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종익 선생의 서거와 자녀들의 장학 사업,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의 예우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거와 안젤루스-로즈데일 공동묘지 안장 송종익 선생은 평생을 바쳐 꿈꾸었던 조국의 완전한 통일과 안정을 끝내 보지 못한 채, 1956년 1월 7일 향년 69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했습니다. 타계 직후 그의 유해는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 인근에 위치한 안젤루스-로즈데일 공동묘지(Angelus-Rosedale Cemetery)에 안장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내 인종 차별로 인해 초기 한인 이민자들은 백인들이 묻히는 묘역에 안장될 수 없었는데, 로즈데일 공동묘지는 이러한 차별을 넘어 280여 명의 초기 한인 이민자들과 애국지사들이 영면을 취할 수 있었던 미주 한인 사회의 국립묘지와도 같은 중요한 안식처였습니다.
자녀들의 장학 기금 조성과 유산의 계승 선생의 '무실역행' 정신과 조국애는 자녀 세대로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그의 아들 윌리 송(Willy Song)과 딸 메리 송(Mary Song)은 아버지가 남긴 뜻을 기리기 위해 사재 15,000달러를 출연하여 장학 기금을 조성했습니다. 이 기금의 핵심 목적은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의 뛰어난 청년들을 미국으로 초청해 선진 학문을 공부하게 하고, 이들이 다시 고국으로 돌아가 국가 재건에 이바지하도록 돕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해외에서 고단한 삶을 살면서도 동포와 임시정부를 위해 모든 경제적 기반을 바쳤던 아버지의 헌신이, 자녀 세대의 인재 양성과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으로 승화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대목입니다.
자녀분들이 기탁한 장학에 대한 흥사단의 소개.
흥사단 장학기금 및 장학금 모금 안내
흥사단은 한국사회 발천에 이바지할 인재양성을 위해 1955년 부터 장학사업을 실시하였으며, 금년으로 65주년을 맞이합니다.
1957년 우강 송종익 단우의 뜻을 받들어 유족이 당시 1만5천 달러를 희사하여 설립한 송종익 장학회는 국내의 유능한 인재를 미국에 유학시켰으며 현재는 미주지역 대학생을 대상으로 장학 사업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1994 장학기금 모금운동에 착수하여 1996년까지 안병욱 단우와 오경숙 단우 유족 등 6인의 기부로 6천 4백여만 원을 모금하였습니다
2001년 중단되었던 모금운동은 미주의 오명석(워싱턴), 정영조 (LA). 박광해(뉴욕) 단우의 기부로 다시 추진되어 미주지역 단우들의 적극참여에 국내의 도산선생 조카인 안성결 단우 유족 등의 동참으로 현재까지 모금중에 있습니다
흥사단 창립 100주년인 2013년에 흥사단장학위원회에서 관리 운영하던 흥사단 장학기금은 흥사단 비전 2013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한명희 단우(2억 5천만 원)와 흥사단 본부(5천만 원 공동출연으로 1996년에 설립한 (재)도산청소년재단과 통합하여 (재)흥사단청소년재단으로 새로운 출범을 하게 되었습니다
현재 통합재단의 재산은 목표한 금액 10억을 달성했으며, 이 재원으로 흥사단 운동을 계승 발전시킬 핵심 인재양성을 위하여 고교생과 대학(원)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니 단우 및 뜻있는 인사 여러분의 동참을 기다립니다
백영중 선생이 우강 송종익 선생의 장학생 1호로서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으며, 유학 당시 송종익 선생이 직접 재정보증을 서주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백영중 선생은 1956년 미국에 도착하여 학업을 마친 뒤, 훗날 흥사단 미주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며 송종익 선생의 뜻을 훌륭하게 이어갔습니다.
