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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1] 그림은 러시아 화가 니콜라이 게(Николай Ге, 1831–1894)의 1890년 유화 작품 〈"진리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와 빌라도(«Что есть истина?» Христос и Пилат)〉이다.[2] 정교회의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에도 이렇게 표기된다.[3] 실존인물은 맞지만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불분명하다.[4] 혹은 본디오 빌라도[5] 유대인들도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책임 넘기기에 동의하여 자기들에게 돌린다고 언급 했고.[6] 공동번역 성서에서의 명칭은 본티오 빌라도로, 가톨릭 성경에는 본시오 빌라도, 개신교 성경에는 본디오 빌라도로 기재되어 있다. 워낙 성경에서의 이미지가 유명해서 '빌라도'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당시 고전 라틴어 명칭은 '폰티우스 필라투스'다.[7] 교회 라틴어에서 단어 중간·모음 앞에 있는 -ti는 치경 파찰음([t͡si])으로 변이음화되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를 그냥 발음하기 편한 '시'로 음역함이 관례화되었다.[8] 1961년에 지중해변의 카이사리아에 있는 로마 시대의 반원형 야외극장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명각이 발견되었는데, 여기선 필라투스를 Praefectus라 한다.[9] 3명의 분봉왕(τετρααρχεω)들이 각각 1/4를, 시리아 속주에서 1/4를 상속 받음.[10] 즉 예수가 태어날 당시에는 유다이아 속주가 없었다. 때문에 루카 2장 1-2절에서 당시 통치자로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시리아 총독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니우스만 언급할 뿐 유다이아 총독은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세례자 요한의 본격적인 활동이 시작되는 3장 1절에서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있을 때"라고 하여 유다이아 총독을 언급한다.[11] 이후 AD 41~44년에 일시적으로 아그리파스(Ἀγρίππας) 1세가 다스렸다가, AD 44년부터 다시 로마 총독이 다스린다.[12] 시리아 속주는 유다이아 속주보다 규모가 더 컸을 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중요성 또한 더 높았다. 로마 입장에서는 다마스쿠스에 더 높은 직위의 행정관을 앉히는 것이 현실적인 결정이었다.[13] 헤게모니의 어원이 된 그 단어이며 정확한 뜻은 '이끄는 자'. 군주, 통치자, 총독 등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이 된다.[14] 3C 말 ~ 4C 말로 약 100년, 중간에 콘스탄티누스 왕조와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있음.[15] 로마사 연구자나 역덕후가 아니고서야 굳이 그럴 이유가 없다. 어차피 피지배민들 입장에서는 Praefectus나 Procurator나 Proconsul이나 모두 로마에서 오신 높으신 분일 뿐이고, 심지어 타키투스 같은 문사(文士)들도 엄밀하게 구분하지 않았다.[16] 시리아 총독이든 유다이아 총독이든 ἡγεμον(헤게몬)이다.[17] 유대 속주의 총독 정도는 오늘날 한국에 비교하면 군수 정도의 위치이다. 현직에 있을 때에야 로마 중앙정계에서도 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도 꽤 있었을 거고 그가 언급된 행정 문서도 제법 있었겠지만, 후대에 전해질 만한 행적이 없다면 당대의 행정용 기록들이 소실되면서 자연히 잊히는 것이다.[18] 예수가 살아있을 때도 젤롯이라 불리는 저항세력이 활동했고, 훗날 예수가 죽은 지 겨우 30년 뒤에 로마와 전쟁이 벌어질 정도로 저항이 심한 지역이었다.[19]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유대 고대사》[20] 폴 존슨 《기독교의 역사》[21] 이 자체는 로마 입장에서 별 문제가 안 된다. 