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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톱카프 궁전 >
톱카프 궁전 - 톱카프 궁전은 1475~1478년에 지어진 궁전으로 1850년 까지 계속 증축 수리 되어 현재에 이른다. 고대 도시와 비잔틴 시대에 왕궁이 위치하던 자리에 지어진 이 궁전은 면적이 700,000 평방미터, 성벽의 둘레가 5km 그리고 모두 7개의 성문을 가지고 있다. 약 400여 년간 24명의 술탄들이 거쳐간 이 궁전은, 1843년 건축을 시작해 1856년에 완성된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황실이 옮겨감으로써 그 화려한 역사가 마감되었다. 현재는 86,0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한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톱카프(Topkapi)는 '대포문' 이라는 뜻으로 궁전 앞에 항상 거대한 대포가 자리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 보스포로스 해협에서 바라본 톱카프 궁전 -
◇술탄 아흐멧3세의 분수 - 톱카프 궁전에 가면 제일먼저 만나게 되는 분수다. 이 분수는 술탄 아흐멧 3세가 지었으며 제1문(제국의 문)밖에 위치하고 있다. 외국에서 온 사절단은 이 곳에서 궁전으로의 출입 허가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고, 그 사이 방문객들은 이 분수에서 세면을 하고 그들의 외관을 다듬었다. 이 아름답고 화려한 분수는 방문객들을 위압시키기 위해 지어졌으며 또한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 술탄 아흐멧3세의 분수 -
여기서 잠깐 술탄 아흐멧3세에 대해 대략 짚어 보기로한다. 술탄 아흐멧 3세는 1703~1730년까지 27년 동안 술탄 자리에 있었다. 슐탄 아흐멧3세가 등극하기 직전의 시대는 일명 튤립의 시대라고도 한다. 제국의 국경은 사방에서 무너지고 있었지만 이스탄불은 튤립의 개화를 기념하는 축제들로 흥청거리던 퇴폐와 쇠퇴의 시대였다. 이 시기의 제국은 파산상태에 이르렀고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마침내 1703년 7월 18일 주민들과 종교학교 학생들이 예니체리와 합세하여 폭동을 일으켰고, 황실 근위대까지 이에 합세하였다. 1703년 8월 22일 반란군은 무스타파 2세를 폐위시키고 당시 30세이던 그의 동생 아흐멧3세를 즉위시켰다. 이로써 그는 카페스(새장)에서 갇혀 산 16년만에 술탄으로 등극 하였다.
술탄 아흐멧 3세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부인만 14명이었고 자식도 쌍둥이 셋을 포함하여 마흔명이 넘었다고 한다.
그의 재위 기간에 오스트리아군에게 베오그라드를 빼앗기고 파사로비츠 조약에 의해 헝가리의 남은 영토 전부와 세르비아, 보스니아, 왈라키아 영토 대부분을 잃었다.
1715년에 아흐멧 3세는 그의 사위 이브라힘 파샤를 대와지르에 임명하였다. 이브라힘은 유럽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이스탄불 최초의 인쇄기를 도입하였다. 또한 프랑스와의 교류로 이스탄불에 바로크 건축 양식이 도입 되었다. 이러한 바로크양식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건물은 아흐멧 3세가 어머니인 발리데 술탄 라비아 귈누스를 위해 지은 위스퀴다르의 예니 발리데 자미이다.
이 시기의 예니체리들은 이브라힘 파샤의 정권아래 지속된 오랜 평화로 전쟁의 약탈품을 얻을 수 없어 불만이 지속되었고 마침내 1730년 오스만군이 이란에 패하자 반체제 인사들과 함께 폭동을 일으켰다. 1730년 9월 28일 시작된 폭동은 마침내 10월 1일 아흐멧 3세의 조카 마흐뭇을 술탄으로 등극 시키고 그는 다시 카페스(새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 1736년 7월 1일 세상을 떠났다.