다만 아쉽게도 요청하신 백영중 선생 이후의 '후속 장학생 명단'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이름은 현재 확인되지 않습니다. 당시 장학회를 통해 배출된 다른 유학생들의 정확한 명단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흥사단 미주본부의 내부 문서나 1950~60년대 장학회 관련 세부 사료를 추가로 발굴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첨부 자료, 출처 :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4year_university&no=1854925
억만장자가 된 백영중 패코 스틸 (Paco Steel & Engineering) 회장
백영중 회장은 "No Money·No English" (무일푼에 영어를 모르는)인 상황에서 무일푼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입지전적인 인물로, 아이빔을 생산·판매하는 미국내 굴지 철강업체인 패코 스틸을 창업하고 현재 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인디애나 공대에서 토목공학(Civil Engineering)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으로, 1962년도에 슐레 스틸(SOULE STEEL)이라는 철강회사에서 팩스 니(Paik\'s Knee)라는 볼트 공법을 처음 개발하면서 두각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크 크레스트(MARK CREST)철강으로 자리를 옮긴 백영중 회장은 본격적으로 영업에도 뛰어들었고 1974년에는 백영중 (Paik)의 앞 두 글자와 회사 (Company)의 앞 두 글자를 딴 패코(PACO)스칠을 창업하기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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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NN, USA TODAY지 등이 후원하는 \'올해의 기업인\'에 선정되어 답례하는 백영중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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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일 |
이후 수많은 창의적 기술과 공법을 개발하던 백영중 회장은 주름잡이빔 (Corrugated Beam, 주름잡은 함석판이 강도가 높아지는 원리에 착안한 것으로 같은 두께의 철판이라도 주름을 잡으면 강도가 두세 배 강해지고 무게가 25~30%s이상 줄어드는 이치를 활용한 빔)을 발명하면서 일약 패코 스틸을 세계적인 용접 빔 철강업체로 급부상하게 만들었고, 지난 99년도에는 Ernst&Young사가 주관하고 CNN, USA TODAY지 등이 후원하는 올해의 기업인상 (Entrepreneur of the Year)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백영중 회장은 1930년 평안남도 성천에서 태어났다. 6.25전쟁중 북한군에 의해 아버지가 총살당했고 청년 백영중은 고향에 어머니와 형제를 남겨놓고 단신으로 월남한 후 연희대 재학중에 흥사단 장학생 선발 시험에 합격하여 1956년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에 유학한 백영중은 당시 미국에 거주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의 부인 이혜련 여사의 도움과 함께, 흥사단 위원장이었던 한시대 선생으로부터 한국에서 미국 올 여비를 마련하느라 정부에서 유학생에게 바꿔 주는 달러를 암시장에 팔아 여비를 마련한 것에 대해 호된 꾸지람을 듣고 이후 "정직과 신뢰"를 자신의 인생은 물론 비즈니스에 적용한 철저한 도산 안창호의 사장적 제자로 살아온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그동안 지금의 성공을 이룰 수 있게 도와준 흥사단에 기여한다는 일념으로 현재 흥사단 미주위원부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면서 일선 현장 운동판에서도 왕성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1999년 1월에는, 상해 임시정부가 3.1운동 이후 독립운동 재원 마련을 위해 1920년에 발행하고 당시 미주 흥사단 단원들이 사들였던 9천여원의 "독립공채"를 22만 2천달러로 상환받았고, 2002년 9월에는 애국선열 추모 및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관 복원사업을 위한 기금 10만달러를 이민 100주년 남가주기념사업회에 기탁하였다. 2003년 1월 25일에는 미국 뉴욕한인회관에서 흥사단 뉴욕지부 창립에 적극 참여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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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의 자서전 "No Money·No English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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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지난 1999년, 자신이 걸어 온 길을 정리하여 엮은 <나는 정직과 성실로 미국을 정복했다>는, 성공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기업인의 자세가 정직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신용인이어야 함과, 좌절을 직접 부딪히면서 의지와 신념으로 헤쳐나가야 하는 강인함의 필요성을 가르쳐 주고 있으며, 미국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따른 용기와 책임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