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할 수 없다(2023) / 김민홍 제6시집(7)
56) 부재不在에 대하여 1
내 속에 오래 숨어있던
슬픔 하나
새에게 주었습니다.
새들이 마구 쪼아 먹고
슬프게 울었습니다.
내 속에 오래 숨어있던
어둠 하나
물고기에게 주었습니다.
세상의 물고기들이 모두
캄캄해졌습니다
아무리 詩라고 해도
거짓말하지 말라고
질타하던 당신은
이제 내 곁에 없습니다.
오랜만에 함께 걸었던
그 길,
햇살만 등에 지고 걸었습니다.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노을이 걸렸습니다.
노을이 스러질 때쯤
난 당신을 보내드립니다.
내 슬픔은 새들이 먹어버렸고
물고기들이 대신
어두워졌기 때문이지요.
57) 부재不在에 대하여 2
비 내린다고 해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내 눈에는 해가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안 보인다고 당신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진 마십시오.
비 내리는 날에 내겐 해가 없고,
당신이 안 보이면 당신은 없는 것입니다.
느낌은 인식을 앞섭니다.
라고 단정할 순 없어도
함부로 나를 수정하려 하진 마십시오.
오늘은 북한산 오르는 길
는개만 내리고,
당신을 따라가지 못해 처진 발바닥에
물집이 생겼습니다.
58) 부재不在에 대하여 3
혼자는 외롭지 않냐구요?
그렇습니다, 함께 있을 때도 외롭지요
어떻게 세상을 건너면서
모두 수행자가 되길 바랍니까?
사는 동안 누구나 외롭다는 말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이 오면 기쁘고
당신이 가면 아프지만
그래도 살아내야겠지요.
부재가 우리의 운명입니다.
59) 편지 한 장
그 젊은 시인의 전위적인 시를 읽다가,
가벼운 두통을 앓다가,
세대 차이려니, 자위하다가
젊은 그 시인의 시에 매료된 듯한
평론을 읽다가, 아무래도
난 너무 오래 살았어,
퇴물 박물관에도 내 자린 없겠지,
하는 생각을 하다가,
혹시 질투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약간 염려도 하다가,
도저히 내 가슴엔 닿지 않는 언어들,
젊어서 문학 이론 공부하듯 읽어 보다가,
머리와 가슴 사이가 까마득한 거리
여기저기 교묘하게 바느질하는 소리를
새로움으로 가득 찬
천재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편지 한 장 쓰고 싶어졌네.
머리로 바느질하는 예술의 한 장르가
독립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시 낭송 행사에서 만난
진지한 눈빛들도 떠올랐네
왜 난 그 눈빛들이 민망해 보였는지,
라는 생각도 하다가,
끝내 편지 한 장 못 썼네.
60) 가을 숲에서
색 바랜 것들을 읽는다는 것은
쓸쓸한 일이야
목소리 한끝에서
눈빛 한 모퉁이에서
조용히 빠져나가는 것들
빠져나갈 것 다 빠져나간
텅 빈 시간
혼자 서 있어야 한다는 것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고, 마을이 있지만
손이 닿는 순간 증발해 버린다는 것
가을 하늘, 가을 숲, 따뜻한 당신,
아름다운 것들은 왜 눈물겨운지
오늘은 비에 젖어 걸었고,
내일은 햇살에 몸 말리며 걸을 것이고,
저녁엔 어김없이 노을에 물들고,
운 좋게 달이라도 휑하니 떠 주면
그저 살아내는 거야
떠나는 모든 것들에
다정한 작별을 하고 담담히 돌아서는 거야.
하지만, 그래도, 색 바랜 것들을 읽는 일은
외로운 일이야.