제1문(제국의문, 바브 휴마윤 Babı Hümayün) - 제1문앞에는 1478년 술탄 메흐멧2세가 이 문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 제 1문(제국의 문) -
제 1문을 지나면 첫번째 정원인 행렬의 정원(알라이 메이다느)이 나온다. 또한 제1정원은 예니체리의 정원 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이유는 예니체리가 이곳에서 교대식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1정원에서는 군대 출정식 및 각종 종교 행사, 그리고 장례식 등이 열렸다. 때로는 창던지기 시합, 레슬링 등의 운동경기도 열렸다. 또한 이 곳은 궁전의 경호를 책임지던 수천 병사들의 훈련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첫번째 정원의 오른쪽엔 하기아 아레네 성당이 있고, 제2문에 이르기전 오른쪽에 당시 제수들을 처형했던 장소가 있다. 처형된 죄수들의 목은 며칠간 경고의돌 이라는곳에 놓여졌다.
제2문까지 약 300m의 길이이며 이 곳까지는 일반인들도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었다.
◇예니체리 - 오스만제국의 보병친위군단을 의미한다. 무라트 1세(재위 1359∼1389) 때 창설된 것으로 전해진다. 원칙적으로 유럽 신속령(新屬領)의 그리스도교도의 자제를 징용해 이슬람교로 개종시켜 엄격한 훈련을 실시한 뒤에 술탄의 상비친위군으로 삼았다. 결혼하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은 금지되었으나 봉급이 많고 고위직으로 오르는 등용문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자제를 지원시키는 그리스도교도도 나타났다. 이들은 특히 14∼16세기에 걸친 투르크의 정복전쟁에서 무공을 세워 그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후에는 군기가 문란해져 횡포가 심했고 술탄의 폐위에도 개입했으며, 마흐무트 2세(재위 1809∼1839)의 근대화정책에도 반대하였기 때문에 이에 마흐무트 2세는 1826년 예니체리의 병영을 포격한 후 폐지시켰다. - 출처: 백과사전 -
제국의 쇠퇴기에 예니체리들은 행정관들의 결정에 불복하고 이 곳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에게 저항할 힘이 없었던 술탄들은 자신의 심복을 어쩔 수 없이 사형시키기도 하였고, 심한 경우 술탄을 폐위 시키기도 하였다.
1617년 무스타파가 술탄으로 등극 하였는데, 이는 3세기 14대에 걸쳐 행해지던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전해 내려오던 오스만 황가의 술탄 계승 전통이 처음으로 깨지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술탄이 승인만 하면 그의 아들이 아니라 가장 연장자인 동생이 보위를 잇게 되었다. 정신 질환이 있던 무스타파는 내궁의 카페스(새장)에 갇혀 살게 되었으며 이후 술탄의 형제 살해의 전통이 이렇게 변형 되었다.
그의 형을 대신해 1618년 14세의 나이로 술탄의 자리에 오른 오스만 2세는 1622년 예니체리에 의해 폐위되고 예디쿨레에서 전통적인 방법인 고환을 쥐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제국의 국정을 어지럽힌 예니체리는 1826년 6월 16일이 되어서야 공식적으로 해체되었고, 그들이 붕괴된 날은 바카이 하이리예(경사스런 날)로 불리게 되었다.
◇하기아 이레네 성당 -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532년 ‘니카의 반란’ 때 성소피아와 같이 소실되었으며 537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이 건물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하에도 유일하게 모스크로 개조되지 않은 건물이며, 오스만 제국 시절 한 때 부대 막사와 무기창고로도 사용되었고 현재는 뛰어난 음향시설 덕분에 콘서트 홀로 사용되고 있다.
이 건물은 성 소피아가 지어지기 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교회로, 330년 4월 2일 시작해 40일간 계속된 콘스탄티노플 창건 기념행사의 장엄한 미사도 이 곳에서 개최되었다.
건물의 구조는 지면보다 약 5m 낮게 세워져 있으며 가로 36.7m 세로 42m의 크기에 둥근 원형모양을 하고 있다. 내부의 반원형 벽면에는 황금색 바탕 위에 십자가로 된 모자이크가 있으며 그 위에는 헬라어로 시편 65편 4절이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하기아 이레네 성당 -
◇381년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종교회의) - 이곳 하기아 이레네 교회에서 38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 때에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 1차 공의회 와 2차 공의회에 대해서 짚어보기로한다.
