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 형이상학의 부활
- 서구 형이상학은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그 원형들이 마련되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러 거대한 목적론적·형상철학적 봉우리를 형성했다.
그 후 한편으로 형상철학을 이어받은 플로티노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퀴나스 등의 초월적인 철학과 다른 한편으로 에피쿠로스 학파와 루크레티우스 학파의 유물론이 대립했다.
르네상스 이후에는 부르노의 사유 등을 비롯해 새롭게 등장한 다양한 사조들과 갈릴레오의 물리학 등을 비롯해 새롭게 탄생한 근대적 자연관을 배경으로 데카르트, 스피노자,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이 등장했다.
18세기와 19세기는 형이상학 비판의 시대였다. 흄의 회의주의, 칸트의 비판철학, 꽁트의 실증주의 등이 등장하면서, 형이상학은 낡은 사변으로서 치부되었다. 그러나 그런 과정에서도 주체철학적인 형태의 형이상학인 헤겔의 사유, 그리고 한편으로 형이상학 비판의 성격을 띠지만 다른 한편으로 현대 형이상학의 씨앗이 된 니체의 사유가 등장했다.
20세기에 들어와 형이상학은 새롭게 부활했다. 라이프니츠까지의 형이상학을 고전적 형이상학으로, 헤겔과 니체를 과도기로 본다면, 베르그송 이후 오늘날까지의 형이상학을 현대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 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성과는 형이상학의 부활에 있다.
- 20세기 형이상학은 단순화의 오류를 무릅쓴다면 대체적으로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한 계열은 현대인의 다양한 체험들, 현대가 이룩한 다양한 담론들을 창조적으로 종합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위대한 전통을 이어받은 계열로서, 베르그송, 화이트헤드, 들뢰즈 등이 이 계열을 대변한다. 이 계열이 그 말의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 '철학'을 형성한다.
두 번째로는 거창한 사변보다는 전문적인 철학적 문제들을 세밀하고 분석적으로 파고 들어간 계열로서, 이 계열은 특히 20세기가 이룩한 논리학적·언어철학적 성과를 토대로 사유를 진행시켰다. 프레게로부터 데이빗슨 등에 이르기까지 전개된 이른바 '분석철학'의 전통이 이에 속한다.
세 번째 계열로는 형이상학의 초점을 인간의 실존적 체험, 초월을 담고 있는 언어, 내적 반성, 의미와 가치 등에 맞춘 계열로서, 현상학, 실존철학, 하이데거의 존재론, 해석학 등이 이에 속한다.
두 번째 계열과 세 번째 계열의 사유는 때때로 '형이상학'을 비판하지만, 그 비판은 기존의 형이상학에 맞추어져 있으며 오히려 두 계열의 사유들 자체가 일정한 형이상학적 맥락을 함축한다.
분석철학은 2강에서 현상학/실존주의와 해석학/존재론은 4, 5강에서 다루며, 들뢰즈는 10강에서 다룬다. 1강에서는 베르그송을 중심으로 현대 형이상학의 기초를 알아본다.
- 베르그송(Henri Bergson)은 1859년 빠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폴란드 계 음악가였고,
어머니는 영국의 교양 계층 출신이다. 어릴 때부터 다재다능했으며 특히 수학에 밝았다.
고등학교 때 파스칼이 제기한 난제를 풀어 프랑스 지성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학에
가면서 철학을 선택했을 때, 그를 설득하려 찾아온 수학 선생이 "너는 인생을 망쳤어"라고
화를 내면서 돌아갔다고 한다. 젊은 시절에는 오히려 유물론적 성격이 강했으며, 루크레티우스를 사사하기도 했다. 어느 맑은 봄날 제자들과 산책하던 중 홀연히 '지속'의 개념을 떠올렸으며, 이후 이 창조적 직관을 인간의 의식, 신체, 우주, 도덕, 종교 등의 문제로 확장시키면서 다듬었다. 『의식 에 직접 주어지는 것들에 관한 시론』(1889), 『물질과 기억』(1896), 『창조적 진화』(1907),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1932) 등을 남겼으며, 1927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나치가 집권하자 게쉬타포를 피해 망명한 사람들을 해외로 빼돌리는데 힘을 쏟았다. 후에 나치가 빠리를 점령하고서 그에게 '특별 대우'를 베풀자, "박해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고 싶다"면서 특별 대우를 거절했다. 보통 유태인들처럼 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몹시 추운 날 신고를 했으며, 그 때 얻은 폐렴으로 1941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을 필두로 한 프랑스의 무수한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그를 다시 안장했다. 베르그송의 사유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서구 사유의 역사에서 한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위대한 사유이며, 현대의 모든 형이상학적 탐구는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를 '현대 철학의 아버지'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 베르그송의 사유는 '지속의 직관(l'intuition de la dur e)' 개념을 기초로 한다. 지속은 시간의 본성이고, 직관은 시간의 본성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베르그송은 시간, 변화/생성/운동(changement, devenir, mouvement)은 결코 분할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인간의 지능(l'intelligence) 또는 오성(entendement)은 자꾸 사물을 나누어서 즉 분석해서 본다.
- 지능은 인간이 진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무기이며, 그 근본적인 기능은 사물들을 다루는 것 즉 조작하는 것(op rer)이다. 그런데 조작이란 고체에서 가능하며(우리는 물이나 공기를 자를 수 없다 → 싯달타의 깨달음과 비교), 때문에 인간의 지능 그리고 그로부터 생겨난 논리학, 분석적 지성은 기본적으로 고체를 모델로 하는 사유이다(分析이라는 말을 음미).
지속이란 흐름이며 액체적 사유를 요청한다(→ 詩와 비교). 지속의 첫 번째 속성은 연속성이다. 베르그송은 제논의 파라독스가 연속적 운동을 불연속적 공간들의 합으로 환원시킨 첫 번째 예라고 생각한다.(→ 텍스트 1) 그리고 이런 사유는 과학적 합리성 및 형이상학적 사변의 근저에 깊이 스며들어 있다. 베르그송은 이런 통찰을 과학과 철학의 역사 전체로 확장시킨다.
- 베르그송은 과학적 합리성의 이런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 무한소 미분(le calcul infinit simal)이었다고 본다. 무한소 미분은 유클레이데스 기하학에서 배제된 연속성과 운동성, 그리고 (비본질적으로는) 시간성을 도입함으로써 사유의 역사에 큰 이정표를 새겼다. 또 무한소 미분은 '극한으로의 이행(passage la limite)'라는 중요한 개념을 도입했다(극한 개념은 후에 데데킨트, 바이어스트라스, 칸토르 등에 의해 정교화된다).
- 그러나 수학과 실재(r alit )는 다르다. 실재는 결코 수학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비합리주의/'irrationalisme' → '비이성적인 것'과 혼동하면 심각한 오해), 궁극적으로 말해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이다. 실재는 '등질성(homog n it )'이 아니라 '다질성(h t rog n it )'으로 되어 있다(→ 동질성/이질성 개념쌍과 비교).
베르그송의 사유는 차이(diff rence)와 복수성(multiplicit )의 사유이다. 그러나 그의 차이는 체계를 전제한 차이가 아니라, 질적 창조라는 근본적인 의미에서의 차이이다. 베르그송은 전통 철학이 대개 "전체는 주어졌다"는 가정 위에서 사유했다고 본다. 그의 차이는 우주에서의 절대적 창조로서의 차이이다. 베르그송의 복수성은 외적 복수성이 아니다. 그것은 잠재적 복수성, 내적 복수성이다.
- 우주에는 근본적으로 두 가지 운동이 있다. 하나는 차이와 복수성을 끊임없이 생겨나게 하는 진화의 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것을 열적 평형으로 몰고가는 엔트로피의 운동이다. 베르그송은 이 두 운동(우주의 '상승 운동'과 '하강 운동')의 투쟁이 우주의 근본 운동이며, 이 투쟁의 결과로 각종 'eidos(= forme)'들이 생겨난다.(그러므로 베르그송을 '관념론자'로 부르는 것은 극히 피상적인 이해이다)
생명은 차이를 낳는 힘인 동시에 또한 기억이기도 하다. 베르그송은 지속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기억으로 보며, 생명과 물질의 투쟁은 또한 기억과 물질의 투쟁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 베르그송은 연속성의 사유에 입각해 '무(le n ant)' 개념을 사이비 개념으로 비판했다. 무 개념은 '가능성(la possibilit )' 개념을 전제하며, 베르그송은 무와 가능성 개념이 결국 인간의 주관(관심, 욕망, 바람, 아쉬움, ... )에서 유래함을 역설한다('무의 인간화'). 베르그송은 충만한 존재의 철학자이며, 무를 부재(不在)일 뿐인 것으로 봄으로써 서구 철학의 전통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 습관은 석화(石化)된 생명이다. 사회는 차이나 복수성, 운동, 생성보다는 규범, 법, 관례 등을 중시한다. 때문에 사회란 기본적으로 '닫힌 사회'이다. 베르그송은 우주의 '창조적 진화(l' volution cr atrice)'의 원동력인 '생명의 약동(l' lan vital)'이 우리 가슴속에서 숨쉬고 있다고 보며 그것이 바로 '사랑의 약동(l' lan d'amour)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윤리나 도덕에서 필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에서 맥놀이치는 사랑의 약동을 실제 직관하고, 그 직관을 통해 우주와 인간과 삶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리고 그 자신 자신의 철학에 충실하게 살았다.
- 베르그송의 사유는 생성과 운동, 차이와 질적 풍요로움, 복수성, 그리고 창조와 생명, 사랑의 사유였다. 현대 형이상학의 근본적인 통찰이 그에 의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유는 이후 하이데거, 화이트헤드, 메를로-퐁티, 들뢰즈 등의 철학, 루이 드 브로이(양자역학), 일리야 프리고진(카오스 이론) 등의 과학, 마르셀 프루스트 등의 문학, 인상파 미술·음악, 그리고 정치(베르그송은 미국 대통령 윌슨을 설득해 제 1차 세계 대전에 참전케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국제 연맹의 활동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 1861년 영국의 아일 오브 다넷에서 태어났으며, 캐임브릿지 대학에서 주로 수학을 연구했다. 수학적 재능과 인문적 교양을 겸비했던 그는 후에 캐임브릿지 대학과 런던 대학에서 강의했다. 1910년에서 1913년에 걸쳐 현대 논리학의
결정적인 저작인 『프린키피아』를 러셀과 함께 공동 저작했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가 하바드 대학 철학과에서 강의했다. 『과학과 현대 사회』(1925), 『과정과 실재』(1929), 관념의 모험』(1933)을 비롯한 명저들을 남겼다. 화이트헤드는 영국 경험론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도 편협한 형태의 경험론의 틀을 깨고 매우 다채롭고 또 열려 있는 경험주의를 추구했다. 현대 과학의 여러 원리들에 대해 심오한 분석을 남겼으며, 베르그송 철학의 몇몇 단점들을 보완해 위대한 형이상학 체계를 건설했다.
- 화이트헤드는 인간의 경험을 단지 지각(perception)으로 환원시키거나 '마음'이라는 추상적 존재의 활동으로 환원시키기를 거부한다. 화이트헤드는 인간이 하는 모든 경험들을 종합하는 것이야말로 철학(특히 형이상학)의 과제라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종합은 단순한 박학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인간의 활동들 근저에 깔려 있는 원리들과 개념들을 검토하고, 그것들의 상충하는 면들을 파고들어가 보다 포괄적이고 역동적인 개념 체계를 구성하고자 한다. 경험론자인 화이트헤드는 이런 사유가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지 않지만, 우리 경험의 지평을 한없이 넓혀나갈 수 있다고 본다.
화이트헤드는 실재의 본성을 '과정(process)'이라고 보았고 때문에 그의 철학은 '과정철학'이라 불린다. 이 점에서 니체, 베르그송의 뒤를 잇고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이 두 인물보다 합리주의적인 요소가 상대적으로 더 강하다. 사유하는 사람은 현실의 구체적 사실들에서 출발하지만, 그런 사실들을 포괄할 수 있는 포괄적이고 합리적인 범주들(categories)을 추구한다. 이 점에서 개념들이나 범주들을 불신한 니체와 베르그송과는 다르다(니체와 베르그송도 개념들이나 범주들의 나름의 역할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개념, 범주가 형이상학의 도구가 될 수는 없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화이트헤드의 사유는 니체, 베르그송의 생성의 사유에 플라톤 이래의 고전적인 철학의 꿈을 용해시켜 넣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어떤 개념 체계도 실재를 완벽하게 포괄할 수 없으며, 사유는 끊임없이 생생한 현실에 대한 경험으로 다시 내려와야 한다.
경험을 인식론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형이상학적 사변을 인식론적 잣대로 막으려는 것은 인간에게서 이성의 잠재력과 상상력을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변에 한계를 가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반역이다."
- 하르트만(Nicolai Hartmann, 1882-1950) 역시 인간의 다양한 경험들을 포괄하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전개했다. 하르트만은 베르그송과는 대조적으로 고전적인 철학들의 가치를 여전히 높게 평가했으며, 현대 과학과 고전 철학(특히 칸트)를 조화시켜 새로운 '순수이성비판'을 쓰고자 했다. 말년에는 윤리학과 미학에 전념하기도 했다.
- 21세기의 형이상학은 몇 가지의 과제를 앞에 놓고 있다. 1) 화이트헤드까지의 형이상학은 20세기 전반에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들을 포용하고 있지만, 이제 우리는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다양한 자연 탐구들(분자생물학, 카오스 이론, 급변론, 은하계 천문학, 복잡계 이론, 생태학, 지구과학 등등)을 철학적으로 해명하고 종합하는 일에 착수해야 한다.
2) 또 하나 지금까지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로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이루어졌지만, 이제 동북아 사유를 비롯해 다른 사유 전통과의 회통(會通)이 필요하다. 철학이 더 이상 지역성의 테두리에 갇혀서는 안 되는 것이다. 20세기 후반의 과학적 성과들 및 동양철학의 전통을 포용할 수 있는 형이상학의 모색이 절실하다. 9강에서 논할 자연철학들(톰, 프리고진, 자콥과 모노, ... )과 10강에서 논할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이런 길을 닦아주었으나, 아직 더 많은 사유가 요청된다.
참고 문헌
베르그송, 『시간과 자유의지』, 삼성출판사
『웃음』, 김진성 옮김, 종로서적(정연복 옮김, 세계사)
『물질과 기억』, 홍경실 옮김, 교보문고
『창조적 진화』, 서정철 옮김, 을유문화사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서광사
『사유와 운동』, 문예출판사
김진성, 『베르그송 연구』, 문학과지성사
들뢰즈, 『베르그송주의』, 김재인 옮김, 문학과지성사
송영진(엮어옮김), 『베르그송의 생명과 정신의 형이상학』, 서광사
콜라코프스키, 『베르그송』, 지성의 샘
하르트만, 『인식과 윤리』, 형설출판사
『존재학 범주론』, 형설출판사
모르겐슈테른, 『니콜라이 하르트만의 비판적 존재론』, 양우석 옮김, 서광사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오영환 옮김, 민음사
『과학과 근대 세계』, 을유문화사
『관념의 모험』, 오영환 옮김, 한길사
『상대성 원리』, 이문출판사
『이성의 기능』, 김용옥 옮김, 통나무
『자연 인식의 원리』, 이문출판사
강성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입문』, 조명문화사
김상일, 『수운과 화이트헤드』, 지식산업사
문창옥, 『화이트헤드 과정철학의 이해』, 통나무
2강 논리학에서 철학으로
- 1강에서 논의한 베르그송의 사유와는 매우 대조적인 또 하나의 사유는 흔히 '분석철학'(또는 이 철학이 흔히 영국과 미국에서 주류를 이루므로 '영미 분석철학')으로 불리는 사유 계열이다. 이 사유는 개념, 범주, 변증법 등 추상적인 사유를 거부하고 생생한 운동성을 지향한 베르그송과는 달리 오히려 논리학의 형식적 분석을 통해서 철학의 문제들에 접근한 사조이다.
