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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후 29년 로마의 심플과 보리 이삭을 묘사한 폰티우스 필라투스 동전
폰티우스 필라투스(본디오 빌라도)
기원후 26년에서 36년 사이에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발행한 청동 동전(또는 '프루타')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관성과 유대인 역사에 대한 그의 개입 때문에 기독교인들과 유대인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습니다.카이사레아에서 발견된 그의 동전과 필라투스 비문의 증거는 폰티우스 필라투스가 유대인들에게 불쾌감을 주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유대에서 로마 종교의 형태를 촉진하기로 결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필라투스가 발행한 동전은 그의 전임자들의 동전과는 달리, 심플럼과 리투아니아와 같은 제국 숭배와 관련된 로마의 상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필라투스가 유대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다면 황제의 머리를 그의 동전 위에 놓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대신, 그는 보리 세 이삭을 묘사했습니다.세 번째 유형은 교차된 종려나무 가지와 휘감긴 [citation needed]비문을 보여주었습니다.
의식은 전조의 지팡이였고, 번개, 새의 비행 등과 같은 자연 현상을 해석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단순자는 제물을 바칠 때 사용되는 국자였으며 로마 사제직의 일반적인 상징이었습니다.이 상징들은 그들이 [citation needed]일상적으로 다루어야 하는 동전에 놓여진 유대인의 종교적 감성을 불쾌하게 할 것이 보장되었습니다.
1. 개요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 대중적으로 본디오 빌라도로 알려져있다. 그는 로마 제국 제2대 황제 티베리우스 시대의 군인으로 AD 26년부터 36년까지 유다이아(유대) 속주 총독(프라이펙투스 유다이아, Praefectus Iudaea)이었다.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유명하다. 다만 복음서에서는 그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리고 있으며, 필라투스는 도리어 예수를 사형시키지 않기 위해 유월절 유대인 죄수 석방 관습까지 거론하며 어떻게든 애썼지만 마지못해 승인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예루살렘 일대는 이 사람이 어느 정도 자율적으로 통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최고의회에 소속된 사제들 중 "열심당원에게 암살당했다"고 기록된 이들이 있는 건 이러한 배경 때문이다.
2. 이름
폰티우스 필라투스(빌라도)는 그의 본명이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라틴어 표기의 -ti 형태를 '시'로 음역하는 관습 때문에 "본시오 빌라도"가 되었다.
폰티우스는 '다섯째'라는 의미로 삼니움족의 부족이름 중 하나이다. 필라투스는 삼니움족의 가문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 또는 로마의 창인 필룸에서 유래한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원래 그의 조상은 삼니움족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삼니움 전쟁은 예수가 태어나기 290년 전에 끝났고 진작에 로마에 합병되고 로마에 동화되었으니 삼니움족 출신 같은 건 의미 없고 그냥 로마인이다. 폰티우스는 로마시대에는 꽤 흔하게 쓴 이름으로 키케로의 친구이자 호민관을 지냈고, 카이사르 암살자 중 하나인 폰티우스 아킬라라는 사람도 있었다.
3. 직위
필라투스의 직함은 유다이아(Iudaea) 속주의 총독(Praefectus)으로서,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다 중부 지방을 다스렸다.
본래 이 지역은 헤롯 임금의 사후 4개로 분할된 왕국 중 헤롯 아르켈라오스(Ἡρῴδης Ἀρχέλαος)가 다스리던 땅이었다. 그러나 아르켈라오스가 폭정으로 AD 6년에 교체되고 로마제국 유다이아 속주가 되어 총독이 파견되었다.
필라투스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의 여부에 대해서 문제 제기가 있다. 필라투스는 유다이아 속주를 관할하지만, 또한 더 큰 속주인 시리아의 총독 밑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그의 직함을 총독으로 번역하는 게 오역이 아니냐는 것. 일단 라틴어로 쓰자면 필라투스는 Praefectus이고 시리아 총독은 Proconsul(직역하면 '전직 집정관')이므로 구분이 된다. 당시 필라투스의 직함은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군단장이자 시리아 Proconsul의 수석부관 겸 유다이아 속주의 Praefectus이었다.