- 325년 제 1차 니케아 공의회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 사이의 신학적 논쟁
아리우스는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처럼 영원하고 단일한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특정한 시기에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서 창조한 존재여서 아들은 아버지께 언제나 복종해야 하므로 그리스도의 본성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주장하였다.
“성부에게서 낳았고 만세 전에 창조되었으며 존재한 성자는 낳기 전에는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논리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가 구원받을 수 없는 대속적 구세관에 모순을 낳았다.
이에 대해 아타나시우스는 성부와 성자의 동일한 존재임을 주장하였다.
‘본체에 있어서 하나’라고 번역될 수 있는 ‘호무시오스(Homoousios) 즉 동질이라는 단어로서 성부와 성자의 분리될 수 없는 결합 관계를 표현하였다.
이 때 형성된 니케아 신조의 주요 내용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역사에 들어오셨으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인 하나님과 같은 본질이며, 참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참 하나님이며, 아버지로부터 나셨지만 지음을 받지 않은 분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아리우스의 사상을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 381년 제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325년 제 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본질이라는 결정을 했지만 삼위 가운데에 하나인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는 본질이 다르며 피조물이라는 생각을 가진 신학자들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381년 제 2차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본질이라는 것을 결정하였고, 이로써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 항목으로 정립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주 만물을 계획하신 분이시고 예수님은 그 계획을 이루신 분이시며 성령님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는 일을 하신다.”
또한 아폴로나리우스 주의는 “완전한 인성문제”와 관련하여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정죄 되었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을 때 사람의 이성이나 마음이 차지하는 자리를 하나님의 이성이나 로고스가 대신 차지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옛 그리스도는 완전한 신이기는 하지만 완전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 안에는 사람의 이성이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아폴리나리우스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을 강조한 점은 옳았지만 완전한 인성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는 인간 예수 안에는 완전한 인간의 이성과 마음이 있다고 함으로써 아폴리나리우스를 정죄하고 예수의 완전한 인성을 주장하였다.
◇사형집행관의 우물과 경고의 돌 - 제 2문 가까히에 위치하며, 이 곳에서는 술탄의 명령으로 죄인들을 처형했으며, 처형된 죄수의 머리는 우물 바로 뒤의 이브렛 타쉬(경고의 돌)위에 사람들에게 경고의 표시로써 얼마 동안 그대로 놓아 두었다. 그리고 이 우물에서 사형 집행관의 옷과 무기 손,발에 묻은 죄수의 피를 닦았다.
제 2 문 (경의의 문, 바브쓰 셀람 Babısı Selam)
이 문을 통해서는 오직 술탄만이 말을 타고 들어 갈 수 있었다. 국무총리를 비롯한 모든 다른 사람들은 말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만 했다. 이 문은 환영의 문, 오르타 카프 등으로도 불린다.
문 위의 커다란 현판에는 이슬람의 신앙고백인
켈리메 이 세하데트(신은 하나이고 마호메트는 선지자이다.)
켈리메 이 페브히드(신은 유일하다.) 라고 쓰여있다.
문 양옆으로 두개의 팔각 원추형 탑은 1525년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 세워졌다. 문의 내부에 있는 탑들은 문을 지키는 병사들의 막사였으며 궁전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외국의 사신들이 허가를 기다리는 곳이기도 했다. 이 문에는 또한 우두머리 사형집행관의 방과 사형을 기다리는 죄수들의 감옥도 있었다.
- 제 2문 (경의의 문) -
이 문을 지나서 있는 두 번째 정원은 ‘디반 메이다느’ 즉 의회가 있는 정원 이라고 불린다. ‘디반’이란 오스만 정부의 의회이다. 이 의회는 술탄이 없을 때는 국무총리가 주관 하여 일주일에 4번씩 열렸다. 이 의회가 열릴 때는 궁전의 모든 사람들이 도열을 했는데 약 5,000명에서 특별할 때는 10,000여 명까지 이 정원에 도열하였다.