19세기에 부울(George Boole), 밀(John Stuart Mill), 프레게(Gottlob Frege) 등이 현대 논리학의 형성에 크게 공헌했으며, 이 중 프레게는 분석철학의 성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 프레게는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전개되어 온 전통 논리학을 넘어서 현대 논리학을 건설하고자 했다. 전통 논리학이 주어-술어 구조라는 일상어의 구조를 토대로 이루어졌다면, 프레게는 수학적 형식화를 사용해 언어를 형식화하고자 했다.
우선 논리학이 다루는 것은 명제이다. 명제는 문장과 구분된다. 또 논리학은 형식을 다루지 내용을 다루지 않는다.
수학적 형식화를 통해서 일정한 집합은 변수로, 집합들끼리의 관계는 함수로, 그리고 특정한 경우는 상수로 취급된다. 그래서 '한국의 수도', '일본의 수도', '미국의 수도' 등등은 'x의 수도'로 형식화된다. "로미오는 줄리엣을 사랑했다", "이몽룡은 성춘향을 사랑했다",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사랑했다" 등등은 "x가 y를 사랑했다"로 형식화된다. 형식화를 비판하고 그것이 왜곡하고 있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을 강조했던 베르그송과 대조적으로, 프레게는 세계의 무수한 경우들이 공통으로 전제하고 있는 논리적 구조(logical structure)를 뽑아내고자 했다. 더 정확히 말해 프레게는 논리적 구조가 'Gedanke'로서 자율적으로 존재하며, 그 논리적 구조에 함수값들이 들어감으로써 구체적인 세계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 점에서 프레게 및 그 후 이런 식의 사유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플라톤적 사유 양식을 따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제 논리학(propositional logic)은 어디까지나 진위 판별이 가능한 명제들만을 다룬다. 감탄문, 명령, ... 등등은 명제 논리학의 관심사가 아니다(이런 한계 때문에 후에 John Austin, Gilbert Ryle, John Searle 등은 분석철학을 일상 언어 분석으로 가져간다).
프레게의 형식화는 그 후 복잡한 발전 과정을 겪어 현대 논리학의 주춧돌이 되었다. '술어 계산(propositional calculus)', '논리적 연결사들(logical connectives)', '양화사들(quantifiers)' 등과 같은 개념들이 개발되었다. "영수 아니면 철수이다. 그런데 철수는 아니다. 그러므로 영수이다" 같은 전형적인 논리적 형식은 'p∨q, -q, p' 같은 식으로 정형화되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전통 논리학의 형식들이 재정리되었고, 또 집합론의 도입으로(예컨대 벤 다이어그램) 더 정교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큰 공헌을 했다.
- 러셀과 화이트헤드는 『수학의 원리』(Principia Mathematica)에서 이러한 형식화를 일차적으로 집대성했다.
러셀은 우리의 일상 언어를 논리적으로 형식화함으로써 기존 철학의 많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순수 논리학자, 수학자인 프레게의 사유는 러셀에 이르러 본격적인 철학적 함의를 갖게 된다.
예컨대 "현재 프랑스 왕은 대머리이다" 같은 문장은 "어떤 x가 있고, 그 x는 현재 프랑스의 왕이며, 그 x는 대머리이다"로 분석될 수 있다. 이렇게 분석할 때 지시의 맥락과 서술의 맥락이 분명하게 드러나며, 이런 분석을 통해 전통적인 '존재론적 증명'의 맹점이 어디에 있는가가 밝혀진다.
또 하나의 예로 내포적 의미와 외연적 의미의 분명한 구분을 들 수 있다. 프레게는 논리적 형식화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두 의미('Sinn'과 'Bedeutung')를 구분하게 된다(샛별과 저녁별의 구분, '플라톤의 가장 뛰어난 제자'와 '알렉산드로스의 스승').
명제의 진위를 구분하는 것은 곧 각 변항들의 진위 구조를 통해서 계산된다. 이런 '진리표'에 의한 연산은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고안되었다.(예제: p∧q ∨ p∧-q)
-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 1889 - 1951)은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유태계 명문 가정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공학을 공부했고, 프로펠러 설계에 몰두했다. 그 과정에서 점차 관심이 순수 수학에로, 그리고 철학에로 기울었다. 프레게의 권유로 러셀 밑에서 공부했으며, 철학자 무어, 경제학자 케인즈 등과 사귀었다. 1차 세계 대전에 참가했으며 전쟁 중에
배낭에 넣고 다니던 수첩에 생각들을 기록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1918년에 『논리-철학 논고』(Tractatus logico-philosophicus)를 출간했다. 책을 출간한 후 철학을 버렸으며 오스트리아 시골 초등학교에서 교사직에 봉사했다. 자신에게 상속된 막대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지금 내 삶에서 좋은 것 한 가지는 때때로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준다는 것입니다." 그 후 수도사의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고, 누이의 집을 설계하기도 했다. 1929년 케임브리지로 돌아와 자신의 전기 철학을 극복하는 사유를 시작했다. 그의 후기 사유는 『철학적 탐구』(Philosophische Bemerkungen)에 수록되었다. 이 책은 언어철학 외에도 심리철학의 중요한 통찰들을 담고 있다. "우리의 삶은 꿈과도 같다. 좀 나을 때 우리는 단지 우리가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깨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에 우리는 깊이 잠들어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와 러셀을 통해 다듬어진 분석철학적 사유에 깊은 형이상학적 향기를 불어넣었다. 그의 삶은 스스로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철저하고 고독한 철학적 삶이었으며, 가장 순수하고 엄격한 사상가(Denker)의 모습을 보여준다.
- 비트겐슈타인은 『논고』의 핵심 사상을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명확하게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야 한다"고 요약했다.
이 책에서 전개된 비트겐슈타인의 언어철학은 흔히 '그림 이론'이라고 불린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실재의 그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그의 전기 철학은 표상/재현이라는 전통 사유의 테두리 내에서 전개된다. 언어는 세계를 그리는 명제들로 이루어진다. 명제들은 사고의 지각 가능한 표현이며, 사고는 사실의 논리적 그림이다.(여기에서 실재와 언어와 관념의 寫像 관계를 추구했던 고전 시대적 사유가 잘 드러난다)
실재와 언어의 관계가 간단한 것은 아니다. "철수가 내 옆에 있다"라고 말할 때, 실제 이 명제에서 '철수'라는 글자와 '내'는 옆에 있다. 그러나 이런 간단한 경우는 드물다. 때문에 여기에서의 그림이란 논리적 형식(logical form)이라 할 수 있다. 악보와 가수의 노래와 그 노래를 녹음한 CD, ... 등은 논리적 형식을 공유한다.(→ 번역의 문제와 비교)
그런데 이런 관계가 성립하려면 무엇보다도 '지시'(reference) 관계가 성립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단어는 복합적인 실재를 가리킨다. '민주주의'라는 단어는 그야말로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복합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분석이 요청되며, 명제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끝없이 쪼개야 한다(→ 분석적 사유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과 비교). 이것은 물질을 쪼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논리적 원자론(logical atomism)'이라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은 세계에 대한 그림을 제공하지 못하는 명제들은 '사이비 명제들'이라고 보았으며, 이런 생각을 토대로 전통 형이상학을 맹공했다. 그러나 칸트가 그랬듯이, 비트겐슈타인 역시 형이상학이 지향하는 세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칸트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했듯이,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가능한 모든 과학적 질문들이 대답되고 난 후에도, 삶의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논고』의 마지막 명제는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켜라"이다.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것은 신비한 것이다." 바하만(Ingeborg Bachmann)은 비트겐슈타인의 생각을 시로 표현했다.
...()... 산에서 우리는
호수들을 보고, 호수들에는
산들이 비치고. 구름 의자를 탄 채
한 세계의 鐘들이 산들거리고 있다. 그 누구의
세계인지를 아는 것은 금지되어 있구나.
...()... Von den Bergen
sieht man Seen, in den Seen
Berge, und im Wolkengest hl
schaukeln die Glocken
der einen Welt. Wessen Welt
zu wissen, ist mir verboten.
- 후기 철학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자신의 전기 철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언어철학을 제시한다.
후기 언어철학은 흔히 '사용론(theory of use)'라 불린다. 이제 의미는 그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용을 통해서 이해된다. 자연과학적 언어만이 세계를 그릴 수 있다는 생각도 철회된다. 또 전기에는 철학의 고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심리적 차원들(지향성, 기대, 느낌, ... )도 논의된다. 이런 논의는 후에 심리철학(mind-body problem, philosophy of mind)으로 불리며 크게 발전했다.
공사장에서 지붕 위의 사람이 "벽돌!" 하고 외치면, 밑의 사람은 벽돌을 던져준다. 위의 사람은 "당신 내게 벽돌을 던져주시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래 사람은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다. 왜일까? 언어의 의미는 늘 어떤 사용의 맥락에서 성립하기 때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사용을 '언어 놀이/게임(Sprachspiel/language game)'이라 불렀다. 이제 의미는 지시 대상과의 관계보다는 사용의 맥락에 중점을 두고서 분석된다. 자연과학도 하나의 언어 놀이일 뿐이다. 이런 식의 언어 이해를 언어학에서는 화용론(pragmatics)이라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제 자연과학적 언어가 아니라 일상 언어를 분석한다. 일상 언어를 교정해서 이상(理想) 언어를 만들려 했던 꿈(카르납 등)이 일상 언어에 대한 섬세한 분석으로 대치된다.
일상 언어 분석은 비본질주의 철학을 가져다주었다. '게임'이라는 말은 어떤 본질을 가지는가? 체스 게임, 교실에서의 어린이들의 게임, 교육용 게임, 비틀즈가 말한 게임(♪"love was such an easy game to play"♬), 스포츠, ... 이 수많은 게임'들'을 게임으로 만들어주는 본질은 무엇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이들 게임들 사이에는 다만 '가족 유사성(family resemblances)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니체와 베르그송이 수행했던 본질주의 비판을 언어철학적 차원에서 다시 확인해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생각은 현대 예술철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언어 게임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본적인 존재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삶의 형태(Lebensform/forms of lif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4장에서 배울) 후설의 '생활세계(Lebenswelt)'보다 다원화된 개념이다.
- 제 2차 세계 대전(1939-1945)은 유럽의 많은 사상가들로 하여금 미국으로 명명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언어철학과 (3강에서 배울) 비엔나 학파의 과학철학은 미국으로 이식된다. 미국은 19세기에는 유럽 철학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20세기 초에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을 통해서 '실용주의'라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사상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이제 20세기 후반에는 유럽에서 건너온 분석적-과학적 철학과 미국 토착의 실용주의가 통합되기에 이른다. 콰인(Willard Quine) 같은 사람이 이런 종합을 대표한다.
이후 분석철학은 논리-언어철학에서 크립키, 데이빗슨 등을, 심리철학에서 김재권 등을, 과학철학에서 쿤 등을 낳으면서 발전했으며, 최근에는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많은 시도들 -- 로티의 신실용주의 -- 이 도래하기에 이르렀다.
- 참고 문헌
러셀, 『서양철학사』(상, 하), 집문당
『수리철학의 기초』, 연세대학교출판부
『일반인을 위한 철학』, 집문당
『철학의 문제들』, 박영태 옮김, 이학사
비트겐슈타인, 『논리-철학 논고』, 천지
『철학적 탐구』, 서광사
『수학의 기초에 관한 고찰』, 서광사
『확실성에 관하여』, 서광사
가버·이승종, 『데리다와 비트겐슈타인』, 민음사
해리스, 『소쉬르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고석주 옮김, 보고사
맬컴, 『마음의 문제: 데카르트에서 비트겐슈타인까지』, 서광사
『비트겐슈타인의 이해』, 분석철학연구회 엮음, 서광사
콰인, 『논리적 관점에서』, 서광사
『믿음의 거미줄』, 종로서적
로마노스, 『콰인과 분석철학』, 지평문화사
크립키, 『이름과 필연』, 서광사
퍼트남, 『과학주의 철학을 넘어서』, 철학과현실사
『이성, 진리, 역사』, 민음사
『표상과 실재』,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3강 인식론/과학철학
- 전통 철학에서도 인식론은 한 자리를 차지했으나 형이상학과 윤리학에 비하면 부차적인 위상을 띠었다. 그러나 근세 과학이 눈부신 성과를 거두면서 인식론, 방법론, 과학철학 같은 메타적 분야가 큰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20세기에도 역시 19세기 말에 형성된 제 2의 과학혁명을 배경으로 다양한 형태의 인식론/과학철학이 전개되었다.
1. 실증주의
- 현대 인식론의 출발점은 실증주의이다. 오귀스트 꽁트에 의해 창시된 실증주의는 현대 학문이 가장 기초적인 배경이 되었고, 전문적인 맥락이 아닌 한 오늘날에도 과학 문화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 꽁트(Auguste Comte, 1798-1857)는 (달랑베르의 제자인) 쌩시몽의 제자로서 계몽 사상의 흐름을 이어받았다.
인간의 인식이 신학적, 형이상학적, 실증적 단계를 밟는다고 했으며, 자신의 시대에 걸맞는 '실증철학'을 세우려 했다. 그리고 그 기초 위에서 사회학을 수립했다.
과학은 '실증성(positivit )'에 기초해야 한다. 달리 말해 현상(現象, ph nom ne)에 기초해야 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인식 주관의 구성을 통해서만 비로소 의미를 부여받는 칸트적 현상이 아니라 독자적 위상을 가지는 현상(= 事實)이다. 이런 현상 개념은 이후 브렌타노로 이어지고 후설에까지 이어진다.
과학은 현상의 원인이 아니라 법칙을 탐구한다(脫存在論). 법칙이란 현상들 사이에 존재하는 불변적 관계이다.
백과전서파의 후예답게 과학을 분류하고자 했다. 단순성에서 복잡성으로 나아가면서 수학(특이한 위상),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생리학, 그리고 사회학으로 분류된다. 뒤의 과학은 앞의 과학에 의존하기는 하지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사회 정학과 사회 동학을 발전시켰다. 베이컨처럼 과학과 정치를 굳게 연결시켰다(푸코가 말하는 '지식-권력').
- 꽁트의 영향을 심대했다. 리트레, 텐느, 르낭, 르 당텍, 아벨 레이 등이 모두 꽁트를 발전시켰다. 또 꽁트의 영향으로 현대적인 형태의 심리학(리보, 비네, 폴랑, 자네, 뒤마, 리셰)과 사회학(에스피냐, 르 봉, 따르드, 라꽁브, 뒤르켐, 위베르, 모스, 포고케, 부글레, 레비-브륄, 랄로)이 발달하게 된다. 꽁트의 사유는 특정한 학파라기보다는 현대 학문 그 자체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밀, 스펜서 등은 꽁트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공리주의 철학을 세웠으며, 밀은 귀납 논리를 발전시켰다.
또 앞에서 말했듯이, 꽁트의 실증주의는 브렌타노, 후설 등을 비롯한 현상학자들에게 이어졌으며, 나아가 베르그송의 경험주의적 형이상학처럼 얼핏 대조적으로 보이는 사조들에게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꽁트의 실증주의를 발전시킨 대표적인 사람은 베르나르와 마하이다.
- 현대 생리학의 아버지이자 '내분비', '당뇨' 등의 발견자인 베르나르는 인식론의 역사에서도 중요하다. 꽁트를 따라 생리학은 물리학, 화학에 의존하지만 그것들로 환원되지 않음을 역설했다.
베르나르(Claude Bernard)는 명저 『실험의학 입문』(1865)에서 과학과 철학의 상보성을 역설했다. 과학 없는 철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이며, 철학 없는 과학은 맹목적인 지식으로 전락한다. 이런 태도는 이후 프랑스 철학의 전통에서 기본적인 태도가 되었다.
과학에서 중요한 것은 '가설(hypoth se)'과 '실험(exp rimentation)'이다. 과학에서는 관찰보다 실험이 중요하다. 그러나 실험은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라, 이미 가설 또는 이론을 가지고서 자연에게 물어보는 행위이다.
과학은 오로지 이성적인 행위만은 아니다. 사물들에 대한 감성이 중요하다(오늘날 '직관'과 '상상력'을 중시하는 것의 선구). 일본인들 특유의 '모노노아하레(物の情)'를 연상시킴. 실제 일본 과학은 철저히 실험적.
