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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서 - 8
사장: 우리의 세계 CHAPTER FOUR: OUR WORLD 충분히 발전된 기술은 마술과 구별할 수 없다. 아더 씨 클라크 Any sufficiently advanced technology is indistinguishable from magic. Arthur C. Clarke 서론 Introduction 지난 장에서, 불멸의 영으로서 우리가 상승과정에 필요한 조건을 창조하려고 어떻게 시도했는지 자세히 이야기했어요. 레무리아와 아틀란티스는 경계를 돌파해서 물리성을 창조의 계단으로 거슬러 올리는데 실패했다는 것을 이야기했어요. 아틀란티스는 커다란 실패작이었다는 것을 알았어요. 기실은, 아틀란티스의 실패가 낳은 악영향을 우린 아직도 처리하고 있어요. 이번 장에서는, 경계를 돌파하려는 우리의 현재 시도를 다룰 거에요. 이번 실험의 전제는 지난 두 실험과 같고, 에너지 불균형의 정도는 아틀란티스에서와 같지만, 이번 실험이 펼쳐지는 조건은 이전보다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는 걸 알게 될 거에요. 아틀란티스에서 남은 에너지적 악영향을 처리해야 할 뿐 아니라,
위쪽 차크라를 일깨울 때가 왔을 때, 만약 몸이 겁에 질리게 되더라도, 아틀란티스가 붕괴할 때와 같은 파괴적인 힘을 휘두르지 못하도록 만전을 기해야 했어요. 하지만, 이번 시도를 자세히 알아보기 전에, 에너지가 작동하는 방법에 대해서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다시 한번 에너지에 대하여 – 무질서도와 어둠/ 창조와 빛 Energy Revisited - Entropy and Darkness/ Creation and Light 위에서 언급했듯이, 상승 시도를 조정하는 일 외에도, 아틀란티스에서 나온 에너지적인 악영향 혹은 “카르마”를 처리할 일이 우리에겐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려면, 그리고 이번 시도가 왜 그리 복잡하고 운영하기 어려웠는지 이해하려면, 우리가 창조하는데 영향을 미치는 에너지의 세 가지 특징을 알아둘 필요가 있어요. 그것은 에너지의 지속성, 중립성, 그리고 결합성(valence)이에요. 에너지의 지속성에 대해서는 이미 얘기했어요. 에너지가 지속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에너지의 관성이나 운동량에 대해서 다르게 표현하는 것에 불과해요. 이전 장에서 이야기했듯이, 당신이 의도를 통해서 일단 에너지를 끌어오고, 그 의도가 일단 실현되거나 표출되면, 그렇게 실현된 것은 그대로 유지되는 성향이 있어요. 에너지와 실현된 것들이 끈끈한 성질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 거에요. 물론, 에너지의 진동수가 낮을수록 (즉, 우주의 차원에서 당신이 낮은 곳에 있을수록), 에너지는 더 끈끈해요. 에너지의 이런 특징은, 분자의 진동속도가 느려지면서 걸쭉해지는 기름이나 당밀 같은 액체의 예에서 잘 드러나죠. 창조의 에너지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에너지가 중립적이라는 거에요. 에너지는 그냥 에너지이고,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요. 에너지의 사용과 오용에 대해서 에너지는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아요. 그건 그냥 있어요. 이 관념이 좀 어렵게 느껴지면, 당신 자신이 에너지를 저장하고 사용하는 걸 생각해보세요. 음식을 먹으면 에너지로 전환되고 당신의 몸이 활동 중에 사용하지요.
