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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디야샨티와의 인터뷰
타미 사이먼: 아디야, 당신은 15년간 선 수행자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당신이 했던 명상 수행, 곧 앉아서 좌선하며 오랜 시간 동안 명상하는 것을 벽에다 머리를 세게 부딪치는 것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당신이 했던 선 수행이 사실상 당신으로 하여금 효율적으로 깨달음을 준비하도록 하였고 당신이 지금 가르치고 있는 통찰력을 제공했다면 어떨까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디야: 그럴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 가능하죠. 그렇지만 내 경험으로는, 선 수행이 진실로 내게 한 것은 결국에는 통과할 수 없는 통로를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실패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방석은 나 자신과 영적인 전쟁을 벌이는 전쟁터였습니다. 나는 깨닫기 위해서 애를 쓰고 있었고, 방석은 나 자신의 개인적 의도가 소진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내가 실패할 수 있기 위해서 그 전쟁에 그렇게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나에겐 필요했다고 뒤돌아보며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영적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란 것을 깨달았기에 마침내 그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선 수행의 시간들은 나름대로 쓸모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한 길을 가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큰 오해를 불러오는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가고자 하는 길을 갈 것입니다.
타미: 아비스 저스티가 당신의 선 스승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아디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상 그렇습니다. 그녀는 지난 세기 일본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다수의 초기 선사들, 주로 야스타니 노사와 마에즈미 노사와 함께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훌륭한 많은 지도자들이 이렇게 처음 미국으로 이주해 온 선사들에 속합니다.
선은 일본에서 매우 관습적이고 매우 제도화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에 가는 것처럼 선불교 사원에 갑니다. “일요일이니 선원에 가서 명상을 하자.”, 이런 식이죠. 그러하기에 미국으로 건너 온 이러한 초기 선 지도자들은 과거의 때가 묻지 않은 신선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주 진지한 사람들을 찾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실제로 깨닫게 되어 가르치게 된다면, 우리 역시 바로 그것을 원하게 될 겁니다. 정말로 진지한 사람들을 가르치는 것 말이죠.
그 당시에는 미국에 선불교 사원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 40여명의 사람들이 수행을 하기 위해 북부 캘리포니아에 있는 내 스승의 집을 가득 메우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잔디밭이나 사방 여기저기에 흩어져 자곤 했습니다. 얼마 지난 후에 내 스승의 스승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여기에 도달하기 위해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 너는 이것을 가르쳐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뿐이었습니다. 어떤 종류의 전통적인 전법의식도 없었습니다. 내 스승은 매우 분명했습니다. 그녀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 머리를 깎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그녀는 중년 여성이었고, 다섯 명의 아이들을 길러냈습니다. 선이 비록 전통적인 방식을 취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녀는 그것이 불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것에 끌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그녀의 집에서 가르쳤으며 결코 자기를 선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녀는 매주 토요일 아침마다 거실에 방석들을 마련해 놓고 앉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1년 반 동안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죠. 그래도 그녀는 매주 방석을 꺼내놓고 이야기를 나눌 준비를 했습니다. 그녀는 그저 앉아 있었고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광고를 하지 않는데 누가 참석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매우 헌신적으로 그 일을 계속했습니다. 일 년 반이 지난 후 한 사람이 참석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사람과 일 년 동안 매주 앉았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사람이 참석했고, 그런 식으로 일이 진행되어 갔습니다. 그녀는 결코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고, 진실로 그녀 자신을 스승이라고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주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선은 미국에서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 같은 사람들은 승복과 사원과 의식과 소품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뒷문을 통해 당신을 자신의 집으로 맞이하는 이 작고 나이든 숙녀분이 있는데, 그녀는 평범한 옷을 입고 있으며 당신은 그녀의 거실에 가서 앉는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전혀 인상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나는 그녀가 내게 사원에 가서 장기간의 수련회-내가 처음 참석했던-에 참석해보라고 제안하기 전까지는 진실로 그녀가 제공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정말로 엄격했던 그 수련회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완전히 녹초가 되었습니다. 나는 “맙소사, 거기 있는 것이 여기에, 그것도 훨씬 더 많이 있군. 내가 수련회에서 분발했을 때만큼이나 그 이상의 법이 이 작은 숙녀분의 일요일 아침 거실과 부엌에 있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그것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지만, 그것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녀는 너무나 겸손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제공했어야만 했던 것들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타미: 비록 당신이 참된 명상과, 글쓰기 실험과 관련한 당신의 발견에 기초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가르친다 하더라도, 당신은 어느 한 계보의 일부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은 그녀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아디야: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녀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는 정말로 그녀 계보의 일부인 것처럼 느낍니다.
