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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건 지시로 천왕봉 아래 성모사 건립… 조선시대엔 도교·유교·성리학까지 반영
지리산 천왕봉 바로 아래 성모사 주변을 일제히 단장하고 있다. 두류산악회에서는 이 자리에 성모사를 복원할 계획을 갖고 있다. / 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삼국사기>(1145년쯤 김부식이 발간한 현존 최고의 역사서)와 <삼국유사>(1281년쯤 승려 일연에 의해 발간)에 이어 이승휴의 <帝王韻紀(제왕운기)>(1287년 발간)에서도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용왕이 다시 나와 사례하며 깊은 궁궐 속으로 인도하여 들어와서 맏딸을 아내로 삼거늘, 금털 난 돼지와 칠보를 겸하여 주기를 비니, 이에 서강 물가로 실어 보냈다. 돌아와 송악에서 살았는데, 여기에서 성지를 낳았다. 성모(聖母)가 도선 선사에게 명하여, 이를 가리켜 명당이라 말하게 했다’-이승휴 <제왕운기> ‘本朝君王世系年代’편
고려 태조 왕건의 출생과 도읍지에 관한 내용이다. 그의 어머니가 왕건을 출생하는 상황과 한국 풍수의 창시자 도선에게 천하의 명당을 찾아 도읍지를 정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이를 일반적으로 ‘지리산의 천왕이 성모임을 밝히고, 성모가 도선에게 이곳이 명당임을 밝히게 하여 태조 왕건의 왕업이 이루어졌다’는 내용으로 기록하고 있다.
산신도 마고에서 위숙왕후·마야부인으로
또 ‘신라 말기에 송도의 한 부인이 지리산에 들어와 산신에게 빌어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후삼국을 통일하니 그가 바로 고려 태조 왕건이다.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는 내용도 있다.
두류산악회에서 천왕사 맞은편에 새로 만든 성모석상.
신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산신제는 천왕봉이 아닌 노고단에서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신으로 모시던 곳이 노고단이었다. 노고단은 ‘늙은 시어머니의 제사터’란 말인데, 마고(麻姑)란 말에 그 어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 접어들면서 노고단이나 남악사가 아닌 천왕봉에서 고려시조인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모시는 것으로 변모됐다. 기록에 의하면, ‘왕건은 왕이 된 뒤 어머니를 상징하는 왕후의 석상을 만들어 지리산 천왕봉에 모시고 성모사라 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때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질 뿐만 아니라 지리산 산신도 마고·노고·선도성모(박혁거세와 왕후 알영의 어머니)에서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와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인다.
왕건의 지시로 천왕봉 아래 건립한 성모사가 그 대표적인 상징이고, 성모사에 만든 왕후의 석상은 위숙왕후의 모습이었다. 성모석상은 그로부터 지리산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신으로 존재하며 1,000여 년의 세월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고려 조정은 왕건의 지시로 세운 성모사 내부에 제사를 전담하는 관리인 신관을 두었다고 전한다. 말을 탄 신관이 군위를 거느리고 왕방울을 울리며 남원, 곡성, 구례, 하동, 함양, 산청, 진주 등을 순찰하며 수령들이 모두 나와서 영접했다는 기록이 <지리산인문사적자료>에서 전한다.
