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공개통 하였으며 바다위 560m와 육지연결 180m 총길이 740m에 폭 10m이고 수면높이 18m의 아취형으로 당시 공사비 6억9천2백만원에 현대건설의 기술진이 서독식(西獨式) 공기잠함공법(空氣潛函工法)으로 건설하였고 통과하중(通過荷重)은 50M/T이며, 난간 기둥에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의 휘호 거제대교(巨濟大橋)가 새겨져 있다.
<구 거제대교>
<시래산 삼각점>
<시래산(258m)>
들머리를 제대로 못찾아 땀 좀 흘리고..
<통영과 분홍색 아치의 해간교>
<돌 탑>
왼쪽 돌탑아래로 직하산
<구 거제대교>
<저 멀리 통영>
<이정표>
<임도>
<폐왕성과 통영항>
고려 의종(高麗 毅宗) 24年(1170) 8月 30日 정중부(鄭仲夫)의 숭문주의 반란으로, 10月 산허리에 견내량(見乃梁 일명:전하도(殿下渡))을 내려보고 둘레 570m, 높이 5m의 산성(山城)을 쌓고 3년간 반란군의 추격이 있을까 감시하였으며 성내에는 천지(天池)가 있고 북측에는 제단이 있어 주민이 해마다 산신제(山神祭)를 올린 기성(岐城)이라 하였다.
명종(明宗) 3年(1173) 8月 경주(慶州)의 동북면(東北面) 병마사(兵馬使) 김보당(金甫當)이 왕의 복위를 꾀하다 정중부(鄭仲夫)가 보낸 이의민(李義旼)에 의하여 함께 살해(殺害)를 당하니 거제 둔덕기성(巨濟 屯德岐城)(구:폐왕성)(사적 제509호)이라 하였고
지방기념물(地方紀念物) 제11호(第11號)로 지정되고 성밑까지 임도(林道)가 개설되어 자동차로 등산하고 있다.
<기지국>
자룡님을 사진에 담고
<통영>
우측으로 보이는 페왕성
등로를 따라가다보니 폐왕성은 가지 못하고 이렇게 내려다 보기남 했다
<할미봉 정상석>
거의 보이지 않지만...
<巨峙>
<삼각점>
<개금치>
언양마을 건너 중통골에서 둔덕면 상둔리로 넘어가는 가파른 큰 고개로 깨금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는데 옛날 밤늦게 넘어가는 길손이 깨금을 따서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는데 밤늦게 돌아오는 길에서 도깨비를 만나자 깨금을 이빨로 깨무니 딱하는 소리에
둔덕면 동편에 위치한 산방산(해발 507.2m)은 서쪽으로 고려 의종왕이 거처했던 우두봉(할미봉?)과 마주하고
있으며, 산 입구에는 청마 유치환선생의 생가(生家)가 있고, 산골짜기에는 보현사가 자리잡고 있다.
산 정상부에는 암석으로 된 두개의 봉우리가 형제처럼 우뚝 솟아 사방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이들 암석은 능선을 따라 산중 복부까지 이어져 내려 오면서 군데군데 튀어나와 작은 바위 봉우리를 만들고 있다.
그외 아랫부분은 푸른 해송림으로 감싸고 있어, 이 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산방산이 바로 거제의 명산임을 직감할 수 있다. 산 정상부 주변에는 철쭉, 산철쭉, 진달래 등 철쭉류가 많아 봄이면 철쭉꽃으로도 유명하다.
<산방산 삼각점>
<산방산 이정표>
<지나온 대봉산>
<맨 뒤는 거제지맥>
<지나온 능선>
<산방산>
바위 암봉이다
<이정표>
<모내기가 끝난 논>
<방하마을에서 본 산방산>
대단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산이다
<청마 기념관>
<청마의 시 #1>
나는 "바위"라는 시를 참 좋아하는데...
<깃발〉(조선문단, 1936. 1)은 연민과 애수를 통해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를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의 '깃발'은 이상향에 대한 동경의 상징이다.
<청마의 시 #2>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로 시작되는
〈행복〉에서는 그리움의 대상에 대한 절망의 애수를 보여주었다
<청마의 시 #3>
<청마의 시 #4>
<청마 유치환(1908~1967)
아버지 준수(焌秀)의 8남매 가운데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극작가 치진(致眞)은 그의 형이다.