마하(Ernst Mach) 역시 꽁트의 영향을 받아 실증주의를 전개했다. 마하는 과학 법칙이란 현상들의 관계에 대한 가장 '경제적인 서술( konomische Darstellung)'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며, 이런 인식론에 입각해 특히 근대의 역학 체계를 설명했다.
마하의 영향력은 컸으며 볼츠만(Ludwig Boltzman)의 통계 역학은 처음에 마하의 실증주의에 짓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현상을 넘어서 사물의 심층에 다가서는 것이 과학이건만, 실증주의는 현상을 넘어서는 모든 이야기들을 '형이상학적'이라고 경멸했던 것이다(오늘날까지도 상당수의 과학자들이 '형이상학적'이라는 말을 이 19세기적인 뉘앙스를 가지고서 사용하고 있다).
- 수학자이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꾸르노(Augustin Cournot, 1801-1877)는 실증주의와는 다른 인식론을 제시함으로써 인식론의 역사에 중요한 이정표를 새겼다. 꾸르노는 철학을 제과학의 종합으로 보는 꽁트에 반대하고 철학을 제과학의 근본 원리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보았다.
꾸르노는 과학이 결코 현상의 서술(description)에 만족하는 행위가 아니며 자연의 근저로 파고 들어가는 담론이라고 보았다. 즉, 과학은 원인과 이유를 묻는다. 이 점에서 꾸르노는 현대 합리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꾸르노는 확률적 세계관의 수립자이기도 했다. 꾸르노는 근대 과학과 인식론이 전제하는 필연성이라는 조건을 비판하고, 과학적 인식은 늘 개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결정론과 우연을 동시에 긍정하는 특이한 입장을 전개했다. 우주는 결정론적 계열들의 총체이다. 그러나 그 계열들의 교차로부터 우연이 발생한다. 우연은 '무지의 도피처(스피노자)'가 아니라 실재(實在)한다.
쿠르노는 인식론에 만족하지 않고 사유를 형이상학의 방향으로 이끌고 갔다. 『유물론, 생기론, 합리주의』(1875)는 그 성과이다.
- 과학의 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별들 중 하나인 푸앵카레(Henri Poincar )는 '규약주의(conventionalisme)로 유명하다. 푸앵카레는 당대의 주된 경햐이었던 과학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과학이 내포하는 규약적 성격을 강조했다. 유클레이데스 기하학, 리만 기하학, 로바체프스키와 보야이의 기하학 등은 모두 자체로서는 맞는 것도 아니고 틀린 것도 아니다. 우리가 어떤 가설을 채택하는 것은 그것이 현상 서술에 적합하기(convenir ... ) 때문이다. 여기에서 적합하다는 것은 논리적 간명성과 생물학적 유용성을 동시에 뜻한다.
그러나 규약적인 것이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과학은 규약과 자연의 합치를 끝없이 확인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기하학들이 동등한 가치를 가지지만 현실 세계에 합치하는 것은 유클레이데스의 기하학이다(이 생각은 아인슈타인이 리만 기하학으로 우주를 서술함으로써 무너졌다). 때문에 과학은 규약적인 측면을 띠는 것이지 자의적인 것은 아니다. 법칙과 원리는 구분되어야 하며 법칙은 객관성을 가진다.
때문에 푸앵카레는 한편으로 규약주의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뒤엠, 르 르와(Edouard Le Roy) 등의 유명론에는 반대했다. 그리고 과학적 법칙의 객관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수학적 귀납법'을 창안하기도 했다. 푸앵카레는 과학적 작업이란 순수한 것이라고 보았다. 과학에 규약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과학은 결코 유용성과 현실적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과학은 인간 정신이 이룩한 위대한 행위이며 그 자체로서 소중한 것이다(이런 생각은 오늘날 르네 톰에 의해 역설되고 있다).
- 뒤엠(Pierre Duhem)은 푸앵카레의 영향을 받았으나 과학의 유명론적 성격을 강조한다. 하나의 사실에 수많은 이론들/가설들이 대응할 수 있다. 그것들 사이에서의 선별이란 결국 편의성이다. 이론/가설은 사실과의 정확한 합치에 의해서보다는 전체적인 정합성에 의해서 평가되어야 한다(물론 부분적인 검증이 요청된다). 이론이란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partially interpreted formal system'이다. 이런 생각은 후에 콰인에 의해 계승되어 'Duhem-Quine thesis'로 명명된다.
그래서 과학에서는 이론이 우선적이다. 모든 실험은 이론 의존적(theory-laden)이다. 실험 기구 자체가 이미 이론을 함축한다. 실험 기구들은 '물질화된 이론들'이다.
과학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과학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푸앵카레가 실증주의와 합리주의의 중간에 선다면, 뒤엠은 철저하게 실증주의를 취하고 있다.
- 20세기 전반에 비엔나에서 과학자들과 철학자들의 집단이 형성되는데, 이들은 '비엔나 서클'이라 불렸다. 카르납, 슐릭크, 노이라트, 라이헨바하 등등 쟁쟁한 학자들이 모여 마하, 푸앵카레, 뒤엠 등의 인식론을 이어 '논리-실증주의(Logische Positivismus)'를 제창했다.
논리-실증주의는 18세기 계몽 사상이 17세기까지의 형이상학에 대해 행했던 비판을 (헤겔로 대변되는) 19세기의 형이상학에 대해 행했다. 이 사조는 '검증 가능성(verifiability)'의 개념을 통해서 전통 형이상학을 가차없이 비판했으며, 이는 당대에 나란히 진행되었던 러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언어철학과 조응하는 것이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이 이런 파괴적인 작업만 진행시킨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당대 과학들(상대성 이론, 양자역학 등)의 세밀한 검토, 과학적 언어(理想言語)의 구성 등과 같은 본격적인 과학철학적 작업에서도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1933년 나치가 집권하자 대다수의 유태계 학자들(당대의 뛰어난 학자들의 상당수가 유태인들이었다)이 미국으로 망명 감으로써 미국이 과학철학 및 분석철학의 근거지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전에 미국을 지배했던 실용주의가 이런 사조들과 융합하게 된다.
그러나 논리-실증주의가 화려하게 꽃피기 이전에 벌써 현대적인 형태의 합리주의가 발아하고 있었다. 메이에르송에게서 이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2. 비판적 합리주의
- 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이란 사물의 원인, 이유, 본질 등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즉, 과학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서술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주의는 과학이란 현상을 넘어서 단순한 현상 관찰로는 얻을 수 없는 어떤 심층적인 지식을 얻는 행위라고 본다. 때문에 실증주의에서 형이상학과 과학은 완전히 반대되는 입장에 놓이지만, 합리주의에서는 정도차의 문제로 놓인다. 보다 과감하고 총체적인 과학이 형이상학이고 보다 세밀하고 구체적인 형이상학이 과학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합리주의는 '비판적' 합리주의이다. 여기에서 '비판적'이란 "19세기적인 비합리주의를 거친", 더 좁혀 말하면 "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라는 뜻이다. 즉, 현대의 합리주의는 고전적 합리주의처럼 세계의 본질에 대한 단적인 접근을 뜻하기보다, 과학적 절차를 통해서 실재의 본성에 점점 더 가까지 다가선다는 것을 뜻한다. 비판적 합리주의의 대표 주자들 중 한 사람인 브렁슈비크는 "고전적인 철학자들이 모두 플라톤의 제자라면, 우리 모두는 베르그송의 제자다"라는 말을 했다. 생성과 지속, 창조, 그리고 우주의 절대적인 질적 풍요로움, 양화(量化)와 공간화의 한계 등등에 대한 베르그송의 비판은 오늘날의 철학에 거의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다. 현대의 합리주의는 이미 니체-베르그송을 거친 합리주의인 것이다.
- 메이에르송(Emile Meyerson)은 19세기의 앙투안느 꾸르노를 이어서 새로운 형태의 합리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메이에르송은 과학사를 존중했지만 잡다한 과학사적 사실의 수집은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는 '역사적 아프리오리'라는 개념을 창안했는데, 이는 과학들에 있어 아프리오리한 면을 찾되 어디까지나 과학사에 대한 경험적인 탐구에 입각해야 한다고 보았다(후에 푸코에게서 이 말이 다시 등장한다).
메이에르송은 과학은 결코 사실들의 단순한 서술이 아니라 존재론적 의미를 띤다고 생각했다. 즉, 과학은 법칙성과 더불어 인과성을 추구하는 것이다(푸앵카레와 비교). 과학의 목적인 단지 예측과 유용성에 있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이 세계를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려 하는 행위이다. 열, 전자, 파동 등과 같은 개념들은 모두 이러한 열정의 소산들이다.
이해한다는 것은 합리화한다는 것(rationalisation)을 뜻한다. 그렇다면 합리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동일화(identification)이다. 현상적 잡다성을 넘어 실재의 간명함을 읽어내는 것이다.(HCl + NaOH = NaCl + H2O) 이 점에서 과학은 고대 그리스 철학을 그 원형으로 한다.(Causa aequat effectum) 상대성 이론의 범기하학(pangeometry)의 추구에서 이러한 태도가 여전히 확인된다.
그러나 실재는 베르그송의 말처럼 절대적인 풍요로움이요, 창조와 지속의 장이다. 때문에 과학적 이상은 그 끝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은 이전에 합리화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조금씩 합리성에 용해해 넣는다. 만일 이런 작업이 끝난다면 우리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를 재발견할 것이다. 그러나 과학이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과학적 작업의 조건이다. 과학을 비켜가는 무한한 질적 풍요로움이 오히려 과학적 합리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 실증주의와는 다른 이런 과학관은 이후 랄랑드(Andr Lalande), 브렁슈비크(L on Brunschvicg) 등을 통해서 발전되었으며, 또 한편에서는 칼 포퍼(Karl Popper)가 논리-실증주의를 논박하면서 비판적 합리주의를 펼쳤다. 이런 흐름을 가장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것은 바슐라르이다.
- 바슐라르(Gaston Bachelard, 1884-1962)는 만학(晩學)의 전형을 보여준다. 바르-쉬르-오브라는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오랫동안 우체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밤에는 독학을 계속했다. 마흔 살이 넘어서 비로소 열전도(熱傳導) 이론에 관련한 논문으로 물리학 박사를, 그리고 '근사적 인식'에 관한 논문으로 철학 박사를 취득했다. 아내를 일찍 사별한 그는 어린 딸 수잔을 키우면서 과학철학과 미학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수잔 바슐라르는 아버지를 이어 철학자가 되었다). 흰 수염을 휘날리며 수많은 학생들을 매료시켰던 그의 강의는 소르본느의 전설이 되었다. 바슐라르라는 이름은 바르-쉬르-오브의 자랑거리였다. 그의 부음(訃音)을 들은 바르-쉬르-오브의 농부들이 삽과 곡괭이를 내려놓고서 그를 위해 묵념을 했다고 한다. 바슐라르는 평생 베르그송을 넘어서려고 고투했다. 베르그송의 지속의 존재론에
맞서 순간의 존재론을, 형이상학에 맞서 과학을, 연속적 과학사에 맞서 불연속적 과학사를 제시했다. 바슐라르는 과학철학과 더불어 사원소(地水火風)의 현상학/미학이라는 파천황(破天荒)의 새로운 경지를 엶으로써 현대 문예 비평에서 큰 영향을 주었다.
- 바슐라르는 베르그송의 연속의 존재론(지속의 존재론)에 맞서 순간의 존재론을 제시했다. 시간은 흐르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특정한 순간들에 마치 촛불처럼 수직으로 솟아오른다. 예컨대 시(詩)는 '순간의 형이상학(m taphysique de l'instant)'이다.
- 베르그송은 과학을 '추상화'와 연관시키며 질적 풍요로움을 강조했다. 베르그송에게는 양면성이 있으며, 질적 풍요로움이 때로는 현상 너머의 본질로서 파악되는가 하면 때로는 우리의 지각을 통해서 파악 가능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때의 지각이란 일상적인 지각과는 다른 미적 지각이다.
바슐라르는 과학은 '인식론적 단절(coupure pist mologique)'을 본질로 하며(프리스트리의 플로지스톤에서 라부아지에의 산소로), 지각이란 아직 인식론적 단절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흐리멍덩한 상황에 불과하다. 바슐라르는 이 점에서 베르그송을 비판한다(그러나 베르그송에게서 '지각'이 이중적인 의미를 띤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 과학이 인식론적 단절들에 의해 진행되기 때문에, 과학의 역사는 곧 이 인식론적 단절들의 역사가 된다. 이것은 곧 과학의 역사가 불연속적으로 진행됨을 뜻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의 역사가 계속 '발전'해 왔다는 종래의 편견을 비판하고 과학사의 불연속을 강조했다.
그러나 연속의 측면도 있다. 그것은 뒤의 이론이 앞의 이론을 그 하나의 경우로서 포함할(envelopper) 때이다. 통계 역학은 열역학을, 아인슈타인 이론은 뉴턴 이론을, 리만 기하학은 유클레이데스 기하학을 그 한 경우로서 포함한다. 이 때에 우리는 과학이 "발전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대개 수학적 경우이다. 개념들의 경우는 이런 경우가 쉽지 않다.
- 반대로 생각해서 인식론적 단절을 방해하는 요인들을 생각할 수 있다. 바슐라르는 이를 '인식론적 장애물들(obstacles pist mologiques)'이라고 부른다. 이에는 선입견, 감정, 개인적 호오(好惡), 국적에 따른 편견 등등은 기본적인 것들은 물론이고, 예컨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내용을 생각하는 것, 하나의 말이 있으면 으레 그 말에 해당하는 실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 평소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과학적 사유에 투영하는 것 등등 많은 인식론적 장애물들이 있다.
- 현대 과학은 과거의 인식론적 개념들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특히 양자역학(量子力學)이 대표적이다. 그래서 바슐라르는 '새로운 과학정신(nouvel esprit scientifique)'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바슐라르의 인식론은 이 새로운 과학정신을 세우려는 노력 이외의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현대 과학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의 분석적 이성보다는 직관과 상상력이 요구되는 것이다. 또 과학이 결국 '간명성(simplicit )'을 드러낸다는 생각을 '간명성의 신화'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바슐라르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를 새롭게 종합해서 '과학적 변증법'을 제시했다.
- 과학은 절대적 지식에는 도달할 수 없다. 과학자의 물음에 대해 자연은 '예(oui)'가 아니라 '아니오(non)'를 답한다. 이것은 삼단논법 2형과 관련이 깊다.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그런데 나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간이다.
이것은 틀린 논증이다. 똑같은 형의 다음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그런데 뽀삐는 척추동물이다.
그러므로 뽀삐는 인간이다.
그런데 이 형은 소전제가 부정일 경우에는 올바른 논증을 만들어낸다.
모든 인간은 척추동물이다.
그런데 꿀벌은 척추동물이 아니다.
그러므로 꿀벌은 인간이 아니다.
바슐라르에 따르면 과학적 추론의 상당수가 이 2형을 사용한다. 그런데 이 2형은 오로지 부정의 결과만을 올바른 추론으로서 제시한다. 과학적 탐구가 궁극적인 '예'가 아니라 '아니오'만을 낳은 이유가 이것이다. 이런 결론은 포퍼가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 개념을 사용해 주장한 바와 일치한다.
- 바슐라르가 화학 실험을 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제자가 "선생님 플라스크에는 미생물이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습니다"(너무나도 투명한 합리주의)라는 말을 했고, 이 말로 바슐라르는 (그 자신의 말마따나) '순간적인' 깨달음을 얻었다. 이 후 바슐라르는 '사원소의 현상학'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을 독특한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 인식론에서 사원소설은 '인식론적 장애물'의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현상의 세계에서 사원소는 우리 마음을 채우고 있는 영원한 이미지들이다. 바슐라르는 이 이미지들과 그것들의 작용(imagination)을 서술해 나간다. 합리적 인식과 현상학적 감성을 동시에 인정한다는 점에서 바슐라르는 '진정한 스피노자주의자'이다. 바슐라르에서 과학-형이상학과 현상학이 화해할 수 있는 한 단초를 읽어낼 수 있다.