61) 오토바이
- 이승훈 선생님께
커피가 좋아
담배가 좋아
개미가 좋아
피라미가 좋아
햇살이 좋아
바람도 좋아
풀꽃이 좋아
가을보다
이른 봄의
낙엽송이 좋아
산이 좋아
강도 좋아
바다도 좋아
산은 힘들어서
자주 못가
강과 바다는
위험해
자주 못가
살아있는 게 좋아
오토바이가 좋아
스포츠카가 좋아
스피드도 좋지만
폼 잡는 게 더 좋아
답답한 사람은 싫어
씩씩한 여자가 좋아
담백한 게 좋아
늘 복선을 깔아놓는
화법엔
금방 질려버리지
살아있는 게 좋아
사람들은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줄
알지만 사실은
오토바이를 더 좋아해
담배를 더 좋아해
커피를 더 좋아해
그런데 자꾸
내 주치의는 화를 내
그래도 나는
커피가 좋아
담배가 좋아
오토바이를 타고
마구 달리는 게 좋아
그러니까
저는
망가지는 걸
좋아하는 걸까요?
62) 금세 죽진 않겠다고
난해한 여성 편력을 거친 후
전처에게 돌아가서 안주 중인
사내의 얼굴빛이 편안해 보였다
전처가 운영하는 건강기구 가게에
정시에 출근하고
정시에 퇴근한다고 했다
사내에게 놀러 갔다가
추어탕 한 그릇 얻어먹고
사내의 동행한 친구에게
생각지도 못한 수지침을 맞았다
생년월일로 내 지병을 진단하고
금세 죽진 않겠다고 했다
양손에 백여 개의 침을 꽂아 넣은 후,
호흡이 좀 편해졌냐고 물어서
그렇다고, 인사로 대답했다
금세 죽진 않겠다고?
저주인지, 축복인지, 위로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금세 죽더라도
만성 비염과 불면이나 완화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나니
코막힘이 좀 개선되는 것 같았다
사내의 친구는
당산동에 사무실이 있으니
침 맞으러 오라고 했고
내 사는 곳은 쌍문동
교통편이 복잡해서
쉽진 않다고 대답했다
63) 당신은 또
오늘은 심각한 당신을 만났지요
당신의 심각함만 가지고 돌아와
다시 펼쳐보니
심각함은 증발하고
심각했던 흔적만 남았습니다.
어제는 신중하고 성실한 당신을 만났지요
만 하루도 못 되어
신중과 성실의 흔적이 희미해지고
당신 이름만 남더군요
내일쯤 다시 도서관에 가서
당신을 찾아 헤맬 게 분명합니다
당신은 또 이런 나를
“허망하다!” 질타하겠지요?
64) 동물의 왕국
왕좌에서 쫓겨 난
늙은 숫 사자 한 마리
치명적 상처를 핥고 있네
어디로 가서 생을 마감할까
하이에나와 들개 무리
슬그머니
절뚝이며 배회하는
숫 사자의 뒤를 밟고
아프리카 독수리
한 마리
그 위를 선회하고 있네
65) 어제밤 꿈엔
돌아가신 장모님이
설렁설렁 걸어오시더군
젊은 모습이셨지
"이건 꿈이야!" 웅얼거리며 깼어
그런데 왜 나와 눈을 마주치진
않으셨을까?
돌아가신 지 반백 년 넘도록
한 번도 꿈속에 등장하지 않으신
어머니가 생각났어
어제저녁엔 구순이 넘으신
이생진 시인이 주재하는
시낭송회에 다녀 왔어
요즘은 멍하니 서 계시는 시간이
많고, 하루 꼭 칠천 보는 걸으신다는
길목엔, 아무도 읽지 않는
시 팻말 몇
(아마도 북한산 입구 근처)
시인께서만 멈춰 서서 한 번씩 읽고
오신다고 하시더군
그리고 꼭 하루 '한 수'는
쓰시고 주무신다고
'한 수'라는 단어만 귀에 걸고 돌아왔어
66)베게트의 방*
"이젠 젊진 않아
하지만 아직 늙지도 않았어"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출신
현대 무용가의
현대무용 중 웅얼거리는 대사.
* 독일에 거주하는 한국 출신의 현대 무용가가 안무한 현대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