하지만, 당신이 무얼 먹는지, 그리고 당신의 에너지가 어떻게 저장되는지는 당신이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지를 결정하지 않아요. 저장된 음식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당신과 당신의 몸은 항상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어요. 당신은 앉아서 티브이를 볼 수도 있고, 달리기를 할 수도 있고, 자녀들과 함께 놀 수도 있어요. 요점은, 당신이 선택을 한다는 거에요. 당신이 그렇게 선택한다면, 소파에 앉아있기만 하는 여가생활로 인해 몸이 안 좋아지고 심장마비나 뇌졸중에 걸릴 위험성이 높아지는 걸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죠. 창조의 에너지도 이와 똑같아요. 그건 그냥 에너지이고 당신이 그걸로 뭘 하든지 상관 안 해요. 에너지는 마음도 없고, 의지도 없고, 도덕성이 없어요. 그것은 물론 신의 일부(the substance of God)이지만, 가공되지 않은 에너지 그 자체는 영이 사라진 상태이고 의도에 반응하기만 할 뿐이죠. 당신이 무슨 활동을 할지 선택하는 것처럼, 당신은 이 에너지를 어떻게 사용할지 선택할 수 있어요.
창조의 에너지라는 이 경이롭고 놀라운 선물을 갖고서, 예를 들어, 평화와 정의, 사랑과 풍요로 가득한 세상을 실현할 수도 있어요. 다른 한편으론, 당신이 그러기를 선택한다면, 이 선물을 갖고서 모든 이들과 심지어는 세계 자체(대자연이라는 어머니)를 당신의 적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결국에는, 그건 당신의 선택이에요. 지속성과 중립성에 더해서, 에너지는 결합성(감정값)이라고 부를만한 성질을 갖고 있어요. 결합성이란, 에너지가 일종의 질적인 각인(찍어 누른 자국, 흔적)을 동반한다는 뜻이에요. 이 각인은 당신의 몸이 에너지에 부여하는 것이죠. 우리의 몸은 물리성 실현 장치이고, 완전히 활성화되면 아주 강력한 매체가 된다는 걸 기억하시죠. 에너지가 당신의 몸을 통과할 때, 에너지는 몸이 당시 갖고 있는 감정적 상태가 부과하는 각인을 그대로 받아서 유지하게 되요. 에너지가 당신의 몸을 통과하면서 받게 된 결합성(감정값)은 몇 가지 방식으로 묘사될 수 있어요. 결합성(감정값)을 회전과 색깔로 묘사할 수 있죠. 당신의 몸은 에너지를 두 가지 방향 중에서 한 쪽으로 돌릴 수 있어요. 당신은 에너지를 “시계방향으로” 돌리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릴 수 있죠. 에너지를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에너지는 통일성과 통합 쪽으로 현실화되고, 에너지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리면, 에너지는 비통일성과 해체 쪽으로 실현돼요. 에너지적 균형(음양)과 회전 사이에 관계가 있는 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죠. 활동성이 강한 쪽, 즉 양에너지를 올리면, 과도한 양 에너지가 낳은 마찰과 투쟁이 에너지를 해체 쪽으로 돌리기 쉽게 만들어요. 에너지는 색깔 역시 갖고 있어요. 여기서 말하는 색깔이란 감정적 색깔을 말하는 건데, 회전의 경우와 같이, 에너지가 당신의 몸을 통과할 때 찍혀지는 것이에요. 자극에 다양한 종류의 감정적 반응을 할 수 있는 당신의 몸은 창조의 에너지에 별의별 다양한 “색깔”을 입힐 수 있어요. 사랑, 자비, 증오, 질시, 분노 등으로 에너지를 색칠할 수 있죠. 당신이 무엇을 느끼든, 그걸 에너지에 찍어 넣을 수 있어요. 아니, 무얼 느끼든, 당신은 그걸 찍어 넣어요. 이제, 지속성, 중립성, 그리고 결합성의 속성을 합치면, 깊은 함의를 지닌 에너지의 속성 한 묶음이 나타나요. 에너지가 중립적이기 때문에, 당신은 에너지를 끌어들여서 당신이 원하는 게 무엇이든 현실로 실현할 수 있어요. 에너지가 결합성(감정값)을 갖고 있기 때문에, 당신은 자신의 개인적인 인장을 에너지에 새겨 넣어요.
