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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옹주 묘역이지만 입구에는 충정공 권협 공 묘역으로 소개하며 아래부분애 정선옹주 묘역 임을 안내한 이유는 이곳이 안동권씨 문중에서 소개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묘역 배치도는 다음과 같다.
묘의 배치 순서로 본다면 아버지(길흥군 권신중)와 아들(부마 권대임)의 자리가 바뀌어 있는데 바뀐 이유는 아들이 부마이기도 하지만 정선옹주가 길흥군(1633년)보다 일찍 요절(1614년)하였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 제6열 맨 위 첫번째는 충정공 권협과 부인 전주최씨의 합장묘
■ 충정공 권협 1553년(명종 8)~1618년(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상(常)이며, 어머니는 나운걸(羅云傑)의 딸이다.
1577년(선조 10)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전적·사예·승문원·춘추관 등의 벼슬을 거쳐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1589년 각 도에 괴질이 발생하자 함경도에 파견되어 백성들을 돌보고 제사를 올렸다. 임진왜란 때에는 장령으로서 선조에게 서울을 끝까지 지킬 것을 강력히 건의했으나 왕은 거절했다.
<선조는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자신이 차고 있던 패검(佩劍)를 하사했다고 함>
1596년에 교리·시강관을 거쳐 이듬해 응교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사태의 시급함을 알리고 원병을 청하였다. 이때, 명나라 병부시랑 이정(李楨)이 우리나라의 지세를 알고자 하므로, 산천의 형세와 원근을 도면에 그려가며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었으며, 이로 인해 보병과 수군을 얻고 군량을 조달하게 했다. 돌아와서 예조참판·호조참판이 되었으며, 황해도관찰사로 나아갔다.
1604년 대사헌이 되었고, 특명을 받아 선무원종공신으로 봉해지고, 이듬해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으며 전라도감사가 되었다.
1607년 예조판서를 거쳐 1609년 종묘영건을 감수한 공으로 정헌대부가 되었으나, 광해군 때에 홍문관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두문불출하다가 1618년 세상을 떴다. 그의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 제5열 두번째는 정선옹주와 길성위 권대임(부마) 합장묘
■ 권대임(權大任)1595년(선조 28)∼1645년(인조 23).
조선 중기의 서예가.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홍보(弘輔).
조부는 길창군(吉昌君) 예조판서 권협(權悏)이고, 부친은 길흥군(吉興君) 권신중(權信中)이다. 어머니 증정경부인(贈貞敬夫人) 이씨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 이여(李璵)의 7세손이자 사평(司評) 이정필(李廷弼)의 딸이다.
서예(書藝)에 뛰어나서 선조가 칭찬하며 여러 번 상을 내렸고, 승진하여 통헌대부(通憲大夫)에 이르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공주(公州)로 피난 가는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고, 그 공으로 봉헌대부(奉憲大夫)가 되었다. 1635년(인조 13) 아버지 3년 상이 끝나자 선무공신(宣武功臣)의 적손(嫡孫)으로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 가는 어가를 호종하여 숭덕대부(崇德大夫)로 승진되고 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1639년(인조 17)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갔을 때에 행장에 든 재화를 다 털어서 포로로 잡혀갔다 돌아오지 못한 노약자들을 속환(贖還)하여 돌아왔다.
정선옹주(貞善翁主)와 결혼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고, 돈녕부봉사(敦寧府奉事) 권진(權瑱)을 낳았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유록대부(綏祿大夫)를 더하여 정일품이 되었다.
묘소 앞에 장명등이 있는 것도 일품 이상이라는 점인 것 같다.
▶ 제4열 세번째는 길흥군 권신중과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
■ 권신중(1575年 선조8년∼1633年 인조11년)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군집으로,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태복사 주부와 형조좌랑을 거쳐, 강서현령, 한성부판관, 창평현령, 김제군수, 여산군수, 단양군수, 통정대부 풍덕군수를 지내며, 청렴결백하게 관직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59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길흥군에 세습하여 봉해졌고, 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부인 이씨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세종의 별자인 광평대군 이여의 칠대손이며, 사평 이정필의 딸이다. 슬하에 3남 1여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선옹주와 혼인한 길성군 권대임, 권대명, 권대식이다.
서울특별시 구로구 궁동 산 1-66번지에 위치한 묘역은 배위 전주이씨와 합장된 단분으로 구성되었다. 봉분 앞에는 장방형 비좌에 월두형 비신을 세운 묘표가 세워져 있다. 묘표 전면에는 『유명조선증 의정부 우의정 길흥군 행통정대부 풍덕군수 권신중지묘증 정경부인 전주이씨좌』라 기록되어 있다. 묘표 앞에는 두 장을 포개놓은 상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과 문인석이 세워져 있다. 봉분 우측에는 장방형 비좌에 옥개석을 갖춘 묘갈이 세워져 있다. 1640年(인조18년)에 세워진 권신중 묘갈의 비문은 조선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미수 허목이 글을 지었으며, 개성부유수 윤심이 글씨를 썼다. 묘갈 전면에는 『증우의정길흥군권공묘갈』이란 전액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권신중의 가계와 관역에 대해 간약하게 서술되어 있다.
▶ 제3열 네번째는 권진과 부인 남양홍씨의 합장묘
■ 돈령부 봉사 권진 (1613~1659)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옥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증조 예조판서 선조 때에 훈노로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길창군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충정이다. 조부 권신중은 통정대부로 군수를 지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고 길흥군에 봉해졌다. 부친 권대임은 선조대왕의 딸 정선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가 되며, 부인은 남양홍씨인데 아버지는 감사 홍헌이며, 조부는 직제학 홍종록이다. 약관에 先王의 외손으로 선공감 봉사에 제수되었으나,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리고 또 돈영부 봉사(현7급)에 제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초야에서 학문에 힘쓰다가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슬하에 2남2여를 두었다.
배위 남양홍씨와 단분합장이고 封墳 앞에는 혼유석, 상석, 고석, 향로석이 배치되어 있으며 좌우에 망주석과 문인석이 각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봉분 앞 중앙에는 장방형 비좌에 옥개석을 갖춘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비는 1694년(숙종20년)에 건립되었으며 홍만조가 비문을 지었고, 박경후가 글씨를 썼다. 묘비 전면에는 『유명조선조봉대부행돈녕부봉사권진지묘 영인남양홍씨부좌』라 기록되어 있다. 후면에는 권진의 효심과 인품, 가계와 관역에 대해 간단하게 서술되었다. 묘비의 크기는 높이 155cm, 너비 62cm, 두께 27cm의 규모이다.
▶ 제2열 다섯번째는 권이경과 부인 초계정씨의 합장묘
■ 길평군 권이경(1638~1686)
조선왕조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길창부원군 충정공 권 협의 현손으로, 증조부는 길흥군 권신중이며, 조부는 선조대왕(宣祖大王)의 부마도위 길성군 권대임이고, 아버지는 권 진이며, 어머니는 증 숙부인 남양홍씨이다. 배위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이다.
함열현감(咸悅縣監)으로 지냈고, 전주진관병마절제도위(全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사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추록되면서 이조참판으로 추증되었고, 겸하여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추증되었으며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으로 추증되었다.