그러나 당대 사람들도, 성경의 저자들도 속주 총독들의 직함 구분을 엄밀히 하지 않았다. 타키투스는 필라투스의 직함을 엄밀하지 못하게 Procurator라고 전하며, 누가 복음서에서는 시리아 총독과 유다이아 총독 모두 ἡγεμον(헤게몬)으로 적는다.
사두정치 ~ 테오도시우스 1세 시대의 로마사를 이야기할 때 정제와 부제를 가리지 않고 이해가 쉽도록 모조리 황제로 번역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경우를 보면 무작정 오역이라 몰아붙이긴 힘들 것이다. 성경의 저자들과 당대 사람들도 총독 직함의 구분을 엄격히 하지 않았는데, 성경의 원문을 벗어나서까지 독자를 헷갈리게 번역할 필요는 없다.
4. 역사적 기록
로마인임에도 정작 성경 외에 그의 신원에 대한 로마 쪽의 기록은 없는 수준이며, 성경 외의 그에 대한 로마의 기록은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가 연대기에서 네로의 기독교 박해를 설명하면서 "티베리우스 황제 시절 예수라는 사람이 폰티우스 필라투스에게 처형당했다" 정도로 짧게 언급하는 정도밖에 없다. 오히려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던 유대 지역의 역사가들의 기록을 통해 그의 행적을 살펴봐야 하는 실정이다.
유대 철학자 필로는 필라투스를 "거칠고 악의가 있으며 잔인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으며,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유대 고대사에서 "필라투스가 부임하고 나서 곧 유대인들을 적대하였다"고 지적한다. 유대 고대사는 당대의 기록 중에 예수와 폰티우스 필라투스에 관해 쓴 거의 유일한 문헌이다. 그의 행적에 대한 유대인 역사가들의 평가는 좋지 않은데, 필라투스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유혈 진압하는 군사적인 탄압 외에도, 유대교 성전에 로마식 신상(神像)을 달았다가 반발로 철회한다거나, 성전의 자금을 가져다가 로마식 수도관을 건설하는 정책을 세웠다가 유대인들의 항의에 직면하기도 했다.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서기 26년에 발레리우스 그라투스의 후임으로 유대 지방에 부임했다. 이 시절 유대 지방은 심심하면 폭동을 일으키는 험지라 로마 제국에서 골치 아픈 지역으로 여겼고, 이전 로마 총독들은 번번이 안정적인 통치에 실패했기에, 당시 로마 황제였던 티베리우스는 만만한 인물을 파견하지 않았다. 이때 로마 제국에서 유대인에 강경책을 쓰자는 세야누스의 추천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임명받았다고 한다. 당시 로마 총독의 임기는 관례적으로 3년이지만 티베리우스가 이례적으로 장기집권을 맡겨 필라투스는 서기 36년까지 10년 동안 유대를 통치했다. 이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지론 때문이기도 한데, 지방관들을 극히 불신하던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파리'에 비유하며 "상처 부위에 새 파리들이 와서 빨아먹는 거보다, 처음부터 빨아먹던 파리들이 계속 빨아먹는 편이 낫다"면서 필라투스에게 장기간 통치를 보장하여 힘을 실어주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세야누스의 예상대로 강경한 정책을 자주 시행했는데, 우선 부임할 때 카이사레아 지역에 주둔하던 로마 군대를 유대 왕국의 수도이자 유대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으로 재배치했고, 더불어 유대의 행정 장관 중 처음으로 유대인이 우상으로 여기며 혐오하던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으로 들여왔다가 유대인들의 강경한 반발로 다시 철수시킨 일도 있었다. 더불어 치수공사를 통해 예루살렘에 물을 끌어왔는데 이것이 성수 장사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불만을 내비쳤다. 유대인들이 필라투스에게 항의하는 집회를 계속 열었는데, 처음에는 그냥 해산시켰지만 갈수록 먹히지 않았고, 결국 진압은 유혈사태로 비화되지만 일단은 소요를 잠재우는 데 성공한다.