로마 제국에서 지방관은 중앙에 바치도록 지정된 세금 액수를 맞춰 내는 것은 물론 예하 군단이 있을 경우 그 유지비용을 대야 했고 로마 고위층에 뇌물을 바쳐 승진도 하고 자리도 보전하고 일가도 먹여살려야 했다. 이 때문에 로마에서 지방관은 재원 확보를 위해 자체적으로 사업을 하거나 그로도 모자라면 자기 통치지역을 추가로 쥐어짜는 일이 흔했으며, 제국 측에서도 착복이 도를 넘는 수준이거나 반란을 유발해 진압비용이 더 들어가거나 하지 않는 한 굳이 터치하지 않았다.[22]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한 학자가 말하길 그에게 다시 예수에 대해서 물어보면, 오히려 누구냐고 반문했을 것이라 한다. 즉 예수 처형은 그에게 단순 업무 처리에 불과했다는 소리다.[23] 네로 사후 잠시 황제가 되었던 비텔리우스는 이 사람의 아들이다.[24] 티베리우스는 기원후 37년에 죽는다.[25] 발견된 이후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26] 이에 대해서 여러 야사가 전해져 오는데, 대체로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된 뒤 카이사레아 마리티마의 주민들에 의해 층계참 중 하나로 대체되어 사람들에게 그 이름이 밟히도록 저주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발견된다.[27] 로마 시대 라틴 문자는 23개로 현대에 쓰는 알파벳 26개보다 적다. U, J, W가 나중에 생긴 글자로 고대 로마 시절에는 U는 V로, J는 I로 표기했고, W도 V에서 파생되었다. 그래서 TIBERIÉUM이 아니라 TIBERIÉVM이고 JUDAEAE가 아니라 IVDAEAE인 것.[28] 건물의 이름으로 추정되는 단어. "황제 티베리우스께"라는 뜻이 되려면 TIBERIEVM이 아니라 TIBERIVS의 여격인 TIBERIO가 되어야 한다. 다만 건물 이름 자체가 결국은 티베리우스의 이름을 땄다는 점에서 의미상으로는 티베리우스에게 바친 건물로 보인다.[29] 세미콜론(;)이 아니라 그리스어 물음표(;)이다.[30] 고전 라틴어로 /ˈɛkkɛ ˈhɔmoː/(에케 호모)라 발음되나, 교회 라틴어로는 /ˈettʃe ˈomo/(에체 오모)라고도 한다.[31] 당시 유다이아 속주의 총독은 시리아 총독이 겸직했고, 시리아 총독은 다마스쿠스에 주재하기 때문에 그 대리인으로 총독의 수석부관인 예루살렘 주둔 로마 군단장이 맡았다. 당시 필라투스의 직책은 실질적 정치 권력과는 다소 거리가 먼, 일종의 임명직 고위공무원이었고, 때문에 다른 누군가를 일부러 사형시키는 것은 별로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32] 복음서에 따라 강도살인을 저지른 죄수로 나오기도 하고, 열심당원으로 히브리인 민족주의 혁명가로 나오기도 한다. 어느 쪽이 맞건 간에 공통점은 로마 제국에게 바라빠는 악질 범죄자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설마 죄인이라는 증거 자료가 아무것도 없는 예수를 죽게 하려고 이런 대흉악범을 석방시키겠냐?'라는 생각으로 바라빠를 들이민 것이라 할 수 있다.[33] 필라투스 입장에서 보면 민란은 무조건 피해야만 했다. 속주에서 민란이 일어날 정도의 사태는 황제에게 보고가 올라가도 이상할 게 없기 때문에 잘못하면 승진은커녕 직장에서 잘리고 본국으로 소환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서에서도 수 차례 언급되지만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이미 충분히 반감을 산 상황이었다.[34] 팻말을 두고 제사장들이 쓸 거면 자칭 왕으로 하라고 하자 필라투스가 한번 썼으면 된 거라고 했다는 부분도 요한복음에만 나온다.[35] 필라투스가 정말로 예수를 정신질환자로 보았다면 그의 행동이 말이 되는데, 역사적으로 적어도 사회적 약자를 사형에 처하는 일은 어지간하면 피하는 것이 암묵적인 관행이었다.[36] 성경 만화 파워 바이블에서도 필라투스의 독백으로 이 자는 반역할 위인이 되지 못해. 그저 몽상가에 지나지 않아. 이런 자를 죽여봐야 내 손만 더러워지지.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묘사가 실제 역사와 같고 다르고를 떠나서, 필라투스 입장에서 예수는 그냥 헛소리나 늘어놓은 정신병자 내지 사기꾼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37] 이때의 헤로데는 헤로데 안티파스이다.