- 포퍼와 바슐라르 이후 "과학이란 무엇인가?" 등을 비롯한 일반적인 물음들은 어느 정도 일단락된다. 이제 개별적인 과학들의 매우 세부적인 문제들 또는 구체적인 과학사적 연구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깡길렘(George Canguilhem)은 바슐라르를 이어 연구했으며, 과학사에서의 단절이 '계기적 단절', '부분적 단절' 등을 포함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 깡길렘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 푸코에게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다고녜(Francois Dagognet) 역시 바슐라르를 이어 과학철학과 미학을 조화시키려 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은 과학사의 급진적인 단절('패러다임'의 단절)을 강조함으로써 전세계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 오늘날 담론의 세계는 극히 다원화되어 있으며 어떤 총체화도 불가능할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미셸 세르(Michel Serres)는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총체화를 추구한다. 백과전서파의 후예인 세르는 '헤르메스의 인식론'을 통해 담론들 사이의 소통, 번역, 개입, 분배 등의 논리를 제시했다. 그러나 세르의 총체성은 헤겔의 총체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개별적인 분야들의 다양성에서 논의를 시작하며, 조금씩 총체성의 이상을 향해 나아간다. 세르의 철학은 오늘날에 진정 필요한 사유를 제시하는 대표적인 사유이다.
참고 문헌
꽁트, 『실증철학 서설』, 한길사
九鬼周造, 『프랑스 철학 강의』, 이정우 옮김, 교보문고
매기, 『칼 포퍼』, 문학과지성사
포퍼, "추측과 논박", 이한구 옮김, 민음사
바슐라르, 『새로운 과학정신』, 인간사랑
『현대 물리학의 합리주의적 활동』, 정계섭 옮김, 민음사
『공간의 시학』, 민음사
『공기와 꿈』, 민음사
『꿈꿀 권리』, 열화당
『불의 정신분석 外』, 삼성문화사
『촛불의 미학』, 문예출판사
『풍경』, 열화당
『물과 꿈』, 문예출판사
『대지의 의지와 몽상』, 삼성문화사
깡길렘, 『정상과 병리』, 한길사
쿤, 『과학 혁명의 구조』,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세르, 『헤르메스』, 이규현 옮김, 민음사
『해명』, 솔
4강 반성의 철학과 현상학
- 서구 철학의 역사에서 본질과 외관(appearance)의 이분법은 중요한 위치를 점해 왔다. 이 때 '외관'이란 가변적이고 감각적인 존재들로서 참되지 못한 존재들이라는 뉘앙스를 품는다.
서구 근대 철학에서 외관은 '현상(phenomenon)'으로 변하며 나름대로의 의미를 함축하는 존재로 화한다. 그러나 칸트에서 뚜렷하게 볼 수 있듯이, 현상은 오로지 주체의 구성을 기다리는 수동적이고 비자율적인 존재로 그쳤다. 아리스토텔레스에서의 질료-형상이라는 도식이 칸트에 이르러 인식 질료와 아프리오리한 형식들이라는 도식으로 바뀐다.
꽁트는 '현상'이라는 말에 자율적인 존재론적 위상을 부여했다. 현상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며, 그 자체 'positivit '(실증성, 능동성, 적극성, 유효성)를 부여했다.(이런 생각은 브렌타노를 거쳐 후설에게로 이어진다)
- 현상을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는 철학적(존재론적-인식론적) 사유는 곧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인생을 적극적으로 이해한다는 가치론적-윤리학적 사유와 맞물려 있다. 따라서 철학은 현실 세계를 넘어서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실 세계 자체에 대한 탐구에 경도된다. 이런 맥락에서 신체, 의미, 습관, 감정, 불안, 죽음, ... 등등의 주제들이 이전보다 더 적극적으로 사유되기 시작한다.
이런 경향은 '실증성'에 대한 공통의 믿음을 깔고 있음에도 꽁트에서 유래해 논리-실증주의와 공리주의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는 서구 주류 사회의 철학과는 다른 계열을 형성한다. 즉, 이 때의 '실증성'은 과학적 탐구의 전제가 되는 '감각 자료(sense data)'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인생을 살아가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 즉 '생(Leben)', '실존(existence)'의 의미가 된다. 따라서 같이 경험적-실증적 태도에서 출발하지만, 꽁트 이후의 실증주의 계열과 멘느 드 비랑 이후의 반성철학 계열은 전혀 다른 -- 나아가 대립적인 -- 길을 걸어간다.
- 현대적 의미에서의 반성철학(la philosophie r flexive)은 고중세의 형이상학이나 근대의 과학적 철학이 아닌 제 3의 길을 걸어간다. 이 계열은 멘느 드 비랑이 데카르트의 'cogito'에 자신의 'volo'를 맞세우면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딜타이, 니체 등의 '생철학(Lebensphilosophie)', 라베송, 라슐리에, 부트루 등의 '정신주의(spiritualisme)', 네동셀 등의 '인격주의(personalisme)', 야스퍼스, 사르트르, 마르셀 등의 '실존주의(existentialisme)' 등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서 후설과 메를로-퐁티, 레비나스 등의 현상학, 하이데거, 가다머, 리쾨르 등의 해석학이 방법론적으로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된다. 물론 지금 열거한 사조들, 인물들 사이에도 많은 차이들이 존재하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이 반성철학 계열이 실증주의 계열 및 사회주의 계열과 더불어 서구 근현대 사유를 삼분했다고 할 수 있다.
- 19세기에 개별적이고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반성철학 -- 그 핵심 흐름은 멘느 드 비랑 이후의 '정신주의'와 쇼펜하우어, 키에르케고어, 니체, 딜타이 등의 '생철학'이다(물론 이런 일반화가 곤란한 맥락이 많다) -- 은 20세기에 들어와 하나의 전기를 맞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이 반성철학적 사유에 뚜렷한 방법론적 구도를 제공한 '현상학(Ph nomenologie)'의 등장이다. 현상학의 등장으로 반성철학은 보다 엄밀한 인식론적 도구를 가지게 된다. 후설은 그 자신은 생철학이나 실존주의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지만, 현상학이라는 방법의 창시를 통해서 이런 흐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 후설(Edmund Husserl)은 베르그송과 같은 해인 1859년 모라비에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6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했다. 1887년에서 1901년까지 할레 대학에서 사강사를 맡았으며, 1901년에서 1916년까지는 괴팅겐 대학에서 가르치고 연구했다. 그 후 1928년까지 프라이부르크 대학에서 정교수로 재직했으며, 1938년 79세의 나이로 운명했다. 나치즘의 등장으로 고난을 겪었으며 쓸쓸하게 운명했다. 후설 사유의 목적은 학문의 토대를 닦고 그를 통해 유럽을 구제하려 한 것이었다. 후설의 저작으로는 『논리 연구』(I, II, 1900-1901),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에의 이념』(1913), 『데카르트적 성찰』(1931), 『유럽 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1936) 등이 있다.
- 후설은 철학을 '엄밀한 학'으로 만들고자 했으며, 그 실마리 -- 아르키데메스의 점 -- 로서 인간의 의식을 탐구했다. 이 점에서 그는 데카르트와 칸트의 길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상학이란 현상의 로고스(Ph nomeno-logie)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본래 현상과 로고스는 대립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후설은 현실-본질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현상 자체를 두 차원 -- 본질적인 차원과 비본질적인 차원, 즉 선험적 차원과 경험적 차원 -- 으로 나누어 본다. 그래서 로고스를 가진 현상을 탐구한다.
로고스를 가진 현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현상의 '의미'를 탐구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상의 의미는 의식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후설에게서 의미를 탐구한다는 것은 곧 의식의 활동 내용을 탐구한다는 뜻이다.
- 1강에서 베르그송이 언어가 세계의 실재를 어떻게 왜곡시키는가를 밝힌 과정을 논했다. 2강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의 전후기 철학에서 언어의 의미가 어떻게 달리 생각되는가를 밝혔다. 3강에서 바슐라르에게서 현상에 대한 인식(더 정확히는 시적 감흥)과 과학적 인식에서의 세계의 의미가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논했다. 이제 4강에서 논한 후설의 의미 이론과 앞에서의 의미 이론을 비교해 볼 수 있다. 5강에서의 해석학, 6강에서의 맑시즘적 의미 이론, 7강에서의 구조주의적 의미 이론, 8강, 10강에서의 푸코, 들뢰즈의 의미 이론도 모두 비교해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20세기 철학의 핵심적인 축들 중 하나는 바로 '의미'의 개념일 것이다.
- 의식의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로서 포착되는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 후설은 '현상학적 환원(die ph nomenologische Reduktion)'을 제안한다. 이것은 곧 객관성의 의미작용 및 대상들의 실존을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의식적 세계의 본질적 구조들의 구성의 역사"를 파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런 후설의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우리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무, 돌멩이, 사람들, 동물들, 푸른 하늘, 땅, 풀, ... 등 '사물들', '세계'는 후설의 시대에 와서는 원자들, 텐서 방정식, 그래프, 수식, 세포, 탄성 곡선, ... 등과 같은 개념적-이론적 존재들 속에서 와해되어버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고는 마침내 인간의 의식까지도 수량화, 법칙화하려는 경향에 이르렀다. 베르그송, 후설, 제임스 등은 모두 이런 문제 의식을 공유했던 철학자들이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의 모토로서 "사태들 자체로(zu den Sachen selbst)"를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 후설의 사유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후설은 체계를 제시한 철학자라기보다는 늘 사고 실험에 몰두한 철학자였다. "나는 내가 본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안내하고 보여주고 서술하려 할 뿐이다." 후설의 사유는 몇몇 측면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순수' 현상학: 논리학에 철학적 기초를 부여하려 한 작업. 사념적 존재들(수학적, 논리학적 존재들)의 본질적인(eid tique, 그리스어 'eidos'에서 유래) 면들, 불변적인 면들을 파악하고자 했다.
'선험적' 현상학: 모든 의미작용들 자체의 지향적(指向的) 원천을 밝히려 한 작업. 주체가 구성하는 인식의 범주들이나 개념들을 발생론적으로 파악하고자 했다. 대상들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은 선험적 주체이며, 이 선험적 주체가 탐구의 중심이다.
'생활세계적' 현상학: 본질주의를 포기하고 일상 세계의 의미작용들을 밝히려 한 작업. 인간의 문화의 역사가 사유의 초점에 오며, 여기에서는 표백된 본질들의 세계가 아니라 생활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이 문제가 된다.
- 칸트가 그랬듯이, 후설 또한 의식을 탐구하면서도 스스로의 작업을 심리학과 구분하려 했다. 후설은 1894년 프레게의 『산수의 기초』를 읽었으며, 이로부터 (밀 등으로 대표되는) 수의 기원에 대한 심리학적-경험주의적 설명의 한계를 깨달았다. 심리주의적-자연주의적 설명만으로는 과학적 진리들의 보편적이고 필연적인 특성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심리주의/자연주의에 대한 후설의 관계는 르네상스 회의주의에 대한 데카르트의 관계, 영국 경험론에 대한 칸트의 관계와 유사하다. 보편성과 필연성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후설은 고전적인 철학자들의 유형에 속한다.
후설은 논리학적-수학적 대상들의 탈물질성(Idealit t)을 증명하기 위해 칸트가 그랬듯이 '사실의 문제'와 '권리의 문제'를 구분했다. 사실의 문제는 경험적이고 발생적인/인과적인 문제이지만, 권리의 문제는 진리의 정당화의 문제이다. 그것은 인간적 본성의 우발성들로부터 벗어난 진리의 문제이다.
- 후설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와 칸트의 '선험적 주체'를 이어 선험적 의식을 학문의 토대로 삼았다. 때문에 후설은 의식이라는 존재의 특성을 현상학의 기초로 삼았는데, 그것은 바로 '지향성(Intentionalit t)' 개념이다. '세계와 우리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지향성이며, 지향성은 중세 철학에서 그랬듯이 대상을 우리에게 불러오는 의식을 활동들을 동반하는 의미의 차원을 뜻한다. "모든 의식은 무엇인가에 대한 의식이다."
데카르트에게서 코기토와 사물의 본질은 신이 준 '자연의 빛'에 의해 일치한다. 칸트에게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의식과 그 의식을 촉발하는 잡다(雜多)이며, 이 잡다는 의식에 의해 구성됨으로써 비로소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된다. 후설에게서 의식의 일방적 성격은 의식과 대상의 양방적 성격으로 바뀌며, 또 자연의 빛은 내재적 방식으로 재현되며, 의식과 그 대상은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된다.
그러나 이 일치는 어디까지나 순수 의식의 활동(no sis)과 이 활동과 일치하는 순수 의미(no ma) 사이에서 성립한다.(이 외에 물질적 층위 즉 'hyl '가 있으며, 결국 후설 현상학은 질료층, 의미층, 의식층 세 층위의 구조로 진행된다) 이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판단 중지(epoch )가 필요하며, 그 후 현상학적 환원을 통해서 현상학적 연역이 가능해진다. 환원이란 결국 의식에 주어진 경험적 소여(所與)들을 정화함으로써 '순수 현상들에 대한 과학'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 베르그송과 제임스가 그랬듯이 후설 역시 의식을 시간 개념과 밀접하게 관련시켜 분석한다. 칸트는 인간이 시간을 인식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으며, 그것을 순수 직관으로서, 모든 인식의 형식적 조건으로서, 그래서 분해 불가능하고 분석 불가능한 것으로서 생각했다. 그리고 시간을 공간과 정확히 대칭적인 방식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칸트의 시간은 베르그송이 비판했던 '공간화된 시간'의 전형이다. 그러나 후설은 '시간 의식'의 분석에 상당한 노력을 경주했다.
후설의 본질주의와 시간 분석이 충돌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의식을 흐름으로 볼 것인가, 그 흘러가는 와중에 나타나는 본질적 측면들을 볼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전선은 흐름이지만 단면으로 보면 많은 동그라미들의 집합으로 볼 수 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후설은 흐름에 주안점을 둔 '발생적 현상학'과 그 와중에서 확인되는 의식의 본질들에 대한 '정적 현상학'을 동시에 진행시켰다고 할 수 있다.
시간은 기억과 기대, 상상 등과 같은 활동을 담지한다. 후설은 '살아 있는 현재(lebendiges Gegenwart)'에 대한 분석에서 출발해, 과거 지향(Retention)과 미래 지향(Protention)을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특히 11장)을 발전시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후설은 이런 분석을 통해 모든 것을 과학이 만들어낸 '관념의 옷(Ideenkleid)'으로 환원시키고자 하는 '객관주의'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이 객관주의가 유럽 학문의 위기는 물론이고 유럽 자체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보았으며, 이 '유럽 학문의 위기'를 '선험적 현상학'으로 구제하려고 했다.
- 후설은 현상학을 통해서 과학을 정초하려 했지만, 그리고 과학으로 하여금 심리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려 했지만, 현상학이 '의식(Bewu tsein)'을 과학의 토대로 삼았다는 점에서 과학의 실제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하겠다.(이것은 후설의 순수 의식을 벗어나 몸을 토대로 삼은 메를로-퐁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3강에서 말했듯이 과학의 특성은 바로 '인식론적 단절'에 있기 때문이다. 인식론적 단절 이전의 차원에 대한 분석으로 인식론적 단절을 본성으로 하는 과학을 정초하려 했다는 점에 현상학의 문제점이 있다.
때문에 후설 이후의 현상학은 후설에게서 여전히 남아 있는 본질주의 및 주객 일치라는 고전적인 전제들을 떼어내고, 과학 이전의(즉 인식론적 단절 이전의) 생생한 생활세계(Lebenswelt)를 분석하고자 했다.(그러나 이런 경향은 이미 후설 자신에 의해 마련된 것이다) 이것은 곧 현상학이 인식론에서 반성철학으로 옮겨갔음을 뜻한다. 그러나 현상학은 바슐라르처럼 이 현상 세계를 미적 대상으로만 보려 하기보다는 타인, 신체, 실존, 사회, 역사, 문화 같은 문제들로 파고들어 감으로써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메를로-퐁티를 들 수 있다.
현상학은 본래 인식론적 성격을 띠고 있지만 생활세계의 현상학은 결국 '생활', '인생'을 탐구하는 사유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이 사유가 결국 실존주의로 귀착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는 '현상학적 인간존재론(l'ontologie humaine ph nom nologique)'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이것은 후설의 현상학이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을 거쳐) 실존주의로 전환되었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인간존재론으로서의 실존주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상황과 맞물려서 지성계에 퍼져나갔다.