그녀는 처음 가르치기 위해 앉아 있던 때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앉았고,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그녀의 거실에서 계속 앉아 있었습니다.
한번은 누군가가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이봐요, 그건 분명히 외롭고 힘들었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거기에 앉던 매 순간마다 나는 나보다 앞선 이 계보의 계승자들을 실제로 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지도자로서 가르쳤던 최초의 수련회에 참석하면서 나는 정확히 동일한 경험을 한 것을 기억합니다. 나는 이것을 전해주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을 자비심을 가지고 했던 존재들의, 이 매우 오래된 계보라는 빙산의 말단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정말로 한 계보의 일부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서 아주 친밀하게 전수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단지 깨달음의 전수가 아니라, 인간 존재로서 그녀의 놀라운 고결함을 전수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매우 강력한 방법으로 나에게 직접 들어오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녀는 그처럼 고결했을 뿐만 아니라, 대단히 관대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거기엔 꾸밈이 없었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거짓된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 고결함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천천히 내게 스며들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수년이 걸렸습니다. 나에게는 그녀가 가진 것과 같은 관대함이 없지만, 내 몸 속에 강력하게 그녀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고결함인 것 같은 공간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아마도 다른 어떤 것보다 그것이야말로 그녀가 내게 준 것일 겁니다.
타미: 실제로 당신을 현재 당신의 상태로 인도한 길이 당신이 가르치고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디야: 전혀 상관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길은 나를 지금 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준 바로 그 길입니다. 수련회를 이끌 때, 우리는 항상 하루에 다섯 내지 여섯 번 고요히 좌선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진실로 나의 영성이 내가 오로지 명상 수행에만 의존하지 않았을 때 출발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근본적인 전환의 시점이 있었고, 저는 더 이상 전적으로 수행에만 의존하지 않고 있습니다. 나는 명상 그 자체로서는 내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지만, 탐구라는 다른 요소가 도입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모든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사물들을 매우 깊고 매우 열심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당연히 깨달음은 항상 자연스러웠습니다. 깨어나는 방법에는 ABC가 없습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나는 이 두 가지 것들을 봅니다. 평온함과 고요함,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차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능력. 스스로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내가 하지 않은 어떤 것을 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않으며, 탐구의 전선에 머물러 있는 능력. 얼마 뒤 이러한 두 가지 접근법들이 모두 내 영적인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결합한 것이 바로 내가 가르치는 것입니다.
타미: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일종의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겁니까?
아디야: 그렇습니다. 길 없는 길이죠.(웃음) 하지만 네, 그것을 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은 ‘하나 더하기 둘은 셋’과 같은 길은 아니며, ‘그저 계속 걸어가면 산의 정상에 도달하게 된다.’라는 식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러한 의미의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하게 향상해 간다는 느낌이 있는 길이 아닙니다. 그것은 경험과 더불어 있는 길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개별적 자아를 떼어놓는 자기 자신과 함께 하는 길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을 의식하고 있든 그렇지 않든, 그 길은 분명 당신을 해체하고 있습니다. 침묵은 당신을 해체합니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침묵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단지 명상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거기엔 또한 직접적인 질문과 탐구라는, 이러한 해체의 보다 활발한 부분이 있습니다.
타미: 당신의 수련회에서, 당신은 종종 사람들에게 ‘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사용하여 탐구하도록 제안합니다. 나는 전에 그러한 제안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기 탐구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자들에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탐구하도록 제안합니다.
