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론 읽는 기쁨] <8> 제1편 제3장 육자진언의 공덕 ②
만다라회 기획, 박희택 집필
「실행론」 제1편 제3장 제3절은 육자진언 염송의 번차별(番次別) 공덕을 설한 회당대종사의 자증교설이다. 본심진언인 육자진언을 한 번, 일곱 번, 백여덟 번, 칠 일 동안 염송하면 어떤 공덕을 성취하는지 말씀하고 있다. 또한 “‘옴마니반메훔’을 다른 마음 없이 한 시간 지송(持誦)하면 그것이 곧 극락이며 이러한 것이 가치 있는 생이다. ‘옴마니반메훔’의 공덕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한 이 년, 삼 년은 염송하여야 확실히 알 수 있다(실행론 1-3-4)”는 한 시간, 이 년, 삼 년 육자진언 염송의 공덕도 말씀하셨다.
이러한 공덕의 눈부심에 관한 법설은 경전에 자주 보이는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중송분에 나오는 “혹은 수미산과 같은 높은 산봉우리에서 남에게 떠밀려 떨어져도, 저 관음을 염하는 힘으로 해가 허공에 머물러 있는 것과 같이 되리라(或在須彌峰 爲人所推墮, 念彼觀音力 如日虛空住)”와 같은 게송도, 사실을 넘어선 진실로 이해할 때 그 진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이를 대종사께서는 “생(生)이 멸(滅)이고 멸은 생이다. 이곳에 극락이 있다(실행론 1-3-4)”고 표현하셨다. 말하자면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진실을 말씀하신 것이다. 생이 없는데 멸이 있을 리 없다. 생과 멸이 하나인, 오고 감이 없는 항상성 그 자체로 여여(如如)한 불생불멸의 세계가 진실세계이고 곧 극락이다. 육자진언 염송의 공덕은 무생법인의 진실세계 곧 극락으로 인도한다는 말씀이다. 대종사의 육자진언 염송의 번차별 공덕도 이와 같이 이해되고 독송되어야 하리라. 경전문학적 과장법(hyperbole)으로 생각하고 읽어서는 그 진의를 헤아릴 수 없다. 독송해 보도록 하자.
“본심진언을 한 번 염송하면 팔십억 겁 불보살의 명호를 부른 공덕과 같고, 일곱 번 염송하면 열여섯 접 겨자 수와 같은 불보살의 명호를 부른 공덕과 같고, 백여덟 번 염송하면 천육십 석 열 말 겨자 수와 같은 불보살의 명호를 부른 공덕과 같고, 칠 일 동안 마음을 다하여 칠만 번 염송하면 비로자나부처님이 지혜로 나타나서 가히 생각할 수 없는 묘덕을 보게 되며 모든 고통을 여의고 안락한 데 이른다. 본심진언으로 널리 육행문을 열게 되니 정법으로 나아가게 된다(실행론 1-3-3).”
“칠 일 동안 마음을 다하여 칠만 번 염송하면 비로자나부처님이 지혜로 나타나서 가히 생각할 수 없는 묘덕을 보게 되며 모든 고통을 여의고 안락한 데 이른다”는 말씀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사실을 넘어선 진실의 신행도(信行道)에서 이해되고 수용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경전의 법구들이 단지 논리의 사변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로자나부처님이 어찌 지혜로 나투실 수 없다고 할 것인가!
또한 육자진언 염송 공덕의 귀결점을 “널리 육행문(六行門)을 열게 되니 정법으로 나아가게 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정법으로 나아감’을 귀결점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널리 육행문을 엶’을 통해 이것이 가능하다고 함으로써 역시 육자진언 염송을 육행불공으로 이해하는(실행론 3-6) 일관된 해석을 보이셨다. 그렇다면 전회에서 독송하였던 “육행을 실천하여 심인을 밝히기(실행론 3-6-2)”의 ‘심인을 밝히기’는 ‘정법으로 나아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정법으로 나아가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심인(본심)을 밝히는 것이라는 명확한 해석이라 하겠다. 이 대도(大道)를 잠시도 잊어서는 진실한 행자라 하기 어려우리라.
제4절은 육자진언 염송의 금강지성(金剛智性) 발현을 말씀하고 있다. “이지(理智)로써 모든 이치를 알면 불[火]에 들어갈 리가 없다. ‘옴마니반메훔’을 염송하면 금강지성이 일어나서 내 마음에 끊을 것은 끊고 세울 것은 세운다(실행론 1-3-4)”의 말씀이다. 대종사께서 사용하신 ‘이지(理智)’와 ‘지성(智性)’의 용어가 눈길을 끈다. 이지(理智)는 이성과 지혜를 아울러 이르는 용어로서, 철학에서는 감성을 넘어서 분별하고 판단하는 이성(理性)에 준한 말로 사용하나, 대종사께서는 지성(智性)과 동의어로 사용하신다.
지혜의 지성(智性)에 대해서는 앞에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金剛)’으로 수식함으로써, 철학에서 말하는 지성(知性, 인간의 사고하고 인식하고 판정하는 지적 능력)과 보다 확연히 구별하셨다. 지혜의 완성 곧 깨달음의 성품[覺性]으로 나아가는 지성(智性)임을 보이신 것이다. 내 마음에 끊을 것은 끊고 세울 것은 세우는 능지능차(실행론 1-1-1)의 다라니[佛, 覺]의 성품이다.
이렇게 본다면 회당대종사께서 밝히신 인간의 인식능력은 감성 – 이성 – 지성(智性, 理智) - 각성(불성)의 순이다. 칸트가 「순수이성비판」(1781)에서 규명한 감성(직관력) - 상상(도식력) - 오성(悟性, 知性力) - 이성(추론력)의 순과는 결을 달리한다. 육자진언 염송의 공덕으로 최고의 인식능력인 각성(불성)에 당도할 수 있음을 설하신 것이다. 대종사의 자증교설을 독송하는 기쁨이여!