▶ 제1열 여섯번째는 권세태과 부인 안동김씨의 합장묘
■ 권세태(1659~1722)
조선왕조 중기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길창부원군 충정공 권 협의 6대 손으로, 증조부는 길흥군 권신중이며, 증조부는 선조대왕의 부마도위 길성군 권대임이고, 조부는 권 진이며, 아버지는 길평군 권이경이고, 어머니는 증 정부인 초계정씨이며, 배위는 숙부인 안동김씨이다.
아버지 길평군 권이경의 장자로 태어나 세자익위사 익찬(世子翊衛司翊贊)을 지냈으며, 수원진관병마동첨절제사(水原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지냈다.
묘의 석물들
● 능, 원, 묘소
능 : 왕 또는 왕비의 무덤
원 : 세자, 세자비 등 종실의 무덤
묘, 묘소 : 일반 백성들의 무덤
풍수지리에서 산 사람의 집은 양택으로 묘소는 음택이라고 부른다.
입수도두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묘가 있는 곳의 가장 높은 공간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의 얼굴에 비유하면 이마 부위이다. 풍수지리 사상으로 알아보면 산천의 모든 기가 입수도두에 모였다가 날개 모양의 선익으로 전달된다고 보았다고 한다.
봉분(封墳)이라는 것은 풍수에서 혈(穴)에 해당하는 것이며 다른 말로는 분상이라고도 한다. 봉분은 큰 바가지를 엎어놓은 듯한 형상을 하고 있는데 이는 주변과 묘를 구분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사선 또는 선익은 묘소 뒤를 흙으로 둘러쌓아서 마지 병풍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며 이것을 잔디의 성이라는 뜻의 사성(莎城)이라고 한다. 사성이란 무덤 뒤에 반달 모양으로 두둑하게 둘러싼 토성을 말한다.
사성(莎城)의 역할은 봉분의 혈의 기운이 좌우로 흩어져 나가는 것을 막아주는 것이어서 이 사성을 단단하게 쌓아줄수록 좋다고 여겼다.
주인을 알 수 없을 경우에는 총(塚)이나 분(墳)으로 구별하는데 총(塚)은 다른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은 특이한 유물이 발견된다든지 다른 무덤과 차별화되는 점이 있을 때 붙이는 이름이며, 당시 지배세력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분(墳)은 특징이 없는 평범한 무덤을 말한다. 보통 이런 무덤의 경우 고분군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체로 00동 몇호분, XX동 몇호분하는 식으로 무덤이 위치한 동네와 고유번호로 이름을 정한다.
▣ 매장(埋葬)을 하는 이유는
① 지하에 저승이 있다는 신앙에 따라,
② 사자(死者)를 겁내 관계를 끊기 위하여,
③ 움집[竪穴住居] 생활의 유풍에서,
④ 단순히 위생적인 면에서 등의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②의 이유가 가장 유력하다. 시체를 단단히 묶어서 굽혀묻기[屈葬]를 하거나, 펴묻기[伸展葬]를 할 때도 시체 위를 무거운 돌로 눌러 놓는 것은 사자의 복귀를 겁내는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며, 지금도 한국에서는 시체를 염할 때 든든한 삼베로 12마디를 묶는 것이 상례이다.
● 봉분(封墳)
봉토분·성분(成墳)·폄분(窆墳)이라고도 하며 흙을 둥글게 쌓아 올려서 만든 무덤
● 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
묘(墓)의 봉분 앞에 세우는 문인(文人)과 무인(武人) 석상(石像)을 말한다.
능(陵) 앞에 세우는 문관(文官)의 형상으로 깎아 만든 돌. 도포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幞頭)나 금관을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을 하고 있다.
중국의 진(秦) ·한(漢)시대에 비롯하여, 한국에서는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만들었다. 석인에는 문신의 형상을 한 문석인(文石人)과 무신의 형상을 한 무석인(武石人)이 있으며, 줄여서 문석 ·무석이라고도 한다. 석인은 방향과 시간을 맡아서 묘를 보호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인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함께 묘를 수호하는 조각이다. 석인의 배치는 묘 입구 전면에 석사자(石獅子) 좌우 1쌍, 문석인 좌우 1쌍, 무석인 좌우 1쌍, 다음에 팔각석주(八角石柱)를 세운다.
▶무인석(武人石)은 형상이 갑옷과 투구로 완전 무장하였으며, 얼굴은 크고 둥글다. 두 눈은 매섭거나 문석인보다 더 크게 뜨고 있으며, 문석인과는 달리 수염이 없고 뺨과 턱과 다리의 굴곡이 대담하며, 입은 입술이 두껍고 굳게 다물고 있어 강건한 무사상을 나타낸다.
허리에는 띠[帶]를 두르고 중앙부에는 귀면(鬼面)이 달려 있다. 칼은 칼집에 넣은 채 허리에 차고 있거나, 칼을 뽑아 두 손으로 지팡이처럼 잡고 있는 점이 문석인과 다르다. 무석인은 대부분의 왕릉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형태가 많이 변했으나, 대체적으로 문석인의 형상은 포(袍)를 입고, 머리에는 복두(頭)를 쓰며, 손에는 홀(笏)을 든 공복(公服) 차림이다.얼굴은 둥글지만 상하로 약간 긴 달걀형이고, 눈은 이른바 행인형(杏仁形)이며, 눈끝은 약간 위로 올라갔다. 큼직한 코 밑에 있는 입술은 가늘고, 힘있게 다문 입 양끝은 아래를 향한다. 코 밑과 턱에 긴 수염을 선각(線刻)으로 나타냈고 턱의 수염은 턱밑으로 뻗어 홀 뒤에 숨었다. 관(冠)의 하부에서 턱 밑까지의 길이와 그 밑 신장의 비율은 1:5-1:3의 변화를 보인다.
● 망주석(望柱石)
무덤 앞에 놓은 혼유석(魂遊石)의 좌우에 벌려 세우는 한 쌍의 8각 돌기둥을 말한다.
망두석(望頭石), 망주석표(望柱石表), 석망주(石望主), 석주(石柱), 망주(望柱), 그리고 화표주(華表柱) 라는 다양한 명칭들을 갖고 있다. 기둥의 윗부분이 보주형두(寶珠形頭)로 되어 돌받침 위에 올린다. 망주석은 중국에서 전하여 통일신라에서 발전되기 시작하여, 8세기경에는 왕릉의 석물 배치가 정비됨에 따라 묘제석물(墓制石物)로 자리를 굳혀 오늘날에 이른다. 무덤의 시설형식에 따라 묘주(墓主)의 사회 신분을 나타내는데, 무덤을 지키는 수호 신앙과 기념적인 기능을 가진 석조물이다. 중국의 《진서(陳書)》 <예의(禮儀)>에 적힌 “양(梁)의 천감(天監) 6년(507)에 묘제를 바로잡되, 석인(石人) ·석수(石獸) ·석비(石碑)의 건립을 금하고 석주(石柱)만 세워 그 위에 이름 ·지위를 적을 것을 허가하였다”라는 대목에서도 망주석의 용도를 알 수 있다. 한국에서는 현존하는 왕릉과 상류층의 묘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민간인의 무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무덤 밖으로 외출했던 혼령이 자기 무덤을 찾아 올적에 식별하라고 세워 놓은 것을 망주(문페)라는 설이 있는데 간혹 세호(상상 속 동물) 등을 조각하여 민속생활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오른쪽 망주석은 세호가 올라가고 왼쪽은 세호가 내려간다. 해석은 망주로 본다면 등불을 올라가서 켜고, 끄고 내려오는 것을 말하기도 하고 천지신명에서 하늘과 땅을 이어 준다는 해석도 있으나 정확한 내용은 미지이다.