그즈음 예수가 처형당한다. 그러나 기록을 토대로 판단해볼 때 필라투스가 유대 사회를 혼란에 빠뜨린 예수를 처형하는 데 주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로마 제국은 이미 유대인들을 억압하고 있었다. 현재 유대교 학자들은 당시 산헤드린 재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성경 구절이 산헤드린 공회법정의 재판절차와 권한과 실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기독교 측에서는 이 불일치를 종교권력이 사법절차에 개입하여 정상적인 절차를 망칠 정도로 부패한 결과라고 본다. 사실 기독교측의 주장을 빼더라도 전근대 시절 그 어떤 나라도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엄정한 절차대로 모든 일이 처리되기는 어려웠다. 필라투스가 손을 씻은 것과 유대인들이 적극 처형을 주장한 것이 후대 복음서 성립 시 기독교를 거부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섞여 왜곡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관대하지도 않았다. 앞서 총독으로 부임하자마자 유대인에게 반감을 샀고, 통치시기에도 유대인의 풍속으론 유대인들의 유월절 기간에 군기나 장비에 있는 황제의 형상을 가려야 하지만 일부러 대놓고 무시했다. 그리고 더군다나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두가이인들에게 정기적으로 상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따로 성전자금을 유용하기도 했는데 유대인 풍속에 따르면 성전자금은 고아나 과부들의 구휼자금으로 써야만 했다. 그런데도 착복하고 나서 수로작업에 썼다고 변명했다. 그럼에도 수로작업에 들어갈 공사비가 모자라 다시 세금을 걷었다. 이처럼 필라투스는 유대인들에게 정직하지도 유화적이지도 않았다. 예수의 사형 집행 과정에서도 어떤 주저함이나 망설임조차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종교 집회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는 과정에 티라타바라는 마을 근방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사마리아인들은 시리아 총독인 루키우스 비텔리우스에게 항의한다. 비텔리우스는 필라투스를 10년 동안 있었던 유대 지사에서 해임시키고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유대에서의 폭력사태에 대해 답하도록 로마로 보낸다. 하지만 그가 로마에 도착할 때, 티베리우스가 죽는다.
유대인들은 사두가이인, 바리사이인, 열심당원 모두 가리지 않고 필라투스를 증오한 걸로 보인다. 예수뿐만 아니라 다른 폭동에서도 필라투스는 유대인의 종교를 무시했고, 유대인들은 이런 간섭에 대해서 반감이 컸다.
4.1. 카이사레아 석판 유물 출토
생몰년도나 어디서 나고 어디서 죽었는지도 불명으로, 워낙 기록이 희박한 탓에 한때 기독교에서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는 설도 있었다. 그러나 1961년 이스라엘 카이사레아에 있는 로마 시대에 지어진 야외극장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이 포함된 라틴어 석판이 발견되어 그가 실존 인물임이 고고학적으로도 증명되었다.
이 석판은 극장으로 들어가는 입구들 중의 하나에서 계단의 층계참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발견될 당시 사람들이 밟고 다녀 이미 돌의 왼쪽 부분이 깎여나간 상태였다. 명각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괄호 부분이 사람들이 지나다니면서 깎여나간 부분이다. 깎여나간 부분들도 비슷한 헌정 문구가 새겨진 다른 온전한 유물들의 사례를 참고해서 채워넣을 수 있다. 그러니까 폰티우스 필라투스 본인이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바치는 의미로서, 석판을 새겨서 야외극장에 놔뒀다는 말이다. 이 점에서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기독교인들이 부른 칭호나 호칭 같은 게 아니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불린 그의 본명이다.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폰티우스 필라투스의 이름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석판을 헌정했을 리는 없다. 석판의 글씨가 2000년이 지나도록 컴퓨터 폰트처럼 반듯한 것으로 보아 실력있는 석공이 새긴 것이 분명한데, 본인이 만든 게 아니면 누가 돈을 들여서 이런 걸 만들겠느냐는 것. 이걸로 그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도 증명되었다.