마지막으로, 에너지는 지속성이 있기 때문에, 당신이 실현한 것과 그걸 실현한 방식은 그대로 남게 되요. 당신이 에너지를 어두운 감정으로 낙인찍게 되면, 당신이 현실을 만들기 위해서 사용한 그 에너지는 당신이 찍어 놓은 그대로 남아있게 되요. 당신이 그걸 다시 각인하고자 하는 의식적인 노력을 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에너지의 관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에요. 하지만, 이 관성이 무얼 뜻하는지에 대해서 이제 자세히 알게 되었고, 단지 움직임뿐만 아니라, 색깔과 회전에도 관성이 적용된다는 걸 알았어요. 이제는 에너지적 관성이 가져오는 결과가 과연 무엇인지 그 전모를 밝혀보도록 하지요. 원래의 회전 The Original Spin 에너지적 관성이 갖는 중요한 의미 하나는, 당신이 에너지에 색깔을 입히고 회전시키면, 에너지는 처음 끌어들여진 장소 근처에서 그런 색깔과 회전을 유지하면서 머물게 된다는 거에요. 그런 다음 이 에너지는 다른 이들이 물리성을 실현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로 다시 쓰일 수 있지요. 여기서 생기는 문제는, 당신의 몸이 공명(동조적 진동, sympathetic vibration)을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죠. 그건 이렇게 작용해요. 당신의 몸은 특정한 현실을 구현하기 위해서 에너지를 끌어들여요. 만약 몸이 차크라를 통해서 끌어들인 에너지가 (회전되지 않은, 색깔을 입지 않은) 중립적인 것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만약 몸이 어떤 감정적 결합성(감정값)을 지닌 에너지를 끌어들인다면, 당신의 몸은 그 감정값에 그대로 반응하는 성향이 있어요.
예를 들어서, 분노의 에너지가 넘쳐흐르고 있는데, 당신이 어쩌다가 우연히 그 분노의 에너지 주변에 있게 된다면, 당신이 창조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 에너지를 먼저 끌어들이게 될 것이고, 당신이 그 에너지를 통해서 현실을 구현하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당신의 몸 상태는 분노 쪽으로 기울게 되는 성향이 있어요. 이건 전혀 신비스러운 게 아니에요. 이건 단순히 에너지에 대한 물리적 반응 (공명 현상)일 뿐이에요. 보통은 에너지적 감정값과 공명은 큰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가 자신이 누군지 완전히 인식하고 있으면, 즉, 우리가 불멸의 영이라는 걸 기억하고 있을 때는, 우리가 에너지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회전하거나 색깔 입히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설령 우리가 그렇게 하더라도, 부정적인 에너지가 증폭되는 걸 막기 위해서 최대한 빨리 그걸 다시 각인하겠지요. 다른 경우에, 만약 우리가 다른 이가 부적절하게 각인해 놓은 에너지를 몸소 체험하게 되면, 우리는 그걸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인 다음, 그걸 더 적절한 것으로 재빨리 변화시키겠지요. 우리가 이렇게 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데, 그건 영으로서 우리가 지저분한 에너지를 남겨두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건 단순히 에너지적인 청결의 문제에요. 하지만, 양에너지 쪽을 올려서 위쪽 차크라를 굶주리게 해서, 에고와 불멸의 자아 사이에 장막(The Veil)이 쳐지게 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될 위험이 생겨요. (자신이 진짜로 누구인지 모르는) 기억상실 상태에서, 과도한 양에너지의 자극에 대처해야 할 때에는 (커피를 여섯 잔 마시고 나서 차분한 상태를 유지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해보세요), 어떤 에너지가 주위에 널려 있는지 생각하지 않은 채, 몸이 그냥 주위의 에너지에 공명해서 유사한 반응을 보이기가 아주 쉬워요.