성모사를 지리산 정상 천왕봉 아래 두면서 고려 때부터 지리산 산신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천왕봉의 주신인 ‘성모(聖母)’와 노고단의 주신인 ‘노고(老姑)’로 대표되는 산신으로 바뀐다. 이는 시대적·상황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먼저 성모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자. ‘성모’는 애초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선도성모를 가리켰지만 고려시대부터는 왕건의 어머니인 위숙왕후의 상징으로 슬며시 변모한다. 왕조에 따라 산신의 형태를 변신 중첩시키는 상황을 그대로 볼 수 있다. 고려는 또한 불교국가로서 통치 이데올로기인 불교의 가르침을 정책 전반에 반영한다. 불교 창시자인 석가모니도 당연히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도 이 시기부터 산신의 모습으로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애초 <삼국사기> 권5 선도성모수회불사편에 ‘선도산 신모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沙蘇, 婆蘇라고도 함)다. 그가 진한에 와서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고 여자는 지선(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이 산에서 살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 해동의 시조는 다름 아닌 박혁거세를 말한다. 박혁거세의 어머니인 경주의 선도산 신모의 원조는 중국 황실의 딸 사소라기도 하고, 천신의 딸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오악제도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중국계 산신 사소를 한국형 산신의 원조로 변신시킨 격이었다. 어쨌든 초기의 성모는 이들이다. 이 성모가 박혁거세를 낳았고, 사후 또한 산신 ‘성모’로 변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자 성모는 경주 선도산에서 지리산으로 옮겨와 한반도의 핵심 산신으로 자리 잡았다. 이어 고려가 건국되면서 위숙왕후와 마야부인으로까지 산신의 주체가 확대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인의 신관(神觀)을 엿볼 수 있다. 하늘의 아들인 천신(天神)이 하강하여 인군(人君)이 되면서 지상의 통치자가 되는 과정이다. 고대국가들이 대개 그렇듯이 정교(政敎)가 분리되지 않은 정치주술적 복합형태를 띠고 있었다. 즉 신화와 역사가 아직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동양뿐만 아니라 서양에서도 비슷한 정도가 아닌 똑 같은 형태를 보인다.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고대국가의 왕 이름이 전부 헤라클래스나 제우스 등의 이름을 띤 것은 이에 연유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당시 통치자들은 천신인(天神人)으로 대표된다. 천신인이 바로 신인복합(神人複合)의 전형이었다. 건국신화의 주인공들은 정치주술 복합과 함께 ‘신인복합’을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박혁거세와 왕건도 똑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신과 동등한 객체로 신성시하면서 왕으로서 숭배하는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노고단의 마고할미 전승은 이어져
천왕봉이 등장하기 전까지 지리산 산신의 중심이었던 노고단의 ‘노고’는 마고할미 산신으로 계속 전승된다. 하지만 고려시대는 지리산의 중심이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옮겨가고, 산신제도 노고단보다 국가에서 주례하는 천왕봉으로 더욱 중심이 쏠린다. 하지만 태초의 산신은 마고, 즉 노고라는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전문가도 이견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1>편에서도 언급했듯이 재야사학자들은 마고를 실질적인 동이족과 한민족의 조상이자 1만2,000년 전에 세운 최초 국가의 건국주로 간주한다. 그 태초 마고도 <삼국유사>에서는 성모로 변신하기도 한다. 당시까지는 노고단이 지리산신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노고와 마고, 성모는 혼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고려시대부터 노고와 성모는 조금씩 구분되면서 서서히 천왕봉 계열의 산신과 노고단 계열의 산신의 두 계파로 나뉜다고 볼 수 있다.
왕건의 지시로 건립한 성모사(聖母祠)는 천왕봉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모사에 가기 위한 가장 빠른 코스는 바로 백무동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백무동 거의 끝 지점에 위치했다고 전해진다. 백무동(百巫洞)은 지명에서 알 수 있다시피 많은 무당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신라의 박혁거세와 고려 왕건의 어머니가 산신으로 변신한 성모사였으니 역술인이나 무속인들에게도 가장 영험한 장소로 당연히 각광받았을 것이다. 자연 무속인들은 성모사에 가기 위해 백무동으로 몰렸고, 그 주변에 터전을 내렸다. 성모사에서 제사를 올릴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백무동으로 몰려들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 때의 지리산 산신에 대한 기록이 몇 가지 전한다.
<高麗史(고려사)>(1449~1551년 김종서·정인지 등이 완성한 역사서) 지리지편에 ‘지리산이 있다. 두류산 또는 방장산이라고도 부른다. 신라에서는 남악으로 삼아서 중사(中祀)에 올랐으며, 고려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東國理想國集(동국이상국전집)>〔고려 문신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에는 지리산 대왕(산신)에게 올렸던 기원문도 전한다. 고려 신종 2년(1199)에 쾌유를 비는 내용이다.
‘아무개 등은 모두 비재로서 원사의 요좌(寮佐)에 보임되어 장차 동도(경주)를 문죄하려 합니다. 대개 일군의 생사와 성패는 모두 통군에게 달렸습니다. 사람의 몸에 비유하면 통군은 머리이며, 요좌는 손이고 군졸은 발입니다. 어찌 머리에 병이 있는데 손과 발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군사가 선주에 머무르고 있는데, 통군 상서 김공 아무개가 갑자기 미질(微疾)에 걸려서 기거가 불편합니다. 생각하건대 산과 들에서 노숙하면서 바람과 안개를 맞아서 일어난 병입니까. 모르겠습니다만 다른 무슨 까닭이라고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일군이 걱정과 두려움에 싸여서 그 연유를 알 길이 없습니다. 감히 중성(衆誠)을 내어 경건히 우리 대왕의 靈(영)에 기도합니다. 만일 신통한 힘을 빌어서 보지하고 구호하며, 김공에게 병을 낫는 기쁨이 있게 하여 즉시 건강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면, 삼군의 복(福)일 뿐만 아니라 대왕의 위령도 더욱 드러날 것입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먼저 옷 한 벌을 올려 작은 성의를 펴고, 병이 쾌유되면 다시 사신을 보내 제사를 올려서 은혜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겠습니다.’