1922년 통영보통학교 4학년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야마 중학[豊山中學]에 입학했다.
이때 형이 펴낸 동인지 〈토성〉에 시를 발표했다고 하나 확인할 수 없다.
한의원을 경영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1926년 귀국, 동래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해 졸업했다.
이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학년 때 중퇴했으며, 사진관을 경영하는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1937년 통영협성상업학교 교사가 된 뒤 교육계에 종사했다.
1937년 문예동인지 〈생리 生理〉를 주재했고, 1939년 첫 시집 〈청마시초〉를 펴냈다.
1940년 가족을 거느리고 만주 옌서우 현[煙首縣]에 가서 농장관리인으로 일하다가 8·15해방 직전에 귀국하여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6·25전쟁 때는 문총구국대 일원으로 참여했다.
해방 직후 생명에의 열애를 노래한 점에서 서정주와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 불렸다.
1954년 경상남도 안의중학교 교장에 취임했고, 같은 해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이어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을 비롯해 경주고등학교·경주여자중학교·대구여자고등학교·부산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다. 1967년 교통사고로 죽었으며 묘지는 부산광역시 서구 하단동에 있고, 경주 불국사, 부산 에덴 공원, 통영 남망공원 등에 시비가
세워졌다.
<청마 유치환>
1931년 〈문예월간〉 12월호에 〈정적 靜寂〉을 발표해 문단에 나왔으며, 이후 35년 동안 14권에 이르는 시집과 수상록을 펴냈다. 그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은 허무와 애수이며, 이 허무와 애수는 단순히 감상적이지 않고 이념과 의지를 내포한다.
, 이러한 시세계는 첫 시집 〈청마시초〉(1939)와 제2시집 〈생명의 서〉(1947)에 잘 나타나 있다.
<청마시초〉에 나타난 허무는 정신편력과 더불어 다양하게 변모하는데 이것은 죽음에 대한 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여기서의 죽음의 의미는 2가지로 나뉜다.
첫째, 일제 말기의 극한상황과 결부되어 자학적 분노와 생명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이는 결국 종교적 자아로 승화되고,
둘째, 인간의 숙명인 죽음이 역설적으로 인간존재에 대한 연민과 애수로 나타난다.
이는 제6시집 〈보병과 더불어〉(1951)에 실린 종군시(從軍詩)들에 이어져 전장에서 애수에 젖기도 한다.
한편 제2시집 〈생명의 서〉에 실린 시는 만주에서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여기에 실린<생명의 서>와 〈일월〉에서는 허무와 고독을 극복한 강인하고 웅건한 의지를 보여주었고, 후에 대표시 〈바위〉로 이어져 순수한 본질적 자아로 복귀하려는 의지로 나타났다. 그는 후기에 와서 허무에 회의를 느껴 이를 극복한 다른 시세계를 보여주려 했으나 갑작스럽게 죽음으로써 이루지 못했다.
시인 스스로 "윤리를 갖지 않은 글, 윤리의 정신에서 생산되지 않은 문학은 무엇보다 첫째 그것을 읽어 줄 독자가 없을 것"이라
했듯이 현대시사에서 보기 드문 도덕적인 시인으로 평가된다.
시집으로는 〈울릉도〉(1947)·〈예루살렘의 닭〉(1953)·〈청마시집〉(1954)·〈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류나무와 남풍〉(1964) 등이 있다. 195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58년 자유문학상, 1962년 대한민국 예술원상과
44번접수
성서 홈플 탑승합니다~~
45번접수
박우정님 성서홈플탑승입니다^.~
46번접수
박우정님 개인사정으로 불참
46번 -현재까지
박진일님 게스트 2명 하나은행
47.48번 접수
김봉재님 일행두분더 참석입니다^.~
49.50번
박승회님 현대앞탑승이십니다^.~
51번
현재까지 50명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리며 산행신청 마갑합니다
대장님 51명입니다..적룡님게스트+1에 한명더포함해서
집안 일로 불참합니다.
가시는 모든분들 즐산하고 잘다녀오세요..
예비두분계십니다^.~
기침이 심해 여러분들께 피해가 될 것 같아 이번산행은 포기해야겠네요.
죄송합니다~~~
개인 사정으로 이번 산행 취소합니다.
다음 산행때 뵙겠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