아디야: ‘나는 누구인가?’는 결코 내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그것이 좋은 효과가 있었을지라도, 나에게 ‘나는 누구인가?’는 어떤 개체를 암시합니다. ‘나는 무엇인가?’가 내게는 보다 제한 없이 열려있는 질문으로 느껴집니다.
타미: 당신은 사람들이 당신의 수련회에 와서 고요히 좌선하는 시간 동안 구부정한 자세로 앉아 있더라도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그것은 내가 했었던 수많은 수련과 반대되기 때문에 나는 그 점이 궁금합니다.
아디야: 그것은 내가 했던 수많은 수련과도 맞지 않습니다.
타미: 그렇다면 어째서 그러한 것에 대해 신경 쓰지 않으십니까? 우리는 열려 있으면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신체의 에너지 통로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앉아 있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까?
아디야: 네, 확실히 그렇습니다.(웃음) 나는 많은 사람들이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동안 깨어나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합니다.(웃음) 그리고 나는 항상 내가 관찰한 것, 내가 직접적으로 경험한 것을 사용합니다. 깨달음이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당신은 연꽃 자세로 앉아야만 하고, 척추를 곧추 세워야 합니까? 아닙니다. 어떠한 전통에서 전해진 것에 귀 기울이는 것보다 그저 관찰을 통해서, 단순히 실제로 일어나는 것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위해서 그러한 것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내게는 분명해졌습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어떤 일에 쓸모 있을까요? 물론 어떤 일들에는 쓸모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특정한 통로를 열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자체로 보다 열린 자세인 특정한 자세가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의 선(禪)적인 배경으로부터 발견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정확한 자세에 지나치게 열중한 나머지 그들이 비록 매우 열린 자세-정확한 수인(手印, mudra)을 한 연꽃 자세-로 앉았다 하더라도, 비록 모든 것이 외부적으로는 옳다 하더라도, 그들의 내부적 마음가짐은 사실 매우 굳어있고 매우 폐쇄적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이란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만약 마음가짐과 자세가 하나라면 그때 그것은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종종, 자세가 지나치게 강조되면, 자세는 옳을지 모르지만 마음가짐은 열려있지 않게 됩니다. 모든 힘을 가진 것은 내부적 마음가짐입니다. 만약 바른 자세를 갖추면 마음가짐도 따라올 것이란 가르침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타미: 수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초보 수행자들에게 일종의 집중 수행을 가르칩니다. 일단 사람들이 기초적인 집중 수행에 익숙해지고 나면, 그들은 약간 긴장을 풀고 탐구할 기회를 가집니다. 나는 많은 명상 지도자들이 집중 수련부터 시작한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수행자들은 명상 대신 생각 속에서 헤매느라 그들의 모든 시간을 써버릴까 걱정스럽기 때문입니다.
아디야: 아마도 그럴 겁니다.
타미: 하지만 당신은 당신의 수련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수련 없이 생각 속에서 길을 잃을까 걱정되지 않습니까?
아디야: 나는 명상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든 어떤 명상 전통에 속해 있던 사람이든, 자주 수련회에 참가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내가 가르치는 것을 이해할 순간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사람들이 조작하기를 멈추면 여러 차례 그들의 마음은 일정 기간 동안 어느 정도 정신을 빼앗기게 됩니다.
종종 수련회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들을 통제할 어떤 수단을 찾기 위해 나를 찾아오려 합니다. 내가 발견한 것은 그들이 더욱 조작하지 않는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보통 수년이나 수개월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마침내 상황이 자연스럽게 평온해지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내게 묻습니다. “제가 저의 주문을 외워도 될까요? 제 숨을 지켜보는 것을 해도 될까요?” 그러면 저는, “그럼요. 그것이 당신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렇게 하세요. 다만 차츰차츰 조금씩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나아가세요.”라고 말합니다.