● 장명등(長明燈)
비단 분묘뿐만 아니라 사찰이나 관가 등의 공공 건축물의 처마 끝에 달거나 마당에 기둥을 세워 불을 밝힐 수 있도록 장치한 등도 장명등이라고 한다. 분묘 앞의 장명등을 일명 석등룡(石燈龍) 혹은 석등(石燈)이라고도 한다. 망주석 한 단 아래 상석 앞에 세워진다. 기능은 묘역에 불을 밝히는 것이지만 실제 사용보다는 사악한 기운을 쫓는다는 벽사의 의미가 강하다. 고려 말부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시대에는 일품 이상만 장명등(長明燈)을 세울 수 있어서 피장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방형의 팔작지붕이 많았으나 차츰 팔각형의 모임지붕형태로 바뀌었다.
무덤 앞이나 사찰의 경내에 세워진 장명등은 받침대와 몸체 부분·지붕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받침대는 대부분 8각형 기둥 모양이며, 이 위에 등을 넣을 수 있도록 네모지게 만든 부분이 얹혀 있고, 몸체 부분 위에는 마치 정자의 지붕처럼 생긴 삿갓지붕을 조각하여 몸체 부분을 보호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이 세 부분은 분리하여 축조한 경우도 있고, 하나로 연결하여 조각한 경우도 있다.
● 둘레석
묘지를 보호하기 위하여 그 주위에 빙 둘러 세우는 돌로 분봉을 보호하는 역할도 한다.
원형 묘지둘레석과 사각 묘지둘레석의 2종류로 나누며 사군자 무늬와 12지신 무의 등을 사용하였고 2단과 3단의 형태가 있다.
원형의 형태는 부드러움과 아름다움, 곡선미 등을 느끼게 해주며 더불어서 고급스러운 느낌을 준다.
사각 묘지둘레석은 일반적으로 좁은 장지에 많이 사용하는데 보통은 문양이 없이 깔끔하게 하는 경우가 많으며 문양을 넣는다면 원형과 마찬가지로 정면에는 무궁화를 넣고 나머지 면들에는 사군자를 새겨 넣기도 한다. 사각형은 둥그런 모양과는 반대로 인공미와 자연미를 대비시켜서 아름다움을 준다.
▲ 둘레석과 묘표
● 혼유석(魂遊石)
영혼이 나와서 놀게 하기 위하여 설치하는데, 묘제 때에는 후손이 올리는 제수(祭需)를 흠향(歆饗)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혼유석이 설치되는 자리는 능원의 경우 봉분 앞이나 일반묘일 경우 상석(床石)과 봉분 사이가 된다. 상석·향로석(香爐石)과 더불어 봉분을 장식하는 석물이다.
혼유석은 일반적으로는 석상(石床) 또는 상석(床石)이라고 해서 제를 올릴 때 음식을 올리는 공간이지만, 왕릉에서는 정자각에서 제향을 올리기 때문에 혼령이 쉬는 곳이라는 의미에서 혼유석(魂遊石)이라고 한다. 혼령이 쉴 수 있도록 의자를 만들어 놓은 곳도 있다. 그래서 서민의 묘에는 별도의 혼령이 쉬는 혼유석(魂遊石)이 있고 제물을 올리는 상석(床石)이 있다.
● 상석(床石)
일반 분묘나 능원(陵園)의 봉분 앞에, 주로 정남쪽에 설치해 놓은 석물.
넓적하면서도 장방형의 돌로 된 상을 말한다. 흔히 ‘상돌’이라고도 부른다.
봉분 앞에 하나를 설치하는데, 길이 아홉 자 아홉 치, 너비 여섯 자 네 치, 두께 한 자 다섯 치라고 규정(길이를 8척도 있음)하고 있다. 합장(合葬)일 때는 두 개를 갖추지만, 한 개를 설치하기도 하는데, 크기는 편리한대로 따른다고 하였다. 따라서, 능원의 것은 크기가 일정하다고 하겠으나, 일반사대부의 것은 일정하지 않다.
상석과 함께 동시에 설치되는 것으로 혼유석(魂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다. 혼유석은 능원에는 봉분 앞에 놓인 상석을 말하는데 제향을 제각에서 올리기 때문이다, 일반 봉분에는 상석과 봉분의 사이에 놓는 장방형의 돌로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마련한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묘제를 지낼 때 영혼이 나와 앉아서 후손이 올리는 제수들을 흠향(歆饗)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석과 혼유석, 그리고 향로석은 모두 묘제를 지낼 때 각각 제수(祭需)와 향로와 향합을 차리거나 올려놓는 데 쓰이고 있으나 실제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
▶ 족석(足石)(상석 받침대)의 높이는 1척5촌이고, 지름은 2척2촌5푼이다. 족석의 사면에 어두문(魚頭文)이나 귀면상(鬼面像)을 새겨놓은 까닭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이들 문양들의 표정이 험상궂은 점을 볼 때 사악한 것을 경계한 의미로 보인다.
봉분 앞에 묘표(墓表)를 세울 때 혼유석은 상석과 묘표의 사이에 놓이게 된다. 향로석은 향안석(香案石)이라고도 하는데 옛말로는 석상(石床)이라고 불렀다. 흔히, 네모 반듯한 돌에 네 다리를 형식적으로 새겨 향탁(香卓)과 같이 깎아 상석 앞에 세우는 것이다. 그러나 여섯 모로 만든 것도 더러 보인다.
● 향로석
향을 피우기 위해 향로를 올려놓는 돌로, 장구와 같은 형태가 일반적이나 고인이나 상주의 취향에 따라 모양도 다양하다. 향은 술과 함께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어울리는 매개체로, 사악기운이나 잡벌레를 물리치는 역할을 한다.
▲ 정선옹주 묘
앞에서 부터 문인석, 장명등, 망주석, 향로석, 상석, 혼유석, 묘표, 둘레석묘
● 묘비(묘표, 묘갈, 신도비)
무덤 앞에 세우는 비석. 죽은 사람의 신분, 성명, 행적, 자손, 출생일, 사망일 따위를 새긴다.
비명에는 보통 고인의 이름과 본관, 특별한 경력 즉 발자취를 새겨 넣었으며 비석의 앞면에 새기는 것을 비표명, 뒷면에 새긴 것은 비음명이라고 표현한다.
▶ 묘표는 죽은 사람의 벼슬명 ·이름 ·생몰연월일 ·행적 ·묘주(墓主) 등을 새겨 무덤 앞에 세우거나 평편히 놓는 푯돌로 표석(表石)이라고도 한다. 왕실과 관료층 그리고 일반 사대부를 비롯하여 중인이나 서민들까지도 입석할 수 있었다. 서민의 경우 그 크기가 두 자[尺]로 한정되어 있어 만약 이를 어기거나 허위 사실을 기재할 경우 강력한 처벌을 받았다. 반면에 양반 사족의 경우에는 어떤 제한이 있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가 없다. 묘표의 특징은 비부에 있어 귀부를 사용하지 않고 방부를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정조 대 이후의 비좌는 거의 문양을 새기지 않았으며, 모양도 장방형에서 사다리꼴로 변모하였다.