기록이 부실한 점을 보면 크게 별 볼일 없는 인물이 예수를 처형한 것 때문에 현대까지 알려진 것처럼 보인다. 로마 제국의 지방 총독 휘하의 관료는 많았고, 통치권을 행사한 지역 내에서는 유명인사였겠지만,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그냥 흔하디흔한 관료 중 하나였다. 실제 이 당시의 필라투스와 비슷한 급의 인물 가운데서 현대까지 알려진 인물은 거의 없다. 이 시대의 인물들 가운데 현대까지 인지도가 높으려면 황제 아니면 뭔가 정말로 비범한 군사적·문화적 업적을 세운 사람 정도. 아무리 황제라도 별 업적이 없으면 인지도가 낮은 경우가 많은데, 지방 관료 정도 지위로 현대까지 이름을 알린 건 상대가 다름 아닌 예수였다는 점 하나 덕분이다. 뭐 사실 아우구스투스나 티베리우스 같은 당대의 황제들도 아무리 유명하다고 하더라도 2000년이 지난 뒤인 현재를 기준으로 하여 예수에 비하면 인지도가 높다고 할 수 없다. 당장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살아 있던 당시 로마 황제가 누군지도 연표 따져보기 전엔 잘 모른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예수가 누군지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는 점에서 예수를 죽였다는 오명은 좀 억울한 측면이 있다.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는 지역들 가운데 예수와 같은 종교 지도자는 흔했고, 필라투스 입장에서는 그저 민중소요나 일으키는 주동자들을 지방 토호들 여론에 따라 처형한 것이다. 당시 민중소요는 드물지 않게 일으났으며, 이에 대한 진압과 지도자의 처형도 비일비재했다. 그 상대가 하필이면 후대에 세계 최대의 신자를 거느리게 된 종교의 신앙 대상이 된 예수였기 때문에, 2천 년이 넘는 지금까지 이름(어떤 면에서는 악명)을 남기게 된 것이다.
예수를 심문하면서 한 말이다. 이에 예수는 묵묵부답으로 대응한다. 그 다음 빌라도는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런 죄목도 찾지 못하였다."라고 말한다. |
예수는 본래 신성모독죄로 기소되어 유대 지방 최고 의회(성전)에 출두했는데, 현지인 의회에서는 사형을 내릴 권한이 없었고 로마인들은 여사제와 간통한 정도가 아닌 바에야 신성모독으로 사형을 선고하는 일이 드물어서 성직자들은 예수를 국가반역죄로 몰아 총독부로 보냈다. 성경에 따르면, 필라투스는 예수의 여러 차례 무죄를 확인했으나 끝내 대제사장 카야파 파벌들에게 떠밀려 예수의 사형집행을 방관했다.
[빌라도가 예수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마태오 복음 21장에서 26장의 판본별 표기]
신약성경의 마태오의 복음서와 마르코의 복음서에서 필라투스는 바라빠를 처형하느냐 예수를 처형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예수를 죽이라는 유대인들의 의견에 떠밀려서 대충 예수를 사형시키기로 결정하고,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하며 손을 씻은 비굴하고 교활한 법조인 정도로 묘사된다. 다만 비굴하다기에도 억울한 면이 있는데 사실상 저기서 "예수 대신에 바라바가 지은 죄가 더 많으니 바라바를 죽여야 맞소" 라고 한마디라도 했었다간 폭동 진압 도중 성난 군중에게 폭행당해 사망하거나, 살아 남더라도 폭동 유발로 인해 자리를 물러나게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선택지 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나안 지방의 명절인 유월절에는 광복절 특사 비슷하게 죄수를 1명 풀어주는 전통이 있었다는 배경 설명이 나오는데, 진위 여부를 놓고 여전히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고대 이스라엘에 그런 관습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오직 신약성경의 4대 복음서에만 등장할 뿐 다른 그리스도교/유대교 관련 전승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 선택 자체가 후대의 창작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식민 지배로 불만이 누적되어 있을 유대인들을 위해 유대계 죄수를 명절에 하나 석방한다는 것은 나름대로 말이 되는 조처이기에 실제로 그런 제도가 있었을 거라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원래 고대 로마와 고대 그리스에 존재하던 풍습이라는 이론도 있다. 풍습이란게 수십 수백년을 존속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보다 훨씬 수명이 짧았던 고대인들 입장에서 수년 이상 지속된 행사라면 당연히 의례적인 관습이라고 여겼을 수 있다.