[38] 심지어 예수의 무죄를 선언하고도 "매질이나 해서 놓아줄 생각"(루가 23장 22절. 공동번역)이라 한 사람이 필라투스이다. 즉, 필라투스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선 무죄한 사람을 매질할 각오가 있었고, 예수가 무죄라는 발언은 필라투스 개인을 억울하다고 옹호하는 구절이 아니라 '로마 공권력을 통한 예수 무죄 인정'이 초점이다. 물론 이는 위에서 빌라도가 말했다시피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했음에도 군중들이 유죄라고 억지를 부리니까 '아무튼 처벌을 하면 만족하겠느냐' 라는 식으로 성난 군중을 적당히 달래주려고 했던 측면이 있기는 하다.[39] 공동번역성서를 쓰는 대한성공회의 기도서에서는 본티오 빌라도라고 한다. 기도서 개정 이전에는 가톨릭과 동일하게 '본시오 빌라도'라고 썼었다.[40] 《천주교 용어 사전》(최형략. 도서출판 작은예수) '본시오 빌라도' 항목[41] 아리우스는 유다가 귀향을 간절히 원함을 알아 곧 유대로 파견갈 필라투스의 측근 중 한 자리로 넣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사를 알 수 없어 애타는 유다는 더 기다릴 수 없다며 개인 자격으로 먼저 떠난다.[42] 흥미롭게도 1961년 영화 왕중왕에서는 다름아닌 헤로데 안티파스로 등장한다. 루카복음 23장 12절(평소 사이가 나쁘던 빌라도, 헤롯이 예수에 대한 처리를 놓고 한편이 되었다는 내용)을 다시 읽으면 꽤나 재미있는 부분.[43] 실제로 있는 '엘머 퍼드 증후군'이란 언어장애다. 시트콤 빅뱅 이론의 등장인물 배리 크립키 역시 이 증후군 증세가 있으며, 폴아웃 3에 나오는 무기인 웨이저 와이플의 유래가 되기도 했다.[44] 촬영 당시 병사 역을 맡은 엑스트라들이 웃음을 참지 못한 것은 실제 연기지만, 널리 알려진 설과 달리 대본을 보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45] 포르노 영화 제목 덕에 대중들에게는 통칭인 칼리굴라로 유명한 황제다. 과거에는 세네카와 수에토니우스의 조작된 기록으로 인해 막장 폭군이자 암군으로 유명했으나, 현재는 권력 강화 중 암살된 황제 내지 원로원과 공화주의자들의 반격으로 암살된 황제 등으로 재평가 중이다. 이런 흐름처럼 21세기 이후 발간된 논문들에서도 고대 로마인들의 기록, 당대 로마 원로원과 황제 본인 및 서민들의 황제 표기 등을 존중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고고학 기본서 등에 의거해 가이우스로 표기하면서, 칼리굴라라는 비공식 통칭을 각주에 집어 넣는 경향이 많아지고 있다.(이 황제와 동시대 사람인 유대인 필로, 요세푸스를 비롯하여 100년 뒤의 타키투스, 200년 뒤의 디오조차 이 황제를 가이우스로 기록하고 있다.)[46] 칼리굴라의 4년 치세 동안 로마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갈등 문제로 골머리를 앓았다. 그래서 유대인 필로는 알렉산드리아 사태 당시, 가이우스와 직접 대면했다.[47] 마태오 복음서 27장 19절: 빌라도가 재판을 하고 있을 때에 그의 아내가 전갈을 보내어 "당신은 그 무죄한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간밤에 저는 그 사람의 일로 꿈자리가 몹시 사나웠습니다."하고 당부하였다.[48] 다만 개신교 계열 라디오 방송인 극동방송의 방송인 주일 드라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다뤘을 때 필라투스의 아내의 이름을 클로디아로 설정했다.[49] 원래 드라마에도 자주 나오는 연기자였으나, 후에 신앙심이 깊어 목사가 되었다. 애마부인에 출연한 흑역사가 있다.[50] 저 말만으로 본다면 필라투스는 아르케실라오스와 카르네아데스로 대표되는 회의주의 전통의 가르침을 연상케 한다. 당시 로마 장교들은 저마다 다른 학파의 철학자들로부터 교육을 받곤 했다. 필라투스 역시 장교로 양성되는 과정에서 철학 교육을 받았을 개연성이 있지만, 회의주의 철학자의 밑에서 배웠는지 여부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다.[51] 다만 니체는 반 기독교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저 문구 때문만이 아니라 신을 죽였기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 확률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