◇쿱베알트 - 건축가 시난의 작품이다. 이곳은 국무회의가 열리던 곳이다. 의회 초기에는 술탄도 참석했으나, 슐레이만 대제 때부터 국무총리 좌석 바로 위에 있는 격자 창문을 통해 의원들이 토론하는 것을 엿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술탄들은 1839년 탄지마트 개혁전까지는 장관들과 국무총리들을 면직하거나 사형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이 때문에 격자창 너머에 술탄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없는 국무총리와 장관들은 대단히 신중하게 회의에 임해야 했다. 의회가 끝난 후 국무총리는 술탄의 접견실로 가서 술탄에게 전체 회의 결과를 보고하고 그의 질문에 대답해야 했다. 술탄이 창문 뒤에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는 총리는 모든 것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말해야만 했다. 이런 시스템을 통해 술탄은 제국의 정사를 장관들에게 맡길 수 있었고 남는 시간을 후궁들과 노는 데 쓸 수 있었다.
- 황금으로 장식된 화려한 쿱베알트의 내부 -
이곳에서 디반회의(국무회의)가 이루어졌다.
◇조리실(부엌) - 이곳은 궁전 조리실 이었고 총길이는 150미터이다. 조리실(부엌)은 400명의 요리사에 의해 이 궁전에 거주하는 3,000여 명의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하루 200 마리의 양, 100 마리의 어린 양, 40 마리의 어린 소, 40 마리의 거위와 오리가 매일 궁전 부엌으로 배달되었다. 또한 매년 20,000 마리의 암닭과 2,000 마리의 칠면조가 배달되었다. 여름에는 880 마리의 낙타에 얼음을 실어서 울루다로부터 운반해왔다.
- 중국에서 건너온 청자 -
1945년에 수리되어 현재는 도자기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7개의 방 중에 6개는 중국 송왕조 시대(960~1368)부터 18세기의 명왕조 시대까지의 청자들이 진열되어 있고 7번째 방은 일본의 도자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이곳은 전체 10,512점 중 4,584점이 전시되어 있다. 궁전에서 중국도자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술탄 파티흐 메흐멧 2세(1451~1481)와 베야지트 2세(1481~1512)때이며 셀림 1세(1512~1520)와 슐레이만대(1520~1566)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들중 진귀한 도자기는 청자인데 이것은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색이 변한다고 한다. 청자는 철 산화물이 사용되어 밝은 녹색을 띤다.
도자기 전시관은 처음부터 순차적으로 관람하는 것이 좋은데 그 이유는 처음에는 희미한 녹색의 청자, 그리고 청색과 흰색 ,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양한 색의 도자기들이 연대순으로 진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은제품 크리스탈 전시관 - 이 곳은 원래 궁전의 하인들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이 곳에 전시된 것들은 18~19세기에 술탄의 즉위식이나 기념식 때 외국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들이다.
◇무기 전시관 - 옛날 재무부 건물로 전체 10,000여 점의 오스만 무기 중 4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7~20세기까지
사용되던 오스만, 아랍, 이집트, 페르시아 등의 무기들이다.
1891년 술탄 압둘 하미드 2세에게 선물한 일본의 칼과 갑옷 과 역대 15명의 술탄들이 사영하던 칼들이 전시되어 있다.
- 일본에서 선물받은 갑옷과 칼 -
일본은 선물까지 보내놓고 막상 1차대전때에는 미국과 영국편을 들었다.
◇하렘 - 하렘은 궁전내에서 가장 비밀스런 곳으로 황실 가족과 부인들 그리고 후궁들의 거처였다. 이곳은 백인과 흑인 내시들이 관리를 하였으며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다. 하렘에는 아름다운 타일들로 장식된 400개의 방과 정원이 있다. 하렘에 거주하는 여인들은 황제의 개인자산 이었으며 500에서 700명의 소녀들이 궁전의 예의범절과 수공예, 음악등의 교육을 받았고, 그중 황제에 발탁되어 왕비가 되거나 고위관리와 결혼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혹독한 규율과 훈련을 견디지 못한 여인들은 자루에싸여 바다에 던져지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지내다 왕비가 된 록셀라나(Roxelana)에 대해서 알아본다.