▶ 묘지(墓誌)는 죽은 사람의 성명·관계(官階)·경력·사적·생몰연월일, 자손의 성명, 묘지(墓地)의 주소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도판(陶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로 광지(壙誌)라고도 한다.
파묻는 이유는 오랜 풍우나 인위에 의한 변화를 막고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이며, 무덤 앞에 세워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한 것은 묘비 ·묘표(墓表) ·신도비(神道碑)라고 한다.
묘지의 재료는 금속판 ·돌 ·벽돌 ·도판 등을 사용하는데, 널이나 유골함에 직접 새긴 것도 있다.
▶ 조선 시대에는 갈(碣)이라는 말을 묘갈(墓碣)에만 사용하였는데, 묘갈은 사대부 층이 주로 입석하였지만 공주와 후궁 등 왕실에서도 사용하였고, 서민층에서도 세운 기록이 보인다. 묘갈의 규모나 양식은 묘표와 거의 같은 것으로 보면 된다.
비갈(碑碣)에서 갈(碣)은 특별히 세운 돌, 가첨석(加墅石)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으로 비갈(碑碣)이란 말과 같이 쓰이고 있지만 갈(碣)은 분명한 형식이 없다.
진(秦)나라 시황제의 낭사대각석(琅邪臺刻石), 태산(泰山) 산정의 무자석(無字石), 오(吳)나라 때인 276년(天璽 1)의 국산각석(國山刻石)·우릉폄석(禹陵稙石) 등은 모두 갈이고, 석고(石鼓)도 갈의하나이다.
또 후한(後漢) 때인 137년(永和 2)의 돈황태수배잠기공각석(敦煌太守裵岑紀功刻石), 270년 오나라 기공각석(紀功刻石) 제1석·제2석도 모두 갈이며, 고구려 광개토왕비도 역시 갈이라 할 수 있다.
▶ 신도비는(神道碑) 왕이나 고관의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事蹟)을 기리는 비석으로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풍수지리상 묘의 동남쪽을 귀신이 다니는 길,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 가운데 하나로서, 중국에서 한나라 때 처음 세웠다는 설이 있다. 처음에는 비에 새기기를 ‘모제(某帝)’ 또는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만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3품이상,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거북받침 위에 직사각형의 비석을 세우고 그 위에 비갓을 올려 놓았으며,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만 세울 수 있었다.
● 기단석(基壇石)
농대(籠臺) 또는 반석(盤石)이라고도 하며 건축물이나 비석의 받침대 등 기초석으로 거북모양 등 다양하다
● 가첨석(加檐石)
개두(蓋頭) 또는 지붕돌이라고도 하며 빗돌이나 석등 따위를 세운 다음 그 위에 지붕처럼 덮는 돌.
● 석수(石獸)
돌로 만들어 묘소 앞에 세우는 동물을 말하며, 사석(獅石, 돌사자), 호석(虎石), 마석(馬石), 양석(羊石) 등이 있다.
권협 신도비
2014년에 비각을 세워 보호를 하고 있지만 비문은 알아보기가 어렵다.
권대임 신도비
권대임 신도비명(權大任 神道碑銘) 해설
儀賓吉城君墓(前面篆額)
의빈(儀賓)길성군(吉城君)묘 (전면전액)
權公神道碑銘(後面篆額)
권공(權公) 신도비명 (후면전액)
有明朝鮮國贈綏祿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謚權公神道碑銘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監春秋館事 許穆 撰
通政大夫承政院左副承旨知製敎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 李徵龜 書,
從姪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 權珪 篆
유명조선국(有明朝鮮國) 증수록대부 길성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贈綏祿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행숭록대부 길성군 겸오위도총부도총관(行崇德大夫吉城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 시(謚) 권공(權公) 신도비명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 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허목(許穆)이 글을 짓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부승지 지제교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承政院左副承旨 知製敎 兼經筵參贊官 春秋館修撰官) 이징귀(李徵龜) 가 글을 쓰고, 종질(從姪)인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권규(權珪)가 전액(篆額)한다.
公諱大任 字弘輔 姓權氏 其先永嘉人 永嘉之權 自太師幸得姓來八百年 世多達官貴人 號爲大族 曾大父常 以善行特聞 爵至同中樞 後贈領議政 東興府院君 大父悏 以功業 貴爲名臣 官至禮曹判書 封吉昌君 贈領議政・吉昌府院君 父信中 連守郡邑 贈左賛成 襲封吉興君 後加贈右議政 母李氏贈貞敬夫人 世宗別子廣平大君璵之七世孫 而司評廷弼之女也 萬曆二十三年十一月廿四日公生 生而秀而媺 聡敏善學 甫十年 才藝夙成 尙貞善翁主 爲吉城尉 上寵愛之殊甚 公尤長於筆法 上稱善不已 賞賜無數 累進 階至通憲 純孝大王二年 李适叛 上狩公山 公從上 陞奉憲十三年 封吉城君 吉興君卒 而旣卒喪 以元功嫡孫襲封者也 明年冬 淸人入京城 又從上於南漢 進崇德 再爲都捴管 後三年 奉使瀋陽 時國家新去亂 悉捐槖中裝 贖還旄倪之未返者 人心德之 二十三年十月廿六日 公卒 春秋五十一公在疾 上特以儀賔尊屬 醫藥屬路 訃聞 上爲之罷朝巷市 賜予賻如儀 命有司庇葬事 禮也 以宣武原從 追加綏祿大夫爲正一品 公仁親篤厚 善於父母昆弟 以及宗族 父母旣歿 有二弟一妹 公均其臧獲 必擇其善饒而厚給之 猶恐其不如父母之視之也 其一弟年最少 公甚愛育之 其衣食服養 一視 而無缺 性恬靜儉約 自處如儒士 善與人忠愛 好文雅 一時薦紳文學 多慕與之遊者 平生不爲奢縱逸樂 雅飭惟謹 士大夫愈賢之 國制 主家有賜奴賜田 而公不肯准受曰 吾受恩已厚 復以此煩有司 不知足也 主昭敬大王女 而靜嬪閔氏出也 嬪康靖大王壻驪川尉子芳之孫 江華都護府使士俊之女也 嬪賢而好禮節 主恭敬謹飭 克順婦德 盖素所敎訓然也 主生於萬曆二十二年四月一日 卒於四十二年八月一日 主長於公一年 春秋二十一 葬於富平之水吞 至是乃合葬焉 有一男曰瑱 敦寧奉事 瑱生一男二女 男以經 守經 壻二人承旨吳始壽 生員洪萬朝 以經生三男一女 皆幼 吳始壽生二男二女 長男尙游 壻一人李景鴻 餘幼 洪萬朝生二男一女 皆幼 又有庶出子二人琳 璉 銘曰