비록 이론상으론 나중에 집중 수행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그것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경험을 십 년 동안 조작해왔다면 그것은 당신의 의식에 뿌리 깊은 습관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을 버린다는 것은 진실로 매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그렇게 되도록 되어 있다 하더라도 종종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생각에, 때때로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어떤 지도자들조차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정말 미치도록 내버려 두거나, 사람들이 스스로 그들의 경험을 조작하지 않도록 허용하게 되면, 그들의 마음이 결코 멈추지 않거나, 아니면 그들이 다른 어딘가에서 길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거듭거듭 반복해서 타고난 본래의 상태가 회복되기 시작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 스승인 스즈끼 노사는 황소를 통제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황소에게 아주 아주 넓은 들을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울타리를 너무 좁게 치지 마십시오. 어떤 의미에서 제가 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실로 거대한 들판을 만들어 놓으면 결국 마음도 도망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익숙한 것과는 다른 과정입니다만, 저는 사람들이 수련회에 와서 하루나 이틀, 사흘, 때로는 나흘 안에 자연스러운 이완과 고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을 거듭거듭 발견합니다.
타미: 당신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대신에 그저 허송세월하면서 멍한 상태로 있게 되지 않을까 걱정스럽지 않습니까?
아디야: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저는 제가 많은 지도자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절대로 제가 누군가의 학교 선생님이거나 부모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저는 깨달음에 대해 진실로 진지한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러한 진지함을 이미 갖추지 않았다면 그들은 엉뚱한 사람과 함께 있는 셈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들에게 진지함을 주지 않을 것이고, 그들로 하여금 진지한 척 애쓰도록 힘을 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전통에서 스승이 그들의 제자들을 진지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저도 압니다. 저는 그것이 어떤 식으로든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진지하지 않다면 모든 자세들과 모든 이러저러한 것들이 진실로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신이 야외 접이의자에 앉아서 하루 종일 구름을 쳐다보고 싶어 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일입니다. 제 말뜻을 아시겠습니까? 만약 그것이 당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라면 바로 그것이 당신이 할 일입니다.
만약 당신이 제게 묻는다면, 저는 감히 그것이 진지하고 그것이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체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바꾸려고 애쓸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여기에 있고, 만약 당신이 정말로 진실을 원한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뭔가를 가집니다. 진지함은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책임이 아니라 당신의 책임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진지함에서 온 것을 가지고 가라앉거나 헤엄칠 것입니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다면, 좋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저는 당신을 구출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저는 정말로 보모 노릇을 하지는 않습니다.
타미: 부분적으로는 그 자신의 진실에 대한 탐구에 진지함을 느끼지만 부분적으로는 불성실하다고 느끼는 사람에게는 어떤 말씀을 해주시겠습니까?
아디야: 대부분의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탐구를 시작할 때 실제로 그런 느낌을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분열되어 있다는 느낌을 갖습니다. 보통 제가 권하는 것은, 그들이 그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진실로 깊은 탐구, 아무 것도 정한 것 없이 그들이 진실로 원하는 것을 조사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어떠한 억측도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저는 종종 그 탐구를 당신이 생각하기에 당신이 원해야 하는 것이나, 어떤 가르침에서 당신이 원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원하는 것을 진실로 바라보십시오.
이러한 종류의 탐구는 해야만 하는 것들이 없을 때, 당신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이 없을 때에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진실로 혼자 힘으로 발견하려는 의지. 이것이 제가 성실함이란 말로 의미하는 바입니다. 만약 누군가 진실로 자기기 정말 원하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러한 탐구를 충실하게 해나간다면, 그러한 탐구는 그들로 하여금 훨씬 더 통합된 곳으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그들을 그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나에게는, 이러한 방법이 훈련을 통해 통합된 곳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사람들은 다른 어떤 것을 원하는 것보다 깨달음을 원해야 한다는 종류의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곳으로 가는 길을 속이거나 거짓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기 감정의 레이더를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그렇게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가르침들을 듣고는 그들이 있지 않는 곳에 그들이 있는 체 합니다.