- 록셀라나(Roxelana)의 초상 -
우크라이나 출신 노예 록셀라나(Roxelana)는 뛰어난 미모에 음악적인 재능과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재주까지 겸비한 여인으로 술레이만 대제의 총애를 받게된다. 술레이만 대제는 록셀라나를 자신의곁에 두고싶은 나머지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결혼까지 한것은 물론 그때까지 궁전 바깥에 뒀던 하렘을 궁전 안으로 끌어들이고 록셀라나가 거기에서 살도록 하였다. 록셀라나는 메흐메드, 지한기르, 바예지드, 셀림 등 4명의 아들과 딸 미흐라미를 뒀으며, 후에 왕자의난에서 살아남은 록셀라나의 아들 셀림이 술탄에 오르게된다.
제 3 문 (지복문, 바브쓰 사아뎃 Babısı Saadet)
이 문의 관리 및 경호는 백인 내시들이 담당하였으며, 사전에 미리 방문 약속을 한 외국의 사신들이나, 술탄을 알현하러 오는 정부의 장관 및 고위 각료들, 의회의 회의 결과를 술탄에게 보고하러 오는 국무총리, 술탄이 불러서 오는 사람들만이 이 문을 통해 세 번째 정원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이 문은 백인 내시의 문, 타흐트 카프스(왕좌의 문), 아으르 카프스(청원의 문) 등으로 불렸다.
이 문의 현관에서는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왕좌가 놓였고, 술탄 메흐멧 2세 이후로 종교적인 행사나 술탄의 즉위식, 장례식 등이 거행 되었다. 술탄의 장례식과 즉위식은 같은 날 동시에 행해졌다.
예니체리의 여러 번의 폭동 중 단지 두 번만 이 문을 통과했다고 한다.
이 정원에서 국가적인 행사가 열릴 때 이 문 앞에 있는 돌에 왕실 국기가 계양 되었고 군사 출정을 떠날 때에는 술탄을 대신하여 출정을 떠나는 국무총리나 장군에게 술탄이 군기를 건네줬다.
- 제3문 지복문 -
중요한 행사가 있을때 이 처마 밑으로 술탄의 옥좌가 놓였다. 현관 앞으로 군기를 꽂았던 돌이보인다.
◇제 3 정원 엔데룬 - 엔데룬은 제국내의 가장 총명한 학생들만이 이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이 곳에서 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군대에 가지 않고 직업 훈련이 끝나면 각 보직에 배치되었다. 이 곳은 4개의 학급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술탄에게 시중을 드는 그룹, 두 번째는 미래의 재무관리가 되는 교육을 받는 그룹, 세 번째는 술탄이 먹는 음식이 신선한지를 관리하는 그룹, 네 번째는 신성한 이슬람의 유물들을 관리하는 그룹이다. 엔데룬 학생들은 이 곳에서 교육을 받는 동안 논리 교육을 통해 그들의 지식을 넓혔고, 또한 직업 훈련을 통해 경영 기능의 경험도 쌓았다. 일종의 경영 대학원인 것이다.
◇청원실 - 청원실(아~르 오다쓰)는 술탄 메흐멧 2세 때 지어졌다. 술탄은 이 곳에서 외국의 사신들을 맞았으며 중요한 소식을 듣는 곳이었다. 이 곳의 분수는 슐레이만 대제 때 세워졌다. 청원실 내부와 외부에 있는 이 분수는 방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밖에서 엿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비밀 유지를 위해 참관자로써는 귀머거리가 선택되었다.
외국의 사신들과 측근들은 먼저 의회인 쿱베알트에서 식사를 하고, 후에 청원실로 안내되었다. 이들은 술탄에게 먼저 세 번 인사를 하고 말을 시작했으며, 통역원들이 이들의 말을 통역했다. 물러갈 때에도 다시 세 번 절하고 뒷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의회의 구성원들은 일요일과 목요일에 새 신발을 신고 청원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청원실에 들어갈 때 국무총리와 다른 고위 관직자들은 술탄의 옷자락에 입맞춤을 하고 오른쪽에 정해져 있는 자신들의 자리에 섰다. 떠날 때는 술탄 앞의 바닥에 입맞춤을 하고 뒷걸음 쳐서 밖으로 나갔다.