<高麗史(고려사)>충렬왕편에 또 다른 기록도 나온다.
‘왕이 병이 들자 二罪(이죄) 이하를 석방했고, 섬에 귀양 보낸 자는 가까운 곳으로 옮기거나 면하여 개성으로 오게 했다. 홍자번에게 지리산에 제사를 올리도록 명했다.’
지리산 산신에 제사를 지내 왕의 쾌유를 비는 내용이다. 나아가 고려 말 외적이 침입했을 때에도 지리산 산신에 기도했다. 외적의 침입은 나라의 불행이며, 신의 수치로 여긴 것 같다. 지리산의 신통력을 빌어 나라의 안녕을 빌었다고 볼 수 있다.
이같은 모습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크게 변하지 않는다. 신라와 고려시대의 국경이 다른 것과 달리 고려와 조선시대의 국경은 비슷한 측면도 작용한다는 사실을 대변한다.
조선 <태종실록> 권28편에 산천의 등제를 나누도록 한 내용이 나온다.
‘예조에서 산천의 사전제도를 올렸다. 본조에서는 전조의 제도를 이어받아 산천의 제사는 등제를 나누지 않았는데, 경내의 명산대천과 여러 산천을 점제에 의하며 제등을 나누었다. 임금이 그대로 따라서 옥해독은 중사로 삼고, 여러 산천은 소사로 삼았다. 경성 삼각산의 신·한강의 신, 경기의 송악산·덕진, 충청도의 웅진, 경상도의 가야, 전라도의 지리산·남해, 강원도의 동해, 풍해도의 서해, 영길도의 비자산, 평안도의 압록강·평양강은 모두 중사였다.’
<세종실록>에는 지리산 산신에 대해서 ‘지리산지신(智異山之神)’으로, <경상도지리신>에서는 ‘지리산대대천왕천정신보살(智異山大大天王天淨神菩薩)’이라 하며, 이를 줄여 ‘대대천왕(大大天王)’이라 기록하고 있다. 천왕은 결국 천왕봉의 신령이라는 의미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태을산신이 새롭게 등장
조선시대에는 이전과 같이 더 이상의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된 새로운 산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박혁거세와 왕건 같이 조선의 건국주 이성계도 비슷한 신비주의나 신성시하는 작업을 벌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이상의 신격화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의미로 통한다. 천신화(天神化)나 신인화(神人化) 작업이 사후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건 아니라는 의미다. 살아 있는 동안 또는 탄생 시에 이미 신비로운 징표를 지녔거나 그 같은 변신이 가능한 인물이라야 가능했다. 이성계는 사실 최영에게 발탁된 장군이었으며, 최영 장군의 그늘에 가려 있다가 어느 순간 최영 장군을 처형하고 왕이 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를 신격화하는 작업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최영 장군은 한국 최고의 산신으로 모셔진다는 점에서도 이성계와 비교가 가능하다.
하지만 지리산에 새로운 산신이 등장한다. 조선시대 역사서나 문헌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산신은 태을산신이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1481년 조선 성종의 명을 받아 노사신 등이 각 도의 지리·풍속 등을 기록한 관찬 지리지)에 ‘태을이 (지리산) 위에 거하니 여러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며, 용상(龍象)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어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명찰명찰편에도 ‘지리산은 태을이 사는 곳으로 신선들이 모이는 곳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천왕사에 콘크리트로 고정시킨 원래의 성모석상.