찻길에서 추월을 당한 경우처럼 단순한 일을 생각해보죠. 이 일에 대해서 보일 수 있는 반응은 광범위한데, 우리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1) 우리가 당시 어떤 기분이었는지, 2) 당신의 몸이 어떤 종류의 에너지를 끌어들였는지, 3) 당신 자신이 본능적인 몸의 반응을 얼마나 스스로 자각하고 있는지에 달렸어요. 우리가 부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들였다면, 그리고 그 에너지가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걸 모르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과잉반응을 할 수 있어요. 이 때문에 운전 중 격분하는 현상이 흔히 일어나는 거에요. 군중 심리에서도 이런 역학을 명백히 볼 수 있어요. 군중들 속에서는 순간적인 공포나 분노가 쉽게 전염되고, 최초의 사건이 감정적인 파장을 일으켜서 군중 사이로 퍼져나가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대혼란으로 번질 수 있지요. 이러한 원칙이 좀 더 높은 단계에서도 작용하는 걸 볼 수 있는데, 세계에서 항상 분쟁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역들의 경우가 그래요. 이런 분쟁은 거기 사는 개인들이 이미 강하게 채색된 에너지와 작업하고 있기 때문이죠. 이 지역들의 에너지는 너무나도 부정적으로 회전되고 색칠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에너지를 바탕으로 무엇이든 긍정적인 걸 실현한다는 게 아주 어렵게 돼버렸어요. 앞서 언급했듯이, 불멸의 영으로서 우리는 결코 어떤 일에도 과잉반응을 하지 않아요. 사실은, 우리의 기원을 알고 있을 때에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분노의 반응을 보일 가능성이 아주 작아요. 또한, 우리가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회전시켜놓고 나서 그 실수를 바로잡는 걸 잊어버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일 거에요. 하지만, 몸 안에 있으면서 기억 상실 상태에 있으면, 상황이 많이 다르죠.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잊고, 우리의 형제자매가 누구인지 잊고,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고, 에너지를 부정적으로 회전시키고, 우리가 그걸 고쳐놓아야 한다는 걸 잊어요. 이것은 아틀란티스에서 우리가 무지와 미신으로 인해서 부정적인 회전과 감정값을 배출하고 확대재생산하면서 심각한 문제가 되었죠. 아틀란티스가 망각으로 사라지면서 발생한 원래의 에너지적 각인을 원래의 회전(Original Spin)이라고 부르기로 하죠. 당신이 기억상실에 걸려있는 동안에 당신이 일단 원래의 부정적인 회전에 참가하면, 진짜 문제가 시작되죠. 기억상실 상태에서는, 당신이 실현한 부정적인 회전 때문에 에너지가 부정적인 성격을 띠게 되고, 당신이나 다른 이들이 앞으로 실현할 것들 역시 마찬가지로 이미 각인된 부정적인 에너지의 성격을 띨 가능성을 높다는 것이죠.