- 청원실 외부에 설치된 도청 방지용 수도 -
◇보물 전시관 - 오스만은 세개 대륙에 걸쳐서 제국을 건설한 15세기 중반부터 비엔나를 포위할 때인 17세기 말까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이었으며 오늘날 40개의 독립국이 예전에는 오스만의 식민지였다. 이를 보면 이 진귀한 보물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리 놀라운 사실은 아니다. 오스만의 술탄들은 제국이 어려울 때에도 보물을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는데, 제국의 마지막 술탄인 메흐멧 6세가 영국으로 망명을 할 때에도 측근들은 보물을 가지고 떠날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단지 자신의 소유만을 가지고 떠났다고 한다.
스픈다이아몬드-모라의 총독이었던 페페델렌리 알리 파샤가 사형된 후 왕실에 귀속되었다.
86캐럿의 다이아몬드 주위에 49개의 작은 다이아몬드가 장식되어 있는데, 메흐멧 4세(1648~1687)때에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되었고 몇 개의 스픈과 교환되어 이름지어졌다.
상아상감 흑단 왕좌-바그다드 원정 때 무라드 4세가 사용한 것.
무스타파 2세의 철갑 옷
황금 물 파이프-반(Van) 총독인 무스타파 파샤가 사용한 것.
황금 촛대-이집트 총독인 메흐멧 알리 파샤.
침실용 황금 물그릇과 물 항아리-압듈 하밋 2세
일본 황궁 모형-압듈 하밑 2세의 술탄 즉위 25주년 기념으로 일본 천황이 선물로 보낸 것.
인도산 황금 코끼리 뮤직박스
쎌림 3세의 에메랄드 묵주
압듈 하밋 1세의 함과 에메랄드 펜던트
1616년에 만들어진 아흐멧 1세의 에메랄드 펜던트
에메랄드 손잡이 단검-1663년 예니 자미의 개막식 때 메흐멧4세의 어머니에게 선물로 주어진 에메랄드 손잡이가있는 단검.
에메랄드 단검-1747년에 술탄 마흐뭇 1세가 이란의 왕 나디르 샤에게 선물로 보냈으나 이란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나디르 샤가 죽었으므로 터키 대사가 이스탄불로 돌아오면서 가지고 왔다.
용이 부조되어 있는 중국 비취 꽃병
독수리 장식 그릇-러시아 황제 세자르 니콜라스 2세가 압듈 하미트 2세에게 선물로 보낸 짙은 녹색의 비취 손잡이가 있고 러시아 제국의 상징인 두개의 머리가 있는 독수리 장식 그릇.
코란과 황금 코란 상자
압듈 아지즈의 에나멜 칠이 된 설탕 그릇 세트
마흐무트 2세의 펜단트
아흐멧 1세의 다이아몬드
황금 향로-선지자 마호메트의 무덤에 보내기 위해 무스타파 3세의 딸인 하티스 술탄이 만든 황금 향로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마흐무트 2세의 모형
황금 촛대- 선지자 마호메트의 무덤에 보내기 위해 황금 48kg과 6,482개의 다이아몬드로 장식.이 촛대에는 압듈 메짓의 인장과 1856년이라는 숫자도 쓰여져 있다.
페르시아 왕좌-1747년 이란의 왕 나디르 샤가 마흐무트 1세에게 선물로 보낸 것.네개의 꽃변 모양이 다리가 있으며, 뒤와 양 옆은 황금 바탕에 진주와, 에메랄드, 루비와 에나멜로 표면이 장식되 있다.
에메랄드와 터키석 벨트-셀림 1세가 페르시아 원정 때 획득한 1508년에 만들어진 이란의 왕 샤 이스마일의 소유였던 에메랄드와 터키석으로 장식된 벨트.
슐레이만 대제의 거울-1543년에 만들어진 손잡이가 흑단으로 되고 뒷면은 상아로 되어 있다.
슐레이만 대제의 신월도
- 다이아몬드가 박힌 황금 잔 -
- 에메랄드와 루비가 박힌 황금 요람 -
- 황금과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촛대 -
- 페르시아에서 보내온 다이아몬드 장식 -
- 유럽에서 보내온 다이아몬드 장식 -
- 술탄 무스타파 3세가 사용했던 갑옷 -
- 스푼다이아몬드, 86케럿짜리 다이아몬드와 주변에 49개의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다. -
- 에메랄드 단검-
이란의왕 나디르 샤에게 선물로 보냈다가 나디르 샤가 암살 당하자 다시 회수해 왔다.