태을은 천지만물의 출현 또는 성립의 근원인 우주의 본체를 인격화한 천제(天帝)로, 태을성은 곧 북극성이며, 병란, 재화, 생사 따위를 맡아 다스린다고 하는 신령한 별이다. 이 별을 신격화한 것이 태을성신이다. 태을성신은 인간의 길흉화복을 관장하면서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칠성신의 역할을 하는 신격이기도 하다. 따라서 태을성신은 칠성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칠성신은 민간에서 산신과 더불어 중요한 신으로 받들어 모셔지는 신격이다. 또한 태을은 도교에서 북극성을 신격화하는 신성의 하나다. 지리산을 도교신앙의 성지로 인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지리산 산신에 대한 중요한 인식의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지리산 산신에 대한 인식은 조선시대 들어 도교, 그리고 유교와 성리학의 영향을 받은 산신이 새롭게 태어난다. 도교는 이미 샤머니즘적 요소를 상당히 융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민생활에 스며드는 건 별로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의 샤머니즘 칠성신은 태을성신과 합해지는 과정을 보인다. 산신과 도교의 융합이다. 뿐만 아니라 천제라는 개념은 유교와 성리학에서 볼 수 있는 개념이다.
유교에서 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고대 문헌에서 나타난 신으로, 흔히 상제(上帝) 혹은 천(天)으로 표현된 인격신을 가리킨다. 둘째는 주자(朱子)를 비롯한 성리학적인 의미에서의 신이다. 특히 주자는 이(理)를 매우 중요시했던 만큼 성리(性理)와 귀신·정신·혼백을 뚜렷이 구별해 전자를 오로지 ‘이’라 한다면 후자를 ‘기’라고 했다. 귀신·정신·혼백은 기이므로 유(類)를 따라 감응할 수 있으나 이는 감응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기의 뿌리가 되고, 이는 쉬지 않고 순환하는 천지조화의 회로와 같은 것이어서 날마다 무한히 생기는 기의 원천이 되므로 기가 단멸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주자는 신이라는 말을 따로 사용하지 않고 그 신에 해당하는 최고의 초월적 원리로 내세우고 있다.
조선시대는 불교국가인 고려와 달리 통치 이데올로기인 유교와 성리학의 이념이 산신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개인 유람록에는 다양한 산신 등장
지리산 산신은 정사(正史)에만 등장할 뿐 아니라 유람록에서도 나타난다. 조선조 유학자 점필재 김종직의 천왕봉 산행기
<유두류록>에 ‘성모사당은 삼간판옥인데, 지붕의 너와에는 큰 쇠못을 박아 매우 견고하며 두 사람의 화공 스님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눈과 눈썹머리 쪽진 데와 얼굴에 색감을 진하게 칠하여 눈길을 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손의 <두류기행록>에서도 ‘거처하는 백성들에게 물으니 이 (지리산 산)신을 마야부인이라고 하는데, 이는 속이는 말입니다. 점필재 김공(김종직)은 우리 동양의 박학다식한 큰 선비인데, 이승휴의 <제왕운기>에서 징험하여 이 신을 고려 태조의 비(妃)인 위숙왕후라고 했으니 믿을 만합니다. 위숙왕후는 열조(烈祖)를 이끌어 세워 삼한을 통일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했으니 큰 산에 사당을 세워 영원히 흠향하는 것은 순리입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인적인 유람록이긴 하지만 산신에 대해선 어김없이 언급한다. 그리고 산신의 대상에 대해선 당시에도 약간 혼란스러운 부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사실 약간의 논리적 근거를 갖고 누가 무슨 주장을 하더라도 완전 얼토당토않은 주장 외에는 어느 정도 먹혀들기 마련이다. 정확한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리산 산신에 대한 큰 틀은 시대에 따라 다소 바뀌기는 했지만 몇 가지로 정리된다.
▲천신의 딸인 성모 마고설 ▲신라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 성모설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설 ▲석가모니의 어머니 마야부인설 ▲태을성신을 포함한 여러 신선 거주설 등이 주된 지리산 산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왕건의 지시로 만들어진 성모사에 모셔진 지리산 산신의 성모석상은 일부 전문가들은 복장양식이나 스타일이 40대의 신라 여인상이라고 한다. 하지만 1,000여 년 이상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한국인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때로는 선도성모로, 때로는 위숙왕후로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지만 본질은 하나였다. 바로 한민족의식을 계승한 우리 조상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가슴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두 자 높이의 이 석상은 마치 모진 풍파 속에서 시달려 온 한민족의 역정을 가감 없이 보여 주는 소박하면서 아담한 모습 그 자체다.