조건만 맞으면, 지금과 같은 (차크라가 닫혀있는) 상황에서도 일이 걷잡을 수 없게 악화될 수도 있어요. 그렇다면, 기억상실 상태에서, 당신의 차크라가 활짝 열리고, 당신의 진정한 영적 자산에 대해서 절대적인 공포에 휩싸인 채 반응을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럼 아틀란티스가 망각으로 사라지면서 과연 얼마나 참담한 일이 벌어졌을지 잘 이해할 수 있을 거에요. 하나의 법 The One Law 이제 이해할 수 있듯이, 아틀란티스의 상황이 끔찍해지자, 물리성의 영역 중에서 이 지역에 부정적으로 각인된 지저분한 에너지가 말 그대로 쏟아졌어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상승의 경계로 물리성을 다시 올리기 위해서 이 지역을 재구성했을 때, 아틀란티스인들이 각인해 놓은 에너지는 그대로 고스란히 남았다는 거에요. 우리가 하강하면서 발생시킨 반-에너지는 시공간 원통 중에서 이 지역에 마치 진흙과 어둠의 늪처럼 머물러 있었어요. 이건 우리가 처리해야 했던 문제였어요.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지만, 설사 원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런 부정적인 에너지를 그냥 남겨둘 수가 없어요. 이게 우리의 상승 시도를 막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부정적으로 각인된 에너지가 범람하는 상태에서는 높은 진동수의 차원으로 상승하도록 우리가 허락할 수 없죠),
아틀란티스에 참여했던 우리 모두는 그 결과에 영적인 책임이 있었어요. 불멸의 영으로서, 당신은 에너지를 만지작거리다 엉망으로 만드는 실수를 저질러 놓고 나서, 다른 누군가가 그걸 청소하라고 내버려두도록 허용되지 않아요. 물리성의 공동 창조자이자 창조의 동업자로서, 우리는 동일한 보편적인 영적 법에 따라야 해요. 이 법은 일종의 균형을 보장하는 장치로 작용하는데, 당신이 실현한 것이 무엇이든 간에, 당신은 그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내용이에요. 이것은 영적 책임의 법 또는 우주의 유일한 법이라고 불리는데, 그건 이게 우리가 지켜야 하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에요. 이 법칙의 작용을 제일 간단히 묘사한다면, 당신이 각인한 에너지를 당신에게 고스란히 돌려준다는 것이에요. 당신이 에너지를 좋은 걸로 각인하고 그 에너지로 현실을 실현하면, 그것은 똑 같은 상태로 당신이 다음에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에게 되돌아가요. 당신이 좋지 않은 것을 에너지에 각인하면, 그 에너지도 역시 당신에게 같은 상태로 돌아가요.
이 법칙은 당신이 내보낸 것과 동일한 질의 에너지를 당신에게 그대로 돌려주는데, 이것은 절대적인 법칙이에요. 이 법은 절대로 예외가 없기에, 에너지를 계속 부정성으로 각인하길 원한다는 것은 무지의 소치에서만 가능한 것이죠. 그들이 빨려 들어가게 되는 반-창조적 소용돌이는 상당한 고통과 불안감으로 이어질 테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대처하기 힘들게 될 거에요. 소울에게 주어지는 에너지가 갈수록 부정적이 되니까요. (反者道之動, “되돌아가는 것이 도의 움직임”이라는 말은 <노자 도덕경>에서 도의 작용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유일한 표현이기도 하지요.—역자) 영으로서, 우리는 이 법을 이해하고 있고, 높은 차원에서 현실 구현을 하고 있을 때에는 실제로 그것이 즉각적으로 작용하는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어요. 높은 차원에서는, 에너지의 반응 속도가 빠르고, 에너지의 유동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투자한 에너지는 바로 우리에게 돌아오지요. 이런 “바로 면전에서 대놓고” 이루어지는 성격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구현하는 현실에 조심스럽게 주의를 기울여요.