공의 이름은 대임(大任)이고, 자는 홍보(弘輔)이다. 성은 권(權)씨이며 본관은 영가(永嘉)이다. 영가권씨(永嘉權氏)는 태사(太師)를 지낸 행(幸)이 고려 태조에게 성을 받은 이후로 팔백년 동안 대대로 현달하여 귀하게 된 사람이 많아 명문대족으로 일컬어 졌다. 증조부 상(常)은 훌륭한 행실이 특별히 알려져 벼슬이 동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뒤에 영의정 동흥부원군에 증직되었다. 조부 협(悏)은 남다른 공훈을 세운 명신으로서 벼슬이 예조판서에 이르고 길창군에 봉해졌으며 영의정 길창부원군에 증직되었다. 부친 신중(信中)은 군수를 연임하였고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길흥군에 세습하여 봉해졌고, 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모친 이씨(李氏)는 정경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세종의 별자인 광평대군 여(璵)의 칠대손이며, 사평 정필(廷弼)의 딸이다. 공은 만력(萬曆) 23년 11월 24일에 태어났는데, 수려한 용모에 총명하고 민첩하여 공부를 잘 하였다. 겨우 열 살이 되었는데 재주와 기예가 숙성하였으며 정선옹주(貞善翁主)에게 장가들어 길성위(吉城尉)가 되니 주상이 남달리 총애하였다.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주상이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수없이 상을 하사하시고 여러 번 승진하여 통헌대부에 이르렀다. 인조대왕 2년에 이괄(李适)의 반란으로 주상이 공주로 피난하자 공은 주상을 수행하여 봉헌대부에 올랐으며 13년(1635년)에는 길성군(吉城君)에 봉해졌다. 이는 길흥군(吉興君)이 세상을 떠나자 장사를 마친 뒤 원공신의 적손이라 하여 세습하여 봉(封)한 것이다. 이듬해 겨울 청나라의 군사가 서울을 침입하자 또 남한산성에서 주상을 수행하여 숭덕대부에 올랐으며, 다시 도총관이 되었다. 삼년이 지난 후 왕명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갔었는데 당시에 우리나라는 겨우 병란에서 벗어난 터였다. 공은 행장 속에 가지고 있던 사재를 모두 내어 그곳에 잡혀있던 노약자를 귀환시키니 사람들이 공의 덕을 칭송하였다. 인조 23년 10월 26일 졸하니, 나이 51세였다. 공이 병에 들자 주상은 특별히 왕실과 결혼한 사람이라 하여 끊임없이 의관과 약재를 내리셨다. 부음이 전해지자 주상은 공을 위하여 조회를 정지하고 시장을 철시하였으며 부의를 의례대로 하사하였다. 아울러 담당관리에게 명하여 장례를 돕도록 하였으니 모두 예에 따른 것이다. 선무원종공신이라 하여 수록대부(綏祿大夫)에 추증하니 정일품이 되었다. 공은 성품이 인자하고 후덕하여 부모 형제에게는 물론이고 인척에게까지 잘 하였다. 부모가 세상을 떠난 뒤 두 아우와 누이동생에게 노비를 나누어 주었는데 반드시 그 중에서 온순하고 건강한 자를 택하여 후하게 나누어 주고도 오히려 공은 부모께서 살아계실 때와 같지 못할까 걱정하였다. 공은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린 아우를 매우 사랑하여 그의 의식(衣食)이 언제나 자기에 비하여 손색이 없도록 하였다. 차분하고 검박한 성품을 지닌 공은 언제나 벼슬에 오르지 못한 선비처럼 처신하였다. 진실되게 사람과 사귀고 글을 애호하였으므로 당대의 많은 고관과 학자가 흠모하여 더불어 교유하였다. 평생에 사치와 행락을 몰랐으며 오직 삼가고 바른 일을 행하였으므로 사대부들이 더욱 어질게 여겼다. 나라의 법에 옹주의 집에는 노비와 전답을 주도록 되어 있는데 공은 이것을 기어이 받지 않으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이미 깊은데 다시 이것 때문에 담당관리를 번거롭게 하는 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짓이다.”라고 하였다. 옹주(翁主)는 선조대왕의 딸로서 정빈민씨(靜嬪閔氏)의 소생이다. 정빈(靜嬪)은 강정대왕(康靖大王: 成宗)의 사위인 여천위(驪川尉) 자방(子芳)의 손녀이자 강화도호부사 사준(士俊)의 딸이다. 정빈(靜嬪)은 어질고 예절을 좋아하였으며 옹주 또한 공순하고 삼가 조금도 부덕에 어긋남이 없었으니 이는 평소에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옹주는 만력(萬曆) 22년 4월 1일에 태어나 42년 8월 1일에 졸하였다. 옹주는 공보다 한 살이 많았으며 당시 나이는 21세였다. 부평의 수탄(水呑)에 장사지냈다가 이때에 이르러 합장하였다. 아들 하나를 두었으니 돈령부사 진이다. 진은 2남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이경(以經)과 수경(守經)이며, 사위 둘은 승지 오시수(吳始壽)와 생원 홍만조(洪萬朝)이다. 이경(以經)은 3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오시수(吳始壽)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상유(尙游)이고 사위는 이경홍(李景鴻)이며 나머지는 어리다. 홍만조(洪萬朝)는 2남1녀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또 서출(庶出)로 아들 둘이 있으니 임(琳)과 연(璉)이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일찍이 임자년에 미수(眉叟) 허(許)선생이 이글을 지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갑오년에 비로소 비석에 새기게 되었는데 비문에 기록되지 못한 자손들을 다음과 같이 추가하여 기록한다. 이경(以經)은 진사시에 합격하여 현감이 되었으며, 수경(守經)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군수가 되었다. 오시수(吳始壽)는 문과에 합격하여 우의정에 올랐으며, 홍만조(洪萬朝)는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참판으로 있다. 이경(以經)은 3남1녀를 두었는데, 세태(世泰)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교리로 있다. 딸은 이한의(李漢儀)에게 시집갔다. 오시수(吳始壽)는 2남2녀를 두었는데, 상유(尙游)는 문과에 급제하여 지금 정언으로 있으며, 상보(尙溥)는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두 딸은 참봉인 이경홍(李景鴻)과 이신명(李申命)에게 시집갔다. 홍만조(洪萬朝)는 사남이녀를 두었는데, 중형(重亨)은 생원시에 합격하여 좌랑이 되었으며, 중휴(重休)는 문과에 합격하여 지금 교리로 있다. 중인(重寅)은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중징(重徵)은 문과에 합격하였다. 두 딸은 생원시에 합격한 목천현(睦天顯)과 남하성(南夏成)에게 시집갔다. 세태(世泰)는 4남1녀를 두었는데, 방언(邦彦), 명언(明彦), 필언(弼彦), 징언(徵彦)이며 딸은 이채(李采)에게 시집갔다. 세정(世鼎)은 아들인 태언(台彦)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세항(世恒)은 2남3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순언(舜彦)과 하언(夏彦)이며, 두 딸은 이택인(李宅仁)과 박이신(朴履新)에게 시집갔으며 한 딸은 아직 어리다. 이한의(李漢儀)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진사시에 합격한 서주(瑞?)이다. 임(琳)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급경(及經)과 무과에 합격한 학경(學經)이다.
숭정(崇禎) 갑신년 후(後) 70년 월 일 세움.
尊而能讓 貴而能下 仁愛篤善 戒愼不惰 中樞三世 吉昌之孫 賢善有自 忠孝之門
고관이 되어도 겸양할 줄 알고, 귀인이 되었지만 몸을 낮추었네.
인자하고 후덕하였으며. 삼가고 근면하였네.
중추공(中樞公)의 증손이자. 길창군의 손자.