“천왕봉 아래 성모사 복원해 성모석상 갖다놓아야”
산청 두류산악회, 매년 독자적으로 성모제·천왕제 지내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김순용 옹이 1970년대까지 지리산 천왕봉에서 성모석상을 지키고 있었다. 성모석상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생전의 김순용 옹. / 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은 남악으로 불리며, 매년 봄가을에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구례군에서 일제 때 중단된 국가적 행사인 남악제를 되살려 노고단 아래 남악사에서 매년 4월 20일 곡우를 전후해서 지리산남악제를 지낸다고 지난 호에서 소개했다.
고려시대부터 지리산의 중심은 노고단에서 천왕봉으로 바뀐다. 이후부터 노고단에서 남악제를 계속 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기 쉽지 않으나 천왕봉에서 산신제를 지냈다는 기록은 문헌에 자주 등장한다. 구례에서는 광복 이후 남악제를 부활시켜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반면 천왕봉에서는 행사를 개최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천왕봉의 행정구역은 함양과 산청이다. 특히 함양은 백무동이 있는 곳이다. 산청은 천왕봉에 갈 수 있는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곳이다.
1970년까지 천왕봉 아래 성모사에 성모석상이 존재했던 것으로 산청의 여러 관계자들은 증언했다. 그리고 역시 산청에서 그곳에서 지리산 산신제를 지냈다고 했다. 지난 호에서 밝혔다시피 이후 수난을 당한 성모석상은 버려져 있었다.
1972년 창립한 산청 두류산악회에서 이듬해인 1973년부터 매년 추석 이후 10월 초 좋은 날을 택해 천왕봉 아래 성모사가 있었던 자리에서 천왕제를 올리고 있다. 헌관은 당연 두류산악회 회장이 맡는다. 아헌관은 시천면장이, 종헌관은 두류산악회 감사가, 축관은 두류산악회 고문이 각각 맡아 진행한다. 조선시대 큰 제사를 지낼 때는 임금이 직접 초헌관을 맡기도 했다. 민간단체의 산악회지만 제문은 조선이나 고려시대 때 지냈던 내용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두류산악회에서 매년 가을 천왕봉 아래 성모사 자리에서 천왕제를 지낸다. 사진은 지난해 천왕제 모습. / 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단군기원 4349년(2016년 기준) 팔월 스무하룻날 덕산두류산악회는 마흔세 번째 천왕제향을 받들어 올립니다. 천제(天帝)여! 온 나라의 모든 일들이 풍성하고 편안하게 하여 주시고 민족통합의 기운이 성숙되게 신조(神助)하여 주시옵소서. 온 인류가 평화로운 질서 속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천지에 가득한 가을 기운을 받아 만기(萬機)가 형통정연하게 음우하여 주시옵소서. 간수한 제수를 차리고 향연을 올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시옵소서!’
그런데 산청에는 성모석상이 두 군데나 있다. 두류산악회에서 매년 봄 성모제를 지내는 석상과 천왕사에 있는 석상이다. 천왕사에 있는 성모상이 원래 석상이다. 지난 호에서 밝혔듯이 진주 과수원에 버려져 있던 석상을 국립공원관리공단과 두류산악회, 천왕사 세 단체 대표가 과수원 주인을 설득해 다시 천왕봉 인근으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김임규 지리산국립공원관리소장은 “당시 돌려받은 성모석상은 공단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1983년 천왕사 혜범스님이 가져가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천왕사 주지는 성모석상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지 못하도록 천왕사에 아예 콘크리트로 접합해서 고정시켜버렸다. “공동으로 관리하자”는 공단과 두류산악회의 주장을 아예 무시하고 독점해 버린 것이다. 소송을 하기도 했으나 돌려받지 못하자 두류산악회에서 회원들과 뜻을 같이 하는 산청 주민 500여 명의 지원을 받아 천왕사 맞은편에 모양은 비슷하게 크기는 훨씬 더 크게 해서 성모석상을 독립적으로 세웠다.
두류산악회에서 지내는 산신제는 천왕제와 성모제로 나뉘어 있다. 천왕제는 천왕봉 바로 아래 성모사가 있었던 자리에서 지내고, 성모제는 매년 봄 새로 세운 성모석상 앞에서 지낸다.
조출환 두류산악회 회장은 “성모제와 천왕제를 산청주민들과 같이 지내기 때문에 군민단합에 큰 힘이 되고 있다”며 “군청에서 예산을 제대로 확보해 1970년대까지 있었던 천왕봉 아래 성모사에 성모석상을 세운다면 산청군민들의 단합뿐만 아니라 지리산 정기를 새로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글 월간산·박정원 부장대우 사진·국립공원지리산사무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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