하지만, 낮은 차원에 있으면서 기억 상실에 걸려있을 때에는, 이 법칙의 작용에 대해서 잊어버릴 수가 있죠. 낮은 차원에서는, 에너지를 각인하더라도,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뿌린 것을 다시 거두어들이게 되거든요. 뿌린 것이 돌아오는 데 걸리는 이 오랜 시간적 단절 때문에, 하나의 법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렵게 되고, 이 법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생기게 되죠.* 이 법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털고 가도록 하죠. * 당신이 하나의 법칙을 기억하도록 하려는 노력이 그동안 없었다는 건 아니에요. 이 법은 모든 세계적 종교나 영적 신념 체계에 황금률의 변용으로 표현되어 있거든요. 속지 말아요. 신은 놀리지 못해요. 인간이 뿌린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거두거든요. 갈라디아서 6:7. 남들이 그대에게 해주었으면 하는 일이 무엇이든지, 그대도 그들에게 해주세요. 이것이 법이고 선지자이니까요. 마태복음 7:12. 그대 자신이 싫어하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하지 마세요. 이것이 법의 전부에요. 다른 모든 것은 해설에 불과해요. 샤바트 31절. 탈무드. 이것이 의무의 전부에요. 만약 그대에게 가해진다면 아픔을 불러일으킬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하지 마세요. 마하바라다 5, 1517. 그대 자신이 당하면 아프다고 느낄 짓으로 다른 이를 아프게 하지 마세요. 불교. 우다나 바가 5, 18. 이것이야말로 인(사랑)의 근본 규칙이에요. 그대에게 가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다른 이들에게 하지 마세요. 논어 15, 23. 무엇이든 자신에게 좋지 않은 일을 다른 이에게 하길 삼가는 그 본성 하나만으로도 족해요. 조로아스터교. 다디스탄-아이-디닉, 94. 이 리스트는http://users.aol.com/psyeditor/goldrule.html과 http://www.teachingvalues.com/goldenrule.html 에서 가져왔어요. (저자 주) 물론, 이것은 보복의 법은 아니에요. 어떤 이는 이 법이 있으니까 눈에는 눈으로 당한 만큼 그대로 앙갚음을 해도 좋다고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지 않아요. 그렇게 해석하는 건 완전한 헛소리이고, 법의 본성과 의도를 어기는 거에요. 눈을 뽑혔다고 가서 눈을 뽑는 것은, 우리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것이 행위가 아니라 에너지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불을 가지고 불과 싸우는 것의 상승작용을 무시하는 것이죠.
부정적인 에너지를 더 많은 부정적인 에너지로 각인하게 되면, 단지 부정성만 늘어날 뿐이에요. 불로 불과 싸우면, 불만 더 커질 뿐이죠. 누가 당신을 때렸다고 당신이 돌아서서 그 사람을 맞받아치게 되면, 원래 있었던 부정성을 두 배로 증가시키게 되죠. 이렇게 하면, 이 간단한 영적 원칙을 완전히 어기게 되는 셈이에요. 하나의 법에 주의를 기울이는 현명한 이라면 부정성을 늘리는데 이바지하는 대신, 다른 쪽 뺨을 내밀어요.* 이것은 심판의 법도 아니에요. 이미 이야기했듯이,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심판이란 내포되어 있지 않아요. 다시 한번 말할게요.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심판이란 내포되어 있지 않아요. 살인조차도, 그 사건 자체로는 단지 물리적 몸의 종말을 뜻할 뿐이죠. 그것이 나쁜 점은, 살인이라는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이 심각하게 부정적으로 각인된 에너지를 처리해야만 한다는 것이에요. 어떤 이가 다른 이를 죽이면, 유족 말고도, 살인자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려야 해요. 왜냐하면, 또 다른 존재를 죽이기 위해서 필요한 부정성과 단절성은 너무나도 엄청난 것이어서, 에너지를 그렇게 부정적으로 각인하는데 참여한 살인자는, 주의 깊게 조정된 에너지 청소 작업을 여러 차례의 삶을 걸쳐서 해야만, 그들이 책임을 지고 있는 에너지가 비로소 깨끗해질 것이기 때문이죠. 반복하자면, 하나의 법은 보복에 관한 것도, 징벌에 관한 것도 아니에요. 하나의 법은 책임에 대한 것일 뿐이에요. 당신이 어떤 것을 창조하면,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이 있어요. 당신이 어떤 걸 망쳐놓으면 당신은 그걸 고쳐놓아야 해요. 어떤 이는 이 법을 싫어할지 몰라도,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영적인 어른들의 방식이에요. 어린이들이 어질러 놓으면 당신이 치우죠. 어른들은 자기가 어질러 놓은 걸 스스로 치워요. 에너지 변환하기 Transmuting Energy 이제 우리가 이 지구에 육화한 두 번째 이유를 살펴보죠. 첫 번째 이유는 우리가 상승을 위한 에너지 작업자들이라는 것이에요. 상승을 위한 작업자라는 것 말고, 우리는 아틀란티스가 망각으로 사라질 때 우리가 마구 쏟아냈던 부정적인 에너지 전부를 깨끗이 청소하려고 작업하는 우주의 청소부들이에요. 우리가 부정적인 에너지를 청소하는 작업을 에너지 변환하기라고 하는데, 하나의 법이 작용한다는 것이 우리가 이걸 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이지요. 일은 꽤나 힘들었지만, 개념적으로는 간단해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지 에너지를 우리 몸에 집어넣은 다음, 알맞은 차크라를 통해서 뭔가 좀더 긍정적인 것으로 바꿔서 배출하는 거였어요. 이건 개념적으로는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아주 힘든 일이에요. 몸이 공명을 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과, 몸이 심각한 영적 기억상실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변환하려고 하는 에너지를 아주 강렬하게 육체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죠. 즉, 분노의 에너지가 우리의 몸을 통과하면,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는 거에요.