어진 사람 나온 곳은. 충효한 가문일세.
길흥군 권신중 [吉興君 權信中]
권신중 묘갈명 전문 [權信中 墓碣銘 全文]
贈右議政 吉興君 權公墓碣(篆額)
有明 朝鮮國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吉興君 行通政大夫 豊德郡守 長湍鎭管兵馬同僉節制使 權公墓碣銘 幷序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 兼領經筵事 監春秋館事 許穆 撰篆
嘉義大夫 開城府留守 尹深 書
永嘉權氏 其先本新羅苗裔也 新羅末世 自太師幸 得姓爲權氏 大於高麗 九世 有樞密副使守平 其後 有史館修撰? 僉議中贊? 領都僉議溥 僉議政丞煦 代言重貴 又六世 有同知中樞常 以善行顯 餘敎在子孫 稱厚德之世者也 中樞公生吉昌君? 亦宣祖世名臣 吉昌君娶全州崔氏 獻納克成之孫 正?沫之女也 恭敬篤厚 以婦德聞 生七男 公最長 公諱信中 字君執 萬曆三年四月十日生 三十一選司馬試 其年 以選爲掌苑別提 明年 移義禁都事 仍陞太僕主簿 改秋官佐? 又明年 爲江西縣令 後再入太僕秋官爲主簿佐? 後年 以漢城判官爲昌平縣令 五年 陞金堤郡守 三年 吉昌君卒二年 貞敬夫人卒 旣卒喪 爲礪山郡守 尋移丹陽 瓜滿爲掌隷司評 一年秋官正?爲豊德郡守 適有修齊陵之事 賞其勞陞通政 以疾謝歸 三年而歿 崇禎六年六月三十日 享年五十九 葬富平水?族葬丁向之原 以子貴 贈左贊成 襲封吉興君後以宣武原從 加贈右議政 公晳而? 正色寡言 嚴重有威儀 其事父母處昆弟 居喪之節 友愛之篤 雖其家訓世德 亦天性然也 有季弟死而卜葬不吉 公之長男吉城君 嘗爲公卜壽藏於族葬之地 公曰安有爲未死者 有兄弟死而無葬者也 遂以葬人賢之 公以長德巨人 終不大用而屈於郡邑 爲官不稱德 人多惜之 所?以廉謹稱 而有惠政碑 贈貞敬夫人李氏 世宗別子廣平大君璵之七世孫 而司平廷弼之女 有婦德 與公同年生 三十七歿 先公二十四年 八月二十七日 初葬于通津中樞公墓側 葬公之明年正月 改葬于公墓之左 生三男一女 男 大任 大鳴 大式 大任尙貞善翁主 爲吉城尉 仍襲封爲吉城君大鳴同知中樞 壻朴尙彬 大任生?敦寧奉事 大鳴生瑀 大式生玹童蒙敎官 壻李爀 朴尙彬無子 有所後子曰希寅 進士?生以經 進士縣監 守經 生員奉事 壻二人 右議政吳始壽 正言洪萬朝 瑀生致經 玹生順經 益經 壻二人 李仁基 韓載 以經生世泰 世鼎 世恒 一女 幼 吳始壽生尙游 正字 尙濟 壻 生員 李景鴻 一女 幼 洪萬朝生重亨 重恒 餘幼 致經生二女 幼 順經生二男 幼 世泰生一男 幼 其銘曰
孝友不怠仁也 儼恪克惠賢也 嗚呼壽不稱其仁 官不稱其賢
崇禎甲申後三十七年庚申 正月 日 立
권신중 묘갈명 해설
증우의정 길흥군 권공묘갈. -전액-
유명 조선국 증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 길흥군 행통정통정대부풍덕군수장단진관병마동첨절제사 권공묘갈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영경연사 감춘추관사 허목 찬전. 가의대부 개성부 유수 윤심 서
영가 권씨는 그 선조가 본래 신라의 후손이었는데, 신라 말엽에 태사 행이 권씨 성을 하사받은 뒤로 고려 때 크게 번창하였다. 태사의 구세손에 추밀 부사 수평이 있었으며, 그 후손으로 사관 수찬 위, 첨의 중찬 단, 영도첨의 보, 첨의정승 후, 대언 중귀가 있었다. 또 중귀의 육세손 동지중추 상은 선행으로 이름이 드러났는데, 그 가르침이 자손에 전해져서 후덕한 세가로 칭송되었다. 중추공이 길창군 협을 낳았는데 또한 선조 때의 명신이다. 길창군은 전주 최씨에게 장가갔으니, 헌납 극성의 손녀이고 정랑 말의 딸이다. 공손하고 후덕하여 부덕으로 소문이 났다. 아들 일곱을 낳았는데 공이 장남이다. 공의 휘는 신중이고 자는 군집으로 만력 3년 4월 10일에 태어났다. 31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그 해에 뽑혀서 장원 별제가 되었다. 이듬해에 의금부 도사로 옮기고 이어 태복시 주부로 승진하였다가 다시 형조 좌랑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 강서 현령이 되었는데, 뒤에 다시 태복시 주부와 형조 좌랑을 지냈다. 후년에 한선부 판관이 되었다가 창평 현령으로 나갔으며, 5년 뒤에 승진하여 김제 군수가 되었다. 3년 뒤에 길창군이 돌아가고, 또 2년 뒤에 어머니 정경부인이 돌아갔다. 상기를 마치고 여산 군수가 되었다가 이내 단양으로 옮겼는데 임기를 마치고는 장례원 사평이 되었다. 1년 뒤에 형조 정랑을 거쳐 풍덕 군수가 되었다. 그 때 마침 제릉을 수리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 공으로 상을 받고 통정대부에 올랐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왔다. 3년 뒤인 숭정 6년 6월 13일에 죽으니 향년 59세였다. 부평 수탄에 있는 선영 정향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아들이 귀하게 되어서 좌찬성에 추증되고 길흥군에 습봉되었다가 뒤에 선무원종공신으로 우의정에 가증되었다. 공은 명석하고 헌칠한 키에 항상 정색하고서 말을 적게 하니, 엄중하여 위의가 있었다. 부모를 섬김에 거상의 예절을 다하고 형제 사이에 우애를 돈독히 하였는데 이것은 비록 가훈과 세덕의 영향이기는 하지만 천성이기도 하였다. 막내 동생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데 묘자리가 좋지 않았다. 그때 공의 장남 길성군이 일찍이 공을 위해 선영에 잡아 둔 자리가 있었다. 공이 말하기를, “어찌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 죽은 형제를 장사지내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고서 드디어 그 곳에 장사지내니, 사람들이 공을 어질게 여겼다. 공은 훌륭한 덕을 지닌 큰 인물이었으나 끝내 크게 쓰이지 못하고 군읍의 작은 벼슬에 머물러서 벼슬이 그 덕에 걸맞지 않았으니, 애석히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수령으로 나간 고을에서는 그의 청렴함과 신중함을 칭송하여 혜정비를 세웠다. 정경부인에 증직된 부인 이씨는 세종의 아들 광평대군 여의 칠세손으로 사평 정필의 딸인데 부덕이 있었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37세의 나이로 공보다 24년 앞서 죽었다. 8월 27일이 기일이다. 처음에는 통진에 있는 중추공의 묘 옆에 장사지냈으나, 공을 장사지낸 다음해 정월에 공의 묘 왼쪽에 개장하였다.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아들은 대임, 대명, 대식이다. 대임은 정선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가 되었는데, 봉작을 이어 받아 길성군이 되었다. 대명은 동지중추부사이고, 사위는 박상빈이다. 대임은 진을 낳았는데 돈녕부 봉사고, 대명은 우를 낳았다. 대식은 현을 낳았는데 동몽교관이고, 사위는 이혁이다. 박상빈은 아들이 없어서 진사 희인을 양자로 삼았다. 진의 아들 이경은 진사로 현감을 지냈고, 수경은 생원으로 봉사이며, 사위 두 사람은 우의정 오시수와 정언 홍만조이다. 우의 아들은 치경이며, 현의 아들은 순경과 익경이며, 사위 두 사람은 이인기와 한재이다. 이경은 세태, 세정, 세항을 두었으며, 딸은 아직 어리다. 오시수의 아들 상유는 정자이고, 상제의 사위는 생원 이경홍이고, 한 딸은 아직 어리다. 홍만조의 아들은 중형과 중항이며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치경은 딸이 둘인데 아직 어리고, 순경의 아들도 둘인데 아직 어리며, 세태는 아들이 하나인데 역시 어리다. 명은 다음과 같다.
