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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의 기적'과 독일 축구
축구의 계절이 돌아왔다. 세계가 19회 월드컵이 열리고 있는 남아공화국을 쳐다보고 있다. 난 운동은 대체로 다 좋아하지만 축구는 좀 원시적인 것 같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구경하는 것은 더욱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축구를 좀 했다. 그것은 순전히 잔디밭 때문이었다. 공원이나 초원에 놀러 가면 잔디밭이 무한대로 펼쳐져있고 거기에는 의례히 축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워낙 잔디가 좋아 어린이들뿐 아니라 여자들도 다칠 염려하지 않고 축구를 즐기곤 한다. 그런 델 가면 불현듯 공을 차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뿐 아니라 선수의 숫자가 안 맞아 같이 하자는 제안을 종종 받았다. 안경도 몇 개 깨먹었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잔디의 쿠션이 워낙 좋기 때문이었다.
사실 난 독일이 축구를 잘하는 것은 거의 잔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독일에는 클럽(Verein)에 가입되어 규칙적으로 축구를 하는 사람만 6백만이 넘는데, 이들은 모두 아무 문제없이 잔디 위에서 축구를 한다. 대부분 땅운동장에서 운동을 하고 기껏해야 인조 잔디장을 빌려 쓸수 있는 한국 축구인들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꿈이다. 독일 말로 잔디는 'Rasen'인데 이걸 소문자로 쓰면 동사(rasen)가 되어 '미친듯이 뛰거나 달린다'는 뜻이 된다. 잔디 위니까 미친듯이 뛰어도 문제가 없다.
공원 잔디밭이나 초지에서 동네 축구하는 사람까지 계산하면 독일 남자들의 3분의 1은 축구를 하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정점에 분데스리가가 있다. 정말이지 독일은 축구하기에 환상적인 조건을 갖춘 나라다. 여름에는 저녁 9시가 되어도 밖이 환한데 늦어도 5시에는 일이끝나니 퇴근 후에도 축구 두 게임을 할 시간이 있다.
지금까지 독일은 월드컵에서만 3번의 우승을 했으니 축국강국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결코 아니다. 독일의 축구는 한국과도 무관하지 않다. 내가 독일 가서 처음으로 택시를 탔을 때, 한국에서 왔다는 내게 운전수가 꺼낸 첫 단어가 '차붐 Tscha-Bum'이었다. 난 한국 축구의 전설로 남을 차범근의 파워는 그의 두꺼운 허벅지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동양 남자치고 두꺼운 정도가 아니었다. 당시 독일팀의 주장이었던 마태우스가 차범근의 허벅지를 보고 부러워할 정도였다. 마라도나의 경이적인 탄력도 그의 탁월한 허벅지가 받혀주었기 때문이다.
독일에 차붐이란 단어를 퍼트린 차범근의 전성기 모습
그런데 독일은 전체적인 축구수준에 비해 큰 스타가 없는 나라다. 베켄바우어나 뮐러 정도가 있지만 옛날 이야기고 오랫동안 독일에는 세계적인 스타가 탄생하지 않았다. 유럽에서 가장 부자 나라이지만 영국이나 스페인처럼 스타를 사오지도 않는다. 분데스리가에 수많은 외국 선수가 있지만 그나마 독일에 와서 이름을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까 독일은 개인기보다는 팀웤과 조직축구를 구사하는 나라다. 이번 월드컵에 나오는 선수들을 봐도 '아 저 선수' 할 유명인사는 없다. 2006년 3위를 하는데 그쳤던 독일이 과연 이번에는 어떤 성적을 낼까? 말하자면 이번 월드컵에서 나는 한국과 독일에 관심이 있는 바, 두 나라를 응원할 예정이다.
2010 WM에 출전하는 독일 선수들
독일을 이해하는데 축구가 한 몫 한다면 - 정녕 그렇다-, 독일 축구사에 '베른의 기적'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축구 드라마다. 이것은 단순히 축구사의 기적이 아니라 전후 독일이 현재의 독일로 발전하는데 중요한 상징적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도대체 '베른의 기적'이 뭔가? 2003년에 동명의 영화가 나와 엄청난 인기를 누린 바 있다. 독문학하는 사람들이 종종 논문의 주제로 잡기도 하는 영화다. 월드컵을 맞아 이 축구 영화가 다시 생각나는 것이 왜일까? 새삼 여기에 대해 몇 자 써 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전에 당시 베른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그 클라이막스는 이러하다.
Bern의 기적을 이룬 독일팀을 환영하는 독일 사람들
1954년 7월 4일, 스위스 베른의 축구장에는 줄기차게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다. 그 빗속을 뜨거운 땀을 흘리며 이리 뛰고 저리 뛰는 22명의 사나이들. 그들의 킥 하나에 환호와 한숨을 내 지르는 수많은 관중들이 소나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에 땀을 쥐고 있다. 세계 축구사의 한 사건이기도 하지만 독일 사람들로서는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베른 월드컵 결승전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독일이 결승전까지 올라가 헝가리와 싸울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독일 정점을 향해 하루 하루 올라가자 독일 전역이 열광과 긴장의 도가니에 빠졌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라디오 앞으로 밀려들었고 한 마을에 한 두 대 있는 흑백 TV 앞에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축구 전력으로 보면 독일은 결코 헝가리의 상대가 아니었다. 과연 게임이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헝가리 팀은 가볍게 두 골을 먼저 넣었다. '헝가리 광시곡'(리스트)처럼 헝가리 선수들은 미친 듯이 공을 몰고 다녔다.
그런데 2:0으로 몰리던 독일은 후반전에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3:2로 역전승을 거둔다. 역전 골은 독일 축구사에 길이 남을 핼무트 란(Helmut Rahn)의 슈팅이었다. 결승에 오르는 것도 상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15년 간 무적의 맹위를 자랑하던 헝가리를 꺽은 것은 독일 축구사에 전무후무한 기적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베른에서 "공은 둥글다 (Der Ball ist rund)"라는 헤어베르크 감독의 유명한 말이 탄생했다. 베른 운동장에 독일 국가가 울려퍼졌을 때 독일국민들은 모든 일손을 놓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때 뛰었던 선수들은 단순히 국가적인 영웅이 된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관심을 받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실제로 많은 선수들이 연예인들처럼 과도한 인기의 부담을 못이겨 마약에 손은 대는 등 불행한 여생을 보냈다.
독일인들에게 이 베른의 축구 기적은 단순히 축구 사에만 유의미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것은 패전의 황폐를 막 디디고 일어선 독일에 '하면 된다'는 엄청난 정신적 에너지를 불어넣어주었다. 실제로 베른의 기적은 독일의 경제 부흥을 예고한 시그널이 되었다. 그 후 독일은 폐허를 딛고 급성장했다.
이 베른의 축구는 또 독일 라디오 방송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이 되었다. 결승전 중계를 맏은 Herbert Zimmermann의 중계는 독일 스포츠 방송사에 아이콘이 되었다. 그의 목소리는 아직도 사람들의 귀에 쟁쟁하게 남아있다. 영화 베른의 기적에도 이 찜머만의 중계가 나온다.
http://www.youtube.com/watch?v=JGOOSVEs-8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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