정적인 것 외에 며칠 후에나 필요한 간단한 물건 등 준비물을 미리미리 가방 속에 챙겨 놓는다. 미루다가 정작 당일에 챙기지 못해 낭패를 본 일이 있기 때문이다. 며칠 씩 가방 속에 미리 넣어 둔 물건 때문에 실수를 덜하게 된 탓에 이 버릇이 지속되고 있다.
제사나 명절, 시댁에 갈 때 요즈음은 아이들이 훌쩍 커서 예전처럼 챙겨야 할 것이 많지 않지만 아직도 다른 형제들 보다 내 가방이 훨씬 두툼하다. 매사에 준비성이 워낙 철저한 편이라 빼어 놓고 가면 반드시 필요할 것 같고 갖고 가자니 짐이 되고 고민에 싸이다가 결국은 가져가게 되고 만다.
마치 가방에 짐을 챙기 듯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그런 것 같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가방에 집(아파트)을 챙기고 집이라는 가방엔 또 장롱이며 냉장고 세탁기 등을 잔뜩 채워 넣는다. 냉장고며 창고에도 생활에 필요한 것들로 항상 가득하게 되고 만다.
구석구석 가득찬 집이라는 커다란 가방을 갖게 되고서도 자가용 등 또다른 가방들을 챙기느라 여념없이 달려가는 게 사람의 모습이다. 곰곰 생각해 보면 당연한 삶의 방편들인데도 어리석어 보이기도 하고 무엇인가를 챙겨야 하는 마법에 꼼짝없이 갇혀 버린 것 같다.
가끔 손가방을 정리하다 보면 필요 없는 물건들이 잔뜩 나온다. 껌 껍질, 사탕껍질, 종이 조각, 버려도 좋을 서류 등등. 깨끗이 정리하고 새로운 각오로 시작 하지만 얼마 안가서 다시 만물상자로 돌변한다. 집안도 언제나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무엇이 그리 많이 필요한지 도무지 치워야 할 게 끝도 없다. 어디 손가방이나 집안뿐이랴. 마음의 가방 속에는 또 얼마나 처리해야 할 찌꺼기들이 많은가. 항상 신선하고 바른 마음만 있으면 좋으련만 썩고 낡고 찌든 것 등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하다.
마음속에 채우기는 쉬워도 버리기는 또 어찌 그리 어려운지.
물론 새 집이나 새 자동차를 샀을 때 얼마간은 꽤나 깨끗이 사용하고 정돈을 잘하게 된다. 어떤 계기로 새로운 각오를 결심했을 때, 마음에 드는 새 물건을샀을 때도 그렇다.
며칠 전 남편 직장 상사의 부인으로부터 멋진 손가방을 선물 받았다. 나보다 몇 살 위인 상사 부인은 여학교 가정선생님을 지내선지 뜨개질, 바느질 등 좋은 솜씨를 고루 갖추었다. 한 달 전쯤 허드레 실로 손가방을 뜨는 모습을 보고 갖고 싶다고 했더니 그 말을 흘려 듣지 않고 손수 재료를 사다가 만들었다고 했다.
항상 가방을 메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생각하며 끈을 길게 하여 멜 수 있도록 편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깊은 배려 속에 만든 손가방을 보니 몹시 기뻤다. 상사 부인은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진작 만들어 줄걸 그랬다며 즐거워했다.
나는 지금 온갖 물건, 서류 투성이인 두툼하고 무거웠던 손 가방의 내용물을 정리하고 있다. 늘 가지고 다니며 기회될 때마다 잔금을 확인해 보던 묵은 통장을 꺼냈고, 어쩌다 사용하는 전자계산기도 꺼냈다. 가끔 뜨거운 물을 이용해 비상시 타먹던 커미믹스 봉지 하나와 굴러다니는 동전과 클립 몇개를 꺼냈다. 여기저기 쑤셔 놓았던 연락처들을 수첩에 꼼꼼히 기록해 두고 필요한 펜 몇 자루만 챙겨 새로운 손가방과 첫 만남을 만들었다.
처음처럼 이라는 말이 있다. 새 손가방으로 인해 고상한 나를 마련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든 것을 계기로 마음에 쌓여있는 불필요한 것들도 정리 됐으면 좋겠다.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환한 구슬이 반짝거리는 새 손가방과의 외출을 서두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