- 과학이 발견해내는 본질들의 세계와 우리의 삶이 진행되는 생활세계를 조화시키는 것은 현대 사회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 하나이다. 베르그송에게 있어 과학과 형이상학, 비트겐슈타인의 과학 언어와 일상 언어에 대한 분석, 바슐라르의 아니무스와 아니마, 그리고 후설 현상학과 생활세계 현상학의 관계 등을 유기적으로 관련시켜 생각해 보자.
참고문헌
스피겔버그, "현상학적 운동", I/II, 이론과실천
한전숙, "현상학", 민음사
후설, 경험과 판단, 대우학술총서 103
순수 현상학과 현상학적 철학의 이념들, 최경호 옮김, 문학과지성사
시간의식 - 한길그레이트북스 19
심리현상학에서 선험현상학으로, 민음사
유럽학문의 위기와 선험적 현상학, 한길그레이트북스 26
현상학의 이념 - 엄밀한 학으로서의 철학, 이영호/이종훈 옮김, 서광사
메를로-퐁티, 의미와 무의미, 서광사
현상학과 예술, 서광사
5강 존재와 언어(해석학)
해석학(Hermeneutik)은 '헤르메스'에서 유래한다. 헤르메스는 신들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이다. 이것을 일반화할 경우 텍스트란 결국 저자의 의도 및 그 의도가 형성된 맥락, 상황을 전달하는 메신저이다. 해석학이란 텍스트 해석의 방법이다.
해석학은 문헌학을 비롯한 텍스트 연구 방법론으로서 일찍부터 개발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한 텍스트 연구 방법이라는 의미에서 현대적인 의미로 전환되기 시작한 것은 슐라이어마하(Friedrich Schleiermacher)와 딜타이(Wilhelm Dilthey)부터이다.
해석학은 언어를 '명제'(프레게)나 (좁은 의미의) '기호'로 보기보다는 '상징(symbole)'으로 본다. 즉, 해석학에서 언어는 단지 특정한 사물을 지시하거나 진위 판단이 가능한 'Gedanke'가 아니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외에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이다. 해석학은 이 숨겨진 의미를 읽어내는 방법이다.
해석학은 생철학적 계기와 형이상학/존재론적 계기를 동시에 함축한다. 해석학은 전통적인 형태의 형이상학, 도덕으로부터 텍스트 해석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해석학은 텍스트를 쓴 사람과 읽는 사람의 생(Leben)에 초점을 맞추며 인간이 삶에서 겪는 체험(Erleben)을 다시 체험하고자(Nachleben) 한다. 이러한 성격은 딜타이에게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러나 동시에 해석학은 언어가 담고 있는 존재에 주목하며 이 때 존재론적 함축을 띠게 된다. '숨겨진 의미'를 찾는 것은 "언어는 존재의 집"(하이데거)이라는 생각을 전제하며, 이 점에서 전통 형이상학을 대체하는 새로운 형태의 형이상학이라는 함의를 띠게 된다.
- 슐라이어마허는 이전의 해석학 전통과 구별되는 몇몇 새로운 요소를 해석학에 도입했다.
학문으로서의 해석학: 기법(Kunst)에서 학문으로
추체험: 저자의 정신적 삶의 이해
해석학적 순환(hermeneutische Zirkel): 전체와 부분의 순환
선이해(先理解): 순환의 실마리
- 해석학을 세계와 인간,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인 현대의 굵직한 몇 가지 사유 계열들 중 하나로 확고하게 정립한 것은 딜타이(1833-1911)이다. 그는 해석학을 모든 형태의 '정신과학(Geisteswissenschaften)'을 위한 일반적인 철학으로 수립하고자 했다.
딜타이는 칸트의 인식론이 자연과학에 대한 메타이론일 뿐 인간의 현실적 삶에 관한 범주들을 제시해 주지는 못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에 상응하는 '역사이성비판'을 쓰고자 했다. "로크와 흄 그리고 칸트에 의해 구성된 '인식하는 주체'의 혈관 속에는 살이 있는 피가 흐르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성(Geschichtlichkeit)'을 핵심으로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딜타이는 이 역사성을 헤겔적인 사변철학으로 파악하기를 거부한다. 그렇다고 그가 맑스적인 유물론으로 간 것은 아닌데, 왜냐하면 'Geisteswissenschaften'이라는 말이 잘 나타내듯이 그의 관심은 'Geist(정신)'에, '내적 체험'에 있기 때문이다. 해석학은 유물론과 달리 탐구의 초점을 '의미'에 맞춘다. 나아가 딜타이는 역사주의 또한 거부한다. 그는 역사 상대주의보다 일반적 성격의 학문으로서의 해석학을 꿈꾼다.
이런 맥락에서 딜타이 역시 해석학을 위한 여러 개념들을 수립했다.
감정이입(Einf hlung): 슐라이어마허적 요소, 그러나 그와 다름
설명(Erkl ren)과 이해(Verstehen): "우리는 자연을 설명하고 정신적 삶을 이해한다(Die Natur erkl ren wir, das Seelenleben verstehen wir)"
체험-표현-이해
경험(Erfahrung)과 체험(Erleben, Erlebnis): 지각과 감정으로 인간을 설명하려는 태도에 대한 비판. 生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하려 함.(현상학에 영향) 시간성(Zeitlichkeit)의 중시.(하이데거에 영향) 시간은 의식의 주관적 범주가 아니라 생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 의미는 시간적. 역사성에 연관.(하이데거에 영향)
표현(Ausdruck): 체험을 다루지만 내성(內省)으로 가지는 않는다. 체험의 외화(Ent u erung), 객관화.(오늘날의 '텍스트' 개념과 연관)
이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정신을 파악하는 것.
딜타이는 한편으로 생철학자로서 삶의 충만함과 의미를 이해하려 했고, 다른 한편으로 인식론자로서 해석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려 했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에는 니체적 요소와 신칸트학파적 요소가 공존했다고 할 수 있다.
딜타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면서도 해석학을 인식론이 아닌 존재론으로 끌고 간 인물은 하이데거이다.
-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독일 메스키리히에서 태어났으며, 후설 밑에서 배웠다. 후설의 현상학과 딜타이의 해석학에 영향 받았으나 이런 요소들을 자신만의 존재론적 관심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나치가 집권하고 (스승 후설을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핍박받고 쫓겨나고 죽을 때 베를린 대학의 총장에 취임해 '총통'을 위한 연설을 했다. 그 후 총장직에서 물러났으나 반성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존재'의 장막으로 숨어 들어갔다. 니시다 기타로, 박종홍 등을 비롯한 어용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20세기 철학의 커다란 수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론자로서 서구 철학의 깊은 근저로 파 내려가 독특한 사유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학자로서 뛰어난 인물이라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존재와 시간』(1927)에 나타나 있으나 이 저작은 미완성으로 그쳤다. 나치 정권에서 물러난 후 그는 사유의 '전회(Kehre)'를 단행해 후기 철학으로 넘어 갔다.
- 하이데거는 후설의 의식 중심적, 본질주의적 철학을 비판한다. 인간은 순수 선험적 자아가 아니다. 인간은 현존재 즉 '거기에-있는-존재(Dasein)'('거기'에는 시간도 포함된다)이다. '거기(da)'란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내(In-der-Welt)'이다. 즉, 인간은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더 쉽게 말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인간은 순수 자아가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달타이와 니체의 연장선상에 있으면서도 방법론적으로 현상학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다만 하이데거는 'Ph nomeno-logie'를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학문이 아니라 존재의 언어를 파악하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현상'이란 드러나는 것으로서 그것은 곧 존재자(ta onta, das Seiende)이다. 로고스란 언어로서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Ph nomeno-logie'를 현상의 본질을 인식하려는 담론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존재를 이해하려는 담론으로 즉 해석학적인 담론으로 이해한다.
- 하이데거의 기본 관심은 존재론이지만, 그 전에 존재를 이해하고 존재 물음을 던지는 유일한 존재인 인간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하이데거는 이 작업을 '기초 존재론'이라 부른다. 인간은 막연하게나마 자신의 실존(Existenz)과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으며, 이 사실(Faktum)에서 출발해 존재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그래서 존재론 이전에 우선 인간을 다루는 기초 존재론이 필요하다. 인간은 "존재의 목동"이기 때문이다.
- 하이데거에게 '세계'와 '사물'은 현상학적 주관성과도 과학적 객관성과도 구분되는 방식으로 이해된다. 세계와 사물은 이제 인간이 현실 세계에서 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서술된다. 하이데거는 현실 세계가 결코 데카르트가 이야기하는 것과 같은 과학화된 세계가 아니라 생활세계라는 것을 손에-잡히는-존재(Zuhanden-sein), '...를-위하여-구조(um ... zu ... )'를 비롯한 다양한 개념들을 동원해서 서술한다.(망치의 예) 『존재와 시간』의 1부는 이런 논의에 할애되고 있다.(1부는 공간론, 2부는 시간론이라고 볼 수도 있다)
- 하이데거는 딜타이의 해석학을 존재론으로 전환시킨다. 이해란 방법론이기 이전에 인간의 존재 방식이다. 현존재는 늘 어디엔가 처(處)해-있는-존재이며(Befindlichkeit)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존재이다.
현존재의 이러한 의미 이해는 시간을 그 근본적인 지평으로 가진다. 그래서 이해란 항상 시간과 관련되며 현존재의 미래에의 기투(Entwurf)에 관련된다. 현존재의 또 한 특성은 가능성에 있다. 『존재와 시간』, 2부는 시간론에 할애된다. 시간의 저편에서 인간은 '죽음으로-향하는-존재(Sein-zum-Tode)'라는 것을 발견하고 자신의 실존이 곧 '불안(Sorge)'를 그 본질로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불안을 통해 인간은 무(Nichts) 앞에 서게 되며 실존적 결단을 통해 깨어있는 인간, 본래적 인간이 될 수 있다.
- 하이데거의 전기 철학은 '간전기(間戰期, entre guerres)를 반영하는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며, 사르트르는 이 사유를 밝은 실존주의로 전환시킨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자신을 실존주의자로 해석하는 사르트르에게 불만의 서한을 보내며(『휴머니즘에 관한 서한』), 자신이 존재론자임을 분명히 한다.
- '드러남' 즉 탈은폐성(脫隱蔽性)은 곧 존재의 나타남이다. 하이데거가 현상학을 채택한 한에서 그의 존재론은 비가시에 대한 사변을 뜻하기보다 가시에 대한 해석(Auslegung)을 뜻한다. 그러나 이 해석은 인간이 존재에 언어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 언어로 하여금 인간을 통해서 말하게 함으로써 스스로를 드러내는 것이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그래서 나는 서글픈 체념을 배웠다네.
말이 불가능한 곳에는 사물도 없다는 것을.(게오르크 트라클)
So lernt ich traurig den Verzicht:
Kein Ding sei wo das Wort gebricht.
-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가 사물들을 자신 앞에 불러와(vor-stellen) 표상하는 사유이며 때문에 사물들을 대상화하고 주관화해 왔다고 본다. 그 시초로서 플라톤의 사유가 비판되며, 그 후 서구 사유의 존재 망각이 비판된다. 이런 과정은 계속 거듭되어 니체의 '힘에의 의지' 같은 개념에서 극에 달하며 그 결과 오늘날의 기술 문명이 도래했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서구 사유의 해체를 통해서 존재론적 차이(존재자와 존재의 차이)를 역설했다.
하이데거의 후기 철학은 철저하게 언어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특히 시의 분석이 주종을 이룬다. 이것은 하이데거가 시야말로 존재를 드러내 주는 언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횔덜린, 릴케, 트라클 등의 시에 대한 분석을 통해 "존재의 빛 속에(In-der-Lichtung)" 서 있음을 지향했다. 진리란 명제와 사태의 일치가 아니라 드러남, 탈은폐성이다. 시와 철학은 이 탈은폐성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한편으로 전통 사유의 주관성, 인간중심주의, 존재 망각에 대한 비판으로 나타나며,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상황에서의 탈출구로서 시와 예술을 통한 존재에의 귀기울임이라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 하이데거 이후 해석학을 발전시킨 인물들로서 가다머(Hans-Georg Gadamer)와 리쾨르(Paul Ricoeur)가 있다. 가다머는 하이데거의 사유를 좀더 구체적인 형태로 다듬었으며 특히 미학의 문제와 역사철학의 문제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의 저작으로는 『진리와 방법』이 대표적이다. 리쾨르는 해석학을 주로 다른 담론들(언어분석철학, 구조주의 등)과 대결시키면서 정교화했고, 또 『시간과 이야기』를 통해서 미학을 전개하기도 했다.
참고문헌
팔머, 『해석학이란 무엇인가』, 문예출판사
슐라이어마허, 『해석학과 비평』, 최신한 옮김, 철학과현실사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이기상 옮김, 까치
『예술 작품의 근원』, 예전사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서문당
가다머, 『진리와 방법』, 문학동네
리쾨르, 『해석 이론』, 서광사
『해석의 갈등』, 아카넷
6강 사회주의 사상의 전개
19세기에 맑스와 엥겔스에 의해 마련된 '과학적 사회주의' 사상은 이후 이론적-실천적으로 발전되어 나갔으며, 마침내 1917년 러시아 혁명을 통해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소비에트연방공화국)이 탄생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비롯해, 동구, 쿠바, 인도차이나 반도, 북한 등등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났으며, 다른 한편 서구 자본주의 국가 내에서도 맑스주의적인 체제 비판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20세기는 맑시즘에 의한 미증유의 역사 실험이 이루어진 시기이며, 무수한 사상적 투쟁과 실제 전쟁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1. 레닌과 러시아 혁명
- 19세가 말 러시아는 아직도 짜르(Czar) 즉 '카이사르'에 의해 통치되던 봉건 국가였다. 사회는 극단적인 신분 체제였고, '치노프니크' 즉 출세용 사다리 체제가 그 사회를 지탱했다.(지식인들의 '신분 상승'을 보장해 줌으로써 사회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는 전형적인 장치. 고대 중국의 과거 제도나 오늘날의 고시를 생각하면 되겠다)
- 1961년 계산된 '농노 해방' 이후 러시아 자본주의가 급작스럽게 발달. '인텔리겐챠'에 의한 '나로드니키' 즉 '나로드(인민)'주의자들이 출현. 전통적인 '오브쉬치나(농촌공동체)'로부터 농민 사회주의로의 직접적인 이행을 주장. 바쿠닌의 무정부주의에서 잘 나타나듯이, 열혈청년들과 농민 대중들의 거리가 컸음.
- 나로드니키를 비판하면서 러시아 최초의 맑시즘 등장. 플레하노프('러시아 맑시즘의 아버지'), 악셀로드, 자술리치 등이 '노동해방단'을 결성해, 나로드니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한편 산업 노동자들이 중심이 되는 러시아 혁명을 꿈꾼다. 1889년 제 2차 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가 러시아 대표로 참석.
- 국제 사회민주주의가 '경제주의'로 흐르다. 레닌(Vladimir Lenin)의 비판: "투쟁의 목표를 임금 인상, 노동 시간 단축 등에만 둔다면 결과적으로 자유주의적 자본가 계급을 도울 뿐이다." 경제주의의 이론적 배경: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레닌의 비판: "만일 경제 투쟁을 그 자체로서 완결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런 투쟁 내에는 어떤 사회주의적인 요소도 존재하지 않는다." 레닌은 경제주의, 수정주의, 소영웅주의(테러리즘) 등을 모두 비판. 대중들의 정신 무장을 위해 《이스크라( )》를 창간.
- 레닌, 경제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를 출간. 노동 운동의 자생적 요소와 의식적 요소 사이의 관계. 노동자 계급이 자생적으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여기에서는 '허위 의식'이 아니라 계급의식)를 획득한다는 경제주의의 주장을 논박. 자생적 요소는 노동조합적 의식에 그칠 뿐이며, 사회주의적 의식은 심도 깊은 과학적 지식에 기반해야만 가능하다.
-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 2차 대회'(사실상 1차 대회) 열림. 그러나 마르토프 등의 멘셰비키와 레닌 등의 볼셰비키로 분열. 멘셰비키의 유연성과 볼셰비키의 강고함이 충돌.
