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산 안내원 김현명
조장빈(근대등반사팀)
방현의 1938~39년〈적설기 설악연봉 및 집선봉 S2 등반보고기〉에 설악산 짐꾼인 김씨는 그가 등반의 의미를 알았던 몰랐던 무관하게 설악산 동계 초등의 전일정을 함께한 인물이다.
우리나라 근대등반 초기의 안내원과 짐꾼에 대해서는 설악산 김씨 외에 금강산의 최영오(崔榮梧)와 김태경(金泰慶) 그리고 1938년 12월김정태와 관모봉 등반을 함께한 박청송(朴青松)의 기록이 전한다. 1932년 경성고보 이즈미(泉靖一)와 하라(原正典)의 금강산 채하봉(彩霞峰) 초등정에 동행한 최영오(당시 30세)는 일어가 가능한 인부로 암벽등반에 동행한 바가 있고 김태경 또한 1933년 이이야마(飯山達雄)과 이즈미의 금강산 집선봉 등반 시 짐꾼으로 시작하여 그후 집선봉 동북릉과 세존봉 암벽등반에도 동행하여 등반도 상당히 능숙했다고 한다. 박청송에 대한 부연 설명은 없고 경성제대산악회의 학술등반에 한인 학생을 인부 담당 통역으로 동반한 경우도 보인다.
당시 안내원이나 짐꾼의 수요는 측량조사, 철도와 연계한 관광지 개발, 학술탐사 등의 등산에 있어왔고 관광지를 배후에 둔 부전고원, 특히 금강산의 경우에는 관광코스에 상업화된 안내원 조직이 설립으로 발전되기도 했으나 전문적인 등반대의 안내원과 짐꾼에 대한 수요는 등반대의 수가 손꼽을 정도였고 관련 사료도 부족하여 그 실제를 가늠하기 어렵다. 원정등반에 있어서 그들은 등반대의 필수 구성원이고 짐꾼 관리와 통역이 주된 역할인 안내인은 운행에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성제대산악회의 이즈미는 한국의 산을 중심으로 한 겨울산 연구에서, 당시 일본의 외국 원정의 열기와 관련한 극지법 등반 방식을 기술하며 대원들 간의 상호 ‘인간과 인간의 심적 결합’의 중요성에 이어 ‘인부’에 대해서 “민족이 다른 인부를 어떻게 사용하여 장기간 전인미답의 빙설의 세계에 살면서 목적의 정상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일종의 기술적 형식적 문제가 발생한다. 이 방면의 연구에는 조선의 산 특히 개마고대의 산이 있다. 그곳에는 내부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추운 날씨와 산에 익숙하지 않은데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인부가 있다.”고 하여 등반은 대원들 간의 신뢰와 더불어 인부의 관리가 중요함을 언급하며 조선에서의 동계등반에 인부의 고용이 일반적이었음을 말하고 있다.
1938년 세브란스의전산악부의 관모봉종주 기록을 보면, 7월 22일 등반을 위해 주을역 앞의 아사노(淺野)씨를 찾아 인부 고용에 대해 알아보았더니 요즘 갑자기 인부의 비용이 인상되어 교섭에 꽤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는 주흘이 러시아인들의 피한 관광지여서 그로 인한 수요때문이다. 원정등반의 경우 현지인들을 안내원이나 짐꾼으로 고용하는 것이 상례적으로 등산 인부의 고용에 일정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현지인과 정례화 된 임금과 인부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인해 비용이 상승하는 경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7월 27일 서관모봉 전 캠프사이트에서 안내인 김씨가 약간 다리를 다쳐 경험이 있다는 노장 인부 사람이 거들게 하고 출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듯이, 인부는 산행 가이드와 짐꾼의 역할로 구분되어 있으며 “오두막(淺野小屋)을 기다리는 마음에 '얼마나 됩니까?'라고 안내인에게 반복해서 오두막까지의 거리를 질문해도 끝내 십리 또는 십일리라고 연발하며 잠시 가서 물어도, '십리입니다'라고 하여 모두는 갑자기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고 하여 안내원은 단순히 통역 등 운행의 보조역할이 아니라 산행 일정을 리드한 경우도 볼 수 있다.
