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詩』2008. 3월호 신작 소시집>
'시인의 말'
시야, 한잔하자!
'신작 소시집'이란 제목이 부끄럽다.
신작이란 어떤 작품을 지칭하는 말인가? 몇 년 전에 쓴 글도 세상에 발표하지 않았으면 신작이랄 수 있는가.
나는 아직 시인詩人이 못 되었음을 오늘의 시인時人으로서 시인是認하는 일이 너무나 시인猜忍하지만 어쩔 수 없다.
詩답지 않은 글로 시답지 않은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스스로 한심할 따름이다. 그렇다고 시인矢人이 될 자질이나 능력도 없다. 시인이 무엇인가. 말의 화살을 만들어 날리며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인가?
늘 뱀을 그려놓고 보면 대가리가 없다. 몸통도 없고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날개가 달린 날뱀이거나 사족四足이 붙어 있는 파충류였다. 때로는 무수하게 많은 금빛 은빛의 비늘로 덮여 화려하게 반짝이고 있는 생명 없는 물체였다. 입때까지는 시에 옷을 입히려고 했으나 이제부터는 벗겨야겠다. '발가벗은 시裸詩'를 만나야겠다!
시가詩家라 하지 않고 시인詩人이라 하는데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앞을 가로막는다. 그러니 이제라도 시인들의 시속時俗이 되도록 내가 시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나의 시속時速이 얼마나 되겠는가. 시는 내 생명의 순간 순간 찰나의 절정climax이 피워내는 꽃orgasm이다. 단단한 시, 단단短短한 시랑 한잔해야겠다.
시야, 그리고 재미 없는 글를 읽고 기꺼이 해설을 해 준 손현숙 시인에게 한잔하자고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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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북은 줄창 우네 (외 5편)
洪 海 里
세상의 가장 큰 북 내 몸속에 있네
온갖 소리북채가 시도 때도 없이 울려 대는 귀북이네
한밤이나 새벽녘 북이 절로 울 때면
나는 지상에 없는 세월을 홀로 가네
봄이면 꽃이 와서 북을 깨우고
불같은 빗소리가 북채가 되어 난타공연을 하는 여름날
내 몸은 가뭇없는 황홀궁전
둥근 바람소리가 파문을 기르며 굴러가는 가을이 가면
눈이 내리면서 대숲을 귓속에 잠들게 하네
너무 작거나 큰 채는 북을 울리지 못해
북은 침묵의 늪에 달로 떠오르네
늘 나의 중심을 잡아주는 북,
때로는 천 개의 섬이 되어 반짝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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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빗소리
혼례만 올리고 시댁으로 가지도 못하고
과부가 된 어린 각시,
마당에 울고 있는
겨울 빗소리
차라리 까막과부望門寡婦라면 덜할까
청상靑孀이면 더할까,
온종일 듣고 있는
겨울 빗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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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뼈
물이 절벽을 뛰어내리는 것은
목숨 있는 것들을 세우기 위해서다
폭포의 흰 치맛자락 속에는
거슬러 오르는 연어 떼가 있다
길바닥에 던져진 바랭이나 달개비도
비가 오면 꼿꼿이 몸을 세우듯
빈 자리가 다 차면 주저없이 흘러내릴 뿐
물이 무리하는 법은 없다
생명을 세우는 것은 단단한 뼈가 아니라
물이 만드는 부드러운 뼈다
내 몸에 물이 가득 차야 너에게 웃음을 주고
영원으로 가는 길을 뚫는다
막지 마라
물은 갈 길을 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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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꽃여자 6
산바람에, 한들한들, 흔들리는
파르르파르르, 떠는
불같은 사랑
물 같은 사람
그리움은 또 어디로 흘러갈 것이랴
수줍고 수줍어라, 그 女子.
꽃잎과 어루는 햇살도
연분홍 물이 들어 묻노니
네게도 머물고픈 물빛 시절이 있었더냐
울지 말아라, 울지 말아라
파란 혓바닥 쏘옥 내밀고 있는
가녀리고 쓰라린, 그 女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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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슬픔
나무들은 꼿꼿이 서서 꿈을 꾼다
꿈에 젖은 숲은 팽팽하다
숲이 지척인데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고
적막에 들지 못하고
지천인 나무들에 들지 못하고
눈을 들면
푸른 게릴라들이 국지전 아닌 전면전을 감행하고 있다
녹음 아래 노금노금 가고 있는
비구니의 바구니 안
소복이 쌓이는 그늘,
그늘 속으로 이엄이엄 질탕한 놀음이 노름인 줄 모르는
한낮의
머나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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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힘
어둠이 빛인 줄 안다면
세상을 밝히는 것은 빛이 아니라
빛의 밝은 힘이 아니라
어둠의 힘이라는 걸 알게 되리
나무도
하늘 가까이 가는 것은 우듬지이지
우듬지에 별이 걸리고
별이 너를 비춰주고 있지만
결국 하늘에 가 닿는 것은
우듬지가 아니라 뿌리다
뿌리가 나무로 들어가
우듬지를 곧추세워야, 비로소
나무는 하늘에 닿는다
그러니 하늘에 닿는 것은 뿌리다
뿌리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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