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려고 노력합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사람들이 그들 자신을 깊숙이 살펴볼 수 있다면, 그들이 진실로 진정한 진실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란 사실을 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충분히 깊숙이 내면을 바라본다면 그들이 발견하게 될 것은 바로 그것이란 사실을 저는 압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들 존재의 토대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 에고의 핵심입니다. 에고조차도 그 가장 깊은 곳에서는 진실을 원하고 있습니다.
타미: 에고의 핵심이 진실을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제 생각에 나의 에고는 명성이나 권력, 돈과 지배력 같은 것들을 원합니다.
아디야: 그렇습니다. 그것은 그 모든 것들을 원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사실 보다 피상적입니다. 그것들은 피상적인 욕구, 피상적인 욕망들입니다. 물론 에고는 그 모든 것들을 원합니다. 당연이 그들은 그것을 원하지만, 만약 당신이 에고적 자아 속으로, 그것의 핵심 속으로 충분히 깊이 들어간다면, 당신은 실제로 진실을 만날 것입니다. 신성을 만날 것입니다. 그것의 불씨가 바로 에고의 핵심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오랜 시간 동안 제가 에고에게 많은 여유를 주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제게 “저는 제가 진실을 원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거나 저것을 가지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가서 그렇게 하세요.”라고 말합니다. 당신이 누군가에게,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것을 원할 수 있습니다. 계속 하세요.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어느 것도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생각을 제외한 전 우주의 그 어느 것도 당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원한다는 것에 대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계속 하세요.”라고 말하자마자 일어나는 일은 놀랍습니다.
가끔 당신이 누군가를 전적으로 허용할 때 참으로 심오한 어떤 것이 나온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갑자기 그들은 “내가 원하는 어떤 것도 원할 수 있다고 느껴지니까, 내가 원했다고 생각했던 것을 진실로 원한 것 같지는 않다. 허락받으니까, 우주와 하느님, 구루와 신성, 모든 것이 괜찮다고 하니까, 그것이 진정으로 내가 원한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라는 생각 속에 빠져듭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피상적 에고의 욕구들은 그러한 욕구들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느낌에 의해서 대부분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매우 불안정합니다.
사춘기의 젊은이들은 아빠 엄마를 흥분시키는 한 그들의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물들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빠 엄마가 전적으로 오렌지색 머리를 허용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머리를 오렌지색으로 염색하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거기엔 어떤 신비나 유혹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이 괜찮다는 것을 발견하지 이전까지 그것은 틀림없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저의 접근방법이 보통 영성이 가르쳐지는 방법과 완전히 반대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의 접근방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로 그들 자신의 본래 모습과 연결되도록 돕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영적 발견들이 완성되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본래 모습과 교감을 가질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해야만 하는 것들과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머물러 있다면, 그들은 거기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타미: 가끔 사람들이 자신의 진정한 본성이 알아차림 그 자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내게는 그것이 공허한 수사처럼 들립니다. 그것은 진실로 일종의 영적인 우회로입니다. 이런 사람은 분노나 신경쇠약으로 속을 끓이고 있으면서도 탐구가 무엇으로 인도하는지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떠들어 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디야: 그것이 제가 사람들로 하여금 명상을 하게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그것을 진실의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만약 일정한 시간 동안 고요히 앉아 있는다면, 조만간 당신의 자제력은 무너져 내리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수련회를 갖는 동안, 사람들은 조만간 다가와서 그들이 항상 가지고 있었던 두려움이나, 그들이 결코 바라보지 않았던 해결되지 않은 문제점이나, 그들이 여전히 20년 전에 일어났던 어떤 일에 대한 분노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저 고요함 속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곧 해체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탐구와 명상을 가르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신들의 진정한 본성에 깨어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미쳐버리지 않고서는 고요히 앉아 있을 수 없다면, 그들은 전혀 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깨어난 것이 아닙니다. 명상은 진실을 드러나게 해주는 오븐과 같습니다.