김정태나 방현의 설악산 동계초등반기의 김씨는 1938년 경성의 일인 암벽등반가들이 설악산 등반을 할 때 안내인이었던 김현명(金玄明)으로 추정되는데, 그는 비슷한 시기의 두 등반기에서 성씨와 연령 그리고 신흥사에서 설악산 안내인으로 추천받았고 그의 집이 지금의 설악동 여관단지 켄싱턴호텔 인근의 토왕동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직업 또한 사냥꾼이었지만 안내를 할 당시에는 약초 채취을 하고 있었다.
김현명은 등반가도 아니고 등산안내원으로 많은 기록이 확인된 것도 아니나 약초채취가 생업인 짐꾼으로 치부해버리기엔, 우리나라 초기 등반사에 짧지만 존재했던 등산안내원과 짐꾼으로 언급할만하다고 여겨진다.
1938년 일인 등반기의 설악산 안내원 김현명에 관한 짧은 글을 덧붙인다.
노인 이야기
“이 사람이 설악의 주인으로 산길 안내를 하는 사람입니다.” 이 말을 듣고 보니 어제도 보았던 몹시 궁색한 노인이다. 69세라는데 이미 허리는 활처럼 굽었고 옷도 원래의 흰옷에 덧대고 기워 얼룩이 져서 엉성한 모습이다. 산 안내인은 우선 강건하고 소박하지만 눈빛이 날카로운 괄괄한 젊은이를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노인은 그 정반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결코 노인답지 않다. 가늘어진 팔과 다리에 힘찬 기운이 뻗쳐 젊은 사람 이상이다.
설악산 가이드의 원류인 "안내원 김현명(69세)" Ⓟ淺田
신흥사에서 마등령으로 올라갈 때, 급경사의 금사다리 은사다리에서 우리들이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있을 때도 그는 편안하고 여유롭게 오르고 있었다. 산안개에 갇혔을 때도 혼자서 보살펴주었다. 그때는 다리와 허리를 곧추세웠고 썩은 나뭇가지를 구해 와서 모닥불을 피울 때는 자연스레 그의 능력을 보았다. 나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매우 흥미를 느꼈고 시라가네(白銀)도 눈여겨보고 있었다.
운행 중에 나는 중간에 위치하여 앞 선 할아버지와는 거의 상의할 일이 없었지만, 대부분 이 할아버지가 하는 일은 언제나 시대적인 것들이 담겨 있었다. 태어나서 자라며 설악산을 벗어나 다른 바람을 쐬어본 적이 없다고 하니 무리가 아니다. 그리고 산길을 걷는 모습에서 19세기 말 시대물의 주역으로도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산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산에 대해서 성실했고 어딘가 모르게 엄숙했다. 걷기만 할 뿐 아무 말이 없다. 하기야 말이 통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꽃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쉬는 중에도 그는 무엇인가 꽃을 찾아주었다. 계곡을 내려갈 때 어디선가 솔체꽃(松蟲草)을 찾아왔다. 친구로부터 훌륭한 압화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일본에 이 식물의 종류가 두세 가지 밖에 없는 희귀한 것이라고 해서 매우 기뻤는데 이런 곳에서 볼 줄은 몰랐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남의 기쁨에 더없이 예스럽게 대한다. 누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갑자기 생글생글 웃으며 꽃을 사뿐히 치켜세우고 촬영 중인 사람에게 매우 고맙다는 듯이 인사를 합니다. 몰래 찍은 다음에 “저는, 몇 번인가 사진을 찍었는데, 아직 아무런 답례를 받지 못했습니다.”하고 말을 건네기도 했다.
신흥사로 돌아온 밤, 우리가 매우 기뻐하고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집으로 가서 벅차오르는 감정에 이웃을 불러 함께 밥을 먹으며 약간의 술로 즐거운 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그는 철이 들고 나서부터 계속 혼자 살아 왔고 아무런 계획도 무엇도 없었던 것 같다. 산의 곰을 전부 잡았고 지금도 작은 사냥감은 있지만 요즈음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수를 다한다는 것은 그와 같은 사람이다. 오세암 때도 그렇고 봉정암에서도 그런 느낌이었다.
1938. 12. 24.
H‧R‧S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
"경성제대산악부의 학술등반에 한인 학생을 인부 담당 통역으로 동반한 경우도 있다. "
그냥 기술하는 김에 다 써놓았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홍종인 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