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6월 4일은 영국 엡섬다운스의 더비경마일이었다. 테이턴햄 코너에는 수많은 관객이 모여 경주마들이 이날 큰 경주의 마지막 직선 코스를 향해 달려오는 장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관객 가운데 한 젊은 여성이 흰 페인트칠을 한 난간 옆에 서 있었다. 경주마의 말굽소리가 점점 가까이 들려오자 경마장에는 긴장된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고 관중들은 흥분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요란한 말굽 소리를 울리는 말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바로 이때 난간 옆에 서 있던 그 여성이 난간 밑으로 빠져나가 경주 코스 한복판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는 국왕의 말인 앤머 앞으로 몸을 던지면서 말 고삐를 잡아챘다. 그 여성에게 가슴을 부딪힌 말은 달리던 코스를 벗어나 한바퀴 공중제비를 하면서 기수를 지면에 내팽개쳤다. 말굽에 짖밟힌 젊은 여성은 지면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고 충격을 받은 군중들은 경주 코스로 몰려나갔다.
구급차로 엡섬병원에 실려간 이 여성은 머리를 크게 다쳐 나흘 뒤에 숨을 거두었다. 이 여자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헌신하여 여러 차례 항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었던 32세의 에밀리 와일딩 데이비슨이었다. 데이비슨이 더비경마장에서 취한 행동은 그 동기가 분명해졌다. 그녀가 입은 코트에는 여성사회정치동맹(wspu)의 자주색, 녹색, 백색의 동맹기가 그려져 있었다. wspu는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투쟁 단체로 그 회원을 서프러젯(여성 참정권론자)이라고 불렀다.
성대하게 거행된 데이비슨의 장례식에는 전국에서 수많은 서프러젯들이 참가했다. 런던 중심가를 메운 수많은 서프러젯들이 참가했다. 런던 중심가를 메운 수많은 사람들은 여성 참정권 운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 여성에게 무언의 찬사를 보냈다. 에밀리 데이비슨이 목숨을 바친 그날의 항의는 여성참정권 운동단체들이 다년간 운동을 벌인 끝에 나온 행동이었다.
영국에서는 1897년에 밀리센트 포셋이 여성의 참정권을 요구하는 여성참정권 단체 전국연합(nuwss)을 설립했다. 이 단체는 평화적인 시위, 가두해진, 토론,청원을 주도했고 전단, 서적, 신문을 발행했다. 그러나 여성참정권 운동의 부진에 좌절감을 느낀 에멜린 팽크허스트와 그녀의 두 딸은 1903년에 wspu를 설립했는데 이 급진적 단체 또한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다.
이 단체가 내세운 "말이 아니라 행동"이란 슬로건은 nuwss의 온건한 운동방식을 거부하고 전투적인 대결 방식을 표명하는 것이었다. wspu의 주공격목표는 차기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가 예상되는 자유당이었다. 1905년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와 젊은 제분소 직공인 애니 케니는 맨체스터의 자유 무역 회관에서 열린 자유당원 집회에 난입했다.
두 여성은 빽빽하게 들어찬 당원들 앞에 일어나 질문했다. "자유당은 여성에게 선거권을 허용할 용의가 있습니까?" 대답을 얻지 못한 그들은 그 같은 질문들을 되풀이했다. 이 때문에 당원집회는 삽시간에 고함과 폭력이 난무하는 수라장이 되었다. 이 두 명의 서프러젯은 질서 문란 행위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그 서프러젯의 주장을 1면 머리기사로 실어 즉각 영국 국민의 관심을 유발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은 그 후에도 몇 해 동안 기세가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1914년 3월 매리 리처드슨이라는 서프러젯이 국립미술관에 들어가 벨라스케스의 "로케비 비너스"라는 작품을 훼손하는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그녀는 체포되어 투옥되었으며 그 사건 이후로 많은 미술관과 박물관이 문을 닫았다.
그해 8월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여성참정권 운동가들은 활동을 중단하고 독일과의 전쟁을 돕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여성들의 참정권 투쟁은 잊혀지지 않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여성이 요감하게 쟁취운동을 벌였던 참정권의 일부가 처음으로 허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