저는 가끔 사람들에게 그들로 하여금 명상에 능숙해지도록 만들기 위해서 명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이 명상을 하면서 조작하지 않을 때, 이것은 물론 수많은 명상가들에게는 새로운 것인데, 그러면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의 짐을 덜게 되고 진실 그 자체가 자발적으로 드러납니다. 내려놓여지는 것은 사람들이 그들의 영성을 억누르기 위해 사용해왔던 수많은 억압된 요소들입니다. 당신이 그저 않아서 조작하지 않으면, 당신은 진실로 당신이 보아야만 하는 것들을 보기 시작하고, 경험해야만 하는 것들을 경험하기 시작합니다.
그저 경험되기 위해서, 반드시 이해되거나 분석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의식하지 못하게 되지 않고 그저 경험되기 위해서, 30년 동안 그곳에서 기다려 왔던 오랜 경험들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제가 발견해왔던 것은 이러한 자연스런 마음의 짐을 더는 일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더욱 깊이 들어가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는 얻는다는 것입니다.
타미: 저는 당신이 깨달음-개별성에서 벗어나 알아차림 그 자체로 정체성이 근본적으로 전환되는 것으로 정의되는-은 사실 그렇게 드문 것이라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사실 깨달음이 드문 것이라는 이러한 믿음은 깨달음으로 가는데 장애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신은 깨달음은 드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디야: 네.
타미: 왜 이러한 믿음이 장애물입니까?
아디야: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우리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아주 평범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만약 깨달음은 오로지 매우 비범한 사람들의 몫이라는, 이런 무의식적이거나 의식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들에 대한 생각과 완전히 반대됩니다. 이러한 생각은 깨달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방해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깨달음의 표본들은 이런 사실을 조장합니다. 우리는 깨달은 존재에 대한 이미지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후광에 휩싸여 있으며, 긴 머리에 늘어뜨린 법복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들이 삶 속에서 무언가 하고 있다면, 그들은 항상 가르치고 있으며, 늘 제자들을 데리고 있고, 늘 그들의 발치에 따르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단순히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깨달음이 당신의 할머니나 당신의 식료품장수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게 매우 어렵습니다. 그것은 전혀 특별하게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몇몇 깨달은 존재들은 매우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하지만 아시는지요? 몇몇 깨닫지 못한 존재들도 매우 카리스마가 있습니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진실로 방해가 됩니다. 깨어나는 것은 비범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평범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로, 진실로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이 되는 것입니다.
타미: 제 생각에 어떤 사람들이 깨달음이 드문 것이라고 믿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이십 년이나 삼십 년 동안 명상을 해왔으면서도, 당신이 묘사한 종류의 귀중한 발견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언짢음이나 냉소, 그리고 깨달음은 오로지 극소수 몇몇에게만 해당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그들이 뭔가 잘못되었다고 믿어야만 하거나, 그들이 어떤 점에서 실패했다고 믿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디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타미: 아니면 그들이 따르고 있는 길이 효과가 없는 것입니다.
아디야: 아! 그것은 훨씬 더 위협적인 생각이군요. 물론 그것이 바로 저 자신의 깨달음에 기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행의 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의 길에 대한 나의 관계를 탓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사람들을 일깨우고, 떨쳐 버리게 하고, 스스로 묻도록 하며, 좀 더 개방적이 되도록 북돋우는 이유입니다. 질문하는 것은 두려워하지 마세요. 당신 자신을 살펴보고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변화하려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어떤 것이 효과가 없다면 옮겨갈 수 있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순수한 눈, 매우 순수하고 매우 열린 눈으로 보십시오. 그 순수함이 늘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경이로움입니다.
아디야샨티
미국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14년 동안 선(禪)을 공부했으며, 일련의 변화를 가져온 영적 깨달음 이후 스승의 요청에 따라 1996년부터 구도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의 가르침은 어떤 전통이나 틀에도 얽매이지 않아 자유로우며, 지금 여기에 늘 현존하는 우리의 본성을 분명하고 명쾌하게 가리킨다. 그리하여 그와 함께 공부한 많은 구도자들이 자신의 참된 본성으로 깨어났다. 서구 영성계의 차세대 지도자로 각광받고 있는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아내 묵티와 살고 있고,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널리 가르침을 펴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완전한 깨달음], [깨어남에서 깨달음까지], [춤추는 공(空)]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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