◇의상실 - 정복왕 메흐멧이 입었던 면으로 된 카프탄(소매가 긴 옷)과 칼,소매가 없는 옷, 금과 은으로 자수가 된 실크 카프탄, 슐레이만 대제가 입었던 금 은으로 자수가 된 모피 카프탄, 삼색의 짧은 실크 카프탄과 짧은 벨벳, 카프탄 셀림 2세가 입었던 자수가 된 ‘보흐차’(숄 또는 망토), 터번 상자, 폭이 넓은 천으로 된 카프탄과 은 자수가 된 카프탄, 오스만 2세가 입었던 카프탄, 무라트 4세가 입었던 실크로 된 소매가 없는 예복, 보석 장식이 된 벨트와 실크 장식 띠, 술탄 이브라힘 더 매드가 이었던 아플리케 디자인이 된 의식용 카프탄, 슐레이만 2세가 입었던 튤립 아플리케 디자인이 된 고급 실크 카프탄, 장갑과 슬리퍼, 아흐멧 3세가 입었던 카프탄과 바지, 베야지트 2세의 아들인 셰흐자데 코르쿠트가 입었던 벨벳 카프탄, 아흐멧 1세가 아이 때 입었던 카프탄, 1826년의 의상 개혁 이전에 입었던 카프탄과, 개혁 후 에 입었던 바지, 쪼끼, 외투, 압듈 하밋 2세가 입었던 쟈켓과 바지, 코트, 페즈(양동이를 엎어 놓은 듯한 술이 달린 터키 모자)와 부츠. 등도 있다.
◇유물 전시실 - 이 방에는 선지자 마호메드의 유품을 비롯하여 셀림 1세가 이란, 바그다드, 카이로, 그리고 메카에서 가져온 다른 종교 지도자들의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외에도 카바신전에서 가져온 이슬람의 유물들도 진열되어 있다. 코란의 인용구와 금과 은으로 만든 베야지트 2세, 아흐멧 1세, 압듈 아지즈의 이름이 부조된 카바의 자물통 및 열쇠가 전시되어 있다. 이것들은 1517년 이집트를 정복한 후에 메카의 총독이 이스탄불에 보낸 것이다.
선지자 마호메트의 칼과 네명의 칼리프들인 아브 바크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와 마호메트의 동료였던 에불 하산, 자페리 타이랴르, 할리드 빈 벨리드 등의 칼들도 전시되어 있다.
그 밖에 모세의 지팡이와 요한의 두개골과 손 이 전시되어 있다.
- 선지자 마호멧의 이빨과 턱수염 -
- 선지자 마호멧이 쓰던 칼과 활 -
- 정통 4대 칼리프 중 아부 바크르와 외메르가 사용하던 칼 -
- 메카의 카바신전의 기둥 -
카바신전은 이슬람이 가장 신성시하는 성전으로 코란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이 건설했다고 한다.
- 선지자 마호멧이 승천할때 남겼다고 하는 황금 발자국 -
- 모세의 지팡이 -
출애굽 시기를 BC1446년으로 보면, 저 지팡이가 3500년 동안 보존된 겄인데 썩지않고 멀쩡하다?. 또한 기독교계에서는 이슬람의 유물실에 있는 이 지팡이를 어떻게 생각할까 호기심이 생긴다.
- 세레 요한의 두개골과 손 -
◇아흐멧 3세의 도서관 - 술탄 아흐멧 3세(1703~1730)는 대단한 독서광이었다. 현재 약 3,500개의 필사본이 소장되어 있으며, 습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높은 지대 위에 세워졌다.
◇제 4 정원(튤립 정원 하스 바흐체-개인정원) - 이 정원은 특별한 출입문이 없다. 그것은 이 곳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은 단지 술탄과 그의 가족들 및 가까운 관료들만이기 때문이다.
◇바그다드 정자 - 1639년 무라트 4세(1623~1640)에 의해 세워졌다. 무라트 4세는 1638년 초여름 바그다드 원정에 올랐고 그 해 12월 25일 마침내 사파비드 왕조를 굴복시켰다. 이듬해 사파비드 왕조는 오스만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터키와 이란의 국경을 정했으며 이 때 정해진 국경은 지금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
무라트 4세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살인광이 되었다.