효우 게을리하지 않음이 인(仁)하고, 엄숙하고 은혜로움이 현(賢)이지.
아, 숙명은 인(仁)에 비해 부족했고, 벼슬 또한 그 현(賢)에 모자랐네.
숭정 갑신년 후 37년 경신년 정월 일 세우다.
권진 묘비명 전문
權瑱墓碑
有明 朝鮮 朝奉大夫 行敦寧府奉事 權瑱之墓
令人南陽洪氏祔左
公諱瑱 字子玉 永嘉人也 初祖太師幸 得姓於麗祖 遂爲權氏 其後 累世貴顯 而世次事蹟 具載眉叟許相所譔先代碑文 此可攷 有諱常 同中樞 贈領議政 東興府院君 嘗以厚德至行聞於世 寔公高祖也 曾祖 判禮部 諱悏 宣廟朝以勳勞策宣武功 封吉昌君 贈領議政 諡忠貞 祖諱 信中 通政 郡守 贈右議政 吉興君 考諱 大任 尙宣祖大王女貞善翁主 爲吉城尉 後襲勳爵 累階至一品 翁主 靜嬪閔氏出 嬪卽府使士俊之女也 公以萬曆癸丑正月二十六日生 生而秀媺異凡兒 見者器之 甫弱冠遽嬰疾 常杜門靜養 不以外物役心 庚寅以先王外孫例 授繕工奉事 坐微事罷 癸巳又除敦寧奉事 辭不就 己亥十二月二十四日卒于正寢 享年四十七 公天性仁孝 自以在襁褓失所恃 爲平生至痛 終身孺慕如一日 生長沁園 而簡素恬靜 絶無綺紈習 每致誠於祀事 雖病必躬親而不攝 如事叔父如父 遇宗族以恩 皆出於至誠 其隱德善行 有如此者 配 南陽洪氏 考監司諱憲 祖直提學 諱宗祿 素聞法門遺敎 得婦道甚協尊章 飭蘋蘩敬禮備至 吉城公亟稱之以賢婦 與公同年生 五十四歿 後公七年 十二月十二日也 以公宅兆不吉 改卜吉興君墓下負壬之原 卽富平之水吞里也 有二男二女 以經 縣監 守經 郡守 女 吳始壽右議政 次 洪萬朝 卽作文者 縣監 三男一女 世泰 正郎 世鼎 生員爲郡守 後世恒 纔登文科 女 李漢儀 吳始壽子尙游 正言 尙溥 進士 壻 參奉 李景鴻 李申命 洪萬朝子 重亨 重休 並生員 重寅 重欽 壻 生員 睦天顯 南夏成 世泰生邦彥 明彥 弼彥 世鼎生聖彥 世恒一男幼 郡守將營墓道顯刻 泣而屬余曰 吾伯氏 行誼文雅 宜光顯吾門 而不幸蚤世 嘗著先君幽堂誌頗詳 子盍以此譔次之 不侫不敢辭 略據基實而識之
嘉善大夫 江華府留守 洪萬朝 譔
嘉善大夫刑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 朴慶後 書
崇禎甲申後 五十一年 甲戌二月 日 立
권진 묘비명 해설
유명 조선 조봉대부행돈녕부봉사 권진지묘 영인 남양홍씨 부좌
공의 휘는 진이고, 자는 자옥이니, 본관은 영가이다. 시조 태사 행이 고려 태조에게 성을 하사받아 권씨가 되었다. 그 뒤로 여러 대에 걸쳐 존귀하고 현달한 인물이 나왔는데, 이에 대한 세차와 사적은 미수 허목이 지은 선대의 비문에 자세히 실려 있으니, 이에서 고찰할 수 있다. 휘 상은 동중추를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고 동흥부원군에 봉해졌는데, 일찍이 후덕한 행실로 세상에 알려졌다. 이 분이 바로 공의 고조이다. 증조 예조 판서 휘 협은 선조 때에 훈로로 선무공신에 책록되고 길창군에 봉해졌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는데 시호는 충정이다. 조부 휘 신중은 통정대부로 군수를 지냈으며, 우의정에 추증되고 길흥군에 봉해졌다. 고 휘 대임은 선조대왕의 딸 정선옹주에게 장가들어 길성위가 되었으며, 뒤에 훈작을 세습 받았고 여러 번 품계가 올라 일품에 이르렀다. 옹주는 정빈 민씨의 소생인데, 정빈은 바로 부사 민사준의 딸이다.
공은 만력 계축년 정월 26일에 태어났다. 보통 아이들과 다르게 나면서부터 뛰어나게 아름다웠으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훌륭한 그릇으로 여겼다. 겨우 약관이 되었을 때 갑자기 병에 걸렸는데, 항상 문을 닫고 정양하면서 외물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경인년에 선왕의 외손으로 선공감 봉사에 제수되었으나, 작은 일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계사년에 또 돈녕부 봉사에 제배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기해년 12월 24일 정침에서 졸하니 향년 47세였다.