- 1905년 '피의 일요일'. 대중들이 짜르의 정체를 눈치챔. 총파업. 전함 뽀쫌킨에서 반란. 1905년 10월 13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소비에트 = 평의회)가 조직됨. 빠리 꼬뮨에 버금가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형태를 보임. 그러나 짜르의 기병대에 몰려 실패. 이후 스톨리핀 반동기(1906-1911년).
- 1912년 《프라우다》 발간으로 혁명 열기 다시 고조. 레닌,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사이에 『제국주의』를 저술. 독점자본주의론 전개. "자본주의가 '최고 단계'에 접어들어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도 최고 단계 즉 혁명에 접근하게 된다." "제국주의는 플롤레타리아 사회 혁명의 前夜". '조국의 패배'가 곧 노동자 계급 혁명의 전야.
- 1917년 2월 혁명. 짜르 체제 붕괴. 부르주아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의 공존. 4월 3일 네닌 핀란드 역에 귀향.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레닌 「4월 테제」 제시. 프롤레타리아와 빈농이 혁명 주체가 되는 혁명 2단계로의 도약을 주장. 의회주의 공화국으로의 복귀 비판. 경찰, 관료, 군대 등 폐지. 토지의 국유화.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레닌은 끈질기게 설득. 레닌이 점차 힘을 얻게 됨.
10월 25일 마침내 무장 봉기. 무혈 혁명 이룩함. "사회주의 체제 건설을 위한 총진군." 독일의 지원으로 백군(白軍)이 결성. 백군과 적군(赤軍) 사이에 3년간 치열한 전투. 연합군의 러시아 봉쇄와 경제적 궁핍.
1919년 제3 인터내셔널. 러시아 외에는 전반적으로 실패. 레닌 신경제 정책(New Economic Policy) 발표. 경제 발전을 위해 자본주의 일부 수용. 심지어 테일러 시스템까지 시도.
- 레닌, '문화 혁명' 제창. 대중교육과 협동조합의 필요성 역설. 관료 제도의 위험성을 고발. 국수주의 비판. 1924년 레닌 사망. 유언에서 스탈린의 '거친 성격'에 우려 표명. 스탈린 제거를 명함. 트로츠키를 추천.
스탈린 권력 장악. 트로츠키와 갈등. 트로츠키, 망명지에서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 의해 암살 당함. 스탈린의 무리한 공업화로 무수한 농민들이 사망.
2. 헤게모니: 레닌과 그람시
- 레닌이 나로드니키를 비판한 것은 그들이 오브쉬치나에서 사회주의로의 직접적 도약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이미 러시아에서는 자본주의가 퍼지고 있었다. 즉,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었으며, 농민이 임금 노동자로 변하고 있었다. 화폐의 유통이 이미 자본주의를 확대시켰으며, 레닌은 자본주의의 발전이 기존 모순을 와해시키는데 과도기적인 공헌을 하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레닌의 비판은 나로드니키가 러시아의 특수성을 강조했기 때문이 아니라(역사의 특수성은 레닌 자신의 주장이다), 그 특수성을 잘못 보았기 때문에 제기된 것이다.
레닌에 따르면 시스몽디 등에게서 볼 수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무조건적인 감상적(感傷的) 비판은 그릇되다. 생산력 개념과 생산 관계 개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하며, 생산 관계를 비판하되 생산력은 인민들의 삶에 중요하다는 점이 인지되어야 한다.
- 레닌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쓸 당시 러시아의 혁명 세력은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노동자 계급이었다. 따라서 이론과 실천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다. 게다가 레닌이 비판했던 사민당(= 러시아 사회민주당)이 결성되고 있었다. 그릇된 이론이 인민을 호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론은 지식인으로부터 나오지만, 그 이론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대중적 실천과의 연계고리가 만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운동을 이끌어 갈 전위(= 아방가르드)가 필요하며 이 생각을 '당(黨)'이라는 개념에 집약했다. 철저하게 훈련되고 강철처럼 강인한 '직업적 혁명가들'의 존재만이 러시아 혁명을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가 성립 가능하다. 헤게모니를 통해 운동의 자연발생성을 극복할 수 있다.
헤게모니란 그리스어 ' g sthai' 또는 ' g moneu '에서 유래했으며, '인도하다' '안내하다' '선도하다' '앞에 서다' 등을 뜻한다. 원래 ' g monia'는 군대의 최고 지휘부를 뜻했다. 레닌에게서 헤게모니는 대중을 사회주의적 투쟁의 흐름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대중의 모든 요구에 깊이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을 뜻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곧 '혁명적 주체'의 개념을 함축한다. 레닌은 역사에 대한 결정론적 해석 -- 맑시즘에 대한 진화론적 해석 -- 을 물리치고 주체적 힘과 정치적 주도권을 중시하는 맑스-레닌주의를 건설하고자 했다.
- 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는 레닌을 이어 헤게모니 개념을 발전시켰다. 그람시는 '진지전(陣地戰)'과 '기동전(起動戰)'을 구분한다. 기동전은 사회의 구조가 흔들리고 급박한 혁명을 통해 새로운 질서를 창출할 때 필요하다. 그람시는 1917년 3월부터 1921년 3월(러시아 내전의 종식)까지는 기동적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그람시의 당대 유럽에 필요한 것은 진지전이다.(이 점에서 그는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을 비판한다) 그리고 그 핵심적인 대상은 파시즘이다. 레닌이 제국주의 시대에 반제국주의를 위해 투쟁했다면, 그람시는 파시즘 시대에 반파시즘을 위해 투쟁했다고 할 수 있다.
- 1929년의 공황이 자본주의를 패망시키지 못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가 이미 성숙했으며, 따라서 폭격을 해도 별 타격을 받지 않는 '참호(塹壕)'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회주의 혁명은 단지 전쟁이나 혁명 또는 기타 방법에 의해 국가 권력을 쟁취하는 것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시민 사회 자체를 정복해야 하는 것이다.(사회주의 '국가'였던 소련의 시민들이 과연 사회주의적 '인간들'이었나를 상기할 것) 특히 그람시는 자본주의 국가의 손발이라고 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의 변화에 큰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시민 사회는 민족적 특징을 띠기 때문에, 헤게모니는 민족적인 특수한 토양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요청한다.
- 그람시에게 혁명이란 정치적-경제적-군사적인 것 못지 않게 도덕적-인식론적-철학적-문화적인 것이다. 그람시의 도덕적-지적 혁명 개념은 레닌의 뭏화 혁명 개념과 상통한다. 진정한 개혁이란 관습을 철저하게 공격하고 문화와 사회, 지식인과 대중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것이다.
그래서 헤게모니란 지도 장치(= 헤게모니 장치)를 만들어내는 능력, 동맹을 쟁취하는 능력, 프롤레타리아 국가에 그 사회적 기초를 제공해 주는 능력 등을 뜻한다.(그람시에게서 헤게모니가 어떤 '상태'나 다른 범주가 아니라 '能力'의 범주로 이해된다는데 주목) 그래서 어느 한 계급의 헤게모니는 어떻게 실행되는가, 프롤레타리아 헤게모니에 이르는 과정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같은 물음들이 중요한 물음들로서 제기된다.
- 이밖에 그람시는 문화와 대중 사이의 관계,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 인문계와 실업계의 분리에 따르는 계급 분화, 카톨릭 교회의 헤게모니를 비롯한 많은 문제들을 그의 『옥중 수고』에서 논했다.
3. 사회주의 사상의 전개
- 루카치는 헤겔을 경유해 맑스를 읽음으로써, 경제 결정론을 비판하고 상부 구조에 대한 연구 특히 미학에 관련한 연구를 남겼다.
- 사르트르와 메를로-퐁티는 스탈린의 교조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실존을 잊지 않는, '체험된 세계'에 뿌리내리는 실존적 맑시즘을 전개했다.
- 모택동은 장개석과의 투쟁을 통해 중국에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웠으며, 맑시즘과 중국의 전통을 이으려 노력했다. 모택동은 도가적 낙관주의를 견지했으며, 이 점에서 서구적 맑시즘의 분위기와 비교된다.
人生易老天難老
歲歲重陽
今又重陽
戰地黃花分外香
一年一度秋風勁
不似春光
勝似春光
료廓江天萬里霜
- 알튀세는 바슐라르 인식론과 구조주의의 방법을 도입해 구조주의적 맑시즘을 구성했다.
- 네그리는 스피노자, 맑스, 들뢰즈의 철학에 근거해 '아우토노미아' 사상을 전개했으며, 가타리, 하트 등과 더불어 줄기차게 사회주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다.
-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를 비롯한 동구, 김일성의 북한,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쿠바, 호치민의 베트남 등을 비롯한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건설되었다. 그러나 교조주의로 화한 당과 자본주의 경제와의 싸움에서의 패배를 통해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 필요한 사회주의는 어떤 사회주의인가를 생각해 보자.
참고 문헌
레닌, "무엇을 할 것인가", 박종철출판사
그람시, "감옥에서 보낸 편지", 민음사
"그람시의 옥중 수고", 거름
루카치, "역사와 계급의식", 거름
모택동, "실천론, 모순론 외", 범우문고
알튀세, "『자본론』을 읽는다", 두레
네그리·가타리, "자유를 위한 새로운 공간", 갈무리
네그리·하트, "제국", 이학사
7강 바깥의 사유(구조주의)
- 아카데미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햇살이 살에 와 닿아 부서진다. 그 느낌이 몇 일 전과 사뭇 다르다. 그렇구나. 벌써 봄 氣運이 살 도는구나. 아직 춥지만 봄 기운이 陰氣를 뚫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이를 易에서는 復卦라 한다. 人生易老天難老!
인간이 그렇게 잘난 존재일까? '근대성'이라는 것이 정말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정말 '주체'인가? 인간이 세계를 인식론적으로 '구성'하고(칸트), '노동(Arbeit)'을 통해 세계를 인간화해 역사를 만들어나가고(헤겔, 맑스), '대자'로서 절대 자유를 구가하는(사르트르) 존재일까? '서구 근대성'이 삶의 모범 답안인가? 철학자들이 원했던 것은 물론 아니겠지만, 바로 근대의 자아도취적 주체철학이 결국 제국주의와 파시즘, 자연 파괴, 인간 소외로 귀착한 현대 사회의 비극에 사상적 토양을 마련해 준 것은 아닌가? 근대성을 수립한 것은 서구이기에 서구가 모든 가치와 의미의 기준이 되어야 할까? 근대가 이룩한 위대한 성과를 충분히 인정해야겠지만, 혹시 그 과정에서 '타자들(l'autre)'은 철학의 눈길 바깥으로 밀려난 것은 아닐까? 칸트, 헤겔, ... 의 철학은 결국 서구-남성-어른-문명인- ...의 사유가 아닌가.
칸트의 예: 1) 주체의 '의식'(왜 꼭 의식이어야 할까? 지극히 추상화된 인간)의 일정한 틀(감성의 아프리오리한 형식으로서의 시공간, 오성의 열두 범주, 구상력과 도식, ... )을 갖추었기에 인간은 바로 이러이러한 식으로 세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그 가능성의 조건 바깥은 알 수 없는 물자체라는 생각,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생각인가.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가 끝없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그 존재의 드러남을 통해서 오히려 주체의 범주가 바뀌어 가는 것이다. 흑체는 물질의 연속성이라는 상식을 무너뜨렸고, 불확정성 원리는 근대 결정론의 금과옥조인 인과율을 무너뜨렸고, 물질-파 개념은 모순율까지 뒤흔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어떤 새로운 현상이, 세계가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세계 속에서 주체가 변해 가는 것이지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다.
2) 칸트가 생각한 '선험적 주체', 엄청난 두께의 비판서들, 그 안에는 미개인이나 어린이나 광인이나, .... 등은 들어설 자리가 없다. 칸트의 주체는 유럽적-과학적-... 주체일 뿐이다.
3)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에만 몰두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정부와 교회에 맡겨야 한다 했던 데카르트, 자기 머리 속에서 세계를 구성했던 칸트, 프러시아의 어용 철학자인 헤겔, 나치의 철학자 하이데거, ...... 언제까지 이런 학자-바보들의 그늘에서 서성댈 것인가?
사르트르의 예: 즉자와 대자를 날카롭게 나눈 사르트르. 거기에 동물이나 식물이 들어설 자리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의 의식만 대자인가? 인간이 그렇게 특별하고 잘난 존재일까? 그의 열정적인 현실 참여와 레지스탕스 운동에 큰 경외심을 바치면서도, 사르트르의 존재론 자체는 전형적인 이분법, '아파트 철학'(내 표현)을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아니라 주체의 '바깥', 그리고 그 바깥에서 서성이는 타자들에게 눈길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 미개인, 어린이, 여성, 동성애자, 변방, 유목민, 담론, 수인, 광인, 여백, 차이, 낙오자, ......
레비-스트로스와 라캉으로부터 오늘날의 데리다, 세르, 레비나스에 이르기까지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새로운 사유 혁명은 바로 이런 시대적-사상적 배경에서 등장했다. 그것은 타자의 사유, 바깥의 사유, 여백의 사유, 차이의 사유이다. 먼 훗날 철학사가들은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사유 혁명으로부터 그들 자신들의 '현대'를 가늠할 것이다. 오늘날 살아 있는 사유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지난 반세기 동안 이루어진 이 사유 혁명을 소화해야 한다.
- 구조주의는 좁은 의미에서의 철학 사조가 아니다. 그것은 언어학/기호학(소쉬르, 퍼스 등), 정신분석학(라캉), 민족학/인류학(레비-스트로스), 문학 비평(바르트 등), 신화학(뒤메질), 사회학(부르디외), 발생적 인식론(삐아제), 역사(아날 학파), 철학(알튀세, 푸코), 나아가 생물학(자콥)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형성된 종합 학문에 붙은 이름이다. 그러나 이 사조에 참여한 사람들이 비엔나 학파처럼 처음부터 의식적으로 학파를 수립한 것도 아니고, 또 흔히 이 사조로 분류되는 사람들 자신들이 스스로를 구조주의자로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구조주의는 서로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서히 형성되었으며, 훗날에 가서야 '구조주의'라는 딱지를 부여받게 된 어떤 느슨한 흐름, 분위기, 경향일 뿐이다. 때문에 이 사조를 그 구체적인 내용'들'을 떠나 추상적으로 일반화해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 20세기 중반 서구 사상계를 지배했던 것은 실존주의와 맑시즘이었다. 두 사조는, 하나는 인간의 주체를 다른 하나는 역사의 객관적 법칙성을 강조했음에도, 결국 서구 근대 철학의 전형적인 적자였다고 할 수 있다. 구조주의는 이런 흐름을 깨고 등장했으며, 그런 등장의 배면에는 바슐라르에 의한 합리주의적 계몽, 게루가 가르쳐준 철학사 독해 방식,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의 부활, 소쉬르와 퍼스의 언어학/기호학, 또 간접적으로는 하이데거와 메를로-퐁티의 후기 철학, 문학 비평의 새로운 경향 등이 영향을 주었다.
- 구조주의는 철학이기 이전에 우선 '인간과학 방법론'이다.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의 구조주의와 철학 사조로서의 구조주의는, 물론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조심스럽게 구분되어야 한다. 그것은 뉴턴과 칸트, 진화론과 베르그송, 수학과 분석철학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과학이 과학 자체로서 그치지 않고 그 과학의 근본 전제들에 대한 메타적 검토, 그리고 그 과학의 성과들이 인간 존재에 대해, 나아가 세계 전체에 대해 함축하는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갈 때, 그것은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예컨대 불확정성 원리는 물리학 이론이지만, 그것이 세계의 비결정성, 우연의 본성 등에 대한 성찰에로 이어질 때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진화론은 생물학 이론이지만, 그것이 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 윤리의 근거 같은 문제들로 확대될 때 철학적 성격을 띠게 된다. 마찬가지로 구조주의는 우선은 언어학, 사회학, 정신분석학 등의 방법론이라는 의미를 띠지만, 그것이 세계와 언어의 관계, 인간의 본성, 문화의 의미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에 연계될 때 철학적인 사조로 화하게 된다.