필라투스는 예수의 처형을 막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물임에도 예수가 죽는 것을 방관했다. 속주의 최고 의회에서는 사형 선고를 내릴 권한이 없었으므로, 필라투스가 끝까지 거부하면 예수는 정치범으로 기소되지 않을 수 있었고 사형 선고를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한편 요한의 복음서 19장에 보면 필라투스가 꽤나 적극적으로 예수를 풀어주려고 힘썼다는 투로 기록되어 있다. 필라투스는 "내가 몇 번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예수는 죄가 없으니 태형만 하고 풀어줄 것이다"라고 했고, 필라투스의 아내 역시 남편에게 예수의 무고를 증언하며 놓아주기를 권했으나 당시 유대인들이 적극적으로 십자가형을 주청하며 민란이 나려고 했다는 언급이 있다.카야파와 성직자들은 강력하게 필라투스를 압박하여, "만일 그자를 놓아준다면 장관 & 지사님은 카이사르의 충신이 아닙니다."라고까지 했다. 그들이 필라투스를 압박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의 죄목에 있다. 예수의 죄명 패에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되어있었는데, 이는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유대인의 왕을 사칭한 것이 죄라는 이야기이다. 왕을 사칭한 반역자는 사형으로 다스려야 옳다는 것이 유대인의 논지. 그러나 필라투스가 보기에 예수는 신의 아들을 자칭하는 정신질환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필라투스의 관점에서는 죄가 되기 어려웠다.
그러나 성경 텍스트가 필라투스를 억울한 제3자라고 옹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실제로 복음서 내부의 몇몇 구절을 보더라도 필라투스는 오히려 유대인들의 반란 등에 대해서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 진압을 잔악하게 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미 복음서에서도 필라투스가 이스라엘인을 학살했다는 구절이 있는데, 루가의 복음서에 필라투스에 대한 부정적 언급이 많다.
무엇보다, 복음서에서 필라투스가 예수의 무죄함을 언급한 건 문맥상 말 그대로 "로마법상 국가반역죄가 없다"라는 의미지, "필라투스는 예수를 변호했다"가 아니다. 예수의 무죄가 로마 공권력의 입을 통해 인정되었다는 게 중요한 것이지, 여기서 '억울한 제3자 필라투스'라고 독해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예수가 무죄라는 걸 알고 있는 필라투스가 졸속 재판으로 무책임하게 사형을 방관했다는 점에서, 복음서가 묘사하는 필라투스는 예수의 유다인 적대자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상당히 악질이라 할 수 있다. 필라투스가 회개했다거나 하는 이런저런 전승들은 있지만, 비평적 성서주석학이 탄생하기 훨씬 전에도 필라투스의 재판에서 예수 죽음 책임의 일정 지분을 물어왔으며, 그렇기에 사도신경에서 "passus sub Pontio Pilato(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라 적은 것이다.
5.2. 신경에서의 언급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라틴어 원문에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적지 않고 "sub(아래에서)"라 적고 있다. 한국 가톨릭과 대한성공회에서는 이러한 원문을 살려 번역하였다. 반면 개신교에서는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의역하였다.
이러한 의역 때문에 개신교의 번역이 오역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sub Pontio Pilato라는 말은 단순한 시대 명시라기보다는 '십자가형'을 판결한 공권력의 책임자로서 필라투스를 무시한 것이므로, 무작정 오역이라 하기는 어렵다. 또한 복음서의 내용으로 보자면, 자초지종이 어찌되었던간에 채찍질의 형벌도 필라투스로부터 내려진 것이고 최종적으로 필라투스가 사형 판결을 내린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그러한 번역이 사실관계를 왜곡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 이외의 자료에서 본다면 필라투스는 우유부단하지도 않고 예수의 재판에 사형을 막아보려고 한 사람은 아니다. 가톨릭에서도 필라투스를 무죄하다 여기지도 않으며 "그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선고한 자이기도 하다"는 식으로 당연히 책임을 분명히 한다. 아래 교리서 서술에서 보듯, 예수의 수난은 유다인 지도층이 씌운 누명, 필라투스의 졸속 재판, 비정치적 메시아를 거부하는 백성, 도주하는 제자들 등 죄의 다양성이 드러난 사건이기에, 필라투스의 무책임함도 이러한 맥락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