공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강보에 있을 때 어머니를 잃은 것을 평생의 통한으로 여겨 종신토록 하루같이 사모하였다. 심원에서 생장하였으나 검소하고 담박하여 귀한 집 자제의 모습이 전혀 없었다. 제사에 정성을 다하였으니 비록 병이 있어도 반드시 몸소 행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행시키지 않았다. 숙부를 부모처럼 섬기고 종족을 은혜로 대우한 것도 모두 지성에서 나왔으니, 남이 모르는 선한 덕행이 이와 같았다. 부인은 남양 홍씨인데 아버지는 감자 휘 헌이며, 조부는 직제학 휘 종록이다. 법도 있는 가문 출신답게 아내의 도리를 다하였으므로 시부모가 매우 흡족해 하였다. 또한 제사를 지낼 때에도 공경과 예절을 지극하게 하니, 길성공이 현부라고 극찬하였다.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나서 향년 54세에 작고하였으니, 공이 세상을 뜬 지 7년 뒤인 12월 12일의 일이다. 공의 산소가 불길하다고 하여서 길흥군의 산소 아래 임좌의 언덕으로 이장하였는데, 바로 부평의 수탄리이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이경은 현감이고 수경은 군수이다. 큰딸은 우의정 오시수에게 시집갔고 둘째딸은 홍만조에게 시집갔는데, 바로 이 글을 지은 사람이다. 현감은 삼남 일녀를 두었는데 세태는 정랑이고, 세정은 생원으로 군수의 양자가 되었고, 세항은 이제 막 문과에 급제하였다. 딸은 이한의에게 시집갔다. 오시수의 아들 상유는 정언이고, 상보는 진사이며, 사위는 참봉 이경홍과 이신명이다. 홍만조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중형과 중휴는 생원이고, 나머지 둘은 중인과 중흠이며, 사위는 생원 목천현과 남하성이다. 세태는 방언, 명언, 필언을 두었고, 세정은 성언을 두었으며, 세항은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어리다. 군수가 묘도에 비석을 세우려고 울면서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며 말하기를, “내 백씨의 행의와 문아는 우리 가문을 드러낼만하였는데 불행히 일찍 세상을 뜨셨다. 일찍이 선군의 묘지를 매우 자세히 지은 적이 있으니, 그대는 묘지에 있는 말들을 차례로 엮어서 지어 주시오.”라고 하므로 내 감히 사양할 수 없어서 대략 그 사실에 의거해 이상과 같이 기록하였다.
가선대부 강화부 유수 홍만조 찬
가선대부 형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박경후 서
숭정 갑신년 후 51년 갑술년 2월 일 세우다.
왕릉 석물 설명도
●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
능(陵)을 보호하기 위하여 능의 위쪽 둘레에 병풍처럼 둘러 세운 긴 네모꼴의 넓적한 돌. 겉에 12신(神)이나 꽃무늬 따위를 새긴다. 계유정란이후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평생을 조카와 형수인 현덕왕후 권씨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쓰지 말라" 유언하였는데 세조의 광릉 이후의 조선 왕릉은 그 전과는 달리 병풍석이 없거나 난간석으로 만들어 졌다.
초기 봉분주위에 자연석을 박아두다가 각진 인공적인 돌을 사용하는 단계를 거쳐서 통일신라시대 이래로 12지 신상을 새기게 되는데 이는 흙무너짐 방지와 경계표시 라는 초기의 의미를 넘어 12방위에 맞추어 땅을 지키는 열두신장(十二支神)
으로 하여금 악을 물리치고 선을 보호하는 파사호정(破邪護正)의 개념으로 까지 발전한다. 즉 모든 방위의 외침으로 부터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새겨진 것이다.
이 병풍석을 나누어 보면 만석(滿石), 면석(面石), 우석(隅石), 인석(引石)
㉠ 면석(面石) : 석탑 기단의 대석과 갑석 사이를 막아 댄 넓은 돌을 말하며 12지신상(地神像)을 조각하였다.
㉡ 우석(隅石) : 귀퉁이 돌을 말하며 구름 문양을 조각을 조각하였다.
㉢ 만석(滿石) : 봉분을 에어싼 병풍석중 맨 위에서 본토를 받쳐주는 석재
㉣ 인석(引石) : 만석위에 있는 각형 또는 꽃봉오리형 서재(방위표시 된것도 있음)
이 병풍석 바로 주위에 경계표시로 난간석이 있는데 이를 크게 3부분으로 나누면 망주석 모양의 제일 높은 기둥을 석주(石柱)라 하고, 그 사이를 가로질러 접근을 막는 죽석(竹石), 죽석의 중간에 받쳐준 작은 기둥을 동자석주(童子石柱)라한다.
이 난간 석주에 12지지를 표시하여 방위를 나타내기도 한다.
▶ 난간석: 경복궁 근정전 용좌(龍座)를 보면 난간석이 있다. 난간석과 무인석은 왕릉에서만 조성할 수 있는 석물이다.
● 정중석(定中石)=배례석
무인석 사이에 설치하였으며 왕릉에 참배하는 사람이 서 있는 자리 표시석
● 산신석(山神石)
능 조성 후 3년 동안 왕릉이 있는 산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예감과 마주보는 동쪽에는 장방형의 판석이 놓여 있는데 능침이 위치한 산신에게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산신석(山神石)이라고도 하고, 달리 환인(桓因), 환웅(桓雄), 환검((桓儉)의 삼신에게 제물을 올리는 곳이라는 뜻의 삼신석(三神石)이라고도 한다. 왕릉은 봉분 주인에게 제례를 지내고 내려와 산신에 제를 지낸다. 이것은 민간의 법도와 반대인 것으로 임금은 하늘의 후손이라는 천손개념이 있어서이다. 즉 민간은 산신제를 먼저 올리고 제례를 지낸다.
● 능침(陵寢)
정자각 뒤에 있는 비탈진 사초지(莎草地)부터 봉분까지의 언덕
● 곡장(曲墻)
능침을 둘러친 담장을 말하며 곡장은 봉분을 감싸듯 앞면만 터놓은 담장으로서 특이한 것은 왕릉의 대부분이 구운 전돌을 쌓아 올리는 중간 중간에 원형의 석판을 삽입시킨 점이다.
● 소전대(燒錢臺) 예감(瘞坎) 망료위(望燎位)
정자각 뒤쪽에 위치한 예감은 제례후 지방을 태워서 묻었던 돌 구덩이로 대체로 방형이다.
소전대와 예감은 왕릉에서 제사를 마친 후 축문이나 혼백 등을 태우기 위한 시설물이다. 일반적인 실내 제사에서는 축문을 화로에 태웠으나, 왕릉과 같이 밖에서 제사를 지내는 경우 축문이나 혼백을 불사르거나 묻기 위한 시설물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 소전대와 예감은 모두 의례가 끝나는 정자각 뒤편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소전대와 예감은 형태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소전대는 받침 모양으로 돌을 만들어 다듬은 형태이고, 예감은 장대석 돌을 사각형으로 둘러 만든 형태이다.
소전대석과 예감은 시기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소전대는 불교 의례에서 지전을 태우는 행위에서 유래하여 초기 조선왕릉인 제1대 건원릉(建元陵), 제2대 후릉(厚陵), 제3대 헌릉(獻陵)에만 설치되었다. 세종대 왕릉 제도를 정비하면서 이후의 능에서는 소전대가 더 이상 설치되지 않았으며, 소전대를 대신해 등장한 것이 예감이다.
● 배위(拜位) 또는 판위(版位)
현관이 제례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곳. 절을 4배 함
홍살문 옆 한 평 정도의 땅에 돌을 깔아 놓은 곳으로 초헌관(임금)이 4절을 하는 곳(拜位)이다. 임금이 능역을 들어서면서 경건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곳. 어배석(御拜石), 망릉위(望陵位)라고도 한다.
● 향로(香路) 또는 신로(神路)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조금 높은 길. 제향시 제관이 향(香)과 축(祝)(축문)을 모신다 하여 향로(香路) 또는 신로(神路)라 부른다.
● 홍살문(紅箭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紅門) 또는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 금천교(禁川橋)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 재실(齋室)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한다.
● 수복방(守僕房)
능을 지키는 수복이 임시로 머무는 건물. 수직발이라고도 한다.
● 정자각(丁字閣)
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모신다. 정자각은 정청과 배위청으로 구성되며 단청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