이런 상황에서, 그 분노에 휘둘리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며 우리 할 일인 에너지 변환작업을 한다는 건 아주 어려워요. 그 대신, 우리는 (특히 우리가 처음 육화했을 경우에는) 그 분노의 에너지를 변환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통과시키면서, 그 분노의 표현을 처음 촉발시킨 친절한 소울에게 분노하며 덤벼들기 쉽죠. 강렬한 감정을 한번이라도 체험해 본 사람이라면 (우린 모두 에너지 청소부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강렬한 감정을 체험해 본 적이 있어요),
그런 강렬한 감정의 흐름을 전환시킨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죠. 당신은 항상 물길을 거슬러 오르느라 고전해야 했어요. 어떤 경우에는, 시계반대방향으로 회전되고 우울증이나 자기파괴성향으로 표출된 에너지의 경우처럼, 말 그대로 완전히 바닥을 친 다음에야 마침내 길(Path)에 들어서서, 에너지 변환하기라는 엄청나게 어려운 작업을 시작하게 되지요. 이 시점에서, 왜 우리가 그냥 물리성 밖에서 에너지를 변환시키지 않는지 궁금할지도 모르겠어요. 즉, 우리의 위쪽 자아들이 (우리의 소울들, 천사들, 대천사들, 상승한 마스터들 등) 이 에너지를 모두 모아서 사랑과 빛으로 회전시켜버리고, 우리는 그동안 환희로 가득한 채 시공간 원통을 구경하도록 하지 않냐는 거죠. 왜 굳이 우리가 몸에 들어가서, 기억상실에 걸린 다음, 에너지 변환 작업을 하는 힘든 방식을 택해야 하냐 이거죠.
그 이유는 간단해요. 몸 밖에선, 우리는 사랑만을 경험해요. 신경세포와 신경절(시냅스), 그리고 감각을 갖고 있는 물리적 몸만이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게 된 풍부한 감정적 체험을 제공해주죠. 우리가 몸 안에 있지 않는 동안에는, 우린 이 지구에 표출된 모든 에너지를 느낄 수가 없어요. 물론, 우리는 에너지를 볼 수는 있고, 에너지의 색깔과 회전은 볼 수 있죠. 에너지의 균형을 재조정할 수는 있어요. (우리가 원하면 심지어는 지역 전체를 “재설정”할 수도 있죠.) 하지만, 몸 밖에서는 우린 특정한 에너지 각인을 바꿀 수는 없어요. 몸이 한 일은 몸 안에 있는 동안에만 바꿀 수 있거든요. |
출처 :빛의 길로 원문보기▶ 글쓴이 : 순리
첫댓글 마이클 샤프의 <생명의 서>를 2/3 번역해서 마이클 샤프를 한국에 처음 소개한 차학선입니다. <생명의 서>에 대한 체험담을 제 블로그에 올렸습니다. 많은 분들께 도움이 되길 원합니다.
https://m.blog.naver.com/74201d/2241070629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