그는 한밤중에 매우 빈번히 칼을 뽑아 들고 여인들의 처소를 몰래 빠져나가 헐렁한 가운 하나만 걸친 채 맨발로 광인처럼 거리를 뛰어 다니며 닥치는 대로 행인들을 찔러 죽였다. 또한 높은 층의 방에서 술을 마시다가 창문으로 달려가 행인들을 향해 마구 화살을 쏘았다. 낮에는 변장을 하고 돌아다니다가 애꿎은 사람들을 죽이기 전에는 궁전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그는 1640년 간경화로 사망하여 아버지인 아흐멧 1세(1603~1617)곁에 묻혔다.
◇슌넷 오다쓰(할례의 방) - 술탄 이브라임(1640~1648)에 의해 1640년에 세워진 건물로 이 곳에서 왕자들의 할례식이 행해졌다. 슌넷은 단순히 할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선지자 마호메트의 종교적 행위와 예언들을 본 딴 모든 종교적인 행위를 의미한다.
◇이프타리예 - 1641년 술탄 이브라힘에 의해 세워졌다. 이 곳은 이슬람의 금식 기간인 라마잔에 매일의 금식이 끝난 후 저녁 식사인 이프탈을 먹던 곳이다.
이브라힘은 무라트 4세의 동생으로써 무라트가 죽기 전에 동생을 처형하도록 명령하였으나 어머니 ‘쾨셈’의 도움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카페스(새장)에서 나온 이브라힘은 하렘을 돌며 춤을 추면서 노래했다.”학살자가 죽었다! 학살자가 죽었다!.”
이브라힘은 남자 구실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기에 어머니 쾨셈은 돌팔이 의사가 조제해준 최음제를 먹이는 한편 뚜쟁이를 통해 노예시장에서 아름다운 여인들을 계속 하렘으로 들였다.
이브라힘은 종종 궁전 마당에 처녀들을 모아 놓고 발가벗긴 다음 그 사이를 종마처럼 말 울음소리를 내며 뛰어 다니면서 내키는 대로 발길질을 하거나 몸부림을 쳤다. 한 번은 우연히 야생 암소의 음부를 보고 금으로 그 모양을 만들어 제국 전체로 보내 그렇게 생긴 음부를 지닌 여자를 찾았다. 마침내 찾아낸 여자의 이름은 쉐케르 파라(설탕 덩어리)였으며 몸무게가 150kg 이었다.
그는 성교의 다양한 방법들을 담은 두꺼운 책들을 모았으며 몸소 새로운 방법들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레반정자 - 1635년 무라드 4세가 코카서스 산까지 확장된 새로운 영토의 점령을 축하하기 위해 지어졌다.
◇소파정자 -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하지 않으나 1682년에 이곳에서 러시아 대사의 환영식이 있었으므로 그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메지디예 정자,로브 룸,소파사원 - 압듈 메지트(1839~1861)가 통치하던 시기인 19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메지디예 정자는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축과 디자인을 맡았던 사르크스 발얀이 디자인 했다.
◇톱카프 궁전에서 내려다 보이는 보스포로스 해협 - 유물관을 나와 정원 뒷쪽으로 나가보니 보스포로스 해협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먼리 아시아와 유럽을 잊는 보스포로스대교가 보인다.
톱카프궁전 관람을 마친후 우리는 도네르 케밥이라는 터키음식으로 식사를 했다. 우리나라 음식과는 다르지만 많은세월 해외출장을 다녀서인지 나에겐 별거부감 없이 잘 맜는겄 같다.
식사후 밸리댄스(Belly dance) 선택관광이 일정에 있었는데 예약이 모두끝나 참관할수 없다고 한다. 아쉽지만 하는수없이 우리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밸리댄스는 춤동작에 여러가지 멧세지가 있다고 가이드가 긴 설명을 해줬는데 잘기억이 나지않아 생략하기로 한다.
호텔은 깨끝하고 안락하며 긴여정에서 오는 피로를 풀기에 딱 좋았다. 그런데 새벽 5시30분에 기상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극기훈련을 하는것도 아닌데, 가이드가 우리를 지치게 만들려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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