이 점에서 현상학과 구조주의는 다르다. 현상학은 철학적 방법론이 먼저 생기고 그것이 여러 분야로 응용된 경우지만, 구조주의는 다양한 인간과학적 탐구들이 이미 형성된 이후 그것들이 어떤 철학적 함축을 띠게 됨으로써 하나의 철학 사조로 화했다고 볼 수 있다.(때문에 구조주의에 대한 이해는 철학 이전에 다양한 인간과학들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특히 구조주의 사유가 당대를 풍미했던 실존주의와는 전혀 상반되는 인간관을 함축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구조주의는 철학사의 한 장에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다.
- 구조주의란 무엇인가? 1) 구조주의는 철학에서 늘 기본적인 대립항으로 인식되어 왔던 대상(세계, 사물, 물체, ... )과 주체(의식, 영혼, 마음, ... )의 이분법을 버리고, 이 둘 사이에 어떤 제3의 차원이 존재한다고 본다. 이 차원이 바로 '구조(le structure)'이다.(인식론-존재론적 배경) 2) 구조주의는 이 제3의 차원이 바로 대상과 주체의 일정한 관계맺음을 지배한다고, 즉 대상과 주체는 자신도 모르게 -- 즉 무의식적으로 -- 이 제3의 공간(논리적, 법칙적 공간)을 통과해서 관계맺는다.(미술 시간과 생물학, 경제학 시간의 예) 3) 인류의 '문화'란 주체의 창조물이라기보다는 주체가 바로 그 무의식적 법칙에 따라 만들어낸 어떤 구조물이다. 즉 문화란 주체의 산물이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고주몽 신화와 파이톤 신화의 예) 4) 구조란 일정한 '소(素)들( ...i me)' -- 음소, 신화소, 음식소 등등 -- 의 체계이며, 주체는 이 체계의 어느 '위치'에 자리잡는다.
- 구조주의라는 학문 방법론에 처음으로 철학적 함축을 부여한 인물은 레비-스트로스(Claude L vi-Strauss)이다. 구조주의가 서구적 주체, 서구적 근대성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나왔다면, 그 초입에 바로 제국주의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는 레비-스트로스의 인류학이 놓여 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인류학이라는 담론은 본래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를 잘 통치하기 위해서 발달시킨 담론이다. 즉 인류학은 제국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 담론이다.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전통을 공격함으로써 유럽에 의해 침탈 당한 未開文明에게 서구 지성인의 사과와 반성을 전달하고자 했다.
인류학의 가장 기본적인 입장은 기능주의적인 입장이다. 기능주의는 한 사물의 의미를 그 사물의 역할, 기능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전형적으로 근대적인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레비-스트로스는 미개인에 대해 구조주의적으로 접근한다.(거북이, 독수리, 곰의 예) 근대 철학은 고전 철학이 '봄'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함'의 수준으로 철학을 변환시키고자 했다. 구조주의는 어떤 면에서는 다시 '봄'의 철학으로 전환하려는 몸짓이라고도 할 수 있다.
- 구조주의는 '무의식'을 핵심으로 하며 이 점에서 현상학/실존주의와 날카롭게 대립한다. 무의식을 좁은 의미, 원래 의미대로 사용하면 정신분석학의 용어이다. 프로이트를 이어 라캉(Jacques Lacan)은 무의식을 탐색했으며,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을 통해 서구 근대적 주체(코기토, 선험적 주체)를 해체했다. 라캉은 주체를 '형성되는' 것으로 봄으로써 현대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레비-스트로스가 인류학의 영역에서, 라캉이 정신분석학의 영역에서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을 전개했다면, 알튀세(Louis Althusser)는 맑시즘의 영역에서 구조주의적 사유를 펼쳤다. 구조주의와 더불어 알튀세는 스피노자와 바슐라르의 철학에 지대한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알튀세는 맑스의 초기 사상과 후기 사상을 날카롭게 구분하고자 했으며, 전기 철학에 영향을 받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대조적으로 후기 사상에 주안점을 두었다.
알튀세는 구조주의적 인과론,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 등을 비롯한 중요한 개념들을 남겼다. 현대 철학의 중요한 -- 어쩌면 가장 중요한 -- 요소는 '주체 형성'의 탐구이다. 주체는 주어진 것, 설명항이 아니다. 그것은 형성되는 것, 피설명항이다. 라캉이 주체형성론을 정신분석학적 테두리 내에서 전개함으로써 일정한 한계를 드러낸다면, 알튀세의 주체형성론을 문제를 사회-역사의 장으로 끌어냄으로써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 구조주의에 철학사적 위상과 인식론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푸코(Michel Foucault)이다. 푸코는 실증주의적-다원주의적 구조주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푸코는 구조주의를 벗어나 독자의 사유로 나아간다.
푸코 사유에서 구조주의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것은 『지식의 고고학』과 『말과 사물』에서이다. 전자에서 푸코는 언표와 담론 개념을 다듬음으로써 현대 문화철학에 결정적인 틀을 제공했고, 후자에서 서구 학문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구조주의의 철학사적 위상을 밝혔다.
푸코의 사유는 유럽적 근대성에 대한 철저한 해부이다. 푸코만큼 유럽적 근대성을 처절하리만큼 적나라하게 해체한 인물은 없다. 이 점에서 푸코야말로 좁은 의미에서의 현대 철학의 입구에 서 있는 인물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형효, "구조주의의 사유 체계와 사상", 인간사랑
레비-스트로스, "슬픈 열대", 한길사
"야생의 사유", 한길사
라캉, "라캉의 욕망 이론", 문예출판사
알튀세, "알튀세", 솔
"'자본'을 읽다"
푸코, "말과 사물", 민음사
"지식의 고고학", 민음사
이정우, "담론의 공간", 산해
8강 근대성 비판
- 근대성이란 서구에서 16세기 말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발달한 삶과 사유의 양태를 뜻한다. 오늘날의 사회는 이 근대성이 극에 달한 초근대성의 사회이다. 따라서 근대성과 현대성을 연속으로 보는 한에서 근대성 비판은 곧 현대성 비판이기도 하다.
사실상 어느 시대, 어느 문화에서나 철학은 비판(Kritik)이다. 그럼에도 유독 '근대성 비판'이 문제가 된다면,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는 물론 서구를 추종했던 다른 문화들에 있어서도 근대성이란 삶의 모범 답안이었고 '근대화'란 역사의 기본 추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성 비판이 문제가 된다.
- 그런데 따지고 보면 19세기 말 이후의 대다수의 '비판적인' 사유들은 모두 탈근대 사상들이다. 근대 사회에서 현실 비판이란 당연히 근대성 비판이겠기에 말이다.
19세기 말에 등장한 대표적인 근대성 비판은 맑스의 사유와 니체의 사유이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두 사람은 모두 19세기에 이르러 뚜렷이 모습을 드러낸 부르주아 사회, 관료 사회, 기술문명 사회, 대중 사회('기술'과 '대중'에 대한 생각에서 이 두 사람이 갈라진다)에 대한 빼어난 비판을 제시했다.
구조주의 또한 탈근대 사유이다. 그것은 구조주의가 근대성을 떠받쳐 온 가장 핵심적인 철학적 개념인 '주체'(더 정확히는 '선험적 주체') 개념을 해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조주의 입장에서 볼 때 맑시즘 또한 근대적이다. 구조주의에 이르러 근대성 비판은 훨씬 선명한 색깔을 띠게 된다. 그러나 합리성, 법칙성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라는 측면에서 구조주의 역시 그 후 비판의 대상이 된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20세기 중엽으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를 사회학적-철학적으로 비판해 왔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를 고도의 합리성(기술문명)과 고도의 반합리성(폭력, 광기 등)이 기묘하게 결합된 사회로 본다. 이 점에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니체의 사유와 대립하며, 간접적으로 맑시즘과 연계된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물론이자 경제 중심주의인 맑시즘과는 달리 '문화'(넓은 의미, 맑스의 '상부 구조')에 중점적인 관심을 가진다. 이 점에서 이 학파의 작업은 막스 베버의 작업과도 통한다. 다소 도식적으로 말해, 맑시즘이 서구 자본주의 사회의 총체적인 전복을 꿈꾼다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서구 사회 자체 내에서 좀더 부드러운 문화 혁명을 꿈꾼다고 하겠다.
이런 성격 차이는 한국 사회에서도 반영되었으며, 80년대에 운동권이 맑시즘을 기반으로 했다면 화이트칼라 지식인들의 상당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경도되었다.
- 프랑크푸르트 대학의 사회과학 연구소에서 출발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사유는 흔히 '비판이론(Kritische Theorie)'이라 불린다. 이 학파는 1923년 창설되었으나 처음에는 맑시즘과 실증주의 사이에서 우왕좌왕했다. 이 학파는 본격적으로는(여기에서 '본격적'이라 함은 초기의 '실증주의적 사회과학'으로부터 '비판적 사회철학'으로 넘어간 것을 말한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가 제 2대 소장으로 취임한 1930년부터 뚜렷한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호르크하이머는 이 학파의 성격을 '사회철학(Sozialphilosophie)'으로 뚜렷이 규정했으며, 이후 1932에 마르쿠제(Herbert Marcuse)가 또 1938년에는 아도르노(Theodore Adorno)가 들어오면서 활기를 띠게 된다. 그러면서 정신분석학이 또 하나의 주요한 관심사로 자리잡게 되며, 맑스와 프로이트의 회통이 모색되었다. 이 학파는 나치를 피해 1933-1950년에는 미국으로 망명갔으며, 1950년에 독일로 다시 돌아왔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실증주의(특히 당대에 큰 흐름을 형성했던 비엔나 학파의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변증법적 사유 양식을 구사했다.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은 고도의 합리성을 구가하는 듯이 보이지만, 의미와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하고 학자의 '가치 중립성(Wertfreiheit)'을 강조함으로써 결국 지식이 자본주의와 지배 권력의 도구가 되어버렸다고 본다. '도구적 합리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현대 사회인 것이다. 이것은 곧 '기술관료=테크노크라트'가 지배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진다.
- 호르크하이머와 마르쿠제는 그람시나 루카치와는 달리 현대(20세기 중엽 당대)의 노동자들은 이미 자본주의 체제에 길들여졌으며 혁명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기울어졌다. 때문에 그들은 노동자들보다는 오히려 비판적 지식인이 혁명 세력이 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 점에서 그 후의 '학생 운동(student movement)'의 이론적 기초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아도르노는 정치의 문제보다는 문화(좁은 의미)의 문제에 몰두했으며 현대의 기술 문명이 어떻게 얼굴 없는 대중을 만들어내는가에 주목했다. 아노르노는 문화가 하나의 '산업'이 되는 현상을 비판하고, 대중 문화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반대로 벤야민은 현대의 대중 문화(영화, 사진 등)가 기존 예술이 가지고 있던 '아우라'를 무너뜨림으로써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사회 운동의 기폭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아도르노와 벤야민은 대중 문화에 대한 상반된 이해를 통해 갈라졌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의 대중의 의식에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자연히 정신분석학에 주목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대중이 나치즘을 환영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이들은 오래 전에 스피노자가 제기했던 "왜 대중은 복종 받기를 스스로 원할까?"라는 물음을 다시 던졌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파시즘의 심리학에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초기에는 그 비합리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배척했던 정신분석학, 생철학, 실존주의 등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에리히 프롬은 정신분석학을 사회학적으로 발전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6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그 후에도 하버마스(J rgen Habermas) 같은 인물을 통해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특히 소통의 문제에 관련해 큰 공헌을 했다.
-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초기에는 주로 의학(특히 정신의학)을 연구했으며,
병리학 학위를 취득했다. 그러나 임상의 길로
가기보다 사상의 길을 걸어갔다. 동성애자로
태어난 푸코는 '타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박해에 깊은 회의를 품고 이후 자신의 실존적
체험을 철학으로 승화시켜 '타자의 사유'를
수립했다. 오늘날의 사유가 타자의 사유라면
푸코야말로 그 대변자라 할 것이다.
푸코는 사르트르 이래 모든 저항 운동을 이끈
투사였다. 들뢰즈와 함께 벵센느 실험 대학을
만들었고,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하면서도
줄곧 사회 운동을 주도했다. 푸코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저항 운동을 모든 다른
형태의 타자들(광인, 수인, 동성애자, 여성,
어린이, ... )로 확장했으며, 그런 활동은 그의
사유와 한덩어리를 이룬다. 푸코처럼 삶과 철학이
한덩어리로 얽혀 있는 사상가도 드물다.
한국 사회에서 푸코의 사유는 1990년대를 수놓았다.
80년대에 맑시즘을 통해 이해되던 현실이 더 이상
이전의 개념틀로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했을
때, 푸코가 그 이론적 프리즘을 제공했던 것이다.
- 푸코는 그의 스승인 조르주 깡길렘의 결정적인 영향을 받았으며, 깡길렘의 인식론을 보다 넓은 지평으로 발전시켰다. 깡길렘은 그의 학위 논문에서 '정상과 비정상'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이 문제는 그대로 푸코의 문제가 된다.
푸코는 한 사회에서의 나눔(division)의 메커니즘, 좀더 철학적으로 표현해 '존재론적 분절'의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정상인과 광인은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나뉘는가? 합법적 인간과 불법적 인간을 가르는 기준은 도대체 무엇인가? 푸코의 사유에는 늘 이 나눔의 문제가 자리잡고 있다. 이 점에서 피상적인 이해와는 달리 푸코는 존재론자이다.
그런데 자연에서의 나눔(예컨대 생물학적 계통학)은 그렇다 치고 사회에서의 나눔은 항상 배제(exclusion)의 문제를 포함한다. 나눔이 있는 곳에 배제가 있다. 때문에 푸코의 사유는 이 배제의 문제를 파고들며, 그 결과 타자들(광인, 병자, 소외된 담론들, 囚人, 여성, 어린이, 노동자, ... )의 사유를 수립하게 된다.
- 푸코는 한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그물망, 주체와 세계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무의식적 지층을 드러내려 한다는 점에서 구조주의의 세례를 받았다. 사실 오늘날의 사유는 어떤 형태로든 구조주의를 영향을 받았으며, 철학사를 구조주의와 前구조주의로 나누어도 좋을 정도로 구조주의적 사유 양식을 결정적인 분기점을 형성한다. 그러나 푸코는 구조주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비판적으로 변형시킨다.
1) 구조주의가 구조를 실체화하려 했다면, 즉 그것을 자연법칙과 같은 어떤 객관적 법칙으로 파악하려 했다면, 푸코는 구조라는 것을 인위적인 것, 자의적인 것으로 파악한다. 때문에 그의 구조주의는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평온한 구조주의나 이후의 탈정치적 기호학에서 탐구하는 구조주의가 아니라 정치, 권력, 배제, 탄압, 저항 같은 내용으로 채워진 역동적인-정치적인 구조주의이다. 구조주의를 이렇게 극복하는 과정에서 깡길렘과 더불어 니체, 바타이유 등의 사유가 큰 도움을 주었다.
2) 푸코는 한 사회의 무의식적 지층을 인정하지만, 그것이 비가시적인 '實在'를 이룬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어디까지나 현실에 드러난 배제 메커니즘들을 탐구한다. 이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실증적 구조주의라 할 수 있다. 그는 '實在'에 대한 물음을 괄호치고 모든 탐구를 역사에 대한 탐구에 국한시킨다.
3) 푸코는 구조가 보편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때문에 라캉처럼 인간의 무의식 구조를 탐구하는 것은 푸코 입장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사유, 칸트와 다를바 없는 사유이다. 구조는 문화적으로 다르고 시대적으로 다르다. 중국의 구조와 프랑스의 구조는 다르며, 르네상스 시대의 구조와 근대의 구조는 다르다. 이 점에서 푸코의 사유는 다원론적-역사적 구조주의이다. 이 점에서 그의 사유는 아날 학파의 역사학과 통한다.
푸코는 구조주의의 성과를 받아들이면서도 이렇게 그것에 결여된 정치와 역사의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사유로 나아갔다.
- 『광기의 역사』는 아마도 서양 철학사상 가장 독창적인 책일 것이다. 철학과 절대 모순을 형성하는 광기를 사유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은 바로 우리 시대의 사유의 출발점을 이루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사유는 『광기의 역사』에서 출발한다.
