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푸른역사 아카데미’에서는 김찬호의 <모멸감>에 대한 서평회가 있었다. 그 책의 토론자로 요청받았을 때, 책을 읽기 전, 모멸감이라는 단어가 낯설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책 어디에서도 모멸감을 주제로 연구한 글을 본 적이 없었다. 모멸감이란 타인이 나를 모욕하거나 멸시한다고 느끼는 마음일 텐데, 그렇다면 그 마음의 배면에 있는 감정이 무엇일까 먼저 생각해보았다.
모멸감은 우선 병리적 나르시시즘의 다른 얼굴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특별하고 우월한 존재라 여기며 남들이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은 상대방의 태도가 자기 기준에 미치지 못할 때 상대가 자신을 모욕했다고 느끼기 쉽다. 또한 모멸감은 낮은 자기 존중감과 관련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자기 존중감이 낮은 사람은 남들이 특별한 의도 없이 건네는 말이나 시선에서도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갖기 쉽다. 다음으로 모멸감은 자아가 약하고 자기 경계가 확고하게 형성되지 않은 사람의 특성이 아닐까 싶었다. 자신과 타인의 경계가 분명하고 타인에 대한 의존성이 없는 사람은 남의 말이나 행동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모욕, 음해하는 언행을 하더라도 그것은 분노나 시기심을 조절하지 못하는 상대방의 문제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모멸감은 당사자가 은밀하게 느끼는 수치심이나, 마음 깊이 숨겨둔 죄의식이 상대방에게 투사되어 작용하는 방식이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모멸감>이라는 책을 펼쳤을 때, 허방을 디디는 느낌이었다. 그 책은 사회학자의 관점에서 쓴 것이었다. 아무리 ‘멘탈 갑(甲)’인 사람이라도 휘청거릴 수밖에 없는 모욕적 외부 조건에 대해 고찰하고 있었다. 감정 노동자, 사회적 약자, 여성 등이 겪는 사회적 차별과 상대적 비하 사례들을 광범위하게 연구해 두고 있었다. 인간 심리를 이해하기에는 프로이트만으로 부족하다고 생각해 심리학에 사회학을 도입한 에리히 프롬이나 에릭 에릭슨과 같은 관점이었다.
이 지면에 글을 쓰면서 식민지, 전쟁, 가난의 경험이 남긴 박탈과 결핍의 문화를 넘어서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반복하자면, 나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붕괴, 심리적 파행이 식민지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조선시대까지는 계급사회이기는 해도 개인이 개인에 대해 그토록 파괴적이고 모욕적인 대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35년에 걸친 식민지 피지배자로서 사는 동안 분노, 모욕, 멸시, 결핍, 슬픔 등의 감정이 국민의 마음 깊숙이 스며들지 않았나 싶다.
▲ “모멸감은 나르시시즘의 다른 얼굴 자기 경계가 확고하지 않은 사람의 특성 우리 사회의 정신적 붕괴·심리적 파행 식민지 시대에 기원 두고 있어”
인간 심리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식민지 피지배 경험은 어떤 느낌일까 혼자 상상해본 적이 있다. 가장 작은 단위로, 가령 누군가가 내 집을 함부로 침범해서 내 행동을 규제하고, 내 물건을 함부로 내어가고, 사랑하는 가족을 전쟁터나 공장으로 끌고 가고…. 잠시 상상했을 뿐인데 머리로 피가 몰리면서 심장 박동이 거세어졌다. 그런 날들이 35년쯤 지속된다고 상상하자 딱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해방조차 우리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어서 우리는 심리적으로 피지배 경험을 제대로 극복한 적이 없다. 해방 이후 곧바로 발발한 한국전쟁도 한동안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것도 아닌 이데올로기를 외부에서 들여와 목숨 걸고 그것을 수호하면서 동족을 죽인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할 뿐이었다. 인간 심리에 대해 공부하면서 어렴풋이, 일본을 향했던 분노가 다른 대상을 필요로 했던 것으로 그 전쟁의 실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학창 시절 우리가 식민지 시대에 대해 배운 것은 주로 항일운동의 영웅담 위주였다. 피해의 경험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기억하지만, 그 시대가 국민에게 어떤 감정을 떠안겼는지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말하기보다, “일본이 우리를 강제로 점령했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두 문장에 내포된 심리적 차이가 아주 크다는 사실에 대해 공감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 적도 있다. 심리학이 식민지 지배자들의 학문이어서 그런지, 식민지 피지배 경험이 공동체 구성원의 감정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한 글을 본 적은 없다. 국내 학자 누군가 그 분야를 연구해서 책으로 써줬으면 소망하기도 했다. 그런 작업들이 선행되어야 우리의 집단 무의식이 된 듯한 모멸과 피해의 경험을 의식화하고, 그 감정들을 인정한 다음, 건강하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누가 어디를 참배한다고 해도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의 행동을 냉철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우리가 더욱 강한 나라가 되는 쪽으로 마음을 모아, 다시는 그 경험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지혜와 힘을 쌓으면 그만이다.
역사 사회적 상황에 의해 촉발되는 감정은 외부 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해소할 수 없다. 윗세대가 해결하지 못한 모욕과 멸시의 감정이 오늘도 물 흐르듯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게 보인다. 예전에는 이념이나 사회적 차별의 문제로 행해지던 모욕과 멸시가 요즈음은 경제적 상황에서 발생하고 있다. 산업화와 함께 개인은 노동력이나 서비스 상품이 되어 분노나 비하감을 표출해도 괜찮은 물질처럼 보이는 듯하다.
한 주상복합 아파트 주차장에 붙은 공지문을 본 적 있다. 경제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는 아파트 주민들이 자기보다 열등하다고 믿는 상가 입주자들의 주차 공간을 제한하는 소송을 낸 모양이었다. 주차장 사용을 차별하는 행위는 불법이라는 판결을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공지문은 종이일 뿐 주차장에는 노란색 선으로 구획된 ‘아파트 입주자 전용’이 대부분이었다. 그곳에 주차된 외부 차량에는 경고 스티커까지 붙어 있었다. 차별과 모욕을 주고받는 문제가 개인들의 자기 존중감과 공감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문제 해결에 한 세대만큼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
그 서평회에서, 얼마 전 모욕감 때문에 분신한 경비원을 기리며 “경비원을 존경하는 방법은 없는가?”라고 질문한 이가 있었다. “아파트 경비원 임금을 의사 연봉만큼 올려주면 된다”고 답했다. 말하고 나니 우리는 틀림없이 작은 성취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심리적 졸부인 듯했다. 사랑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사랑할 줄 모르듯, 존중받은 경험이 없는 사람은 존중할 줄 모른다. 자신도 타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