푸코는 이 책에서 다채로운 논의를 전개하고 있으나, 그 중 몇 가지만 짚어보자. 1) 비본질주의: 니체와 베르그송 이래 비본질주의는 현대 철학의 기본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비본질주의를 단지 추상적인 철학적 논의로만 다룬 것이 아니라, 실제 역사 속에서 본질들이 어떻게 '형성'되고 '변환'되는가를 추적한다.
2) 푸코는 '지식(savoir)' -- 푸코의 전문 용어이므로 주의를 요함 -- 과 권력 사이의 끈끈한 연계성을 정신병리학(말미에서는 정신분석학)을 예로 전개한다.
3) 푸코는 타자가 어떻게 형성되는가, 동일자의 눈길 또는 정의(d finition)가 어떻게 타자를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주체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푸코는 주체성 -- 사실상 反주체적인 주체성 -- 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문제삼고 있다.(라캉, 알튀세 등과 비교)
4) 이 책은 서구의 '근대성'에 대한 환상을 송두리째 뒤집어엎고 있으며, 이 점에서 탈근대 사유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푸코는 서구 근대의 '지하실'에 들어가 그 음모, 고문 도구, 교활한 훈육 체계 등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 『임상의학의 탄생』은 주제가 의학이어서인지 일반적으로 덜 논의되고 있지만 푸코 사유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푸코는 여기에서 '봄(voir)'과 '앎(savoir)'의 관계를 임상의학이 탄생하는 지점에 초점을 맞추어 낱낱이 해부한다. 이 책은 또한 죽음에 대한 비샤의 중요한 통찰을 세밀하게 분석해 주고 있다.
- 『말과 사물』은 서구 담론사에서 특히 생명, 노동, 언어라는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맞춘다. 푸코는 르네상스, 고전 시대, 근대, 그리고 오늘날의 '에피스테메'를 추적하면서, 박물학=자연사가 생물학으로, 부의 분석이 정치경제학으로, 일반문법이 비교 언어학으로 변환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러한 과학사적 논의를 통해 푸코는 서구 담론사에서의 언어와 주체의 관계를 파헤친다. 르네상스 시대, 고전 시대, 근대, 현대로 변환되면서 언어와 주체가 어떤 연관을 가지는지, 그리고 '말과 사물'이 어떤 굴곡을 겪는지를 다루고 있다.
푸코는 칸트에서 실존주의에 이르기까지의 서구 주체철학을 '인간학적 잠'에 빠졌다고 비판하며, 유명한 '인간의 죽음'을 선언한다.
- 『지식의 고고학』에서 푸코는 지금까지 자신이 했던 작업들을 되돌아보면서 그 방법론적-존재론적 기초를 다시 검토한다. 언표, 담론, 역사적 아프리오리를 비롯한 다양한 개념 장치들을 통해 자신의 작업을 재검토한다.
- 『감시와 처벌』은 서구 사회에서 죄의 개념과 처벌 양식이 어떻게 변했는가, 근대 '휴머니즘'이 표방한 처벌의 인간과는 과연 어떤 성격을 띠는가, 법의학, 형법학 등 근대적 지식들과 부르주아 사회의 권력은 어떤 상호 관계를 지녔는가 등을 탐구했다.
이 책은 또한 지정학(地政學)에 큰 시사를 던져주었으며, 신체적 차원과 담론적 차원 사이의 관계를 새로운 맥락에서 제시했다. 푸코는 이 책을 쓸 당시 열정적인 사회 참여를 통해 감옥 환경의 개선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 『성의 역사1: 지식에의 의지』는 『감시와 처벌』을 이어 서구 사회에서 성이 어떻게 다루어져 왔는가를 논한다. 『성의 역사』는 본래 6권으로 기획되었으나, 1권이 나온 후 푸코는 갑자기 8년 간의 긴 침묵에 들어간다.
- 『성의 역사』 2, 3권인 『쾌락의 선용』, 『자기에의 배려』에서 푸코는 새로운 정향을 보이는데, 그것은 그 때까지 권력이 주체를 어떻게 모양지우는지에 주목했다면 이번에는 반대 방향으로 즉 주체가 권력의 장 안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주체화하려 했는지를 다루기 시작한다. 푸코는 이런 과정을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subjectification'이 아닌 'subjectivation'으로 표기한다. 그것은 예속과 주체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과정이다.
또 하나 독특한 것은 그 때까지 언제나 근대를 다루어 오던 푸코가 이번에는 고대로 영역을 바꾸었다는 점이다. 푸코는 이 작업을 계속 이어가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완성하지 못했다.
9강 카오스모스의 세계관
- 17세기 초에 새로운 자연과학이 탄생하면서 '자연철학'이라는 말은 자연과학 이전의 구닥다리 지식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었다.
오늘날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연과학이 고도로 발전했지만 자연의 근본적-종합적 의미, 자연과 인간의 관계(우주에서의 인간의 위상), 자연과학적 자연과 다른 담론들이 이해하는 자연 사이의 관계 같은 문제들은 과학자들로부터도 또 철학자들로부터도 외면당해 왔다. 이 점에서 과학철학이나 생명윤리학과 더불어 요청되는 담론은 자연철학이다. 과학철학이 과학에 대한 '메타적', '방법론적' 연구를 맡고, 생명윤리학이 생명공학이 빚어낼 수 있는 비윤리적 상황을 맡는다면, 자연철학은 자연 전체에 대한 종합적 안목이라는 역할을 맡는다. 오늘날 상대적으로 과학철학은 많이 발전했지만 자연철학은 미진하다. 그것은 세부적인 영역을 파고드는 자연과학자들에게도 또 오래 전에 자연, 우주, 세계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 철학자들에게도 버거운 작업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현상학, 해석학을 비롯한 반과학적 철학들을 선호하게 되고, 과학자들은 실험실의 좁은 세계에 폐쇄되고 있다. 한편으로 현실을 담지하지 못하는 인문주의적 철학들이, 다른 한편으로 이미 자본주의, 기술문명의 하수인이 되어 버린 과학들이 양극화된 것이다. 자연철학이 오늘날 매우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이 때문이다.
- 20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들(물론 철학적 함축을 띠는 성과들)은 많다. 분자생물학, 카오스 이론, 프락탈 이론, 급변론, 우주론에서의 발견들(펄사, 빅뱅, 흑공 등), 사회생물학 논쟁, 여전히 열띤 논의를 불러오고 있는 진화론 등이 그것들이다. 여기에서는 이들 중 카오스 이론을 살펴보고 '카오스모스'의 개념을 익힌다.
-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대립은 모든 고대 담론에 공통된 소재이다. '카오스모스'란 두 말을 합친 것이며 혼돈과 질서의 중첩을 이야기한다.
카오스와 코스모스는 자연철학적 맥락 못지 않게 역사철학적 맥락도 함축한다.(장자의 예, 레비-스트로스의 예)
- 근대 과학은 (고대 철학으로부터 물려받은 환원주의), 분석적 사유 양식, 양화와 함수화, 그리고 기계론과 결정론을 그 기본 성격으로 가진다. 그러나 카오스 이론은 근대 과학의 이런 성격을 여러 면에서 극복하고 있다.
카오스 이론은 1960에 등장했으며, 영국의 기상학자인 로렌츠가 발견한 '카오스 현상'에 그 실마리를 두고 있다. 로렌츠는 대기방정식을 푸는 과정에서 카오스 현상을 발견한다.(그림 참조) x(t)는 대류의 세기, y(t)는 오르내리는 2개 흐름의 온도차에 비례하는 함수, z(t)는 온도 분포의 차가 모형으로부터 떨어진 정도, a는 '프란틀 수'(유체의 확산 계수와 열전도 계수의 비), b, c는 계수들.
- 로렌츠는 초기 조건을 0.506127로 잡았다가 계산을 간단히 하려고 0.000127을 뺐다. 컴퓨터에 작업을 맡기고 나갔다 와서 난생 처음 보는 놀라운 그래프를 보게 된다.
이 현상은 '초기 조건에의 민감성', 자유도(自由度)의 증폭, 비선형성(non-linearity)을 특징으로 갖는다. 이런 특징들은 전에 볼 수 없었던 것으로 세계의 숨은 비밀을 활짝 열어주고 있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세계'는 그것과 비교해 비교도 할 수 없이 복잡한 진짜 세계의 한 '경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 이 카오스 현상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이제 몇 가지 개념 장치들과 가설들, 이론적 고안들이 제기된다. 그중 기초가 되는 개념은 '끌개'라는 개념이다. 다음 그림을 참조. 이 그림은 무산(霧散) 구조(또는 散逸 구조)를 잘 보여준다.
- 기존에는 세 가지 끌개가 있었다. 점 끌개, 원 끌개, 도넛 끌개이다. 로렌츠가 발견한 카오스 현상은 '이상한 끌개'를 보여준다. 어떤 점에서 '카오스 현상'이라는 말은 좀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로렌츠가 발견한 것은 카오스가 아니라 어떤 새로운 질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전의 질서에 상대적으로 '카오틱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중요한 것을 알려준다. (다른 맥락에서이지만) 구조주의를 이야기하면서 '바깥의 바깥'에 대해, 카오스에 대해 말했다. 이제 우리는 카오스란 무질서가 아니라 복잡한 질서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오래 전에 베르그송이 지적했듯이, '질서'란 다분히 인간중심적인 개념이다. 우리의 개념틀에 포착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거기에 "질서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정치철학적인 맥락도 상기). 현대 과학이 발견한 것은 카오스가 아니라 카오스모스이다.
- 이상한 끌개와 더불어 카오스 현상을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카오스 현상이 프락탈 현상을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프락탈 이론과 카오스 이론이 만난다.
- 서구 철학은 오랫동안 변화하는 현상의 근저에서 불변의 실재를 찾아왔다. 그리고 이런 논리를 과학에 그대로 이전된다. 메이에르송이 역설한 '동일성'이 서구 사유의 근저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베르그송은 서구 학문의 근저에 깔려 있는 플라토니즘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시간의 철학을 제시한다.
카오스 이론은 현대 철학과 나란히 '존재에서 생성으로'의 이행을 강조합니다. 이제 고전 물리학을 특징짓던 탈시간성은 카오스 이론의 시간성을 통해 극복된다. 카오스 이론은 '혼돈으로부터의 질서'를 강조하며, 이 과정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것은 시간이다. 프리고진이 베르그송을 강조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카오스 이론은 근대적 환원주의에 카오스 현상의 복잡성을, 분석적 사유에 분석 불가능한 운동을, 양화와 함수화 아래에 깔려 있는 카오스를, 그리고 기계론과 결정론에 맞선 세계의 비결정성과 유기성을 강조한다.
참고문헌
모노, "우연과 필연", 삼성문화사
자콥, "생명의 논리", 민음사
톰, "카타스트로피의 과학과 철학", 솔
프리고진/스탕제르, "혼돈으로부터의 질서", 정음사
이정우, "접힘과 펼쳐짐", 거름
10강 들뢰즈와 가타리
- 들뢰즈와 가타리는 20세기 철학의 총결산이라 할 정도로 매우 종합적이고 다채로운 사유를 구사했다. 정치한 철학사가이자 중후한 사상가인 들뢰즈와 열정적인 투사이자 비판적 정신의학자인 가타리의 만남은 두 사람 각자에게서는 기대하기 힘든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19세기에 맑스와 엥겔스의 만남이 있었다면, 20세기에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이 있었다.
- 철학사에서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자신 이전의 철학사를 자신만의 고유한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다. 시간 개념을 가지고서 서구 학문의 역사 전체를 비판하고 새로운 지속의 형이상학을 제시한 베르그송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들뢰즈 역시 자신의 고유한 관점에서 서구 철학사를 새롭게 해체-재구성했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대신에 스토아, 에피쿠로스 학파를, 아퀴나스 대신에 둔스 스코투스를, 데카르트 대신에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흄을, 칸트와 헤겔 대신에 니체와 베르그송을, 현상학 대신에 '바깥의 사유'를 파고 들어갔고, 이 점에서 서구 철학계의 '주류'에 대항하는 새로운 철학사 계열을 창조해냈다. 그는 늘 체계나 학파, 제도 바깥에 선 인물들, 철저하게 내재적 사유를 구사한 인물들을 재해석했으며, 이를 통해 사유의 역사에서의 '孤兒的 계열'(마쑤미)을 창조해낸 것이다.
- 들뢰즈의 사유는 맥락에 따라 차이의 존재론, 사건의 존재론, 욕망의 존재론, 기호의 존재론, ...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그의 전기의 대표적이라고 할 『차이와 반복』에서는 주로 차이 개념이 문제가 되고 있다.
현대 철학에서 차이 개념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해된다. 들뢰즈는 동일성 내에서의 차이를 말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 두 존재 사이의 커다란 차이(즉 대립, 모순)를 '부정(Negation)' 개념을 통해 사유하는 헤겔적 사유를 비판하며, 나아가 체계 내에서의 요소들의 차이-놀이라는 구조주의적 차이 개념을 비판한다.
들뢰즈의 차이는 베르그송적 차이이다. 그것은 고정된 요소들 사이의 차이도 아니고, 보편자 내에서의, 체계 내에서의 차이도 아니다. 그것은 차이-자체로서 기존의 테두리에 복속되지 않는 새로운 차이이다. 베르그송의 지속은 연속성, 다질성, 창조성을 그 특징으로 하며, 들뢰즈는 이 사유를 차이 개념을 통해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 들뢰즈는 또한 기호의 철학자, 사건의 철학자, 이미지의 철학자, 시뮬라크르의 철학자이기도 하다. 낯선 기호들을 사유하기(『프루스트와 기호들』), 플라톤의 'phantasma'를 어두운 지하실에서 '표면'으로 불러내기(『차이와 반복』), 사건을 의미와 연결시키기(『의미의 논리』), 이미지의 운동을 파악하기(『영화 1: 운동 이미지』, 『영화 2: 시간 이미지』).
- 들뢰즈는 1969년에 가타리와 만나게 되며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1972년 저 유명한 『안티오이디푸스』를 펴낸다.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어렵고 전문적이던 들뢰즈의 사유가 가타리와 만나면서 갑자기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열정으로 가득 찬 사유로 바뀐다. 반대로 말해, 정치적이고 의학적이던 가타리의 사유는 들뢰즈와 만남으로써 존재론적 기반을 갖추게 된다.
흔히 『안티오이디푸스』는 '68 혁명'의 철학적 형상화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이 책의 기본 테마들은 대개 들뢰즈와 가타리의 이전 저작들에서 그려져 있었다. 다만 그것이 색다른 스타일로 표면에 솟아올랐을 뿐이다.
- 두 사람은 이 책에서 프로이트-라캉까지 이어져 오던 욕망 개념을 질타하고 새로운 욕망 개념을 제시했다. '욕망의 형이상학'.
그리고 이 욕망의 개념에 입각해 '욕망의 세계사'(내 표현)이라 부를 수 있을 새로운 역사철학을 건설했다. 미개 사회, 전통 사회, 자본주의 사회로 나누어 이어지는 세계사는 독특하고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었다.
이런 논의에 이어 말하자면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논의가 이어진다. 이 대목은 매우 난해하고 또 정리가 아직 덜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1980년에 '자본주의와 분열증' 2편인 『천의 고원』을 펴낸다. 20세기 철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걸작에서 이들은 『안티오이디푸스』의 다소 거칠었던 부분들을 보다 정교화하는 한편, 이른바 '노마돌로지'라고 불리는 새롭고 풍부한 사유를 거침없이 펼쳤다. 이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내용들은 오늘날 전세계 지성인들에 의해 논의되고 있으며, 이 책을 기념한 록 아티스트들의 기념 음반이 나올 정도로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다.
- 들뢰즈는 또한 문학예술 연구에도 열을 쏟았으며, 『프루스트와 기호들』, 『카프카』(가타리와 공저), 『감각의 논리: 프랜시스 베이컨』, 『영화』(1, 2) 등을 남겼다. 『천의 고원』에서는 '리투르넬로'가 논의되었다.
참고문헌
들뢰즈, "니체와 철학", 민음사
"의미의 논리", 한길사
가타리, "분자혁명", 푸른숲
들뢰즈와 가타리, "안티오이디푸스", 민음사
"카프카", 동문선
이정우, "인간의 얼굴"
--- 현대철학의 파노라마 이정우님의 컬럼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